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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평점 :
편지하면? 제일 안 좋은 추억으로 무조건 군대가 떠오른다. 훈련소에 입소해서부터 볼펜과 편지지를 던져주고는 다짜고짜 부모님에 편지를 쓰라는 황당무개한 강요를 시작으로, 자대배치를 받아서 정기적으로 편지쓰는 행사가 나를 참 막막하게 괴롭혔다. 대부분 첫 편지는 감회와 우수에 젖어 부모님께 눈물을 편지를 쓰기도 한다마는, 나는 이게 영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좋은 곳에 간 것도 아니고, 그렇게도 가기 싫었던 군대에 끌려가서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부모님께 구구절절 받들어 올릴 어떤 말씀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라고는 하니까, 나의 상투적 문장력을 발휘하여 한 장 씩은 꼬박 채워 보내곤 했다. 다른 선임병의 편지까지도 대필한 기억이 난다. 어찌나 상투적으로 잘 썼는지, 대필했던 선임병의 부모님께서 그 편지를 보시고는 처음으로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다나, 그런 풍문도 전해진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좋지 못한 추억이긴 하지만, 이때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을 부모님께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편지하면? 더욱 쓰라린 추억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교회 학생회 대표로 음악 경연대회에 출전해서 독창으로 입상한 적이 있었더랬다. 거기서 나를 알아보고(?) 친구의 친구에게서 편지가, 연서가 날아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학생에서의 연서. 한 달 동안 답장을 쓸까 말까, 쓰면 어떻게 써야 할까? 우린 아직 서로 잘 모르지 않으냐, 아직은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 에서부터 핑크빛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오만가지 상상과 현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답장을 썼다 지웠다, 다시 썼다 찢었다를 반복했다. 결국 한 달이 넘도록 답장 한 장을 못 썼더랬다. 그 여학생은 뭐하고 살까? 문득 궁금해진다. 내 답장을 심히 기다렸을 것인데! 쩝!
살면서 편지를 쓴 기억이 많지 않다. 이른 바 편지는 구시대적인 것이어서, 90년대에 들면서부터는 편지가 가지는 다양한 역할들이 다른 신시대적인 것으로 대체되었고, 이제는 아예 이 수고로운 글씨쓰기는 사라져 버린 듯 하다.
편지를 대체한 것은 흔히 이메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봐도 이메일은 그 대체물이 되지 못한다. 이전의 편지가 담았던 수만가지 중에 이메일은 단순히 스팸 비스무리한 것만 가져왔을 뿐이다. 오히려 이 편지를 거반 대체하고 있는 것은 핸드폰과 문자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가까운 이들과 끊임없이 주고 받는 문자메시지는 하루 한 통의 편지의 양과 비견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편지를 완벽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고미숙 선생의 인터뷰를 어느 동영상을 통해 우연찮게 본 적이 있었다. 옛날 옛적(?) 연애편지 얘기였다. 사랑타령만 하면 제대로된 연애편지가 아니라나, 거기엔 자신의 비전과 능력 등이 총체적으로 담기도록 연애편지를 써야했고, 연애편지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말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는 그런 얘기였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편지가 담아내었던 것은 이런 종류, 그러니까 지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길기도 하고 깊기도 한, 하고 싶었으나 얼굴 대면하고 말하지 못했던 말들을 편지는 고스란히 담아내 주었다.
