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책을 새삼 꺼내들게 되었던 것은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 1월 책이었던 <육식의 성정치>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채식주의와 관련이 없었던 것 같은데, <육식의 성정치>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그 책에 할애하고 있다.
퍼시 셸리는 이 신화에 관해 낭만주의적 채식주의식 해석을 내린다. "(인류를 대표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자기의 천성을 크게 바꿨고, 불을 조리에 사용했다. 다시 말해 도살장에서 인간이 느끼는 혐오스런 공포감을 숨길 수 있는 방편을 개발했다. 이 순간부터 질병이라는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의 장기들을 쪼아 먹었다.
'근데적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괴물 이야기에서, 피조물이 불과 고기를 다루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떠돌이 거지들이 남겨놓은 불씨를 찾아낸 피조물은 말한다. "방랑객들이 남겨놓고 간 고기 부스러기를 불에 구웠더니, 나무에서 딴 열매보다 숼씬 더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이런 발견을 육식이 아니라 채소나 과일을 조리하는 데 이용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내가 먹는 음식을 불 위에 올려놓았죠. 열매는 이렇게 하면 그냥 먹을 때보다 맛이 없지만, 견과류와 나무뿌리를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고기 부스러기는 육식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피조물은 이런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을 거부한다. (p 226~227)
사람의 선입견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프랑켄슈타인 하면 그 책을 제대로 읽어본 기억도 없으면서, 만화에 등장하는, 그 괴물을 상상하게 되고, 그 괴물은 절대 채식같은 건 하지 않게 생겨서 고기를 뜯어먹는 모습을 바로 연상하게 된다.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 정말이지 그 이미지를 없애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자꾸 생각난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는 이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르게 여러가지 측면에서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메리 셸리라는 작가의 상상력과 존재론적 가치부여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읽었다. 생각해보니 이 책을 읽기 전엔 그저 어떤 (미치광이) 박사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내어서 그 괴물이 으악.. 하며 달려드는 그런 내용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참으로... 무지했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샤실은 괴물에겐 이름이 없다. 그 괴물을 '창조'한 이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인간이 과학에 몰두하여 끝도 없는 오만의 열정에 불타오르게 되면서 이것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도 못하는 지경에서 무책임하게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고는 자기가 만든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버려버리는 과정은...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과 문명이라는 그 열기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망쳐버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야기한 존재(인간이겠지)가 그것을 얼마나 나몰라 방관하면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명깊었던 부분은 그 '괴물'이 자신의 목소리롤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난데없이 그냥 그 모습으로 만들어져서 만든 사람에게서 버림받고 흉측한 몰골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처음 내가 태어났던 때를 기억하는 건 아주 힘들다. 당시의 사건들은 모두 혼란스럽고 불분명한 느낌이다. 이상한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동시에 보고 느끼고 듣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여러 다양한 감각의 작용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p 136)
그 '존재'는 쫓기듯 어느 축사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는데 그 근처 오두막에 사는 프랑스인 가족에게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온화하고 아름다운 그들을 보며 말을 익히고 글을 익히고 스스로를 가꾸어나가는 모습이 애절할 정도다. 언젠간 나의 진심을 알아주겠지. 내가 아무리 모습이 흉해도 저들은 이해할 거야.. 그러면서 내심 그들을 친구로 삼게 된다.
... 이런 그들을 보고 있을수록 보호와 친절을 갈구하는 내 욕망은 커져만 갔다. 내 심장은 사랑스러운 이들에게 존재를 알리고 사랑받고 싶어 애가 달았다. 그 다정한 표정들이 나를 애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내 궁극적 야망이 되었다. 그들이 경멸과 공포로 내게 등을 돌릴 거라는 생각은 감히 떠올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이 그 집 문간을 찾아왔다가 쫓겨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내가 바라는 건 약간의 양식이나 휴식보다 훨씬 소중한 보물이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친절과 연민이니까. 그러나 나 자신에게 전혀 자격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p 176)
그러나 외면당했고 버림받았다. 그리고 자신을 창조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커졌다. 프랑켄슈타인 근처로 와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요구사항은 하나였다.
... 나는 외롭고 불행하다. 사람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기형이고 추악한 존재라면 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반려자는 나와 똑같은 종족이고 같은 결함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은 바로 이런 존재를 창조해내야 한다. (p 192)
이런 존재론적 비극이라니. 외로움에, 고독에 스스로가 내몰리는 것을 괴로와하면서 자신을 환대할 단 하나의 다른 존재를 기대하는 그 '존재'의 바램이 마음에 와닿을 수 밖에 없었다... 꼭 그 '존재'가 아니라도 이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주 사소하게는 (너무나 주관적인 판단임에도) 못생겨서, 뚱뚱해서, 가난해서, 더 나아가서는 몸이 불편해서, 나이들어서, 성적 취향이 달라서.. 다수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치부하거나 어쩌면 너무나도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해서 아픔을 준다. 내가 왜 세상에 나서 이런 고초를 당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입장이 된다면.
이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도 안 들어줄 수도 없어 방황하던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시도는 하지만 결론을 맺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나가던 것을 없애 버린다. 그리고 나서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고... 결국 프랑켄슈타인과 그 '존재'간의 일대일 겨루기가 되어 쫓고 쫓기는 긴 시간이 이어진다. 그리고..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 그러나 내 존재와 그에 수반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장본인이 감히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게는 비참과 절망을 쌓고 또 쌓아 안겨준 주제에 영영 금지된 감정과 열정을 누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력한 질투와 쓰디쓴 분노가 나를 끔찍하게 허기진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p 298~299)
복수가 즐겁기만 한 것이더냐. 프랑켄슈타인의 고통만 고통인 줄 아느냐. 그런 일을 저지른 나에겐 더 컸을 수 있는 고통이 수반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지내게 해놓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려 바둥거리는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는 복수심을 불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내 분노가, 내 복수심이 흘러넘치는 것을 자제하지 않았다.. 라며 울부짖는 그 '존재'의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울리는 것 같다.
19세기에 지어진 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흡인력 있고 놀랍고 상상력이 만발한 책이었다. 정말 행복한 마음으로 (물론 프랑켄슈타인과 그 '존재'의 불행에 마음은 아파왔지만) 다음 내용이 궁금해 잠을 못 자는 며칠이 이어졌더랬다. 좋은 책이 주는 지극한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껴볼 수 있었던 2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