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시간은 00:15 한국 시간은 01:15 이겠구나.
수요일 아침에 싱가폴에 와서 한 숨 잔 뒤에 학교 가 교재를 받아오고, 목요일에는 하루종일 수업이 잇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컨디션도 엉망인데다, 이틀 연속 잠을 제대로 못자서, 오늘은 저녁 다섯시에 잠깐 자고 일어나야지, 했는데 일어나니까 밤 열 시였고.. 배가 고파서 그 때 밥을 먹고, 사워도우 사온 것도 먹었다. 바질페스토, 소금, 후추, 올리브유, 발사믹, 다진 마늘 넣어 소스 만들어서 그거 찍어 먹었다. 그리고 복숭아 사온 것도 야무지게 먹고. 그렇게 정승제가 운동하는 영상 보다가, 글 좀 쓰자, 하고 놋북을 열면서, 흐음 그런데 적막 속에 하지 말고 음악 들으면서 할까? 하고 유튭에서 공부할 때 듣는 음악 을 틀어두었다. 피아노 연주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건 별로라서 넘기고 넘기다 보니 조용한,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팝송들이 연달아 나오는 영상을 찾게 됐고, 흐음, 블루트스 스피커 연결해 듣자, 했더니 갑자기 분위기 무엇. 코끝에 와인 향기가 ... 왜죠? 음악을 틀었는데 왜 내 코끝에 와인 향기가 아른거리죠. 하- 음악은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내가 안들을라고 하는데... 나를 순식간에 다른데로 데리고 가버려. 나는 음악들으면서 공부 못한다. 자꾸 내 마음, 이상해져버려..
그래서 와인 따라와서 마시고 있다는 뜻이다. 이 밤에.
이번 새로운 5레벨 선생님들을 만나 처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이번엔 쓰기 선생님도 듣기 선생님도 모두 남자였는데, 쓰기 선생님은 너무 지루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수업이 너무나 걱정된다. 게다가 온라인 숙제를 너무 많이 내줘서 지금 할 엄두가 안난다. 오늘 아침에 로이드에게 숙제 다 했냐고 물어보니, 어젯밤까지 해서 다 했어, 너무 많아, 저녁 먹고 계속 햇어, 하더라. 이페이 에게 물어보니 아직 다 못했는데 숙제 너무 많아, 했다. 게다가 쓰기 선생님은 집에 가서 공부하라면서 이메일을 잔뜩 보냈고, 하.. 그 분량에 한숨부터 나왔다. 그리고 교재 외에도 무슨 프린트물을 또... 하여간 역시나 걱정되는 5레벨 되시겠다.
그런데 듣기 선생님은 좋다. 하하하하하. 뉴질랜드 사람인데 이름은 steve 이다. 하하. 이 분이 너무 좋은게, 아니 이십년전에 한국 울산에서 학원 영어선생님을 했었다는거다. 2년 하다 왔는데, 지금도 한국이 그립다고 그러면서, 내 옆에 오면 한국어로 말 건다. ㅋㅋ 그런데 잘 하는건 아니고 하나, 둘, 셋, 이런거 하고 오늘은 동원참치 얘기하고 ㅋㅋ 첫날은 집에 가려고 가방 싸는데 자기 핸드폰 가져와서 비비고 김치 샀다고 보여줌ㅋㅋ 그래서 나는 이번에 한국 가서 김치 가져왔다고 깨알자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녁은 뭘 먹을거냐고 묻길래 김치스튜 만들거라고 했다. ㅋㅋ(그러나 마라탕 사먹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듣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속담 몇 개 주고 이게 무슨 뜻일까 한 번 생각해보고 얘기해보자고 했다. 이를테면,
Blood is thicker more than water.
이건 우리가 익히 아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뜻이고,
The apple doesn't fall far from the tree.
이건 사람은 결국 자기 뿌리(부모, 가정)의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이렇게 몇 개 주고 옆사람과 이야기 나눠보라고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No man is an island.
