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역시, 처지에 따라 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빈둥대면서 읽으니까 책이 다 재밌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도 대체로 좋기만 하다. 일할 때처럼 긴장하지 않은 덕,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보니 정한 시간 내에 읽으려고 애쓰는 덕, 그러면서도 읽다 재미없으면 덮으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한 덕, 논다는 사실 때문에 느끼는 불안을 달래는 데 책만 한 게 없는 덕. 여전히 책 읽는 속도는 느리고 읽는 장르는 편협하지만, 읽는 게 다시 재밌어진 게 어디야.
원대한 꿈으로야 읽는 책마다 기록을 남기고 싶지만 당분간은 그것조차 미루기로 하고 즐겁게 읽고 있다. 다만 너무 엉키지 않게 중간 결산(?) 같은 걸 해보기로 했다. 새로 읽은 책, 다시 읽은 책들 중 각별히 좋았던 책들이 이랬다.
<곰 인형 일요일>
나는 이토록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왜 말이 없니. 너도 날 좋아하는 게 맞니? 과묵한 곰인형 때문에 애태우던 주인공이 어느 밤, 제가 인형이 되어 본다.
갖고 싶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책이 절판이라니, 비룡소 너무해. ㅠㅠ
<부루퉁한 스핑키>
윌리엄 스타이그라고 하면 "슈렉!"이나 "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 같은 작품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요번에 다시 쭉 읽어 보니 이 책이 제일 마음에 남았다. 어른들이 보기엔 '하나도 골낼 일이 아닌 걸 가지고' 골이 난 스핑키는 마음껏 화를 내고, 충분히 보상 받고, 떠들썩하게 식구들과 화해한다. 화끈해!
<고맙습니다, 선생님>
패트리샤 폴라코의 이야기나 그림은 전통의 계승, 시대 변화, 인간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왠지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데(죄송해요) 이 책은 한번씩 다시 생각이 났다. 이번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다시 보니 사야겠단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난독증을 이겨내고, 꿀처럼 달콤한 지식을 맛보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괴물 쫓는 방구 탐정>
강마루를 중심으로 한 탐정단의 활약을 그린 책. 앞의 책 "귀신 잡는 방구 탐정"도 완전 재미있어서 다음 편을 기대했는데, 기다린 보람이 있다. 편마다 화자가 달라 지루하지 않고, 범인이 뻔하다 해도 숨은 사연을 알아내는 과정이 흥미롭다. 재밌어요!
<내가 나인 것>
나는 왜 유명한 책을 이렇게 늦게야 읽을까. -_-;; 명성만큼이나 훌륭한 책이었다. 걸핏하면 야단만 치고 다른 형제와 자기를 비교하는 엄마한테 나는 바로 나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히데카즈의 고군분투를 담고 있다. 이 싸움은 대강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면서 끝나는 싱거운 것이 아니다. 끝까지 간다. 미리 말하자면 히데카즈가 이겼다.
<100달러로 세상에 뛰어들어라>
팔 물건 또는 서비스, 고객, 결제 수단만 있으면 당장 시작할 수 있다! 마이크로 비즈니스의 세계를 소개하는 책인데, 주장이 분명하고 성공 사례가 많아 읽고 있노라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볼 용기가 생긴다. 다만 그 사례들은 미국의 경우라는 것. 이래서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하는 것이냐.
<관엽식물 가이드 155>
지난 몇 달, 우리집에 있었던 제일 큰 변화는 화분이 늘었다는 것인데 나는 이 변화가 아주아주 마음에 든다. 그 영광을 네꼬남과 이 책에게 돌립니다. 실용서란 무엇인가! 실용서에는 어떻게 장인 정신이 담기는가! 이 책이 그걸 몸소 보여준다. 화분 키울 계획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이 책을 보면 키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심리의 책>
어쩌다 보니 읽게 된 책. 하여간 뭔가가 궁굼할 때 시작은 일단 DK가 최고란 걸 새삼 깨달았다. 1) 큰 흐름을 잡아준다 2) 핵심을 표나게 알려준다 3) 다 알려주진 않는다(더 알고 싶으면 알아서 공부하렴) 4) 디자인이 예쁘다(호기심 지속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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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동안 읽지 않았던 소설도 몇 편 읽었다. 소문 많이 났는데 안 읽었던 것, 요즘 많이 얘기되는 것, 오래 전 읽었는데 잊어버린 것... 그러나 어쨌든 올해 봄여름 묶어 제일 마음에 오래 머문 책은 이 책이 될 것 같다.
<백의 그림자>
"무책임하지 않게 착하다. 질척이지 않고 따뜻하다. 요란하지 않게 슬프다."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밝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