편지는 일종의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다. 누군가를 대면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을 때에 편지는 그 거리를 넘어 의사소통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편지의 거리가 편지의 속성을 다양하게 만들어 주었던 듯 하다. 얼굴 대면하고는 말하지 못했던, 닭살스런 말에서부터, 뼈아픈 말 등등, 못했던 말들, 자세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 한 이불 속에서 살면서도 뭔가 진중히 할 이야기가 있으면 편지를 쓰기도 하잖은가? 아무튼 편지가 가지는 이런 종류의 장점들을, 이 편지가 잊혀져 가는 지금 그 대체물들이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비, 그들이 자기 자신들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썼다. 그것들을 엮은 것이 『아버지의 편지』다. 정민 선생이 그간 꾸준히 해왔던 고전 산문의 대중화 작업의 최근작 중 하나다. 그간의 작업들에 매우 만족하고 있던 차에, 이번 책에서 느끼는 만족은 좀더 색다른 종류의 것이다. 편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날로 갹퍅해지는 세상 속에서 사라져가는 이런 편지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보편적인 아버지들의 엄격함과 자상함에서부터 팔불출스러운 우스움까지, 다채로움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편지에 대한 나의 추억은 위에서 따분하게 읊었기에 각설하고, 이 책이 담고 있는 아버지들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편지는 어려서 아버님을 여읜 나에겐 참 부럽고 안타깝게 하는 것들이다. 아들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쓰고 조언하며, 정성스레 편지를 써내려간 조선시대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내게도 있었다면, 아마도 내 삶은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상실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이 책에서의 아버지들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들에게, 혹은 자식에게 선경험자로서의 조언과 스승으로서의 훈계 등의 역할을 오늘날의 아버지가 감당하고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입시공부에 열중하기 위해 조용히 해야할 뿐,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존재일 뿐이고, 그 공부를 꾸준히 안정적으로 지속하게 만들어줄 돈 찍어내는 기계여야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의 가족의 문제, 아버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오늘날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살기 위해 살아왔고, 자식들 키우기 위해 살아왔던 이 아버지들, 세상과의 경쟁에서 남과 싸워 이겨야할 강한 자식들로 키우기 위해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저 기계적 역할만을 해올 뿐이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버지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가족, 아버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반이 갹퍅해 지는 현실에서 느긋한 편지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 이러이러해라, 1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절대로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공부해라 등등, 이딴 소리 적어보내려고 편지를 쓴다면 미친짓이 아닐까? 여하튼 오늘날의 사회에서 편지는 괴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수도 없이 날아다니는 그 문자메시지 속에는 다만 공허하고 일회적인 것 뿐이다. 아들에 대한, 연인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친구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깊고 넓은 이야기들이 사라져버리고, 일회적이고 상투적인 것들만 남아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짧막한 대화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쯤해서는 예전의 우정국이 사라지고 우체국이 된 것이 이해되기도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를 본받아 우리도 다시 이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좋아하는 후배와 크리스마스 겸 연말연시에 카드보내기를 해보자고 몇 차례 보낸적이 있었더랬다. 그것도 잊혀져가는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생일을 맞아서 얼마전에 후배놈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손수 적은 카드도 받아보았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는 요즘, 괜히 막막하고 따분하고 냉냉한 세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지 않을까? 모든 잊혀져 가는 것들을 되살릴 필요도 능력도 없겠지만, 이런 편지쓰기 만큼만은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쓰다보니 책 얘기를 많이 못했다. 내가 이 책에서 또한 주목한 것은 이래저래 웃긴 대목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은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들의 엄중함과 자야로움, 그리고 귀엽기까지한 모습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몇 대목만 정리해 보자.
"동접 중에 불행히 놀이로 사람을 꾀어 그르쳐서 무리를 어그러뜨리는 자가 있더라도, 절대 그들 무리에 빠져서 휩쓸려 한통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31쪽)
이황이 아들 준에게 보낸 답장의 한 대목이다.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말라는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구나 하기도 하면서, 요즘 유난히 설레발치고 다니는 엄마들의 모습까지는 아닌 듯 싶어진다. 친구 아빠의 직장에서부터, 그 집 살림살이까지 다 따져서 놀애 안 놀애 정해지는 요즘의 것과는 아무래도 다른 종류의 친구사귐에 대한 조언일 것이다.
"조정의 잘잘못은 비록 말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깊이 생각해서 매번 어쩔 수 없는 뒤에라야 말하도록 해라. … 어찌 입에서 나가기만 하면 문득 많은 세상일에 얽혀들면서도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핑계대는 게냐?"(149쪽)
박세당의 편지다. 아들이 앞뒤 안 재고 떠들고 다며 별별 문제들을 많이 일으켰나 보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말조심하고 훈계다. 이 말조심을 요즘의 위정자들에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 뿐일까?
