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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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가진 인쇄마술의 힘을 안 것은 한겨레신문이 나오면서였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180도 다른 기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또 사회를 바꾸어내는 큰 힘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세상이 달라 보였다. 물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신문기사 이면에 자리잡은 자본논리와 권력논리에 휘둘리지 않을려고 노력해왔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여전히 나는 그래도 신문권력에 휘둘리는 소외된 소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이 태어나고 하루를 넘기면서 사망하는 일간지의 짧은 일생 속에 우리의 무의식도 함께 생멸하는 주기를 거친다. 자본과 권력의 피리소리에 춤추는 신문과 더불어 우리들도 함께 춤추고 있는 것이다.

신문이 현실의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설에 대해 신문 탄생의 과정은 취재기자 --> 취재부장 --> 편집기자 --> 편집부장 --> 편집국장 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나 되는 현실의 왜곡과 굴절과 편집과정을 거치는 데에서 소설보다 더 허구적으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사주의 이해관계와 밥그릇을 놓고 벌이는 위협은 결코 신문이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군사독재시절엔 정권에 의한 보도지침이 신문의 편파성을 주도했다면 이젠 신문기업의 자본화와 광고주의 압력에 의한 자본논리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서의 신문을 타락시키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온갖 인생의 미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듯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들의 집단무의식의 속으로 파고드는 굵은 선의 신문표제에 우리의식은 갇혀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암 조광조는 '말길의 통함과 막힘이 한 사회의 최대문제이니, 통하면 해결되어 편안하고 막히면 어지러워져서 망한다.'라고 했듯이 신문의 숨겨진 논리에 휘둘리면 망하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바르게 읽기를 할 수 있는 독자들이 많아질 때는 신문뿐만 아니라 그 사회도 정화된다. 신문에 숨겨진 자본논리와 권력논리에서 나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 사회의 변화는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문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독자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문의 내용을 재구성하면서 읽는 편집자적 안목으로서 바로 읽기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신문은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며, 그 창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읽어내어야 할 눈이다. 그리고 신문은 우리 사회를 보다 깨끗하고 투명하게 바꾸어내야 할 우리들의 손이며, 바꾸어진 사회에서 우리들의 인생의 가치를 참되게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우리들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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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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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햄버거가 전세계인의 주식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개인 파산자가 산더미처럼 불어가고 있는 지금, 노무현 정부에 의해 다시금 보수주의적 정책으로 회귀되고 있는 노사관계에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행복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가? 1848년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제기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NO'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저자는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과 전태일의 삶에 영향을 받고 맑스주의에 의한 삶을 아직껏 살아오고 있는 이른바 세간의 시선으로 본다면 깝깝하고도 융통성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의 삶속에서 동지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삶의 투쟁과 사상들, 변해가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들을 새롭게 정리해내고 많은 동양적 사상과 지혜들에 대한 폭넓은 독서와 함께 유연해지고 넓어진 생각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축으로서 꼿꼿이 유지되고 있는 현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맑스의 삶과 그의 문제제기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기본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그것이 옷을 조금 바꾸어 입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에 대한 생각들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게 한다.

