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집에 돌아와 귀걸이를 빼는 순간에 여자는 가장 여자다워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귀걸이를 빼는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자'로서의 가장 사소하고 작은 -그러나 중요한-의식을 끝마치는 것 같달까. 머리통에 붙어있는 그 작은 귀에서 더 작은 귀걸이를 빼는데 두 손이 필요하다는 것도, 두 손을 쓰는 것 뿐만이 아니라 고개가 살짝 돌아가기도 하고 기울여지기도 한다는 것도 놀랍다. 귀걸이를 빼는 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서 감추어두었던 많은 것들이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 같다. 하루간의 지쳤던 일들과 슬펐던 일들, 또 기뻤던 일들. 그것들이 그때 바깥으로 나오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고 어깨를 주무르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그래서 가끔 메탈 알러지로 고생하며 미처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으면서 혹은 술을 마시면서 중간에 귀걸이를 빼야 하는 그때가 나는 참 싫다. 

귀걸이를 하면 하지 않을 때보다 2.5배쯤 더 예뻐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걸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귀걸이를 즐겨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도 내가 만약 진창에 빠져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진창에 빠져있다면 반짝이는 귀걸이도, 제법 화려한 목걸이도, 빨간 립스틱도, 8센티 힐도 생명력을 잃는다. 이 모든것들이 저마다의 기능을 다 해서 나를 웃게 하려면 내가 진창에 빠져 있지 않는게 중요하다. 내가 지옥에 있지 않는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사소한 모든것들이 빛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늪에 빠지지도 않고 지옥에도 있지 않은 삶.  

 

그리고 내게 바람이 있다면, 내가 문득 새벽 4시에 깨어 눈을 떴을 때, 그 때 누군가를 불러도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그때 누군가를 부르고, 말을 거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니었으면.  

 

   
  한밤중에 일어나 담배를 찾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하지만 세상이 까마득한 새벽 4시에는 구원을 청할 데가 없다. (p.110)   
   


 

새벽 4시. 나는 항상 그 시간쯤에 눈을 뜨곤 한다. 그리고 때때로는 아주 강렬하게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새벽 4시. 구원을 청할 데가 없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덜렁, 혼자이다. 심지어 나는 담배도 피지 않는다. 

 

   
  새벽 4시는 기억 속의 시각이다. (p.119) 
 
   

 

수지는 새벽 4시에 이전 기억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내가 그렇듯이. 구원을 청할데가 없을 때, 나도 내 기억속으로 숨어든다. 늘 그렇진 않다. 가끔은 방금 꾼 꿈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오늘도 그랬다. 오늘도 꿈을 꿨다. 나는 새벽에 눈을 떠서, 아, 그 사람을 봤는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꿈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억은 희미했다. 새벽 4시에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구원을 청할 데가 없음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겹다. 지치는 일이다. 

 

나는 사람들과 굳이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이들과 어느 정도의 선을 유지하고 싶다. 그리고 그 선을 그들이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 역시 그것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이 좋은 것 이라는 생각은 들진 않는다. 형제들 중 가장 큰 아이의 특징인지, 그도 아니면 B형의 특징인지, 아니면 사자자리의 특징인지, 아니면 순수히 개인적인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대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고, 상대에게 괜히 내가 힘든걸 말해서 같은 고민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아니, 나만큼 고민하지 않을거라는 건 안다. 나만큰 힘들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그러나 내가 힘든걸 말함으로써 지금 저여자는 힘들다, 하는 것을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다. 이건 가까운 사람들과 언제나 다투는 이유가 되었었다. 모든게 끝나버리면, 상황이 종료되면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내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내게 들이밀곤 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 아니었다. 

 

   
  그는 수줍은 듯 씩 웃는다.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능력있는 경찰이 되지는 못할 사람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리다. 너무 솔직하다. 그녀가 전화를 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에게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 (P.284-285) 
 
   

 

상대는 말하라고 했다. 상대는 부담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부담이 될까봐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고 책속의 수지는 생각한다. 이 생각은 수지에게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어떤 부담도 지우고 싶지 않다. 그것이 아마도 그녀가 새벽 4시에 구원을 청할 데가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마이클, 나 조금 무서워요."
그녀는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낸다. 때로는 별 상관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수지,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는 이제 놀란 목소리다. 그는 수지의 약한 모습이 낯설다. 뭐라고 해야 하는지 대답을 찾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리 때문에 그런가 봐요."
그녀는 얼른 생각을 바꾼다. 마이클에게 그런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 지금의 모습으로 굳어 버린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건 그의 책임이 아니다.
(P.314) 
 
   


 

수지는 혼자서 많은 것들을 감당해내야 한다. 드러나는 진실 앞에 휘청거려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데는 서툴다. 이런 그녀에게 담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의 좋은 친구 '케일럽'은 어느 날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지를 얘기한다. 늘 잠들기 전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도. 