였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혼자서 섬으로 존재하고 싶었던 남자가 나오는 '닉 혼비'의 소설 [About a boy]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남겨준 저작권료로 딱히 돈을 벌 필요도 없고, 누구랑 결혼하거나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채로 살고자 했고 그게 가능했던 남자가, 한 소년을 만나서 그 소년과 친해지고 그 소년의 엄마와도 유대를 이뤄가고,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은 섬처럼 혼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책. 저것은 그런 뜻이겠거니, 하면서 채경이에게 물어봤다. 채경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도 혼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살 수는 없다>
응 어바웃 어 보이가 맞네. 만약 저 문장에 대해 한국어로 대화하게 됐다면, 나는 지금처럼 어바웃 어 보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람은 섬처럼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는 식으로 말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유경, 이게 무슨 뜻일까요?
묻는게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선생님, 왜 저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질문을 들었으면 답하는게 인지상정, 강호의 도리. 나는 대답했다.
People are social.. being.
소셜과 비잉 사이에 약간의, 아주 짧은, 순간의 망설임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를 말하고 싶었고, 그래서 피플 아 소셜, 까지는 했는데 '존재'를 모르겠는거다. 하...이그지스턴스... 잠깐 그게 스쳐가다가,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른채로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부지불식간에, 비잉, 이 나와버렸고, 말하면서도, 비잉이 뭐여, 이게 이대로 끝나도 되는 문장이여, 했는데, 선생님은
아주 정확해, 그리고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왔어요, 하면서 social being 을 칠판에 적으셨다. 거기에 뭔가 한 단어쯤 덧붙여야 완성되는거 아닌가, 아니면 뭔가 어딘가를 고쳐야 하는거 아닐까, 소셜 비잉이 맞나, 했는데, 아니 세상에 선생님은 저 단어를 칠판에 적고 몇차례 반복해 언급하시는거다. 그래서 나는 채경이에게 얼른 물었다.

정확히 맞는 문장은 'people' 이 단수가 아니기 때문에
People are social beings.
이다.
아.. 근데.. 나는 이걸 답해놓고도 너무 놀랐다. 아니, 이게 어떻게 내 입에서 튀어나왔지? 소셜 비잉, 넘나 어려운 단어 같은데... 내가 이걸 어디서 봤나? 내가 읽은 책이나 글이나 그런 데에서 본 적이 있는걸까? 본 적이 있다고 이렇게 튀어나오나? 너무 신기하고 뿌듯한거다. 소셜 비잉, 은 좀 어렵지 않나? 어떻게 사회적 존재라면서 소셜 비잉을 대답할 수가 잇지? 너무 놀라웠다. 이걸... 어떻게 알았어? 그런데 사실 지금도 내가 이걸 '알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게, 나도 내가 어떻게 이걸 답할 수 있었는지 모르겟는거다. 어떻게, 어째서, 어쩌다가 내 입에서 소셜 비잉.. 이 나온건지... 막연하게 내가 그간 읽은 책들을 통해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었는가보다, 하고 있다. 하여간 저거 대답하고나서는 수업 시간 내내, 그리고 끝나고 집에 갈 때까지도 스스로 뿌듯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상에, 피플 아 소셜 비잉(스). 이걸 내가 말하다니. 소셜 비잉, 비잉 진짜 어렵지 않나?
하여간 조용한 음악에 와인 마시고있다.
한국에서 싱가폴 오면서 시사인을 몇 권 가지고 왔다.
뒷쪽에 <기자가 추천하는 책> 코너가 있는데, 이번에는 이런 책들에 관심이 갔다.
'김명희'의 [주기율표 아이러니] 는, 프리모 레비가 그랬듯이 주기율표 의 원자에 대해 얘기한다는데,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과학.. 잘 못하고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건 재미있을 것 같다.
