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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예수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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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 전체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좋게 말해 비판이지, 일부에선 '개독교'니 '먹사'니 하면서 기독교 혐오의 감정을 적대적으로 내비치며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가득하다. 이런 비판 또한 비난에 대해 한국의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들의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예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엎친 데 덮친 격"적 인식이다. 그러니까 속되게 말하면,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안 되려다 보니 별의별 기독교 관련 사고들이 터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의석 군 사건이나, 사학법 개정, 대형교회 비리와 부정, 이랜드 사태와 최근의 아프간 피랍자 사건 등 교인들도 줄어드는 마당에 안 좋은 일들만 계속 터지고 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상황의 해법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가 되겠다.

또 하나로는 "올 것이 왔다."라는 인식이다.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기독교 내에서 그간의 상황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일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법으로는 "이제야 말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근원적 해결을 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라는 절실한 태도로 현 상황을 당면하는 것이 되겠다.

짐작하겠지만, 전자의 태도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왕 속담을 쓴 김에, 이 태도또한 속담에 빗대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가 되겠다. 지금 보니, 말을 잘못 한 것같다. 빗댄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되버렸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면,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간 열심히 "구렁이 담"을 수십차례 넘겨 주었으니, 이제는 '가래로' 아니 대형 포크레인을 돈 주고 불러야할 상황이 아닌가?

얼추 조짐을 보니 이번에도 구렁이, 아니 이젠 100년 묵은 능구렁이가 되서 빌딩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같다. 이제는 이무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부라퀴가 맞겠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성찰해서 기독교가 그야말로 진정한 예수 안에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역시 나는 서론이 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건 그렇다고 치부하더라도, 한국 기독교는 이런 비판에 대해 서론만 길게 나불되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에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이 기독교 관련 비판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나 또한 이런 경향에 관심을 가지고 속속 출간되는 이런 비판 서적들을 구해 읽고 있는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다. 이 책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후로 준비해 둔 것은 슬라보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미셸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 데이비슨 뢰어의 『아메리카, 파시즘, 하느님』등이다.

이와 함께 한국 기독교 비판에 중점을 둔 책으로 얼마전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를 읽었다. 이 책도 추후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간략히 언급하면,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에 대해 추적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아울러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소유한 풀러신학대 총장 리처드 마우의 저서 『무례한 기독교』도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전직 목사였던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다. 저자 류상태는 대광고 강의석 군 사건 당시 대광고 교목실장으로 재직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 소속 목사였다. 그런 그가 강의석 군 사건을 계기로 목사직을 반납하고 기독교 비판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두 번째 결과물이 이 책 『당신들의 예수』다.

저자 류상태는 목사직을 반납하고 나와서 먼저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를 출간했다. 목사직을 그만두고 행상을 하면서 펴낸 것이다. 이 책을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가 목사직을 그만둔 이후 '기독교 의식 개혁운동'에 나선 것을 볼 때 아직은 기독교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번의 책 『당신들의 예수』는 더이상 자성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다. 분노는 한층 높아졌고, 이제 그는 기독교를 혐오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만드는 책이다.

"깨달음을 교리라는 그릇에 담아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기독교는 스스로 생동성을 죽이고 자신의 종교를 박제화하고 말았다.", "존중해야 할 전통 문화와 다른 신념 체계는 가차 없이 파괴하는 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공격적인 전도 행태와 안하무인식 문화 파괴 행태로 우리 사회와 이웃 종교인들께 큰 결례를 저질러왔습니다." 등의 그의 언급과 심지어는 "기독교인들이여, 성경을 찢어라", "예수님, 그만 은퇴하십시오-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주십시오"라는 언설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운영한다는 '불거토피아'에 들어가보면 그가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안티기독교를 표방하는 넷티즌들과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현직 목사였던 사람이 한 명의 제자로 인해 목사직을 버린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무엇이 그를 지금의 이르게 했던 것일까는 더욱 알기 어렵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분노의 글'을 쓰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과연 기독교를 혐오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보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책의 제목과 같이 "당신들의 예수"에 대한 혐오이다. 그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왜곡하고 제멋대로의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예수, 그가 말하는 진정한 예수는 어떠한가? "영혼이 존재한다면, 다음 세계와의 연결 문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과 윤회사상을 참고하라고 말하고 싶다. 연기설과 윤회사상이 설명하는 전생과 내세의 가능성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론이나 부활론보다 훨씬 정교하고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언급을 들으면 과연 이 사람이 전직 목사였던 사람이 맞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 책 전체에 흐르는 맥락은 기독교의 배타적 폭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한국의 기독교는 그러한 배타성을 버리고 다원화를 인정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각기 다르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견해는 아무리 나같은 날라리 기독교인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파격적인 것이다. 그의 한국 기독교 비판은 구구절절이 옳은 것이지만, 그의 파격적 다원화 주장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독교가 지금의 배타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차원이지 그들과의 통합을 말하기에는 기독교 자체의 본질이 그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점에서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시민 교양이 그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높다.

저자 류상태가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 지금의 류상태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그는 아직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비판은 그러한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가슴을 쥐어뜯는 외침인 것이다. 2000년 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듯이 2000년 후 류상태의 외로운 외침을 그에 견주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다시금 사울로 개종한 것처럼 보여지지는 않는다.