   
  수지는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시절, 케일럽이 항상 입고 다녔던 하늘 빛 볼링 재킷을 떠올린다. 재킷의 오른쪽 주머니에는 '비센트'라는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그런데 수지는 예전 남자 친구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한 사람을 알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하지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PP.462-463) 
 
   


한 사람을 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책 속에서 수지가 말해줘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이제 나는 알았으니까. 게다가 오랜 시간이 걸려도 한 사람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다. 나는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걸.  

 

처음에는 문장이 좋은 소설인 줄 알았다가, 숨겨진 이야기들에 놀랐다. 마치 추리 소설인듯 언니 그레이스에 대한 진실들을 접하게 될때, 이 책은 점점 더 가치있는 책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이 품절인 것도 서운하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없는 것도 야속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작가라면, 그래서 이런 책을 썼다면, 아마 나도 다른 책을 섣불리 쓰지 못했을 거라고. 심지어 나는 더 쓸 생각도 안했을 거라고. 죽기전에 이런 책을 써냈는데 뭘 더 하겠다는 욕심을 낼 수 있을까? 이 책 한권을 세상에 내보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이 책 한권을 써냈으므로 나는 나 스스로를 기특하게도 여기고 다독이기도 했을 것 같다. 이젠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채로 일상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라면 그랬을 것 같다. 

 

품절 딱지가 뚝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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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꽥!!!!!!!!!!!!!!!!!!!!!!!!!!
    from 마지막 키스 2012-10-10 13:06 
    이 책..품절이 풀렸네요!! 품절 풀린것 만으로도 완전 울트라캡숑나이스짱으로 기뻐서 미치겠는데 심지어 반값(!!)입니다. 맙소사. 아직도 이 책을 읽지 못하신 분이라면 다시 품절되기 전에 어서, 어서!!
 
 
네꼬 2011-06-30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귀 안 뚫었는데, 그냥 귀걸이라도 해야 될까요? 다락님의 '여자론'은 언제나 좋아요. 그리고 참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새벽 3시 전화, 알죠? 4시라도 상관없어요. :)

다락방 2011-06-30 22:19   좋아요 0 | URL
새벽은 새벽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는것 같아요, 네꼬님. 구원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새벽이 되면 반드시!! 네꼬님을 기억할게요.날 내치지 말아요. 갈데가 없어요,난.

자하(紫霞) 2011-06-3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4시에 구원을 청할 친구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저는 똑바로 누워서 심호흡을 해요~^^

다락방 2011-06-30 22:2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많은 생각을 해요, 새벽 네시엔. 가만가만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고 딱 그만큼의 어둠이에요.

음. 2011-06-3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벽 4시에 전화하는 모임을 한번 만들어보죠.

다락방 2011-06-30 22:22   좋아요 0 | URL
윽 좀 비참한데요. 너무 절절해요. 모임을 만들어 전화해야 하다니.

moonnight 2011-06-30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귀 안 뚫었어요. ; 귀 안 뚫은 귀걸이는 못생긴 거 밖에 없어요. -_-;다락방님처럼 여성스럽게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귀걸이를 빼는 행동은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상상;
이 책, 좋다고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저는 살 생각도 안 했어요. 뭔가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후회가 되네요. 품절이 풀렸으면 저도 바랍니다.
그나저나, 새벽 네시에 저한테 말 거셔도 괜찮아요. (수줍;) 둔해서 말 걸어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라도, 다락방님은 환영 ^^

무해한모리군 2011-06-30 11:46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저도 강추요!

다락방 2011-06-30 22:28   좋아요 0 | URL
여성스런 순간임엔 틀림없지만 사실 그때쯤 되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있는것 같아요,문나잇님. 일상을 살아내느라 지쳐서 머리는 떡지고 화장은 번들거리고;;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해요, 현실은.

저도 이상해게 손이 안갔던 책이었어요. 선물 받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거에요. 정말 좋아서 제가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데 품절이라니. 흑흑 ㅠㅠ

무해한모리군 2011-06-30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새벽에 깨면 굳이 자려고 하지 않아요.
대체로는 그런 적막한 순간이 좋아요.
커피 한잔하면서 멍하게 있어도 좋고,
편지를 써도 좋고,
책을 좀 읽어보다가 졸아도 좋고 말이지요..

저도 이 책을 읽고 이 사람 다음책을 안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했어요..

다락방 2011-06-30 22:33   좋아요 0 | URL
새벽에 깨어 있으면 그 자체로 선물 받은것 같아요.남들은 다 자고있을 시간이라는걸 알기 때문인지 새벽은 깨어있는자의 것 같잖아요. 저는 대부분 새벽이구나, 생각하고 시간을 확인하고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자요. 가끔은 불을 켜고 책을 읽거나 수첩에 낙서를 해요.

이런 책이라면 이 한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라면 말이죠.

플레져 2011-06-3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4시에 행복한 사람은 없다, 고 쉼보르스카가 말했대요.
(조경란의 백화점에서 읽었어요)
부디 재발매 기원!

