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들한테는 부인도 있었고 어린 딸도 있었는데, 그 아줌마는 남편이 죽고 나서 몇 달 뒤에 딸만 데리고 집을 나갔어. 그 후 방앗간 할머니 할아버지는 방앗간 문을 닫고 십오 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그러다가 방앗간 할머니가 무서운 병에 걸린 거야. 아직까지 이 할머니가 걸린 병을 낫게 할 약은 없어. 아니, 한 가지 방법은 있지. 그러니까 그 병이 나으려면 우리같이 어린 아이들이 필요한 거야. 우리 같은 어린아이들의 싱싱한 간을 먹어야만 병이 나을 수 있대. 옛날부터 내려오는 방법이래. 그래서 방앗간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학교에서 혼자 오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어."
작은 아이의 말이 끝났지만 준영은 운동장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준영의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길고 누런 앞니를 드러낸 어느 할아버지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어느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햇다. 낡은 비닐들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방앗간 집 앞에서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낫과 호미를 들고 서 있었다. -23-24쪽
준영은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머리를 흔들어 그 끔찍한 장면을 떨쳐 버렸다. 그러고는 애써 작은 아이에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당연히 믿기 어렵지. 그러니까 믿고 안 믿고는 네 마음이야. 우리가 너한테 믿으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건 아니잖아. 나도 솔직히 네가 믿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우리처럼 겁먹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이 준영을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믿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한 강요 같았다.
작은 아이가 일어서서 그림을 그렸던 흙바닥을 꼭꼭 눌러 밟았다. 이야기하는 동안 나뭇가지로 수없이 긁어서 어지럽힌 흙바닥이 깨끗해졌다.
작은 아이는 바닥에 다시 학교와 마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까?" -24쪽
"이렇게 방앗간을 지나오면 여기 작은 산이 있잖아. 여기가 뱀산이야. 뱀산은 사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지. 그냥 소나무밭이라고 해야 맞을 거야. 학교 오는 길에 너도 봤을 거야. 거기는 뭐 특별한 건 없어. 근데 왜 뱀산이냐 하면, 말 그대로 옛날부터 뱀이 많아서 뱀산이야. 구렁이, 물뱀, 독사, 꽃뱀에 백사까지 뱀이 우글우글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거기는 뱀이 문제가 아니야. 길에서 뱀산으로 한 오십 발짝 정도 걸어가면 땅이 움푹 팬 커다란 웅덩이 같은 곳이 나오는데, 그 웅덩이 아래로 내려가면 아주 작은 무덤이 하나 있어. 그게 아기 무덤이야."
작은 아이가 흙바닥에 반원을 그렸다. 그 순간 준영의 머릿속에도 작은 무덤이 그려졌다. -25-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