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모님은 구멍가게를 하셨다. 대모님은 '성당 엄마'라고 배웠기 때문에 나는 대모님도 "엄마"라고 불렀다(이상도 하지.) 아들 딸이 나보다 훨씬 컸던 대모님은 그런 나를 귀여워하시면서 가끔 가게도 맡기시고, 가게 잘 봤다고 사탕도 주시고 했다. 언니가 학교 가고 동네에 놀 사람이 없을 때 나는 가게 뒷방에서 배 깔고 누워 놀았다. 한번은 그 방에 갔더니 난생 처음 보는 과일이 있었다. 조금 못생겼는데 향은 끝내주게 좋았다. 

"엄마, 이거 뭐야?"

"모과."

"이거, 이거 뭐냐고."

"모과."

"???"

이거 뭐냐니까 뭐가 뭐냐니? '모과'를 '뭐가'로 듣고 당황한 나를 보고 대모님은 빙긋 웃으셨다. 그러곤 내 눈을 똑바로 보시면서 "모, 과."라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해주셨다. 아직도 모과를 보면 이제는 연락이 끊긴 대모님의 다정한 눈빛이 생생히 떠오른다. (얼마나 웃겼을까!)

 

*

주말에 대구에서 올라온 아주버님, 형님, 조카 둘과 함께 강화도의 펜션에 놀러 갔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둘은 30년 가까이 묵혀 온 어색함을 조금 깼고, 나보다 어리고 나보다 예쁘고 나보다 날씬하고 나보다 상냥하고 나보다 어른스러운 형님(ㅜㅜ 게다가 경상도 사투리)과 나는 고기를 처음 먹는 사람들처럼 쉴 새 없이 먹고 또 먹었다. "숙모~" 하고 부를 때마다 애간장을 녹이는 일곱살 대구 소녀 S와, 이제는 제법 말이 통하지만 가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뭐라카노?" 하고 혼잣말을 하는 세살 경상도 남자 K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물놀이를 하고 잔디를 뛰고 불꽃놀이를 했다. 형님 말씀따나 "즐겁다, 맛있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주말이었다. 대구로 내려가면서 형님은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세살 K가 차 출발하자 (역시 혼잣말로) "재밌었어." 하더란 얘길 전해주셨다. 하지만 압권은 일곱살 S의 질문. "숙모는 왜 자꾸 아빠한테 아주머니라 하지?"

 

*

절친의 아들 여덟살 H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멋진 소년. 자기가 다 큰 줄 알고 아저씨처럼 구는데, 얼마 전 제 엄마가 "우리 H, 학교 가 있는 동안 보고 싶어서 혼났네." 했더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구한테 혼나?" 하더란다.

 

*

어린이들은 바보 같다. 그래서 정말 좋다.

 

 

 

 

 

 

 

 

 

 

 

 

 

 

 

 

 

 

 

 

 

 

 

올랴가 병아리에게 양배추 잎을 뜯어 먹인다.

"병아리는 양배추 안 먹어."

엄마가 알려 주었다.

"갖고 있다가 나중에 토끼가 되면 먹으라고 주는 거야."

 

_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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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7-0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과에 관한 에피소드는 저랑도 통해요. 저도 꼭 그랬어요. 이 과일 이름이 뭐냐니까????

ㅎㅎㅎ
아아, 아해들은 이렇게 순진무구할 때 그야말로 천사지요.
병아리가 커서 토끼가 되는 마법이 믿겨지던 그 즈음 말이에요.^^

네꼬 2013-07-08 09:22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래, 내가 분명히 어딘가 또 있을 줄 알았어. ㅎㅎㅎ 세상에 무슨 과일 이름이 뭐가랍니까! 전 그때 그 엄마가 날 놀리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 말 듣고 진짜 엄마한테 가서 이르듯 얘기한 기억도 나네요. ㅋㅋ)

카스피 2013-07-0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 모과를 덥썩 물었다고 맛이 없어 배튼 기억이 나네요^^

네꼬 2013-07-08 09:23   좋아요 0 | URL
차로 마시면 맛있는데 왜 그냥 먹으면 맛이 없을까요! (차는 너무 맛있죠!)

순오기 2013-07-04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가의 나무를 가르치며
"저건 뭔나무야?"
"먼나무"
"뭔 나무냐니까?"
"그래. 그 나무 이름이 먼나무라니까!"
ㅋㅋ
이런 이야기도 들어보셨죠?^^

사랑스런 아이들~~~정화되는 느낌이에요!