다락방 2011-06-30 22:35   좋아요 0 | URL
조경란의 백화점에 그런 문장이 나왔었군요. 그러고보니 익숙한 문장같기도해요. 저는 새벽 네시에 행복한 최초의 여자사람이고 싶어요,플레져님.

... 2011-06-3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새벽 4시 30분에 잠들었는뎅...

다락방 2011-06-30 22:36   좋아요 0 | URL
잔다고 왓섭이라도 넣어주지 그러셨어요!!!!!

람혼 2011-06-30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또 다락방님이 흡연의 세계로 들어오신 줄 알고 내심 반가워했다는...^^;

다락방 2011-06-30 22:59   좋아요 0 | URL
하하 전 금연의 세계에 입문한지 몇년 됐습니다, 람혼님. 그나저나 담배가 람혼님을 불렀군요! 오랜만이에요.
:)

poptrash 2011-06-3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라는 첫 문장만, 누가 말해줘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4시의 담배도 있군요. 음. 저는 새벽 4시에도 담배 피고 오전 9시에도 담배 피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담배를 피고 잠을 잘 거에요. 엉터리 글을 쓰느라 밤을 샜어요. 다락방 님이 제목 좀 정해줘요.

다락방 2011-07-01 11:25   좋아요 0 | URL
저는 어제 늦은밤, 팝님의 글을 읽고 제목을 정해드리고 싶었으나, 제목이 너무 제 취향대로만 지어져서 차마 권해드릴 수가 없었어요. 아직까지 제목을 못짓고 계시네요. 얼른 지어봐요, 얼른!!

2011-06-30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춘희 2011-06-3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었다니 다행이에요 ㅎ 전 리뷰가 없길래 흥미가 없으셨구나 했어요! 잘 지내요 다락방?

다락방 2011-07-01 11:26   좋아요 0 | URL
엄청 좋았어요, 춘희님. 집에 안읽고 쌓인책이 백권이 넘어서 사놓거나 선물 받은 책 읽으려면 오만년 걸려요. 계속 책을 사서..orz

엊그제 카톡으로 제가 인사했는데 씹으시더만요!! 스맛폰 장만하셨어요?

머큐리 2011-06-3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걸이를 하고 싶고...새벽에 깨면 담배부터 찾는 저에게... 감동적인 페이퍼...ㅎㅎ

다락방 2011-07-01 11:26   좋아요 0 | URL
오오, 머큐리님. 귀걸이 하고 싶으세요? 감동..이라니 하하하하. 별말씀을요.
금요일이라서 오전 내도록 일도 안하고 들떠있어요. 금요일은 정말 왜이러나 몰라요. 히히.

감은빛 2012-10-1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까지 귀걸이나 반지를 끼지 않는 여자들과 살아왔어요.
어머니도 아내도 귀걸이를 하지 않네요.
어머니께서는 귀도 뚫지 않으셨구요.
아내는 귀를 뚫었었으나, 한쪽이 막혔어요.
연애할 시절에는 한쪽만 귀걸이를 했던 적도 있었는데,
결혼 후에는 귀걸이를 안하네요.

이글을 읽으니 중학생때쯤 문구점에서 어머니께 선물하기 위해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귀걸이들을 살펴보던 제 모습이 생각나네요.
어머니는 그때 제가 선물한 귀걸이를 아직 갖고 계실까요?
아마 제가 귀걸이를 선물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계실 것 같네요.

다락방 2012-10-11 14:17   좋아요 0 | URL
저도 초등학교 다닐 때 동생들하고 돈을 모아서 엄마한테 3천원짜리 진주목걸이(당연히 진주가 아니었겠지요)를 사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보니 언제부턴가 그 목걸이가 보이지 않는데, 망가져서 버리셨을까요?

저는 귀걸이를 무척 하고 싶은데 메탈알러지 때문에 오랜 시간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귀걸이하면 스스로 더 예뻐진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괴로움을 감수하자 싶어서 귀걸이를 했다가는 시간이 흐르면 너무 간지러워서 아플 정도로 긁고 만지고 해야 해요. 윽.

오래된 글을 읽으셨네요, 감은빛님.
:)
 

Dear my Boss, 

보쓰, 


오늘 일기예보 들었나요?
호우 경보래요.
그 커다란 창 밖으로 비가 얼마나 퍼붓고 있는지 보이죠?
그런데, 

그런데 보쓰,
왜 나를 외근 보내나요?
왜요?
왜? 

이렇게 비가 퍼붓잖아요.
우산을 써도 흠뻑 젖잖아요.
그런데 왜 나를 외근 보내는거에요?
내가 이 비가 오는데도 출근해줬잖아요. 그런데 왜요?
천둥 번개소리 들었어요?
내가 천둥 번개를 얼마나 무서워 하는지 알아요?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천둥번개가 내리쳤어요. 난 정말 무서웠다구요. 