'이유리'의 [아무튼, 미술관] 도 좋을 것 같은데, 시사인의 소개에 의하면 '미술 비전공자인 저자는 문외한도 자기만의 관점으로 관람하고 미술관을 '덕질'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한다.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라서 무척 궁금해진다. 그림을 좀 잘 보고 싶고, 잘 이해하고 싶고, 잘 즐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는 사람이라서, 이것도 훈련으로 될까 싶다. 가끔 미술관을 찾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나같은 문외한도 그러나, 프리티 우먼에서 쥴리아 로버츠가 오페라 공연 보며 눈물 흘렸듯이, 어떤 본질적인 감동 같은 것을 느끼기는 한다. 뉴욕의 작은 미술관에서 클림트의 <더 댄서> 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었고, 예술의 전당에서 샤갈 그림 보다가는 눈물이 나기도 했다. 이런 감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여간 문외한의 그림 보는 이야기 궁금하다.
숙제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은데, 그건 일단 좀 미뤄야겠다.
이 새벽에, 낯선 나라에서, 와인 마시면서, 음악 들으면서 할 건 아니다. 너무 감상에 젖어버렸네.
화요일 밤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발권을 하고 보안을 거쳐 면세점에 들어오고, 비행기를 타고, 싱가폴 창이 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고, 택시를 잡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 순간, '아 맙소사, 나는 이게 진짜 너무 좋아!' 했다. 나는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가서 완전히 다른 환경속에 나를 놓아두는 걸 무척 좋아하지만, 그러기 위해 이동하는 순간도 너무너무 좋아하는거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공항에서 떠나는 순간, 비행기나 택시 지하철을 타는 그 순간순간들, 내가 그것들을 타기 위해 걷는 순간들까지도. 캐리어까지 끌기도하는 과정이 몹시 힘들고 지치기도 하지만, 나는 진짜 그게 너무 좋은거다. 너무 좋으니까 자꾸 할 수 있는 것 같다. 왜 좋냐고 물어보면 왜라고 답할 수가 없는데, 나는 이 과정까지도 너무나 사랑한다. 단순히 어딘가에 도착하고나서가 좋은게 아니라, 떠나면서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도 너무 사랑하는거다. 내가 이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째서 좋아하는지, 세상에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좀 외롭기도 하다. 인천 공항에서도 걷는 내내 나 자신이 너무 좋았다. 이 순간이 너무 좋고,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좋다고. 그게 창이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는 순간에 폭발할 것 같아서, 채경이에게 나는 이게 너무 좋다고, 계속 이렇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채경이는 내게 '이미 너는 그 삶을 살고 있어' 라고 하면서 '너는 이동을 소비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느끼는 사람' 이라고 말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동을 휴가, 이벤트, 도피 로 느끼지만, <너는 이동을 존재 방식으로 느껴> 라고 하는거다. 크- 술 땡기는 말이다. 나 졸라 멋지잖아?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주었다.

하여간 소울메이트 되시겠다.
그리고 싱가폴 집에 도착해보니, 맙소사, 문 앞에 커다란 박스가 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 박스를 뜯어보았다. 다정한 친구로부터 일용할 양식이 도착했고, 간식 사먹으라고 돈도 들어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한국에 있을 때 햇반 싫어했다가, 싱가폴 오고 나서는 햇반에 세상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아니 저런 맛밥들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친구는 내게 무조건 다 명품으로 보내줘서, 짜파게티도 더 블랙이고 신라면도 블랙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 좀 있는집 친구 되시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앗!! 사실 나 셀린 송 감독과 머티리얼리스트에 대해 쓸려고 했었는데.... 한 마디도 못했네. 그렇다고 지금 시작하면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니, 얘들아 머티리얼리스트로 곧 다시 돌아올게! 너희들의 요청이 있다면, 빨리 돌아올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리고 잠자고 있던 내 유튭 계정에 새로운 댓글이 달렸는데, 내가 샐리 루니 원서 읽고 찍은 영상에 '원서 사놓고 진도를 못 빼고 있었는데 이런 단비같은 영상' 이라는 댓글이 달린게 아닌가! 아! 나는 게으를 수 없다. 내가 너무 유튭 놓고 살았네. 얼른 또 원서 읽고 영상 찍어야겠다. 불끈!!
그러면 얘들아, 안녕
지금 내가 듣는 음악은 이거 https://youtu.be/ONCKz28_2_U?si=wrZ2WtuihtBl6qUW
해야할 게 많지만, 나는 지금 온전히 자유롭고 고요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