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HGW XX/7 에게 바칩니다 

 

나는 언제나 이런 한 문장을 꿈 꾸었다. 간단한 문장, 여러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단 한명만이 등장하는 그런 헌사. 책이든 앨범이든 그리고 영화든, 그것들에 헌사가 포함되어 있을때 감사해야 할 사람이 수십명이라면 그 헌사의 가치는 그 사람수대로 나눠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들은 내게 그다지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명, 단 한명만을 단 한줄로 표현한다면, 세상에 그보다 완벽한 헌사는 없는 것 같았다. 

그 모든 헌사를 나는 2007년, 영화 『타인의 삶』에서 보았다.  

묵묵히 일을 하던 비즐러가 서점에서 누군가의 신간을 발견하고 들어간다. 그 책을 찾아내고 책장을 연다. 오, 그런데 뜻밖에도, 맨 앞장에 비즐러 자신에 대한 헌사가 나온다. 

- 이 책을 HGW XX/7 에게 바칩니다   

이 단 한줄의 헌사에는 모든것들이 담겨져 있다. 책을 쓴 사람과 책장을 연 사람, 그 둘은, 서로가 서로의 눈을 보며 그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단 한번도 말한적이 없지만, 이 문장만으로 그들은 서로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나를 위해 애써줬다는 것을 알고있다'는 것을 다 읽어낼 수 있다. 그 문장을 발견한 비즐러에겐 그 순간 어떤 감정들이 찾아왔을까. 수십수백가지의 생각, 수십수백가지의 감정. 그 모든것들이 그에게 찾아왔을것이고, 그리고 또 그 순간, 아 이제 됐다, 의 안도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받고 싶은 것, 혹은 내가 쓰고 싶은것도 이런것이다. 단 한줄로 써버렸지만 모든것들이 담긴 것. 그래서 헌사를 바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 한줄만 읽고도 모든 행복과 모든 슬픔 또 모든 위로와 모든 격려를 알아챌 수 있는 그런 것. 

 

그런 헌사를 나는 오늘 아주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내게 목소리와 만년필을 돌려준 내 친구 다니엘에게.
그리고 우리 둘에게 목숨을 돌려준 베아트리스에게.
   

이 헌사에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걸 다니엘은 알고 있다. 파리의 소인이 찍힌 소포지만,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저 가볍게 몇장을 넘겨보려 했지만,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던 문장이었으니까.

그날 옛 알다야 저택을 돌아보고 서점으로 돌아오니 파리의 소인이 찍힌 소포가 도착해 있었다. 거기에는 보리스 소렌이라는 사람이 쓴 『바다 안개의 천사』라는 책이 들어 있었다. 새책들이 언제나 가지고 있는 그 신비한 향기를 맡으면서 가볍게 몇 장을 넘겨보다가 내 눈을 사로잡는 첫 문장을 읽기 위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즉시 누가 그 책을 썼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첫 페이지로 돌아가 내가 어렸을 때 그토록 사모하던 그 만년필의 파란색 선으로 씌어진 다음과 같은 헌사(獻辭)를 발견했다. (2권 p.390) 

 

 

 

  

 

2권의 1/3쯤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책은 재미는 있지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 혹은 다른 사연이 숨겨져 있을거라고 막연한 기대도 했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나는 아, 역시! 하고 갑자기 이 책을 읽는데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2권을 읽다가 한번, 눈물이 고였고 계속 읽다가 다시 한번, 이번엔 눈물을 닦았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수첩과 펜들 그리고 물이 들어있는 머그컵, 일을 하기 위한 각종 서류들이 쌓여있어 지저분하다. 업무용 다이어리는 구겨진 채 펼쳐져 있고 오전에 받은 우편물은 뜯지도 않았다. 펜을 서랍에 넣는 대신, 물을 마시는 대신, 서류를 정리하는 대신, 우편물을 뜯어 보는 대신, 나는 바람의 그림자를 읽었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멋진 헌사를 보았다고 감동하고 있다. 

지금 끓어오르는 이 모든 감정들을 무시한 채로 퇴근시간까지 남은 세시간을 일에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이래서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야 해. 부자로 태어나서 회사따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책만 읽어야 한다고. 책 읽은 후에 일을 해야 하다니, 비극이다. 