그래요.
젖어버린 샌들은 물기를 닦고 말리면 돼요.
젖어버린 종아리는 네, 물기를 닦아내면 돼죠.
괜찮아요.
그런데 흠뻑 젖은 치마는 어쩌나요? 걸을때마다 두꺼운 허벅지에 철푸덕 달라붙는 치마 말입니다.
앉았다 일어나면 의자에 엉덩이만큼 흔적이 남아요.
이걸 어떡해요? 어떡하냐구요. 

보쓰,
나한테 왜이래요? 
왜 나를 이 비 퍼붓는데 바깥으로 보냈어요?
제정신입니까?
제정신이에요?
내가 .. 일 그만둬요?
원하는게 그겁니까?
잊었어요? 내가 왜 여기서 일하는지? 
나 예쁘다고 보쓰가 같이 일하자고 했잖아요.
하긴, 이건 보쓰의 잘못은 아니네요. 예쁜 나의 죄지..

보쓰. 
한번만 더 이런 비오는 바깥에 날 내보내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거에요.
한번만 더 이런 비오는 바깥에 날 내보내면 때려치겠어요.
그때가서 잘못했다고 울며 매달려도 난 잡히지 않아요.
뒤도 안돌아보고 떠날거에요.
연봉 올려준다고 해도 얄짤없어요. 

보쓰,
똑바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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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6-30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저도 어제 가장 하이라이트 순간에 수원에서 서울까지 뚜벅이 외근 나갔다는... 정말 요즘 날씨는 너무해요.

다락방 2011-06-30 19:22   좋아요 0 | URL
오늘은 오후에 잠깐 해 뜨다가 다시 소나기 내리더라구요. 그러더니 지금은 다시 개고 있어요. 비가 퍼부을려면 제가 집에 있을 때 퍼부었으면 좋겠어요. 일하는 중에는 좀 그만오고.. ㅠㅠ

블루데이지 2011-06-3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글 읽고 웃으면 안되는 거죠?
예쁘신 다락방님이 비오는날 외근으로 힘드셔서 보쓰에게
쓰신 편지 이시잖아요~~ ㅋ흑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요~~서투른 예술이 아니라 너무 노련한 예술이셔요~~

다락방 2011-06-30 19:23   좋아요 0 | URL
어머. 노련..이라뇨!! 하하하하.
어제 외근 다녀오고 완전 화가 치밀어가지고 썼네요. 화는 예술을 부르는가 봅니다. 자고로 예술가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법..

루쉰P 2011-06-3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웃고 가요. 음..웃으면 안 되는 일인가?? 암튼 다락방님의 블랙유머에 비 오는데 상쾌하게 일하고 있어요.
우리 보쓰도 밖에서 일 시키거든요. ㅋ

다락방 2011-06-30 19:24   좋아요 0 | URL
이제 비 멎는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새벽에 깼을 때 빗소리 들리거나, 아니면 빗소리에 깨거나 할 때는 참 괜찮은 기분이에요. 음, 좀 더 기분이 가라앉긴 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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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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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말고 살아보라고 하면 그건 헛소리, 살다보면 좋은날이 올거라는 건 말짱 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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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1-06-2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빙고!

다락방 2011-06-28 15:15   좋아요 0 | URL
다들 너무들하지 뭡니까!

stillyours 2011-06-2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오늘 아침에 올렸는데! 다락방 님 40자평에 완전 공감!

다락방 2011-06-28 15:16   좋아요 0 | URL
그녀에게 어쨌든 더 살아보라는 말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못할 말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moonnight 2011-06-28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책 관심가던데 꼭 읽어봐야겠군요!

다락방 2011-06-28 15:16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은 이 책을 읽으시면 좀 힘들어하실 거에요. 후아-

2011-06-28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1-06-2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자평 참 잘썼네. 어쩜 이렇게 잘썼을까!

다락방 2011-06-28 15:37   좋아요 0 | URL
저 한수철님 40자평 이미 읽었어요. 그런데 지금 또 가보니까 없더라구요. 한수철님이 40자평도 쓰셨구나..그건 최수철의 작품이기 때문일까...아니면 침대이기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다락방 2011-06-28 15:57   좋아요 0 | URL
저도 잠시후 따라가서 꽃뱀이 될게요.

개인주의 2011-06-2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정확하잖아요.ㅡ^ㅡ

다락방 2011-06-28 15:3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너무 정확하죠.

무해한모리군 2011-06-2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산다는게 왠지 고단하게 느껴지네요.. 오늘

다락방 2011-06-28 17:38   좋아요 0 | URL
전 6월이 그렇습니다, 휘모리님. 하아-

마노아 2011-06-2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40자 평이에요. 운율까지 느껴져요. 김이설 작가님 책을 저도 어여 봐야 할 텐데요.

다락방 2011-06-29 09:10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일전에 우리 박범신의 [비즈니스] 얘기한 적 있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비즈니스와 환영을 비교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저는 환영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저 혼자 비교를.. ( '')

poptrash 2011-06-29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무서워요. 덜덜 떨면서 읽었어요. 이 책의 짧은 서평을 써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오늘 중으로 써야 하네요...) 다락방 님 40자 평보다 잘 쓸 수도 없고.

