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 -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의 현장에서 보내온 생생한 일상의 기록
레티시아 비카이으 지음, 정재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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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사진이 있다. 이 소년의 무모한 행동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앞날에 불운한 전망을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 보르도 2대학의 정치학교수로 팔레스타인 문제 전문가인 레티시아 비카이으는  바쌈과 나지, 사미라는 이름을 가진 30대 전후의 팔레스타인 해방군의 삶을 밀착해서 취재하였고, 그들의 성장과정과 삶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원인과 문제점, 해결전망의 어려움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티파다(Intifada)'는 민중봉기를 뜻하는 아랍어다. 이 말은 팔레스타인 민중이 이스라엘의 학정에 맞서 자발적으로 대항했던 두 차례의 사건을 지칭한다. 첫 번째 봉기는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있는 자발리아 난민수용소에서 시작되어 전 지역으로 퍼졌으며, 두 번째 봉기는 2000년 9월 예루살렘에 있는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에서 비롯되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987년 12월 9일 차할군(이스라엘군을 지칭함) 지프차 한 대가 이스라엘로 일 나가는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태운 차량과 추돌사고를 내었고, 이 사고로 자발리아에 거주하는 노동자 4명이 즉사했다. 이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몇 시간 후 가자지구 북쪽에 있는 자발리아 수용소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이스라엘군 관측소들이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에게 공격당했다. 폭동은 다른 수용소와 거류지,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전역으로 퍼져갔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시작된 폭동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의해 봉기로 발전했고, 이후에는 산발적 폭력투쟁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시민불복종의 형태를 띠고 이스라엘 상품 불매운동, 관공서나 경찰관의 사직 등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정부 대표와 비밀협상을 가지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팔레스타인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지도자들의 부르주아적 생활로 인해 민중들과의 계층간 계급간 격차와 소외감을 가져왔으며, 그들의 사유재산 추구와 부정부패로 인해 순수한 민족해방을 위한 열정을 가진 인티파다의 주역들은 그 혜택들로부터 소외되어버렸다. 나아가 이스라엘 군벌과 정치인들과의 야합으로 자치정부 지도부는 민중들로부터 괴리되어 갔으며,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현명하고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경제는 이스라엘의 분리정책과 변화된 통제정책으로 이스라엘에 종속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어냈으며,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이스라엘 기업가가 운영하는 일터로 나가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의 상당부분이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이유로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과거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부터 감시받고 박해받게 되었으며, 앞으로의 전망에서 낙관적인 희망마저 잃은 해방군은 더욱 파괴적이고 폭력적으로 이스라엘의 통치에 대응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치구를 유폐시키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습과 무차별 공격을 낳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인티파다 알 아크사는 아라파트의 실추 속에 계속되는 지도자의 암살로, 나아가 청렴하고 유능한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해방투쟁의 방향성 상실로 더욱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민족의 장래에 대한 불투명하고도 절망적인 상황은 젊은 해방군들로 하여금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하였다. 그래서 결국엔 자살테러소동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군인과 민간인이 무차별 살상되고, 그 보복으로 더욱 많은 살상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대상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내에서 조심스레 무장투쟁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런 방법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점과,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무고한 국민의 희생속에 전쟁과 살인이 더 이상 우리에게 행복한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하는 목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목소리를 덮을 정도로 극단주의자들의 목소리 또한 높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는 피를 통해 평화에 이른다고 했던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60여년간의 대량학살과 전쟁은 이미 충분할만큼의 인류의 피를 뿌렸지 않았는가?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관심이 없었던 20세기가 남겼던 수많은 비극과 학살을 돌아보면서 21세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따뜻한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하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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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0-1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는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단순히 이스라엘과 연계된 문제인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내부 기득권자들의 잘못된 부정부패로 인하여 문제가 점점 더 확대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부터는 아라파트같은 지도자의 숭고한 리더십을 의심하게 되었죠. 항상 문제는 외부보다는 내부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는 진리를 이럴때 써먹어야 한다는 일이 참 속상합니다. 리뷰 정말 잘 쓰셨습니다.^^