뭐, 사무실에서 책을 읽지 않고 일을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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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고소진] 1월달에 읽을 책
    from 마지막 키스 2010-01-19 15:25 
    벌써 11일째 지나가버리고 있지만, 어쨌든 남은 1월동안 이 책을 읽겠습니다.
  2. 옮긴이의 말
    from 유리동물원 2010-01-19 15:53 
    스페인어로 된 명작인 [돈키호테]와 [백년 동안의 고독]의 첫문장은 모두 '기억하다'라는 동사로 시작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로 시작되는 [바람의 그림자]가 독자들에게 그 '기억'의 고전들처럼 오랫동안 추억되길 기원한다. 그리하여 기억되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있는 거라는 누리아의 말처럼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3.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를, 단 한 문장
    from 마지막 키스 2011-06-27 09:12 
    '나보코프'의 『절망』을가방에 넣고 외출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그 당시, 나는 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이 책을 챙겨 가면서도 내가 읽지는 못할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나는 많은 시간을 멍하니 보낼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하철 안,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첫장을 넘겼을 때, 나는이런 문장을 보았다.나의 아내에게 바친다흰 여백에 쓰여진 단 한줄의 헌사. 간결한 단 한줄의, 단 한명에 대한 헌사는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든다. 마음이 술렁술
 
 
2010-01-19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큐리 2010-01-19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그 기분을 200% 공감해요..ㅎㅎ 바람의 그림자를 읽고 일을 한다는 건....비극인거죠??

메르헨 2010-01-19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말이죠. 유명하다는 책을 좀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근데 다락방님 서재에 오면 꼭...장바구니에 담게 되더이다.^^

비로그인 2010-01-19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게 파우, 익스익스 지븐'이렇게 읽지요. 전 스캔을 뜨거나 임시문서를 저장할 때 이젠 늘 hgw xx7로 저장합니다. 다른 이들이 그냥 그 이름만 보고 이젠 제 것인줄 알더라구요. 하지만 그 의미는 아무도 모를 듯 해요.

치니 2010-01-19 15:51   좋아요 0 | URL
멋지다, 주드님! ^-^

비로그인 2010-01-20 10:19   좋아요 0 | URL
헤헷 저 영화를 보고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뮌헨'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범 사례였다면 타인의 삶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사례였지요.

순오기 2010-01-2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일을 마치고 와서 이 글을 보니까 다행이네요.
집에 오면 알라딘에서 노느라 책을 잘 안 읽어서 아예 출근할 때 한 권 가져가서 읽고 와요.
대개 동화책이라 금세 읽지만 쓰는 일은 또 쉽지 않아요.

이런 헌사를 받는 대단한 책은 꼭 봐줘야 하는데...

마노아 2010-01-1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뜨거운 감상이, 이 책에게 바치는 가장 훌륭한 헌사가 될 거예요!

... 2010-01-1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혹시 옮긴이의 말도 읽으셨나요? 이 책은 옮긴이의 말도 끝내주는데... 제가 알려드리죠.

습관 2010-01-1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런,

저 '타인의 삶'DVD를 주문했어요.

이건 전혀 계획에 없던 건데...어...


종혁 2010-01-1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이거 반드시 읽어야 겠다고 다짐하고 나갑니다 :)

기억의집 2010-01-1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가 지금까지 본 멋진 헌사는 이거 였어요. 그림책중에서 <할아버지의 붉은 뺨>이라고 있는데..거기에서 글작가는 <내 친구 유리처럼 이야기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라고 했고요. 그린이는 <'현실'에 저항하고 판타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라고 했지요. 멋지죠! 다락방님이 말하는 단 한사람을 위한 헌사는 아니지만... 전 저게 저한테도 해당되서 너무나 행복한 헌사였어요^^

전 오늘 남극의 쉐프보고 왔어요^^ 친구들이랑 막걸리 한잔 들이키고....^^

마늘빵 2010-01-19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또 보고 싶네...

비로그인 2010-01-20 10:20   좋아요 0 | URL
영화가 찍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마침표.

Mephistopheles 2010-01-1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슬픔도 기쁨도 아닌 정체불명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던 영화.

비연 2010-01-1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취향과 바람의 그림자. 정말 제 마음에 구멍 뻥 뚫고 지나간 작품들이죠.
생각할 때마다. 님의 페이퍼같은 글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 저릿저릿한.

무스탕 2010-01-1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 영화를 보려면 DVD 밖에 방법이 없는건가요..
참 나, 헌사에 홀려 책 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또 첨이네요 ^^

프레이야 2010-01-19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타인의 삶, 이 영화 정말 최고에요.
나도 그런 짧으면서도 최고의 헌사를 받고 싶어요.
아, 그러고보니 받은 적이 있어요.
눈을 감아도 빛나는 이에게..^^

섬사이 2010-01-2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나도 읽고 또 봐야겠다~

레와 2010-01-2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또 보고싶군요..

Kir 2010-01-2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삶 저녁에 다시 봐야겠네요. 다락방님 페이퍼를 읽고 나니, 또 보고 싶어요.
<이래서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야 해. 부자로 태어나서 회사따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책만 읽어야 한다고. 책 읽은 후에 일을 해야 하다니, 비극이다> 이 부분에 고개를 끄덕거리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웃어버렸어요.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다락방님은 참 귀여우세요^^ 물론, 바람의 그림자를 읽고 일을 해야한다는 건 비극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