다락방 2011-06-29 09:13   좋아요 0 | URL
팝트래시님, 얼른 서평 써서 올려봐요. 팝님이 느끼신게 제가 느끼신 것과 같은지 궁금해요. 저도 이 책 읽고 나니까 작가한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그래서 리뷰를 써보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지더라구요. 쓸데없이. 그래서 중도에 스톱하고 더이상 쓰지 못하고 있는데 팝님은 저랑 좀 취향이 다르긴 하지만서도, 어쩌면 저랑 같은 느낌을-이를테면 별이 넷일 수 밖에 없는 이유-받으셨는지 궁금하거든요. 전 이 차마 더 주지 못한 별 하나에 대해서 너무 얘기하고 싶은데 그것에 대해서 글이 너무 안써져요. 문장이 안만들어져요. 그게 너무 괴로워요. 엉엉 ㅠㅠ 그러니까 팝님이 얼른 써봐요!!

paviana 2011-06-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흑 이렇게 제맘같은 40자평은 첨이에요. 저도 딱 지금 이래요..

다락방 2011-06-30 12:59   좋아요 0 | URL
파비아나님,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파비아나님의 삶이 그렇다는 건 설마, 아니겠지요?

세실 2011-06-2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거라는건 말짱 개소리"
정말 그럴까요? 아 우울해진다....

다락방 2011-06-30 13:00   좋아요 0 | URL
이 책속 여자에겐 그랬어요. 사람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날이 올거야' 라고 말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자칫하면 섣부른 위로가 될 수 있겠더라구요.

Kir 2011-06-2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절대로 읽지 않겠어요... 40자평만으로도 무섭네요ㅠㅠ

다락방 2011-06-30 13:01   좋아요 0 | URL
Kircheis님, 네, 저 위에 팝트래시님은 읽으면서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고 하잖습니까! 버틸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읽지 말아야 할 소설인것 같아요. ㅜㅡ
 
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품절이고 작가는 다음 작품을 안내고. 너무 잔인하다고들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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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래쉬 2011-06-28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오

다락방 2011-06-28 13:47   좋아요 0 | URL
전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moonnight 2011-06-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락방님. 이 책 굉장히 좋으셨나봐요. +_+;

다락방 2011-06-28 13:4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좋았어요, 문나잇님. 품절이 아니라면 여기저기 선물하고 싶은데 말이죠. 흑 ㅜㅡ

관찰자 2013-01-2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책장을 열고 맥도널드 장면부터 좋아지기 시작했었는데요.ㅠㅠ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면 습관적으로 검색해 보는 작가들이 있는데,
'수키 김'도 그중 한 사람.
근데.
책, 어지간히도 안 써요.
완전 짜증 지대로.ㅠㅠ
 
헌사(獻辭)

 

'나보코프'의 『절망』을 가방에 넣고 외출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그 당시, 나는 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 책을 챙겨 가면서도 내가 읽지는 못할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나는 많은 시간을 멍하니 보낼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하철 안,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첫장을 넘겼을 때, 나는 이런 문장을 보았다.  

 

 
나의 아내에게 바친다 


  

 

흰 여백에 쓰여진 단 한줄의 헌사. 간결한 단 한줄의, 단 한명에 대한 헌사는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든다. 마음이 술렁술렁. 나는 이 단 한줄이 좋아서 아주 잠깐동안, 이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좋구나.   



 

나보코프가 아내에게 바쳤다면, 수키 김과 사샤 스타니시치는 부모님께 바쳤다. 

 

 

수키 김의 『통역사』에는 이렇게 써있다. 

부모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사샤 스타니시치의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에는 이렇게 써있다. 

나의 부모님께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서 니콜 크라우스는, 자신의 남편과 조부모님께 책을 바쳤다. 나는 그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 보다는 이런 소설을 써서 그것을 남편에게 바칠 수 있다는 것이 몹시 부럽다.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이 조너선 사프란 포어라는 것이. 아, 나도 그에게 바치고 싶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사는것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사라지는 것의 반대를 가르쳐주신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그리고 내 인생 조너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미셸 깽의 『처절한 정원』은 책의 내용과 일치하는 헌사가 쓰여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으며 광부였던 할아버지와
레지스탕스 요원이었으며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두 분은 나에게 공포에 대한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두 분은 역사의 흑백논리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나에게 독일어를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르 비키에게도 이 책을 바치고자 합니다. 

 

 

만약 내가 책을 쓰게 되고 그리고 책의 제일 앞장에 헌사를 넣게된다면, 나는, 가족을 넣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가족이 아닌 타인을 넣고 싶다. 가족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고 어쩔 수 없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책에 넣는 헌사에까지 가족을 넣고 싶지는 않다. 내가 쓴 책이고 내가 쓴 글이라면, 그것은 온전히 내 마음대로 내가 주고 싶은 사람,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헌사에 '바친다' 혹은 '바칩니다' 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고 가장 간단하며 바로 이것이다 싶은 헌사는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매혹』에 쓰여진 헌사이다. 

