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모든 것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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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지만 여러 곳에서, 특히 문학에서 90년대는 없는 것이거나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청춘들이 그랬다. 80년대 청춘들은 우리한테 학생운동 안 해봤으면 말을 말라고 했다. 00년대 청춘들은 취직의 고단함도 모르면서 훈수 두지 말라고 했다. 우리 스스로도 그때 얘기를 할라치면 고작 IMF 얘기를 했다. (나는 왠지 그게 우리도 그런 거 뭐 하나 있다고 조그맣게 항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앞뒤 세대들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덜 불안한 20대를 보냈다. 그래서 다시 말할 엄두를 못낸 건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을 따져 보면 어디 별일 없는 청춘이 있을까. 게다가 그때는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고, 언젠가는 죽는 것이 당연했던 김일성의 죽음이 한때 사회를 뒤흔들었으며, 이름도 생경한 '수학능력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랬던 때 십대를 서둘러 마무리짓고 싶었던, 혹은 마무리를 미루고 싶었던 보통의 아이들 이야기가 『안녕, 내 모든 것』에 담겨 있다.

 

입력된 정보란 정보는 모두 세세히 기억하기 때문에 피곤한 지혜는 배워야 할 것이 폭발하던 그때 우리를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니 준모가 틱과 뚜렛증후군을 앓아 말끝마다 킁킁대고 욕설을 내뱉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모의 파산과 이혼으로 부유한 조부모에게 얹혀 살아야 하는 세미는 겉으로는 번듯해도 속은 허허해 언제나 의식적으로 등에 힘을 주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을 산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반포'로 대변되는 강남 일대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대학에서 처음 (낯을 무척 가리던) 강남 친구를 사귈 때까지, 나에게 강남 애들은 '우리 학교 전교 5등이랑 8학군의 반 5등이랑 비슷하다'는 식의 비교 속의 아이들이었다. 어려운 것 모르고 자라 구김 없고, 한편으론 입시 준비로 개인주의를 다진 아이들. 그 선입견이 아직도 적잖이 남아 있었는지, 세미가 할머니를 따라 강북의 어느 점집을 찾아가며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놀랐다.

 

"차는 남산터널을 지나 시내 한가운데로 진입해 들어갔다. 서울 시내에 오면 나는 항상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나에게는 너무도 낯선 풍경들이 차창 밖을 훅훅 지나갔다. 내 머릿속의 서울은 한강 이남 뿐이었다. 반듯반듯, 고만고만하게 지은 성냥갑 같은 아파드들, 그 틈 사이의 풀밭들, 천장이 낮고 베니어판으로 칸막이를 한 아파트 상가들. 내가 나고 자란 동네가 이 오래되고 거대한 도시의 극히 일부라는 불가사의한 사실이 나를 주눅들게 했다." (82쪽)

 

그래, 내가 난생 처음 강남역에 갔을 때 느낀 당황스러움 같은 게, 그애들한테도 있었을 테지. 강남 사는 친구를 만나 들어간 까페가 한여름에도 유난히 추웠듯, 그애들한테도 오래된 건물들이 주는 두려움 같은 게 있을 테지. 어떤 면에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던 이들이 오히려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데 더 중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세상이라는 게 만만치 않다는 것은 보통의 십대라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감지하는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세미가 사랑하고 따랐던 자유분방한 고모가 남편의 폭력을 감수하며 나름의 안정된 생활을 고수하려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고모의 안주는 조금만 다른 방식으로 세미에게도 이어진다. 

 

세 친구는 십대를 마무리하면서 커다란 비밀을 나누어 갖고 헤어진다.(스포일러가 될까봐 밝힐 수 없는 이 비밀은 실제로는 범죄이지만 내게는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데 같은 비밀을 안고도 셋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 한 명은 먼 곳으로 떠나 자유로운 삶을 시작하고, 한 명은 썬글라스 없이는 밖을 나설 수 없는 팍팍한 삶을 살고, 한 명은 세속의 삶을 받아들인다. 다시 찾아 정리하려 해도 할 수 없는 비밀은 그곳에 묻어둔 채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속의 나는 자주색 더운 교복을, 또는 대학입학 기념으로 산 짧은 주름청치마를 입고 있었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누군가 나의 지난날을, 그때를 이야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때가 있었다고 불러주고 돌아봐주었기 때문에 비로소 '안녕'을 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문인지 책을 읽을 때가 아니라 작가의 말까지 꼼꼼하게 읽기를 마치고 책을 덮었을 때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들을 거기 두고 나는 오늘을 살아야 하니까. 그말은 곧 그때의 나, 그때의 내 모든 것에게 안녕을 고하고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가, 다르다. 다른가, 같다. 그 생각을 하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내 모든 것」을 찾아 들었다. 길에서 나는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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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07-0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1학년때 주유소에서 알바했는데 김일성이 죽었다고 손님이 이야기 해주던게 기억나네요.
참 엄청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마도 땡볕에서 12시간 이상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일하느라 더 덥게 느껴졌나봐요.
비도 내리고 이것저것 옛 생각이 나네요.

네꼬 2013-07-08 16: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해가 기록적으로 더웠어요. 손에 쥐면 체온 때문에 펜대 색깔이 변하는 볼펜이 그때 유행이었는데, 그냥 책상 위에 둬도 저절로 색이 변했지요;; 생각만 해도 또 덥네요. 어휴.

moonnight 2013-07-0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지 마세요. 네꼬님. 토닥토닥.

네꼬 2013-07-10 16:25   좋아요 0 | URL
크헝. "내 모든 것" 멜로디가 시작되니까 울컥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