저자 류상태의 이 외침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그의 조언을 오늘날 한국 기독교 신자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교우님이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거든,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 또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고백과 충돌하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기독교 교리에는 부합되지만 이 두 고백과 충돌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는 교회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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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기독교 -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리처드 마우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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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 한국의 기독교는 코너에 몰렸다. 언론에 의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대형교회들의 비리가 폭로된 데다가, 아프간에서의 피랍사건까지, 이른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한국 기독교는 현재 비난의 ‘윤간(輪姦)’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판을 넘어 비난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난이라는 행위가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비난의 당위가 인정될 때, 우리는 충분히 비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최근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정확히 말하자면 주류 한국 기독교 지도층에 대한 비난은 얼핏 그 당위가 인정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어디까지는 감내해야할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많은 네티즌들(엄밀히 그들을 네티즌, 즉 인터넷 상의 시민이라고 부르기 민망하기조차 한)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적 비난의 세례를 받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하다. 비판과 비난을 넘어, 앞서 표현한바 ‘윤간’을 당하고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소리다.

  우리 사회에서 ‘윤간’은 어떤 경우에라도 긍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윤간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정되어진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현상들에서 이런 ‘윤간’적 막심(莫甚)함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동정적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최근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들이 그 거대한 내막을 들어낸 것도 있겠지만, 이는 길고도 오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의 잘못들이 한국 사회 일반에 뿌리 깊게 각인된 것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현대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의 산실인 미국의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의 저서 『Uncommon Decency』(InterVarsity Press, 1992.)가 최근 번역되어 『무례한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는 그간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여실히 인식한 산물이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서 그간 부단히도 ‘무례’했다는 인식이 이 책의 번역을 촉진한 것은 아닐까? 고려신학대학원 신원하 교수는 추천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한국 교회에는 마우가 요구하는 기독교적 교양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왜 ‘요구’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와는 조금 다른 맥락 가운데에 적용해 볼 수도 있으리라. 변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이 사회에 대해 '무례'했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무례함을 기독교 일반으로 싸잡아 이야기 하지만, 그 중심에는 ‘개신교(改新敎)’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무례하게 느끼는 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천주교와 개신교 중에서 개신교가 한 역할이 훨씬 크다는 소리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의 발자취를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왜 한국 개신교가 그렇게 무례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천주교에 의해서였다. 잘 알다시피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로 인해 잠시 쇠퇴하다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이번엔 개신교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이 침투의 대다수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당시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가 작용하게 되면서 이전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는 개신교가 급속히 퍼질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것과 함께 천주교와는 다른, 아니 여타의 종교와는 다른 수법이 개신교에는 있었는데, 그것은 이 개신교가 “찾아가는 종교”였다는 점이다. 천주교의 성당과 불교의 사찰과는 달리 개신교의 교회당은 산골짝 마을 곳곳까지 찾아간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빨간불의 십자가는 이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신(新)포교전략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전략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급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보편 종교로서의 이러한 포교 전략을 탓할 바는 아니지만, 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함께 역설적이지만 ‘종교적 무례함’이라는 두 양상으로 찾아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 모토와 함께 세속화라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종교의 세속화는 질적 성장보다는 양적 성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매우 상업적이고 기업적인 행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밑도 끝도 없는 “안 믿으면 지옥불”식의 협박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한국의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의 중추자(中樞者) 무당들의 신(神) 들린 모습들까지 개신교의 종교 행태에서 보게 됨으로써 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비루함에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울며불며, 두 팔을 휘저어대며,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는 그들의 모습에 일종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행태들을 초심자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것인데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죄 없는 어린양들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외침은 그 자체로 비호감일 따름이다.

  “찾아가는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복음주의의 목표의식은, 그 연원을 신약 성경에 두고 있다. “땅 끝까지 이러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기독교는 선교를 그 절대적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기독교(基督敎), 즉 그리스도교(敎)로서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의 행렬을 이루게 한다. 산과 강도 그들을 막지는 못한다. 이것을 우리는 ‘세속화(世俗化)’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세속화라는 어휘가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다소간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그 복음을 들고 세상 곳곳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찾아가는 종교” 전략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문제는 포교 전략적 ‘세속화’ 뿐만이 아니라, 부정적 함의로서의 ‘세속화’도 함께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세상 만방이 주의 이름을 알게 되는 그날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고 여기는 이 포교자(布敎者)들은, 그 ‘끝날’에 자신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 확실한 관계로 잃었던 양을 다시금 찾아오는 것보다는 단지 ‘예수’란 존재가 있었다는 단순한 알림만으로 그들의 선교를 지속해 왔다. 그들이 믿건 안 믿건 크게 개의(介意)치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가지는 거대한 오류의 원인자(原因子)가 된 것이다.