 

 

리사에게 

 

나는 리사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에게 리사는 이 책에 헌사로 쓰여질 단 하나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리사는 그의 아내이거나 그의 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한들 그는 '아내에게' 라든가 '딸에게' 라는 이름을 대신하는 위치를 넣지 않았다. 그는 그저 리사에게, 라고 했다. 나는 이런식의 헌사가 가장 마음에 든다. 단 한명의 이름을 넣는것. 상대의 포지션을 넣는게 아니라 이름을 넣는 것.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그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의 헌사에, 이름을 넣었지만 수식어를 함께 넣었다.  

 

 

보다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조안 라몬 플라나스를 위해 



'보다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이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참 매력적이지만 이름을 간결하게 넣는쪽이 내게는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름만 넣으면 그 이름 앞에는 아주 많은 수식어들의 가능성들이 열려있으니까. 

 

 

조너선 프랜즌은 그의 소설 『자유』에서 내가 원하는 형식 그대로 이름만을 간결하게 넣었다. 

 

 

수전 골롬브와 조너선 갈라시에게 



그러나 두명의 이름이 들어가있다. 수전 골롬브와 조너선 갈라시. 이 책은 미국 내 판매 100만부를 돌파했다고 하며 전 세계 34개국에 판권 계약이 되어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전 골롬브와 조너선 갈라시는 전 세계에 걸쳐 자신의 이름을 한번씩 읽히게 된다. 자랑스럽고 뿌듯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책이 나에게 바쳐졌어, 내가 수전 골롬브야. 왜 두명일까, 이 둘은 조너선 프랜즌과 무슨 관계일까? 형제도 아닌것 같고 자녀도 아닌 것 같은데. 수전 골롬브와 조너선 갈라시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조너선 프랜즌과 어떤 관계일까? 어떤 사이길래, 어떤 감정으로 교감을 나누었길래 미국내에서만 100만부를 돌파하고 여기 대한민국에 사는 내가 읽기도 하는 이 책에 이름이 쓰여지게 됐을까? 이 책을 펼쳐 제일 앞장, 흰 여백에 자신들의 이름이 쓰여진걸 확인한 순간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울었을까? 가슴이 벅찼을까? 

 

 

'필립 베송'의 『포기의 순간』의 헌사는 독특하다.  

 

 

경계를 넘은 이들을 추억하며 

 

책을 읽기 전에는 이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알 수가 없다. 경계를 넘었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헌사는 그저 아름다운 문장에 지나지 않는걸까? 그러나 책을 다 읽고 이 헌사를 다시 마주하면, 아,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어쩌면 이 책속의 주인공들 같은 인물들을 필립 베송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이 헌사를 다시 보면 이 문장이 얼마나 애틋하게 느껴지는지.

  

위에도 언급했듯이, 내가 쓰고 싶은 헌사는 '리사에게' 같은 헌사이다. 나는 그 한문장으로 모든게 충분하다고 믿는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단 한줄로 넣는 순간 이미 나와 그 사람 사이에는 어떤것들이 오고갔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아마 상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헌사가 쓰여졌던 책을이 어떤 것들이었지, 하고 책장 앞에 서서 기억을 더듬어 꺼내보다가, 문득, '안토니오 수잔 바이어트'의 『소유』의 헌사는 누구 앞으로 되어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쩐지 두근두근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열었을 때 그 책속에 헌사는 없었다. 내가 내 책장들에 꽂혀있는 책들 속에서 내 이름이 쓰여지길 원하는책이 있다면, 내가 헌사를 받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것은 『소유』이다.  

 

내가 가진건 왼쪽의 구판인데 개정판이 나오면서 설마 없던 헌사가 들어가있진 않겠지.

  

 

   
 
"네 이모님한테 말 좀 전해 주려무나. 네가 어느 시인을 만났는데, 그 아저씨가 사실은 무정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찾고 있다가 너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으며, 이젠 새로운 곳의 숲과 초원을 찾아 떠나는 중이라고 말이다."(「소유」, 하권, P.536) 
 
   

  

오늘 아침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는 Karina 의 Slow Motion 이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고,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아직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추가: 

『소유』의 구판에도 헌사가 있었다. 브론테님이 댓글로 적어주신 '이소벨 암스트롱을 위하여' 라고. 다만 표지를 펼치면 다른글이 먼저 나오고 또 그 책장을 넘겨야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내가 어째서, 어떻게, 왜 놓쳤을까. 조너선 사프런 포어가 그의 아내 니콜에게 바친 헌사를. B님이 제보해주셨고, 집에 와서 찾아와 보았다. 무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헌사. 젠장.  

