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버려라 - 잃어버린 삶의 복원을 위하여
제리 맨더 지음, 최창섭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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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 오후 여러분은 할일도 없이 텔레비전을 켜놓고 별로 재미도없는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지루해하면서도 딱히 또 할일이 없어 그냥 재미없는 텔레비전 앞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 기억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여기 미국사회에서 텔레비전이 가정에서 보편화되는 초기에 그 해악성에 대하여 이렇게 자세하면서도 분석적인 시도를 하였다는 사실은 놀랍다. 또한 그 분석이 지금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매체가 되어버린 현대생활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도 큼은 또한 놀라운 사실이다.

저자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 그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텔레비전이라는 테크놀러지 그 속에 숨겨진 반민주성과 상품 이윤 논리 그리고 반생명적인 논리와 사기와 기만에 대해 저자는 철저하게 해부하여 우리 앞에 그 결과를 드러내놓는다. 사실 기존의 저서들은 과학기술과 대중매체는 중립적이며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선과 악의 모습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가진 해악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에 이미 텔레비전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텔레비전을 버리라고 한 저자의 식견은 대단히 선구적이다. 특히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는 인간의 오감 중 시각과 청각의 감각만 사용하게 하고 그것도 서로 독립적이고 현실과는 무관하게 인위적으로 조성된 생명체의 기운이 죽은 감각만을 전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는 누구도 얘기한 적이 없는 자연광과 텔레비전을 포함한 인공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점 등 우리가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매체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영향에 대해 많은 근거있는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은 아주 독창적이고 선구적이다.

사실 텔레비전은 우리들의 많은 일과 후 시간을 흡수해버림으로써 우리들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생명체와 직접 접촉할 기회를 차단한다. 전자매체라는 상자 하나에 우리의 일생을 얼마나 많이 소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더욱이 그것이 우리들의 사고와 감각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무디게 하고 소멸시켜버리는 죽음의 매체라는 것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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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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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어떤 현실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식민주의에서 제국주의로 다시 경제발전에서 세계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실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삶의 대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한다. 경제발전이라는 지상최대의 과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쓰러진 숲과 오염된 강과 대지 파괴된 자연과 인간정신의 황폐화와 무감각화뿐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른바 지금의 현실은 '타이타닉 현실'이다. 암초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배에서는 엔진실에서는 석탄을 쏟아붓고,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할 일을 하고 있고 선실에서는 암초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기를 선장은 명령한다. 이 배가 곧 암초에 부딪혀 좌초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미국인의 경제생활 수준을 전지구인이 갖고 있다면 지구라는 별이 다섯개라도 모자라다는 통계적 사실은 이러한 비유를 설득력있게 뒷받침한다. 지금의 경제성장에서 자연파괴를 멈추고 조금이라도 우리의 자연을 되살리려면 미국인의 에너지 소비를 지금의 10%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현실의 광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되어야만 우리는 그 개혁의 첫걸음을 옮길 수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빈곤감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주체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선택되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결 역시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두에서 일본의 9조 헌법 교전권이 먼저 언급된 것도 이러한 의미이다. 국민들의 올바른 정치적 선택과 결단에 의해 이러한 것(국가의 살인면허와 우리 지구 경제의 미친 질주)은 고쳐질 수 있고 또 고쳐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다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지금 당장 그 급박성을 인식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여진다.

전 세계가 발전 모델로 삼아온 미국 사회의 헌법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정치적인 선택과 결정의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누구에게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타이타닉에 올라탄 우리들 모두가 암초가 멀지않은 현실을 직시하고 엔진실도 방향키도 우리들이 잡아야 한다. 무력감을 느낀다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우리 공동체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이미 월드컵으로 촛불시위로 대선으로 우리들의 행동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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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루엔자
존 더 그라프 외 지음, 박웅희 옮김 / 한숲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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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할인 매점에 들어서서 상품을 돌아보다가 시식코너에서 맛을 본 뒤 충동구매로 물건을 산 적이 있는가? 카드 결제일 예측하지 못한 액수의 결제대금으로 신용카드를 가위로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은 적이 있는가? 남는 시간을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며 쾌감을 느끼거나 소비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위의 질문들에 적어도 두 개 이상에 '예'하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이미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문명사회의 이기로 찬란한 미국사회, 그 사회속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원인불명의 소비풍조에 대해 저자는 오랜 기간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 결실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다. 이름하여 '어플루엔자'. 그는 우리 사회의 소비심리를 일종의 바이러스로 규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생활에 스며든 과잉소비풍조와 그 근저에 도사린 끊임없는 욕구와 탐욕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로 인한 피해는 우리 사회의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오염된 대기, 죽음의 강, 과도한 스트레스와 인간관계의 파괴와 빈부격차와 위화감, 자원의 탈진, 후손들에게 물려줄 대지의 위기, 보장된 불만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우리가 흔히 경제성장이라는 미명하에 무시해버린 숨겨진 비용들을 이 책은 자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오래된 우리들의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정신적인 삶의 행복 추구와 물질적인 단순한 삶에 두지 않고 오로지 '물질적 소비'에만 둠으로써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상품의 사용가치 그 자체보다는 헛된 소비심리에서만 만족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존엄을 상실시켜버렸다.