  이들에게 복음의 알림은 시급한 문제였을까? 이 기독교 전도자들은 너무 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흔히들 말하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포교전략을 구사해 왔던 것이다. 여기에 비기독교인, 즉 그들의 포교대상자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리처드 마우가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가 영향력 있게 전파되게 하자면 성도들은 타인을 향해 일반적인 정중함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닮은 정중함을 지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도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이런 정중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무례한 기독교”였던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런 말을 했다. “恭而無禮則勞(공이무례즉노), 愼而無禮則諰(신이무례즉시), 勇而無禮則亂(용이무례즉란), 直而無禮則絞(직이무례즉교).” 곧,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조심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혼란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공손해 보이고, 조심하는 것처럼 보이고, 용감한 것처럼 보이며, 때론 강직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예의도 없었다. 그러니 괜한 헛수고만 한 것이고, 세상이 두렵게 여겨지고, 혼란스럽기만 하고, 또 너무 급한 것이 아닌가? 몇 천 년 전의 공자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들에 예견하듯이 이런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해법으로서 나는 이 책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가 충분한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마우가 이 책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세상과 기독교인이 공존하기 위해서, 즉 그 둘이 다른 상황가운데서 분리되지 않고 세상가운데서 하나가 되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품의와 신앙을 가지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보다 효과적인 복음전파의 한 방식으로서 대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있다. 그 적절한 해결책으로서 “기독교적 시민교양”, 즉 ‘Uncommon Decency’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원하 교수의 소개를 들어보자.




  “현대는 문화 전쟁 시대라고 할 만큼 각종 문화와 사조가 공존하면서 때로 충돌하고 부침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신념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할 ‘무엇’(what)에 대해서보다는 ‘어떻게’(how) 전달해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마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중하고 친절하며 관용하는 태도 즉 기독교적 교양과 예절(Christian Civility)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점점 사나워지고 전투적이 되어 가는 사회에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비일상적인 정중함”(Uncommon Decency)을 갖추고 일반 시민들을 대하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그간의 복음주의의 대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변화된 현대사회에서의 전략적 수정, 즉 포교의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해법인 것이다. 이러한 마우의 주장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불만적일 수도 있다. 그간의 자신들의 ‘헌신적’ 선교가 무의미한 것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우는 여러 장을 할애(割愛)하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해 해명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략적 수정에 대한 주장은 일면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경청해야할 시대적 필요성과 부합한다. 21세기 세계는 변화했고, 다원화 사회가 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해야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서로 다른 것은 폭력적으로 자기화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지금은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 그런 폭력적 자기화에 대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고 기독교적 존재 목적인 복음 자체에 대한 변화를 마우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신용하 교수의 말처럼 그들의 진리를 간직한 채, 그 진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하느냐, 즉 방법적 측면에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기독교인들에게 타당한 방법이다. 또한 그들의 포교대상인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소식임에 분명하다. 어떤 종교에 대한 혐오감은 현대를 살아가는 무신론적 인간들에게는 불행이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불교건 천주교건 개신교이건 이슬람이건, 현대인들에게 이들은 하나의 도움의 목소리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교화시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어떤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시될 때, 교화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비판적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기독교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이것은 어느 상황에서는 항상 열기를 띄기 마련이다. 그런데, 비기독교인들과는 어느 정도 대화가 되지만, 기독교인들과는 대화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할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진리(=복음)가 곧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합리화 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진리에 대한 비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타협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마우는 “불신자에게 배우”라고 주장한다. “주님은 때때로 이상한 교사들을 보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한 번 공자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三人行(삼인행), 必有我師焉(필유아사언). 擇其善者而從之(댁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기불선자이개지).” 곧,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論語』「述而」편의 이야기인데, 이는 마우의 조언과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누구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우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무신론적 사상가 니체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당당히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사성어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당연스러운 교훈마저도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마우의 주장이 특이한 것이 아니면서도 놀라운 것은 이런 한국 기독교의 기초적 태도의 문제를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바로 마우가 인용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의 자세다.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타인의]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없다면 그분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요구되는 만큼 다른 이들과 차별성 있게 살아간다면,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의문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의문들을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해 힌두교가 제공하는 대답이 아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게 하며, 기꺼이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모든 의문에 대해 흡족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는 모범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에, 세상의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받고 존경받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그렇지는 않더라도,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향기’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모범적 교양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건 기독교인들이 모범적일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간혹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사회에서 욕먹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마우의 이런 지적이 너무나도 소름끼칠 정도이기까지 하다.

  리처드 마우가 펼치는 ‘시민교양’의 논리에서 다소간 나와는 그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시각이다. 그는 ‘정당한 전쟁’론을 옹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적 원리에 근거할 때 이는 타당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내 견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적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나, 그리고 성서에 입각해서나 자명한 논리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우의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교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건대 그 기본적인 요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친절과 온유함을 제쳐놓을 권리가 없다”는 언급은 우리 모두가 경청해야만 하겠다.