"몹시 기다리던 차에 일을 맡긴 하인이 왔다. 편지 보고서 새아기가 무사히 해산한 것을 알았다. 또 사내아이를 낳았다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나는 이미 늙었는데 네 형들이 잇달아 요절하는 화를 당하고 보니, 자손이 고단한 것을 늘 상심하고 아파했었다. 이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만금을 얻은 것만 같구나. 새로 낳은 아이 이름은 '다손(多孫)'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157쪽)
박세당의 또다른 편지다. 할아버지가 된 기쁨이 가득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들이 그토록 말조심 하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세상을 먼저 떴다. 그런 안타까움에서 일까? 귀하게 얻은 손자의 이름을 다손이라고 지어준다.
"조밥과 찬 짠지를 먹지만 평소처럼 편안하니, 너희는 절대로 내 걱정은 하지 마라."(233쪽)
"뱃속에 횟병 증세가 몹시 고약하여 통증을 없애고 싶구나. 예전에 기록을 보니 후추를 꿀에 버무려 알약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구나. 대두도 수십 알쯤 가져왔으면 좋겠다. 내 건강은 신경 쓸 것 없다."(238쪽)
박제가의 편지다. 이 대목들을 읽다가 박장대소했다. 무득 얼마전의 CF가 떠올랐다. "아들아~"로 시작해서, "아무것도 필요없다"하는 어떤 노부부가 나와서 웃음을 주었던 모 기업의 CF 말이다. 그 CF 시리즈를 보는 듯하다. 말하자면 "아들아~" CF의 조선시대 버전인 셈이다. 조밥과찬 짠지를 먹지만 괜찮다, 걱정마라, 하면 아들이 괜찮구나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하겠는가? 애처롭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박지원의 늙으막 시절의 편지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해보면, 박지원은 애교덩어리, 귀여움 덩어리가 아닐까 싶다.
"재선(在先) 박제가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시필(詩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 마땅히 요 며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간이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니, 어찌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에서 내놓겠느냐? 그렇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이를 빌려 오도록 해라."(196~7쪽)
꼴 같지 않고 무도한 인간이 박제가? 절친했던 박제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렇다면서도 아들에게 그래도 빌려 오도록 하라는 건 또 뭔지! 게다가 호랑이 같이 생긴 박지원이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고 한 대목에서는 도무지 이 사람을 감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박지원도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가 됐다는 소식에 기뻐서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여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잖은가? 손자의 삼칠일을 맞아서 "2백여 명의 관속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주"더란다. 게다가 "나도 경술년에 순조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니라"며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손자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럴까 이해도 하지만, 다음 대목에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전후해서 보낸 소고기볶음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찬거리로 했느냐? 어째서 한 번도 좋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느냐?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나는 육포나 장조림 등의 반찬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추장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니, 맛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다오."(207쪽)
박지원에게는 요즘 나오는 휴대폰을 하나 사줘야 할 성 싶다. 요즘 애들처럼 수시로 문자를 날리면서 왜 내 문자 씹냐고 한바탕 야단을 칠 것만 같다. 박지원이 손수 요리를 해서 자식들을 챙기는 모습도 이채롭지만, 보낸 음식을 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모습은 아이같기만 해서 참 즐겁다.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박지원은 요즘의 이모티콘의 원조격이란 사실이다. 번역문에서 "껄껄"로 표현했고, 원문은 "好笑好笑"로 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ㅎㅎ" 나 "ㅋㅋ"인 셈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 핸드폰 세대하고 제대로 통하지 싶다.
이 외에도 많은 대목들에서 재미와 감동을 함께 느낀다. 공부 방법이나 훈계 등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곳곳에 감춰진 이런 감성어린 아버지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따분할 것만 같았던 조선시대 아버지들의 편지가, 이렇게 즐겁고 기쁜 감동을 줄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이제부터 우리도 이를 본받아서 아버지에게, 혹은 아들에게, 때론 부인에게, 형제자매에게, 그도 아니면, 아무에게나, 편지를 써보자. 삶과 사회가 한층 밝아지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나 손해 볼 것은 없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