이 바이러스는 아직 물리적으로 병으로 치부되지 않아서 병원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그 문제성이 더욱 심각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병을 자각시키고 고쳐줄 많은 의사들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는 당신부터 당신가족의 주치의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어플루엔자라는 현상을 사회계급적 시각에서 조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소비주체의 병이라는 표현을 빌어 사용했다. 그것이 가진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선 미국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가나 기업주의 이윤추구에 대한 비판에서 가진 자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문제해결을 취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고, 다음으로 제3세계 시민의 입장에서는 부의 상대적 박탈감에 의한 위화감 조성으로 마무리짓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모색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서 우리 삶을 재조명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안으로서의 자발적 단순성이 자기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꿈으로써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즉 공동체, 창의성, 사랑, 친절, 자비, 자연과의 유대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단지 소비를 줄이는 것을 넘어 욕구와 필요를 줄이는 삶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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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의 사색 - 재독 철학자 송두율의 분단시대 세상읽기
송두율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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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을 고집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타자에게 열린 친절함만이 상호간의 문제를 화해와 협력으로 이끈다. 재독 철학자 송두율교수는 남북간의 통일문제를 미국과 일본의 논리에 따른 남한 지배층의 논리에 반대하며 북한을 바라보는 새로운 입장과 통일의 조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우선 북한 사회를 파악하는 관점으로는 50년대 이후 있어왔던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로는 어떤 설명도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세계화의 관점을 가지고서도 볼 수 없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북한을 개방시켜 시장경제원리에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관심은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체제로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에 의거하여 그는 북한의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한다. 북한 스스로의 발전 방향에 입각하여 북한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나 세계화의 안경으로 북한을 보지 않게 되고 그러할 때 남북한의 교류와 화해협력의 올바른 토대가 형성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의 통일방안도 상대방의 입장과 현실에서 출발해야 합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와 세계화의 논리가 마치 진리인양 무조건적으로 추종했다고 볼 수 있다.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의 절대주의와 사대주의에 비판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유럽 사회와 독일의 예를 통해 우리 나라의 입장정립에 이정표를 제공해주고 나아가서는 여러 이론과 예술분야를 끌어들여 서양적인 이성과 합리성의 관점이 아닌 우리의 동양사상과 민족사상으로 서양의 한계점을 극복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입장이 자신의 목소리만을 고집할 때 맞게 되는 상황은 갈등과 대립일 수밖에 없다. 열려 있지 않은 이상, 서로의 관점이 공존하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통일은 없다.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물아일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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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상식을 뒤엎는 역사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창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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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와인을 놓고 부르조아의 음식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와인의 맛과 종류를 잘 아는 친구의 식도락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사실이었다. 내 주제에 향기와 맛좋은 와인이 도대체 뭐야? 라고 말이다.

인류역사상 사람이 음식에 쏟아부은 관심과 열정만큼 큰 것도 잘 없을 것이다. 음식의 맛이 바로 음식의 멋이 되고, 그 음식의 멋을 위해 인류가 치른 희생은 너무나도 컸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중세 말 14~5세기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이 와인으로 인해 야기된 것임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향로를 얻기 위해 신항로의 개척에 나섰다가 죽은 수많은 영혼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감자가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대기근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고 난 후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그 밖에도 음식하나로 인생이 뒤바뀌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어찌 여기서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람의 일생은 여러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로써 채워진다. 부욕, 명예욕, 성욕, 식욕 등등....하지만 그 중 사람이 탄생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구나 변함없이(물론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요구하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식욕이 아닐까?

식생활의 습관을 놓고도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한국인의 식습관은 밥그릇과 국그릇을 식탁에 놓고 수저를 사용해서 먹는다. 이를 두고 일본인은 짐승의 식습관이라고 한다. 반면 일본인들의 밥먹는 모습은 밥그릇을 들고서 젓가락으로 먹는다. 이를 우리 나라에서는 걸인의 밥먹는 태도라고 비하한다. 힌두교도들은 소를 먹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이슬람교에서는 돼지를 먹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인구의 40%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음식도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다. 우리는 외국의 여러 가지 문화현상들을 대할 때 가지는 여러 가지 편견들을 피해야 한다.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좋은 것으로 보고 낯설고 어색한 것은 야만인들의 행각이라고 일컫는 태도는 잘못되었다. 음식문화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그 문화가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많은 문화적 세계화의 시대에 살게 되었다. 음식문화도 예외일 순 없다. 그렇다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세계화 추세에 맞춘다고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가 먹는 새로운 음식들을 단지 즐겁게 즐기면서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 이제 와인을 한 잔 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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