네꼬 2013-07-08 09:24   좋아요 0 | URL
응? 먼나무가 있어요 그래? 먼나무람. ㅎㅎㅎㅎ 이 얘기 재밌는데요! 어디 가서 써먹어야겠네요. 순오기님 반가워요!

paviana 2013-07-04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힐링되네요. 저 오늘 기분 더럽거든요. 고마워요.네꼬님 와락 꼭..

네꼬 2013-07-08 09:24   좋아요 0 | URL
아니 어떤 *식이 파비님 기분을 더럽게 했단 말입니까. 데려와요! (주먹)

다락방 2013-07-05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동생 식구들이 다같이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 날따라 유독 예쁜짓을 많이 하는 딸이 예뻤는지 제부가 제 조카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아이구 이쁜 내새끼 넌 대체 어디서 왔니' 했대요. 그런데 조카가 '타미? 타미 소파에서 놀다왔는데?' 라고 했다더라고요. ㅎㅎㅎㅎㅎ 아 이뻐 미치겠어요. 내일 조카 보러 가려고요. 희희.

네꼬 2013-07-08 09:26   좋아요 0 | URL
깔깔깔. 이런 귀요미들 ㅎㅎㅎ 그 타미가 보자기 두르고 찍은 사진 저한테도 있지요. 그 사진 보고 여러 귀요미들이 누구냐고 궁금해했어요. (어린이들끼리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요?) 소파에서 온 타미, 계속 계속 예뻐라!

비로그인 2013-07-0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한테 혼나? 푸히힛~
저희 집에도 몸개그의 달인 바보들이 있는데 나날이 똘똘해지고 있어서ㅠㅠ 가는 날을 붙잡고 싶은 요즘입니다 흑흑....

네꼬 2013-07-08 09:27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바보들이 정신 차리기 시작하면 왠지 저는 늙는 기분. ㅠㅠ 어디다 좀 써놓고 두고두고 놀려주세요. ㅠㅠ (우린 왜 우는 거죠?)

moonnight 2013-07-05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글을 읽으니 눈물이 핑~~ ㅠ_ㅠ 아이들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존재들이에요. ㅠ_ㅠ
세살난 남자아기의 "뭐라카노?"는 진짜... ㅋㅋㅋ
요즘 어쩐지 우울증 모드여서(너무도 한참 가는 우울증 ㅠ_ㅠ), 알라딘에 들어와도 댓글 썼다가 지우고 나가곤 했었는데, 네꼬님 글이 저를 불러내셨어요. 감사드려요. 앞으론 자주 인사드리도록 할께요. ^^

네꼬 2013-07-08 09:30   좋아요 0 | URL
혼잣말이라서 "뭐라카노?"를 직접 듣지 못했는데, 그걸 전해주는 형님 말씀에 의하면 옆에 계시던 아주버님이 "아가 와 자꾸 사투리를 쓰노."라며 걱정(?)하시더랍니다. (저희 아주버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애들이 어린이집 다니면서 사투리가 늘었다고 불평하시는 스타일입니다. 아주버님의 사투리는 어쩔...)

문나잇님, 이리 와요! 엉덩이 좀 맞읍시다!

moonnight 2013-07-09 15:18   좋아요 0 | URL
앗 네꼬님께 엉덩이 맞는 건가요? ;; (괜히 혼자 얼굴 빨개지며 웃고 있다. ^///^)

네꼬 2013-07-10 16:25   좋아요 0 | URL
어멋! 대체 왜!! >.<

2013-07-05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8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licia 2013-07-05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과가 후숙과일인 줄 알고 익지도 않은 파란모과 따왔다가 벌레가 생겨서 버린 적 있어요. 방에다 놔뒀는데 한 달이 지나도 안익는 거예요.ㅠㅠ 인터넷만 찾아봐도 알수 있었을텐데ㅠㅠ 모과와 바보 맞네요 크크
^------^

네꼬 2013-07-08 09:33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저는 "후숙과일"이란 말을 지금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이거 원 이렇게 무식할 수가 있나, 허허허...(괜히 도사풍으로 웃어 보았어요.) 모과가 참 여럿 바보 만드는군요. 허허허...(동굴 에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