달팽이 2004-10-2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젠 철지난 과일이 되어버렸지만 포도의 그 싱그러움으로 아침 시작할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잔인한 이스라엘
랄프 쇤만 지음, 이광조 옮김 / 미세기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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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은 "시오니즘의 숨겨진 역사"이다. 저자인 랄프 쇤만은 버트란트 러셀의 비밀 비서로서 제국주의 국가내에서의 민중과 계급문제, 제 3세계에서의 민중해방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던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는 나찌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들이 애초에는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감을 찾기 위한 순수한 시도에서 시작된 시오니즘이 자신들의 동족들도 배반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비극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사악함으로 나아가기까지의 역사적인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사의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하듯이 팔레스타인의 비극 역시 극단적 시오니스트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아무런 힘도 없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유태인들의 마음 속에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불사하겠다."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심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극단적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선량한 유태인들에 대한 배반이 우선 일어난다. 나찌에 의한 유태인의 대량학살이 같은 민족인 그들에 의해 암묵적으로 동의되어지고 그들은 나찌의 지도자들과 뒷거래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국가 건설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다. 나아가 그들은 나찌가 자기민족에게 써먹었던 학살방식을 팔레스타인 지역의 민중들에게 그대로 써먹는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관계가 식민주의내에서 지배 피지배 관계로 오면 결국엔 같아진다고 했듯이, 자기보다 힘센 자들에게 당했던 화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통해 더욱 가혹하게 가해지고 만다. 시오니즘의 유대국가 건설 움직임이 있기 전부터 이민족들과 이웃으로 어울려 평화롭게 살았던 선량한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왜 그런 비극을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 늘 대량학살과 폭력과 착취는 아무런 방어능력도 없고 말할 수 없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런 일들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힘없는 그들이 불의에 강하게 저항하지 못한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물론 저자는 팔레스타인의 희망을 아랍민족들의 해방투쟁과 유태인 노동자계급과의 공동투쟁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한과 고통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한과 고통이 또 다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라고 하는 외양을 띠고서 우리 세상에서 돌고 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세상은 왜 이런 걸까? 마음이 펼쳐진 세상의 비밀은 마음의 비밀에서 해결되어야 할 숙제들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제국주의도, 나찌즘도, 파시즘도 우리 사회 속에서도 내재화되어 있듯이 극단적인 시오니즘도 우리 사회내에 잠재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하면서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워가며 인권과 생존권을 외면해버리는 사람들, 국가보안법으로 이익을 보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현실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국보법의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외면해버리는 보수주의자들, 자신은 늘 선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의견에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교조주의자들의 마음 속에는 늘 인류를 위험과 비극으로 내모는 잔인함이 도사리고 있다.

시오니즘의 숨겨진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역사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부정과 폭력을 몰아내고 평화와 사랑을 구하지 않는 이상 세상사의 비극은 돌고 도는 연기의 법칙아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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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대담 시리즈 3
임지현.사카이 나오키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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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기억을 전유하기 위한 갈등과 투쟁의 결과 형성된다. 그 과거란 개인에게 있어 사건발생 후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기억되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그 개인의 기억들이 뭉쳐진 집단적 기억인 역사도 마찬가지로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역사적 기억에 관한 것이다. 근대 이후 세계사의 큰 축을 형성해왔던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집단적인 기억을 형성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을 누려왔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만적인 환상이라는 것이다.

임지현 교수와 사카이 교수의 대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의의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 분야에서 흔치 않는 별 다섯개를 주었다.

첫째로는, 국민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근대화의 과정과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제국주의로의 발전과 팽창에서 야기되는 식민주의의 문제, 선진자본주의와 후진 자본주의의 문제, 선진 자본주의 내, 후진 자본주의 내에서의 차별과 배제 억압의 논리가 이끌어 온 왜곡된 세계사에 대해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출되고 또 재배치되면서 그 이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 이익을 보다 영속화시키기 위해 대중집단을 국민국가의 형성을 통해 그 틀 속에 묶어두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에서도 러시아와 후발 사회주의 간의 지배 종속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과 일본의 구체적인 역사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식민지 국가에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그들의 관점은 우리 나라의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 근대화과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역사 조명이 필요함을 말해준다.('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일본식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민족의 발전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이광수를 포함한 친일파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대부분이 내셔널리즘적 국가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다.) 식민지 내에서의 제국주의의 내면화는 안토니오 그람시에 의하면 '헤게모니'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고찰해본다면 이전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드러난 약간 상이한 두 길일 뿐인 것이다.

나아가 정보화 혁명이후의 세계화 현상과 다국적 자본의 해외진출, 지역경제의 블럭화 현상을 포함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 9.11테러 이후의 미국 사회의 보수주의화 물결 등 현실적 문제에 접근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국가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 틀안에서 사유와 실천을 가두어 놓았던 과거의 대안 추구방식을 비판하고 그것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어 거기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보자는 의도를 담아내었다.

둘째로는, 번역이라는 공동작업을 통해 외국어를 자국어로 바꾸어냄으로써 타인의 사고를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열린 대화를 통해 보다 성숙한 방법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대담에서도 결국엔 두 사람이 역사를 인식함에 보편적인 부분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공감의 접점을 통해 역사는 새롭게 인식되어지고 여기에서부터 역사적 실천을 위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새로운 사유가 바로 당면한 역사적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고 대화와 상생의 역사를 펼쳐가는 데 있어 출발점이 된다는 생각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과거의 기억을 전유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각 각 다른 시각들의 접점에서부터 우리들은 열린 대화의 장을 만들어 나가야 하며 그 접점에서 집단적 기억은 타인의 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에서 시작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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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a327 2004-11-2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쯤까지 읽다가 책장에 영구보관되고 있는책인데....