  마지막으로 마우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대에 공적인 존재로서 사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자질”을 언급한다. ‘융통성’을 가질 것, ‘잠정적인 입장’에 설 것, ‘겸손함’의 태도, ‘경외감’, ‘소박함’ 등이 그것이다. 이 5가지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적 삶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을 마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마우는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마우가 언급한 저 5가지 원칙이 얼마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마우의 이 처방이 한국 기독교에 잘 먹혀들기 힘들어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우의 이런 지적들은 한국 기독교에 적합한 ‘양약(良藥)’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될 때에 기독교 복음주의는 보다 합리적 보수주의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수장격인 리처드 마우의 지적을 한국 보수주의의 절대 기반인 한국 기독교가 자기 것으로 실천할 때, 한국 기독교는 존경받을 수 있고, 기독교의 존재목적을 충실히 이행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욕먹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아파한다. 그러나 먹을 욕은 먹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 한국 기독교가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변화의 행동강령이 이 책 『무례한 기독교』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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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말에 큰 울림이 남네요. 최근 기독교에 대한 비난의 세례가 일말의 예의없이(?) 자행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었는데, 이 책이 문제의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군요. 다만 멜기세덱님의 견해처럼, '정당한 전쟁'이란 허상을 찬성하는데에는 마뜩치 않지만 말이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멜기세덱 2007-08-17 17:28   좋아요 0 | URL
최근 한국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초례한 한국기독교의 '예의 없음'을 지적한 것인데요. 그 점에서 있어서 리처드 마우의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바람결님과는 첨인 것 같네요. 반갑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Jade 2007-08-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은 항상 리뷰를 너무 열심히 쓰셔서 읽기가 힘들어요 ㅎㅎ 그래도 항상 읽고나면 생각을 많이 한다는...멜기님, 밤새 책읽고 글만 쓰시나봐 ㅎㅎ 책 말고 연애를..ㅎㅎ

멜기세덱 2007-08-17 17:30   좋아요 0 | URL
책과 하는 연애도 영~ 시덥잖네요...ㅎㅎ 리뷰 쓰기도 일주일에 하나 쓸까 말까 하구요....ㅎㅎ 저도 말이죠, 다른 걸 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답니다...
ㅠㅠ;;

웽스북스 2007-09-0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 리뷰(당신들의 예수)를 읽으며 이 책을 추천해드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언급되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스크롤을 내리니 리뷰까지 있네요 ㅎㅎ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과 대화가 더 잘된다는 말에 저도 공감을 해요- 사실 내가 너무 쿨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잠깐 이 모드 벗어났는데, 결국 본성은 어쩔 수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요
아프간 사건을 겪으며 답답한 마음에 다시 집어든 책이었어요- 작년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와닿는 부분이 더 많았고요- 초기미국 선교사 쪽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여 대학시절 은사님께서 쓰신 '초기미국 선교사 연구'라는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절판이네요 ㅠ
멜기세덱님 내공 따라가려면 아직 먼 길인 것 같지만 차근차근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HOW TO READ 성경 How To Read 시리즈
리처드 할로웨이 지음, 주원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성경, 흔히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즉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라고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맹점'은 있는 듯 하다. '셀러'라는 의미에서의 성경의 존재는 르네상스 시기, 즉 인쇄술이 발달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서구권에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당대 서구지역의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의 유일무이의 경전인 성경이 일반 대중(여기서는 일반 기독교도들)들에게 읽히는 책, 그럼으로써 팔리는 책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일단 '서구'라는 지역적 제한이 붙어야만 한다. 이런 기독교가 서구의 산업적 경제적, 그리고 무력적 발달과 함께 비서구 지역에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성경도 함께 그 소비 구역을 넓혀가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 세계 인구의 1/3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스테디셀러'는 전 세계 인구 1/3에 의해 달성된 것이 된다.

이 1/3의 사람들을 가만히 놓고 보면, 대다수 서구인과 일부 아시아인이 그 대부분을 구성한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경제력이란 무기가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 인쇄술의 발달과 그 산물들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 즉 경제력이 다른 어느 지역(비기독교인들의 지역) 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성경을 무한히 소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라는 월계관은 거반 자작극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내가 책을 썼는데, 우리 가족과 친인척들과 사돈에 팔촌들이 가산을 털어 수십, 수만권을 사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놓은 것과 매 한 가지 아니면 두 가지라는 소리다. 이 맹점을 무시하고 흔히 기독교인들은 이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를 드리밀며 성경이 최고의 책이라고 자찬한다. 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성경이 '최고의 책'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성경은 '최고의 책'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스테디셀러'적 맹점이 또 다른 측면에서 '최고의 책'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데에 있다. 그 다른 측면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성경이 기독교인들만의 스테디셀러로서 절대적 '경전화' 되고 있는 것이고, 이것과 밀접히 관련이 되겠지만 진정한 스테디셀러로서의 성경의 비기독교인화가 그 다른 하나이다.

성경이 기독교인들만의 소유는 아니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간에,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것일진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절대화해서 자신들만의 특권적 소유물로 만드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다만 글씨를 써내려갔을 뿐이라는 영감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영감을 내리실 때, 성경이 '경전'으로 떠받들라고 하시려는 의도는 거의 없을 것이 아닌가 한다. 성경이 경전화되고 의식화(儀式化) 될 때, 읽는 책으로써의 활용도는 떨어질 뿐이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에게 성경이 교회갈 때에나 사용되어지고 있는 점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나는 이것이 일부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성경을 매일같이 읽는 기독교인들이 그 일부에 해당될 것이라 생각한다. 경솔한 판단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성경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복음주의도 여기에 한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기록된 이 성경은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인데, 이는 달리 하면 함부로 해석하는 행위를 죄악시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 읽기를 적극 권장(달리 표현하면 강요) 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해석'은 암묵적으로 금하고 았다. 성경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리, 곧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읽고, 또 읽고, 심지어 외울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이 진리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주일 예배의 설교 시간에 목사의 말씀인 이 진리를 해석해 전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일반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은 절대화, '외경화'되고, 일부 목회자들 및 교회지도자 들에게는 성경 해석의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 특권은 배타적이어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일반 성도들의 나름의 '해석'까지도 배척될 뿐이다.