 

 

 

 

니콜
내 아름다운 여신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For
NICOLE,
my idea of beautiful
 

 

 

 

 

 

 

 

하아-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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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27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 <소유>에는 "이소벨 암스트롱을 위하여"란 헌사가 들어가 있네요 ^^

다락방 2011-06-27 10:06   좋아요 0 | URL
그럼 제가 될 수 없겠군요. orz
구판에는 없었는데 제가 책장을 잘못 넘긴걸까요? 집에 가서 다시 넘겨봐야 겠어요. 소유의 헌사를 받는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일 것 같아요.

네꼬 2011-06-2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트위터에 이 글이 링크되었는데, 멘션에서 "다락방님"이란 글자를 읽는데 왜 내가 으쓱하고 뭉클한 거예요? 응? (나 연예인 누구랑 친하다! 하는 기분?) 아 좋아.

다락방 2011-06-27 10:13   좋아요 0 | URL
흥! 뭐 그정도를 가지고. 별 거 아니에요. 흥. (한껏 으쓱하며 잘난척한다)

레와 2011-06-27 10:18   좋아요 0 | URL
네꼬님, 미투!!! ㅎㅎ

다락방 2011-06-27 10:21   좋아요 0 | URL
레와님도 참. 진짜 뭐 이정도 가지고 그래요. 이게 뭐 별거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치니 2011-06-27 11:48   좋아요 0 | URL
미투, 나는 페이스북에서도 봤음! ㅎㅎ

다락방 2011-06-27 12:40   좋아요 0 | URL
아이, 치니님도 참. 왜들 이러세요. 저 다락방이에요. 움화화화화화화화홧(하늘높은 줄 모른다)

레와 2011-06-2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한 한줄의 문장도 좋고, 이름만 들어간 헌사도 좋고 난 다 좋아요.
이 책 한권이 날 위한 것이라니.. 엄청 근사하잖아요!!

다락방 2011-06-27 10:21   좋아요 0 | URL
그쵸, 근사하죠? 게다가 그 책이 정말 멋진 책이라면(소유라든가, 포기의 순간이라든가)얼마나 더 근사할까요. 최고일거에요, 그 기분은. 어휴..생각만해도 벅차요. ㅠㅠ

루쉰P 2011-06-2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멋지네요. 전 헌사는 그냥 지나쳤거든요. 근데 다락방님의 리뷰를 보며 헌사라는 것이 꽤 매력적이구나 하는 생각이들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은 만약 헌사를 쓰게 될 기회가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꼭 넣을꺼에요!! 반드시요!! 다락방님이 조금 싫어하시는 월요일이에요. ^^;
커피 한 잔 드시며 여유를 가지시기를...저는 닭도리탕 해 먹고 있어요. 혼자서 월요일의 여유죠..푸하하하!

다락방 2011-06-27 12:41   좋아요 0 | URL
밥도 먹었고 커피도 마신 점심을 막 보내고 있습니다. 문득 책상위를 보니 참.. 한숨이 나네요. 너무 지저분해서. 이것들을 다 어떻게 치우고 정리하나 싶어서 말입니다.
전 오후에 쵸코하임 먹을거에요. 하하하하

네, 루쉰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넣으세요. 그러나 넣기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섣불리 넣지 마시구요. 왜냐하면 이미 인쇄되어 세상에 뿌려진 책들은 아주 오랜시간 남아있으니까요. 아주아주 오래요. 그 오랜시간동안 그 책속에 인쇄된 이름은 지울 수 없어요.

야클 2011-06-2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못쓰는 저는 매달 주는(바치는) 현금봉투에 아내에 대한 헌사를 항상 바꿔가며 쓰지요.
예를 들면,

" 무슨 조화인지 날이 갈수록 더 예뻐져가는 XX에게 꽈자값을 드립니다 " 같은. ^^

다락방 2011-06-27 12:58   좋아요 0 | URL
오. 그런 봉투라면 헌사 없이도 이미 행복한 마음이 가득하겠는걸요!! ㅎㅎㅎㅎ

레와 2011-06-27 13:46   좋아요 0 | URL
역시, 야클님은 멋쪄요! 꽈자라니, 까오~

야클 2011-06-27 13:53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 역시 봉투는 겉 보다 속이 중요한듯. ^^

다락방 2011-06-28 08:22   좋아요 0 | URL
속이 꽉 찼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죠. ㅎㅎ

blanca 2011-06-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헌사 읽으면 왠지 가슴이 뭉클하더라구요. 그리고 항상 이름만 있는 헌사에서 그 이름을 가진 이는 누구일까? 궁금해요. 그런 간단명료한 헌사가 항상 궁금하고 부러웠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다락방 2011-06-28 08:23   좋아요 0 | URL
저 어젯밤에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헌사를 보고 부르르 떨었어요. 니콜이 너무 부러워서 주저앉을 지경이었어요. 하아- 저도 니콜이 부러워하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니콜
내 아름다운 여신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ㅠㅠ

moonnight 2011-06-27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저도요. 관계를 밝히지 않은 헌사와 마주하면 생각하게 돼요.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 작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헌사를 쓴 걸까. 이러면서 괜히 애틋해지는데. 다락방님께서 꼭 집어주시네요. ^^

다락방 2011-06-28 08:2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문나잇님. 아내나 부모라는 누구나 추측하기 쉬운 관계 말고 단순히 이름만이 적혀있을 때 거기에 더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일까, 하고 말이지요. 이름을 넣고 싶어요, 저도. 만약 제게 그런일이..생긴다면요. 하하하하 ㅠㅠ

얼룩말 2011-06-27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사에게..
짱!^^

다락방 2011-06-28 08:25   좋아요 0 | URL
근사하죠? 저 책도 엄청나게 매력적이에요. 제목도 무려 [매혹] 아닙니까!

