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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리처드 도킨스의 화제의 책 『만들어진 신』을 읽는 내내 당황스럽지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때문이었을까?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리뷰쓰기를 주저했다. 지금도 내가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리되지 못한 채 혼란스럽다. 리처드 도킨스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그래, 신은 없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 못난 자존심 같은 것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킨스의 의도가 빗나간 것은 아니다. 그가 뜻한 바를 전부 이룬 것은 아니지만 내 안의 충격은 나를 도킨스의 손을 잡기 가까운 쪽으로 밀어버렸다.
도킨스의 논리는 너무나 명쾌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나같은 범인으로서는 그를 반박하고 싶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굳이 반박하려 애쓴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라고 매도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악마의 사도가 내민 선악과를 이미 한입 깨어물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겠다. 이 책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하는 7개의 스펙트럼 속에서 나는 "4. 정확히 50퍼센트.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불가지론자.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나 "5. 50퍼센트보다 낮지만 그리 낮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에 회의적인 쪽이다."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 책을 한 번 더 읽는다면 그 아래로 더 내려가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었나?"를 끊임없이 되물었다. 그 시작은 내 의지와만 상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태신앙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나이때부터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던 듯 하다. 그 어린 기억속에는 교회가기 싫어 이른 아침부터 떼를 쓰다가 매를 맞은 가슴아픈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교회를 자연스럽게(?) 다니게 되면서 나는 당연스레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독교인이 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어떤 영적체험의 기회를 갖게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영적체험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고, 지금은 아예 교회를 나가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애써 '날라리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열성적으로 교회를 나갔다. 고등학생 때쯤인데, 그때는 온갖 교회의 일들을 맡아서 참으로 열심히 했다. 학교와 집과 교회 밖에 모를 정도였다. 성가대도 하고, 학생회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주일학교에서 보조교사로 봉사하기도 하고, 청소도 하고 기도회도 열심으로 나갔다. 여러 부흥집회에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나섰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런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예배때는 교인들 앞에 나가 찬양인도까지 '정열적'으로 도맡았다. 그러나 거기에 흔히 말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는 찾지 못했다. 의구심이 들었고 회의감이 나를 휘감았다. "내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회의를 하게 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때 그 회의 속에 성령이 찾아와 위로하고 뜨거운 영적 체험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의 그 지독한 회의감은 열심으로 나가던 교회를 끊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정확히는 예수를 사랑한다.
왜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일까? 지독한 회의심은 교회와 예수를 분리하게 만들었고, 단지 교회를 나가기 위해 열심이었던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 열심 가운데 예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찾으려 했고 교회를 끊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간절히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서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에 대해 전부터 회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경의 첫 구절부터 나는 믿지 못했다. 어떻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성경의 그 어느 기사와 이적도 믿지 못한다. 반대로 이 사실을 초장부터 인정하고 가면 성경의 어느 구절도 믿지 못할 바가 전혀 없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것도 천지창조보다는 미약해 보이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교회를 다니는 내내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신화적으로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천지창조라니? 어느 신화가, 전설이, 그 어떤 환타지 소설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가정으로 시작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것이 내 회의감의 원인이 되지는 못했다.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 나는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까지는 여전히 부확실하지만, 그의 삶과 사역을 나는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정말이지 그것은 그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따질 필요도 없이 말이다. 난 그의 말들을 사랑했고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행위를 사랑했다. 그런 예수가 있다면, 그것이 상상속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믿고 싶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망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난 후엔 그 말에 더욱 동의하고 싶어진다. 지금의 나로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또한 그런 망상,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을 상상한다는 것을 나는 그리 무력하게 보지 않는다. 리처드 도킨스가 신을 망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망상이 일으킨 백해무익의 결과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예수라는 망상, 아니 상상은 어떤가? 그것 마저도 유해할까? 나에게 그것은 결코 유해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은 어디까지는 전통적 예수관과는 다를 것이긴 하다.
얼마전 김용옥으로 한국기독교계가 떠들석 했다. '구약폐기론'은 운운했느니 안 했느니하면서 분분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김용옥을 불편해 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마저도 그런 불편한 감정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가 앞으로도 리처드 도킨스를 따라 읽는다면 언제고 리처드 도킨스에게 설복되고 말 것만 같다. 그의 논리는 철저하고 명확하다. 너무 쉽지 않은가? 그의 논증은 너무나 당연한 설법이고 빈틈을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독교인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들으면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는 망상의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하겠다. 난 단지 '사랑의 예수'만을 상상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진정한 예수'를 찾아내는 날이 온다면 행복하겠다.
이 책 『만들어진 신』을 우리는 기독교 비판서로 읽어도 좋을 듯 싶다. 그가 일반적인 신을 공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논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를 대상으로 한다. 나는 충분히 기독교 비판서로서 이 책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많은 기독교인이 보아도 좋지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당신들의 예수』를 읽었고,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었다. 그리고 『죽은 신을 위하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끝끝내 기독교를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련의 책들을 통해 보다 의미있는 예수를 상상할 수 있을 것같은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아직까지 날라리 기독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