르네상스 이후 성경에 대해 일반 대중들의 접근권을 허용했다면, 오늘날에는 그 해석의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 나아가 두번째 측면, 곧 성경의 비기독교인화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의 추구란 현재의 1/3에게 제한된 스테디셀러로서의 성경이 나머지 2/3에게도 스테디셀러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앞선 말한 성경의 '절대화'와 '외경화'의 배타성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달리 말하면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성경의 '문학'화로 이어진다. 즉 2가지의 필수적 과정이 동시에 해결되야 하는데, 정리하면 성경의 '절대화'로부터의 해방과 '문학화'로서의 지향이다.

이는 성경이 진정한 '전 세계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되게 하는 길이고, 성경이 진정 오늘날 최고의 책이 되게 하는 길이다. 나아가 비기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선교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여기에 이러한 해법으로서의 유효적절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 있으니 바로 『HOW TO READ 성경』이다. 이 책은 'HOW TO READ' 시리즈로,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한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 기획의 하나이다. 즉, 이 책의 기획의도는 비기독교인에게 오히려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유용하겠지만, 그러한 구분에 관계없이, 어떻게 하면 성경을 "제대로 읽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리처드 할로웨이가 말하는 성경 읽기의 유효적절한 방법은 바로 성경을 통해 "현재 삶의 조건을 반영하고 해석"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성경을 읽는 가장 나은 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말은 바로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개인에게 있어서 성경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바로 그 개개인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문학'을 대하는 자세와 궁극적으로 동일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저자의 말을 절반쯤 곡해하면 성경의 '문학적 읽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성경은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문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따오면 "내부에 이미 강력한 힘이 깃든 거룩한 책"이 성경이라고 하는데, 그 강력한 힘의 원천은 바로 이 뛰어난 문학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작, 약속, 연관, 유배, 고통, 구원자, 도전, 비유, 사도, 종말"이란 10가지의 테마를 선정하여 성경을 읽는 모범적 포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테마들은 하나의 흥미만점의 대하장편소설의 기본 테마들의 모범적 구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흥미로움에서 시작하여 곳곳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들을 오늘날의 상황과 여건 가운데서 시의적절하게 해석해 낸다면, 성경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최고의 책, 최고의 문학, 최고의 고전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읽기 방법들을 살짝 하나만 엿보도록 하자. 저자는 신명기를 읽으면서 '연관, 종교적 사회와 윤리'라는 테마를 뽑아낸다. 거기에서 오늘날 "성경은 일종의 연대성을 명령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더 큰 안목과 상상력으로 마음을 써야 한다"는 의미를 추출한다. 나아가 "성경이 묘사하는 하느님은 정치적으로 통화주의보다는 분배주의를 지지하는 분임이 뚜렷하다. 하느님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닌 것 같지만, 무한경쟁보다는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늘리려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셨음도 분명하다."라는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저자의 성경 읽기 방법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성경이 오늘날 그 자체가 가지는 뛰어난 이야기성과 흥미성을 모두 내어 버리고 다만 딱딱한 절대 '경전'의 어두운 세계로 치닫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이 그 질 낮은 문학으로 취급받는 것을 혐오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문학의 효과적 기법인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구약의 다양한 장들에서 웅장한 역사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미로운 시적 언어가, 고통과 번민의 언어가, 슬픔과 분노의 언어가 쓰이고 있음도 주지할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서양의 모든 예술의 모태에는 성경이 있음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그 성경의 '문학성'을 배제하는 것은 성경을 죽이는 행위, 곧 불경이 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도교인에게나 성경은 최고의 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그러기에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 "강력한 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 높은 곳에서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도 이제는 '문학'으로 낮아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책 『HOW TO READ 성경』에서 이러한 문학적 읽기가 충분히 의미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성경의 가진 그 강력한 힘을 전달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류에게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곧 '문학'이다. 인류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성경은 불려져야 한다.