살인자와 인터뷰인가 기억인가에서 사람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하죠

아니면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거나, 이해해도 금방 까먹어 버린다는데.

책 두께가 주는 중압감과 더불어 긴 내용의 책을 띄엄띄엄 읽다 보니 연계성이

없어 중간에 포기 했는데, 님의 글을 보니깐 다시 책을 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달팽이 2004-11-25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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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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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당신은 제 3세계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우와 노동현실을 보면서 때로는 우월감을 느낀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 안에서 오리엔탈리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멋지게 지은 서양식 집과 좋은 차 , 늘씬한 서구형 미인을 부러워 한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서구 중심주의적인 옥시덴탈리즘을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들의 삶만을 중심으로 보고 나머지를 주변부로만 파악하는 태도, 자신의 삶을 문명으로 파악하고 나머지를 야만으로 파악해서 그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편견,  우리를 위해서는 타인의 삶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배타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씻어낼 수 없는 피로 물들였습니다. 나아가 인류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살지 못하고 타인에게 종속되거나 배제되는 비극의 역사를 낳았습니다.

    그럼 이런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과 같은 우리 사회를 보는 일그러진 시각들은 어떻게 생기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민족과 국가라고 하는 허상을 우리들 개인 각 각의 내면에 심어놓는 방법에 의해서 생기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박노자씨는 집단과 전체주의에 의해 희생되었고 배제되었던 개인적 가치의 복원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이나 가해자건 피해자건 그 국가나 중심부나 주변부를 해체해보면 전체에 의해  많은 기층 민중과 시민과 개인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한 개인은 그 수레바퀴를 되돌리기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수레바퀴에 묻어가는 미약한 존재로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방향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예측한다는 것도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20세기에 인류의 대량학살의 역사와 인간 존재의 극한적 무의미함을 겪으며 적어도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광기로 치닫는 집단적 무의식과 집단광기를 극복해가는 개인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주의적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우선은 인류의 대량학살은 반드시 민족이나, 국가라는 환상을 통해 국민들을 집단 무의식의 상태로 몰아 인류최악의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그런 외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허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과 나아가 전체주의적 환상과 집단광기는 반드시 개개인의 내면을 오염시키고 쇠뇌시키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우리들 내면의 깨달음이 이러한 비극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쓰고 있는 중심부를 향한 끝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하얀 가면,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자기비하와 타문화에 대한 사대주의적 시각을 말합니다. 그 가면을 벗어내는 일은 단순히 우리의 몸치장을 바꾸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어내고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보는 바르고 넓은 눈이 필요하며 여기에 그런 눈 하나가 박노자씨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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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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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편안하게 읽어내기 쉽지 않은 역사책이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편지형식의 글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스스로가 '개인주의적 진보'와 '건강한 보수'라 얘기하는 그들을 통해 진보와 보수가 열린 대화와 토론의 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읽다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흐릿하게 되고 누가 누구의 글인지 헷갈리게 되어버린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우리가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우익과 좌익의 구분으로는 설명되지 못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에서 외면적인 행위만을 놓고 보면 우리는 누가 보수이고 누가 진보인지 구별을 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근대화의 역사는 민족과 국가, 집단과 전체라는 것을 위해 개인적인 가치가 희생된 역사였다. 이에 두 교수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전체주의적 횡포에 의해 죽어버린 진정한 주체와 개인을 다시 살려내는 것을 그들의 임무로 삼았다.

  그것은 다시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학자들에 의해 교과서화된 정설만의 해석을 거부하고 역사를 보는 개개인에 의한 개인적 가치와 해석을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나타났으며, 이 책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개항기를 통해 본 한국사회는 봉건제 타파라고 하는 과제와 근대화의 추진에 의한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외세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만 가고, 주변의 조선지배의욕을 막아내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내부적으로 갖추어지지 못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전체주의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적 가치를 복원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당당하게 우리를 세우는 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민한다. 

   전체 역사의 흐름에서 과연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그 전체주의적 횡포에 맞서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답없는 질문을 던져보고 가장 합리적인 모색을 해보고자 하며 물론 그것은 오늘날에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는게 두 교수의 생각이다.

   한국 근대사에 대한 박노자 교수의 객관적이고도 외부적(?)이며 대담한 비판에 최소한의 민족적인 자존심을 나름대로의 근거로서 지켜내고자 한 허동현 교수의 반론이 묶여 한국사회가 안고 나가야 할 과제들에 대해 대중들의 개인주의적 가치의 부활과 개인의 자유롭고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현실의 한국의 선택을 지혜롭게 하고자 한다.

   두 교수의 진지하고도 깊은 우정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은 우리 사회의 앞날에 대한 또 다른 희망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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