마노아 2011-06-2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책에는 누구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자주 나오는데 보통 작가의 아이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음반에도 땡스투~라던가 스페셜 땡스 투~이런 이름이 곧잘 나오죠.
그런 자리에 올려진 단 하나의 이름이 내가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무척 벅찬 걸요.
하지만 역시 먼댓글 연결된 타인의 삶의 헌사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다락방 2011-06-28 08:26   좋아요 0 | URL
엄마나 아빠가 본인의 아이들에게 바친다는 건 너무 당연해 보여서 그러니까 음, 좀 특별하게 느껴지지가 않아요. 물론 그림책이라든가 동화책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썼겠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엮이는 일은 살다보면 엄청나게 많은데 만약 제가 그 입장이 된다면 그때만큼은 누구의 엄마나 누구의 자식이라기 보다는 나라는 인간 자체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기분이거든요. 글쎄요, 막상 그런일이 생긴다면 제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타인의 삶의 헌사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헌사죠. 저도 엄청나게 좋았더랬습니다.

잘잘라 2011-06-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1-06-28 08:27   좋아요 0 | URL
제가 왜 멋집니까. 저 헌사를 쓴 작가들도, 저 헌사를 받은이들도 제가 아닌걸요. orz

새초롬너구리 2011-06-27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갑자기 예전에 본 영화마냥 눈앞에 장면들이 떠올라요.

미녀:(바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신다)
바텐더:(컵을 닦다가 그녀쪽을 보고) 저...혹시 작가인 #$%$#%$아니신가요?
미녀:(아 조용하게 먹긴 글렀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네, 맞아요.
바텐더:최근작 #%$#%^를 정말 잘 봤어요. 그래서 기억해요.
미녀:네
바텐더;근데 혹시 헌사를 바친 #%$#%는 누군가요? 정말 궁금해서요.
미녀:딴여자랑 바람이 나서 통장,집,별장까지 다 소송비용으로 날리게 한 전남편이예요.
바텐더:(당황하여 얼었다)
미녀:책을 쓸때만해도 책과 함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사람이 어느순간 세상 모든 것을 줘서라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을때에도 여전히 그 헌사를 볼 수 있다는게 얼마나 엿같은지 아나요?

음, 비가 와서 그런가. 우울한 너구리였어요~



밥이좋다 2011-06-27 23:08   좋아요 0 | URL
멋진걸요

다락방 2011-06-28 08:29   좋아요 0 | URL
새초롬너구리님 ㅠㅠ 울고싶네요 ㅠㅠ
제가 저 위에 어제 루쉰p님의 댓글에도 달았지만 책은 한순간 없어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이름을 올릴때 생각을 깊게 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생각을 깊게 했다고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리고 그때는 확신을 가졌겠지만,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또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그 모든것들이

시간이 지나도 내가 이 일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 일을 꼭 해야만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뒤에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밥이좋다님, 전 현실은 잔인하다는 생각밖에 들질 않아요. 흑 ㅜㅜ

starover 2011-06-27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보다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조안 라몬 플라나스를 위해'와 '경계를 넘은 이들을 추억하며'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다락방 2011-06-28 08:30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 '보다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이라는 수식어는 그 수식어 자체로도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사랑하는' 이라든가 '내 전부인' 이라든가 '아름다운' 이라는 수식어는 뻔하고 흔하고 식상한데 '보다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이라니, 작가는 괜히 작가가 아니구나 싶어요. 그런 수식어는 듣는 사람을 꽤 기분좋게 만들어줄게 틀림 없어요.

경계를 넘은 이들을 추억하며, 라는 헌사가 쓰여진 [포기의 순간]은 헌사만큼이나 책도 아름답습니다.

비로그인 2011-06-27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또 추천수 100을 찍어 봅시다아~ ^^

헌사도 글도 멋집니다.

다락방 2011-06-28 08:31   좋아요 0 | URL
100은 무리겠어요, 바람결님. 욕심입니다. 하하

헌사는 거창한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멋질 수 있는 문장인 것 같아요.
:)

꼬마요정 2011-06-28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사에게.. 저도 한 표!^^

다락방 2011-06-28 08:32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요.

리사에게
간결한 단 한줄.

2011-06-28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1-07-0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를, 단 한 문장 - 이 제목에 끌려 들어왔어요. 맘에 들어서요^^
아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11-07-01 14:3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