(이 책의 아쉬움이 몇 가지 있다. 참고문헌이 제시되어 있는데 좀 부실하다는 점, 대부분이 외국서적이라는 점, 우리말 번역본의 정보가 전무하다는 점 등이다. 이는 번역자나 편집자들이 좀 보완해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하나님'과 '하느님'의 용어 사용 문제다.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개신교인들이 읽는데에 거슬릴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리고 인용된 성경이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글성경본이고, 그에 따른 각 성서의 제목이 조금씩 달라 약간 읽는데 더딘 감을 주었다. 뭐 그거야 내가 감수할 사항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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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잘 다녀오셨나요 멜기님? ^^

그나저나 재도전! 혹시...
헌법의 풍경, 면장선거!!!
-.-;;;

멜기세덱 2007-08-12 00:05   좋아요 0 | URL
오늘이요? 하루 종일 자느라...못 갔어요...흐미...ㅎㅎ

그나저나, 또 틀리셨어요...ㅋㅋㅋ
체셔님에게는 이제 도전권이 없으세요...ㅎㅎ
 
멜기세덱 추천 7월의 책 『평화의 얼굴』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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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사회 속에 드리운 기독교의 모습

  요즘 각 언론매체를 통해 이랜드 노사분쟁 사태와 관련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심히 괴롭다. 이랜드가 어떤 회사던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겠다는 사명을 표방하며 선교를 최고의 목표로 삼아 발전해 온 기업이 아니던가? 이랜드의 사주 박성수 회장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철강왕 카네기만큼이나 존경받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언급되던 영웅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신앙심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의 이랜드를 키워왔다는 그의 성공사례는 어지간한 기독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 아무런 대책도 내어놓지 않는, 전형적인 비기독교계 회사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무자비한 행태를 보이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계 기업이라 자청하는 이랜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사주 박성수 회장의 잘못된 믿음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일반적 기업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번 이랜드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두 가지의 요소, 지주자본가의 기업적 횡포와 왜곡된 자기 합리적 신앙이 이번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와 분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랜드 사측을 비판하는 목소리 중에 다른 기업도 아닌 기독교의 진리와 사랑을 표방한 이랜드, 특히 신앙인을 자처한 박성수 회장이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박성수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 경영진의 기독교적 사상과 이해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성수 회장이 "노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이랜드의 박 회장이 얼마나 자기 합리적 기독교 신앙을 품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박 회장의 신앙적 깊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신앙이 본질적 기독교 정신과는 많이 다른 각도로 깊이 박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많은 기독교(특히 개신교)인들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 후에 성경적 근거를 제 입맛대로 찾아들고 와 보란 듯이 우긴다. 거기에는 절대적이면서 비타협적 태도로 모든 것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하게 된다. 결국 박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의 경영진에게 "기독교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비판은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은 강력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이랜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이랜드 사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 내의 기독교에 이런 박 회장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교회 내에서나 밖에서나 기독교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님, 예수님의 뜻이라고 내어놓지만, 너무 많은 부분에서 자기 합리적 '하나님의 뜻'을 비타협적이고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행태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백 여 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너무 많이 왜곡되고 변질왔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 병폐들이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신교계 케이블 방송에서 중계하는 한 대형교회의 예배 실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님께서 "미국은 우리 형님 국가니 우리 동생 나라가 잘 대접해 줘야하고, 사악한 저 이북의 공산주의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또 한 번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신앙인 김두식, 그의 용기 있는 비판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우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을 이 책 『평화의 얼굴』에서 재삼 확인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김두식 교수의 『칼을 쳐서 보습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란 책의 개정증보판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역사적 추이와 오늘날 한국의 실태, 그리고 그 문제점과 대안들에 대해 친절하면서도 강력하게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 기독교 정신의 근본 바탕에 '평화주의'적 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의 반평화주의적 행태에 조심스런 비판을 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울 수 밖에 없었음을 나는 고백해야 하겠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란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은 칼과 창으로 상징되는 '전쟁'에 있지 않고, '보습'과 '낫'을 들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평화'에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기본 주제다. 그러면서 김두식 교수는 본인 자신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한국 기독교의 본질적 회복을 위한 자성과 반성의 성찰을 이 책 곳곳에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용기와 진정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책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변질과 왜곡에 대한 전면적 비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아니 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전에 이런 한국 기독교 비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어떤가? 기독교가 본디 그리스도교임을 알고, 그리스도가 곧 메시아, 예수님임을 아는 나에게 오늘날의 기독교는 본디 '예수 그리스도의 교'하고는 한참을 멀리 가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마가복음 12:28-34, 누가복음 10:25-28)


  이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을 온전히 보여준다. 기독교의 절대 경전인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란 것인데, 구약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새 언약,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기독교에는 새로운 예수님의 언약이 유효하다. 구약의 약속은 성취된 바, 다만 그 기독교 역사적 교훈으로써 우리에게 역사(役事)할 따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이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와 동등하게("그와 같으니"란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위계적인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할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이어야 하는데, 한국의 기독교는 이 본질에서 한참을 빗나가 있는 듯 보인다. 그 단면이 바로 이랜드 사태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주류 기독교계의 대응에서도 우리는 이런 본질적 기독교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서 김두식 교수의 문제의식은 심각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방해야할 기독교, 곧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할 기독교가 평화의 모습이라고는 코빼기 보이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김두식 교수 자신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한다는 것은 무척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기에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3.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김두식 교수에 따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문제에 대한 지금의 기독교계의 반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점이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기독교가 어떻게 그 반대 선상에서 대척하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 종단은 국가 안보와 국군의 정신 전력 보호 차원에서 병역대체법 도입에 절대로 반대한다.”, “병역대체법이 도입되면 국내 140여 종의 이단 종파가 신앙적 양심을 내세우며 병역을 거부하고 특히 국가의 모든 제도에 대해 양심적 거부를 불사하는 극도의 국기 문란이 예상된다.”, “병역을 거부하는 특정 종교인들이 감옥에 간 것은 기독교와 상관없이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고 “이들을 평화주의자나 다수의 힘에 의해 억울하게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처럼 만들어 가는 것은 무지와 악함의 극치” 등의 표현은 한국의 기독교계 단체들의 대표자들의 입에서 발설된 것들이다.