우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이것은 노동관에 대한 변화를 의미하는데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노동형태도 많이 변화되어서 이젠 제조업에 종사하는 육체노동자 뿐만 아니라 정신노동자 및 사무직 노동자 등...자본의 지배하에 '소외된 노동'을 영위하는 모든 계급 계층들이 이에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요즘식의 말대로라면 20:80 사회에서 필요없는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자본의 편에 종사하는 경영노동 및 이와 유사한 형태의 노동도 바뀌어진 사회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협동노동조합에 의해 운영되건 국가에 의해 운영되건 또는 전교조의 노조전임자처럼 그렇게 운영되건....사회내에서는 필요한 노동이므로 지금은 비록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지만 바른 처우로 바뀌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까지 포용하는 노동관을 갖추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음으로 인류사회가 계급사회에 접어들고 나서부터 그 사회가 붕괴되는 데에는 역사적 주체임의 인식과 더불어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힘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문이다. 그것은 단지 수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역사발전의 법칙 속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힘의 등장을 말한다. 부르조아는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그 자본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듯이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할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소멸시키고 도래할 역사적 법칙 속에서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노동자 정당이라고 하기엔 대의제민주주의의 한계를 느끼는 나로서는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없고, 다수의 폭력혁명이라는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라는 전태일의 글에 나타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것은 더욱 확장되어 이 자본의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육체가 고통당하고 마음이 상처받아 인간성이 파괴되는 자본가계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만들어가는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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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사람들
케빈 베일스 지음, 편동원 옮김 / 이소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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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의 병적기록이 잘못되어 내가 다시 군대에 잡혀가게 되는 일....남자들이라면 어쩌면 한번쯤은 이런 악몽아닌 악몽에 시달려 본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꿈속일 뿐이고 깨고난 후 일과를 마치고 친구들과 술한잔을 기울이며 안주거리로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현실이라면 얘기는 아주 복잡해진다. 그 때 우리는 군대의 상명하복식 질서에 편입되어 자유의지를 상실한 한 명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노예제 하면 흔히들 고대의 로마사회나 스팔타쿠스 또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인류역사에서 사라져버린 한 기록들로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예제가 허울만 달리하고 세계화가 깊숙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현대사회에서도 존재한다면 그대는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저자는 '채무노동'이란 이름의 허울뿐인 노동계약서 속에는 사기와 기만에 의해 유린되는 인간의 자유와 생명이 있으며, 다 써버리고 난 후 일회용품처럼 내버려지는 노예적인 삶이 전세계의 도처에 퍼져 있으며 그 노예제는 세계화의 경제 속에 깊이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채무노예의 형태는 성 매매업, 임금노동자의 노예로의 전락, 노예제의 문화와 전통의 지속된 형태 등 사회와 문화에 따라서 다르게 형성되지만, 그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교육받지 못하고 사회의 극빈층에 해당되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고 있지 못하여 일정한 사회조건 하에서는 언제든지 그들의 지위가 자본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과연 이렇게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마음대로 짓밟고 희생시키는 경제체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야 하고 이러한 경제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나 스스로의 자각이 우선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사회문제의 모든 경우가 그러하듯 노예제 종식에 있어서도 우선적으로는 문제의 당사자인 '채무노동자'자신의 주체적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 사회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그것과 더불어 바른 의식을 가지고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한 사회의식(사회적 밈)의 성숙도 갖추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형된 노예제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경제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노예제에 의해 생산된 상품을 아무런 생각없이 소비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노예제의 유지와 영속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피와 희생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 후 일회용품처럼 폐기처분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간의 존엄성을 그리고 우리의 존엄성을 짓밟고 폐기처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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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바 바베, 간디를 만나다
비노바 바베 지음, 김문호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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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혁명에서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만난 것이 민중혁명에 의한 사회주의국가건설에 있었다면 간디와 비노바의 만남은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너머 진리를 향해 있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가진다. 진리와 삶의 의미, 영성을 추구하던 한 젊은이가 민족의 지도자를 만나 그를 섬기고 봉사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섬겼던 이가 정치의 논리너머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객관적인 간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간디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간디의 사상과 정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에 있다. 그런 면에서 간디를 누구보다도 섬기며 그 뜻을 따르고자 했고 그 마음과 공명했으며 간디의 사상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쳤던 비노바의 마음에서 우리는 어쩌면 가장 진실한 간디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주장했고 실현하려 했던 주요사상인 '스와라지', '사티야그라하', '아쉬람','사르보다야'의 개념들은 아직까지 인류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면 문제해결을 위한 선현들의 뜻깊은 말씀들이 늘 있어왔음을 알게 된다. 마하트마 간디 역시 그러한 선현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선현들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늘 세상이 여전히 쳇바퀴돌듯 미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사회정치적인 논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성취해내는 사람들의 의식이 성장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간디의 사상은 그것이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날때에야 비로소 우리들의 삶의 변혁도구가 된다. 간디가 살았던 시대에 그의 사상을 몸소 체화시키지 못하고 단지 간디의 결정에 추종하기만 했으므로 그의 사후 세상은 변화되지 못했다. 물론 간디의 영향으로 인도사회에 내재된 많은 가능성을 부정하진 못하지만...

신이 간디를 데려간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든 성현의 죽음이 그러하듯 간디의 죽음은 이제 그의 육체나 그의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마음속에 씨앗으로 간직하여서 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위대한 정신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피어날 때에라야 비로소 간디는 우리들 속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모두 휘젓고 돌아다녀도 우리 마음 속 세상을 찾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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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 원리 - 역사 원동력에 관한 과학적 분석
하워드 블룸 지음, 이무연 옮김 / 파스칼북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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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는 왜 대량학살이 없으면 안되는가? 왜 현대의 세계에도 그러한 현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왜 서로 다르다는 구실을 찾아서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하고 때로는 인종청소까지 서슴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야만성에 대한 물음에 답을 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은 세상에 나왔다.

이제까지의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소산의 결과라는 논리를 180도 뒤집은 이 책은 그 근거에 대하여 유전학적 성질에서부터 자연계의 여러 가지 법칙들을 가져와서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록 저자의 논리에 끼워맞추기 위한 논리적 치우침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사회적 지배논리를 뒤집어보면서 이렇게 논리적이고 명쾌한 설명을 엄청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야만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적 산물이나 문화적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그것은 애초에 인간의 유전적 정보에 의해 아로새겨진 생물학적 본성이고 자연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성질이라는 것이다.

침팬지 사회에서 자연스레 서열이 생기고 우두머리가 아랫바닥에 존재하는 침팬지를 학대하는 것에서, 개미부족이 다른 개미 부족과 부딪혀서 대량학살을 수반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서, 사자가 평원에서 자신과 새끼의 생존을 위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행위에서도 우리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을 발견한다.

다만 인간사회에서 그것과 다른 차이점은 인간사회의 발전으로 인한 조직의 확대와 그 과정에서 밈(관념의 자기복제단위)이 생겨나고 그 밈의 네트워크가 인간역사를 결정짓는 주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게 다인가? 이런 약육강식의 자연현상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사회에 일어난 대량학살과 인종청소에 대해 아무런 가치판단도 내리지 못한다. 따라서 미국사회의 독주에 의한 세계평화의 논리도 합리화되어버리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균형상태에 의한 불합리가 혼란상태가 가져올 대량학살과 생명파괴의 해악보다는 낫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에....

분명 루시퍼의 원리만으로 부족하다. 그것이 인간사회의 흐름을 결정짓는 원동력이자 에너지라면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킨다면 역시 인류사회를 선한 세상으로 바꾸어내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선도 악도 없는 그 에너지가 본래에 존재하는 것이니 그것이 가진 모순적 속성을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다면 그 에너지의 긍정적 사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루시퍼의 원리를 넘어서는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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