  이 땅의 모든 전쟁에 반대해야할 입장이라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보다도 기독교가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김두식 교수는 왜 기독교가 이 땅에서의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지를 기독교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밝혀내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이상적 모델로 추구하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독교는 평화를 지향하는 모습을 품고 있었으며, 기독교의 역사를 통틀어 많은 신앙인들이 병역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해왔음을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병역거부는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의 모습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지배층과 결탁의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그것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근대 국가주의의 창궐에 기인한다.

  기독교의 근본에 평화에 대한 염원과 실천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인된 기독교로서 지배층과 결탁하고 그들에게 봉사해야하기에, 그 왜곡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 왜곡은 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모습이 기독교 전통으로 여겨지는 모습은 가히 역겨운 일이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 교회 어느 곳에서건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가 군에 입대하여 총을 굳건히 들고 모든 전투에서 하나님의 능력주심에 힘입어 적들을 섬멸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믿음의 사람이므로 모든 위험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실 것이고, 내가 쏘는 총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돌질해 오는 적들의 심장에 백발백중할 것을 믿는다. 과연 이게 기독교가 믿는 예수님의 구속의 축복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게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자신을 버리고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것은 아가페, 곧 완전한 사랑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배운 오늘날 기독교 형제자매들은 적과 나를 구분짓지 않고, 원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단골 설교 메뉴도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다만 군대에 가서 총을 들고 적을 섬멸할 그날을 위해 살인 훈련에 매진하는 것은 그런 설교에서 논외가 된다.

  찬송가나 복음성가에는 전쟁에 대한 노랫말이 많다. 원수와 대적하여 담대히 싸우고, 완전히 무찌르고, 강하고 굳센 하나님의 전사로서 모든 악에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인데, 얼핏 듣기에는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구약의 성경 구절에서 그런 노랫말의 근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축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성경에 근거하여 볼 때, 그 문맥 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전제가 있다. 즉 전쟁은 인간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자기 다툼에서 총칼을 들고 휘둘러 적들을 섬멸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곧 영적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강하고 담대히 악에 대적하여 인내하고 싸운다면, 하나님의 영적 승리를 맛보게 된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들의 분규와 전쟁에서 지지고 볶을 것이 아니라, 인내와 사랑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날의 영적 승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군대가서 총을 들어 국가에 충성하라는 논리는 껴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종교적 의미에서건 개인적 의미에서건 기독교는 그들에 대해 반대할 명분이 없다. 반대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서라도 그 근본 기독교의 원리상에 있어 그러하며, 더욱이 기독교 사랑의 관용과 포용에 있어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는 그 소수자들을 포용하고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제모습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주류 기독교는 어떠한가? 과연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임을 포기한 것이며, 기독,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유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배반의 기독교가 아닌가?


4.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성 프랜시스의 이 기도문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진리와 희망을 전하고, 기쁨을 주는 것, 곧 기독교의 제 역할이 아닐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평화롭게 쉴 수 있는 곳은 이 땅에서 주류 기독교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멸시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당밖에 없다. 과연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인가? 나는 아무래도 받아들이지를 못하겠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리고 간구하는 프랜시스의 기도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이 읊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의 기도로 읊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가득 품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김두식 교수의 이 수고로운 작업도 그러한 지극한 염원을 한가득 담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두식 교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다시금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길 다시 한 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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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 회장에게 권하는 두 권의 책
    from 상콤한 포르노그라피 2007-07-13 15:01 
    얼마 전에 집근처 한 대형교회에 현수막이 붙은 것을 보았다. <개그맨 마빡이 정종철 집사 간증 예배> 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개그콘서트 내 요즘 인기를 얻은 신인 오지헌 씨도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이름이 나있고 여기저기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비단 이 두 사람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어떤 직업인이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면 그때부터 여기저기 교회서 간증을 해달란 초청이 줄을 잇는다.   예수님의 가르침
 
 
마늘빵 2007-07-11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먼저 쓰셨군요. :) 강추입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4   좋아요 0 | URL
좀 제대로 써보겠다 싶어 조금조금씩 쓰다가 얼렁뚱땅 마무리해버렸네요...ㅎㅎ 앞으로 계속 보완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가져보려구요. 명색이 크리스천으로서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부끄럽네요.

홍수맘 2007-07-11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에 "아멘"하며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5   좋아요 0 | URL
이 땅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기도합니다. 그 뜻 가운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있지 않겠습니까?

투명고냥이 2007-07-1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멜기세덱 2007-07-11 22: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근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2007-07-1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1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7-1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제 페이퍼에 트랙백으로 꼬리 남깁니다 :)
 
예수 -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를 추적한 BBC 다큐멘터리
톰 라이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예수. 그는 누구인가? 새로운 약속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마가복음 1:1) 예수의 세계를 선포하는 이 새로운 약속(신약)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죄악된 영혼을 구원시킬 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한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필요치 않다. 다만 "그를 믿는가?"의 물음만이 필요했다. 누구도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그가 무엇이기에, 그가 과연 어떠하기에 등의 물음을 가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일 뿐인것이다.

구약의 시작은 이렇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절대적 믿음을 첫장 첫구절에서 강요하고 있다. 이 시작을 받아들인다면, 성경 전체의 그 어떤 기사와 이적을 받아드리지 못하겠는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은 '천지창조'에 비견될 바 못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아들은 그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곧, 구약과 신약은 그 구조가 동일하다. 절대적 믿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첫마디부터 내놓는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작품에서 첫장 첫구절의 시작은 무언가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해하지 못할바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기독교는 믿음을 강요했다. 성경의 독자에게 수많은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것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믿어야 구원받는단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논리적 이해(사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를 쓸데없는 것으로 곧잘 치부하곤 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왜 하나님을, 왜 예수님을 이 땅의 신자들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따질 수 없는가? 신성모독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신성 모독이라면, 신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나는 이 땅의 기독교가 예수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예수가 보여주었던 그의 삶과 사상을 우리가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땅에 육화되어 온 것이 아닌가?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하는 방법으로는, 인간적 방법인 논리적인 이해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 책 『예수』는 그런 논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도와준다. 예수가 왜 이땅에 왔고, 그의 삶과 사상은 어떠하였으며, 성경의 내용을 충분히 따져보면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이다.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사복음서는 그 내용의 차이가 꽤나 많다. 그것을 우리는 대조해 보면서, 인간의 방법, 즉 역사적이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각각의 복음서들에 저자들의 주과적 진술들이 보이게 된다. 마태가 신에 들려 저도 모르게 술술 써내려간 것이 마태복음이 아닌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한 예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되었을 때 예수가 말하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굳은 믿음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역사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각 복음서의 집필자들이 그 복음서의 예상 독자들이 처해있던 상황들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고 있었을까를 상정한다. 그럴 때에 복음서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실증적인가? 과연 이 땅의 기독교는 예수를,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예수에 대한 믿음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허무맹랑하게도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걸 절대적으로 믿으면, 너희에게도 그런 기사와 이적이 이뤄질 것이라고 호도하는 이 종교가, 이제는 예수 '읽기'를 통해서 충분한 이해를 통해 반석위에 굳건한 믿음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이 책은 예수 '읽기'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단숨에 읽고 깊이 음미해야 할 책,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 사족
간혹 많은 분들이 내가 닉네임으로 쓰고 있는 '멜기세덱'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온다. 여기서 시원스레 알려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멜기세덱(Melchizedek) 구약에 잠깐 나타나는 아주 신비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창 14:18, 20; 시 110:4). 그러나 이 사람의 존재 속에는 오랜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고 그돌라오멜과 여러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중에 그를 만났다. 그때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의 십일조를 그에게 바쳤다. 그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것은 주님의 최후의 만찬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이었다(창 14장 참조). 그 후 수천 년이 흐른 뒤 다윗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멜기세덱을 다시 한 번 언급했다(시 110:4).

  예수님과 멜기세덱 :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레위 지파나 아론의 자손이 아닌 '멜기세덱의 제사장'이라고 말했다(히 5:1-10; 6:20). 그리고 멜기세덱은 탄생, 아비, 어미, 족보, 죽음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히 7:3). 이러한 면은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신학적 평가
  신학자들은 멜기세덱을 놓고 오랫동안 씨름해 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멜기세덱을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판정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가 족보 없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1세기에 이 서신서를 읽었던 독자들은 인간의 족보에 대해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론으로부터 내려온 완전한 족보가 없다면 그들은 아무도 제사장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종류의 제사장을 강조하면서 아론이나 레위 반열이 아닌 영원한 제사장 반열인 지극히 높은 제사장 멜기세덱을 바로 예수님의 반열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히 7:4-10).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직접 희생 제물로 드려 더 이상 희생 제사가 필요 없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히 7:26-28).

이상 하용조 목사 편찬, 『비전성경사전』, 두란노, 37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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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17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앞부분에 멜기세덱이 잠깐 나와요. 분위기가 참 신비로웠어요^^

마늘빵 2007-03-1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의미군요. 음. 이 쪽 계열은 영 몰라서.

멜기세덱 2007-03-1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전 코엘료를 읽지 않았거든요. 연금술사에 멜기세덱이 나온다? 신비롭다? 마노아님 때문에라도 읽어봐야 할려나....ㅎㅎ
아프락사스님> 제가 쓰이기에는 너무나 크죠! 이쪽 계열도 알고 보면 재밌을거 같아요..ㅎㅎ

Jeanne 2007-06-05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평신도 사역자양성' 이라고 해서 부지런히들 교육하고 있지 않나요?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로 압니다... (전 학교에서 배웠지만요)
(태클 아니에요...;)

멜기세덱 2007-06-0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세요. '평신도 사역자양성'이 얼마나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할런지는 의문이고요,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성경의 '무오류'성을 곧이 곧대로 믿고있다고 판단이 됩니다. 성경 해석의 권위가 여전히 성직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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