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몇 자 끼적끼적.

 

1.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가디건 안에 입은 반팔 셔츠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집 앞의 은행나무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곧 저 나무들의 잎들이 노란색으로 물들거고 시간이 좀더 지나면 하나씩 둘씩 떨어지겠구나.... 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 아래 있는 자동차 여기저기에 붙어서 떼어내기 바쁘겠구나... 라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착지. 에잇.

 

2. 가을이 되면 왜 이리 마음이 스산해지는 걸까. 낼 모레 프로젝트 결과물을 내야 하고 그래서 똥줄타게 바쁜 요즘. 어제도 10시에 집에 가고 오늘도 아침부터 정신없이 이것저것 처리하다보니 벌써 11시를 향해 시계 분침이 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여기 들어와서 도닥거릴 정신을 가지는 걸 보면, 아마도 난 가을을 타는 건가보다. 아직 시작이나 하는가 싶은 가을을 탄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걸 보면, 역시 난 가을을 타는 게지.. 하하.

 

3. 일하면서 느끼는 건, 사회생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사회성의 지능이 아닌가 하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이제 실무에서 관리로 넘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더 많은 일들을 협의해야 하고 더 많은 사항들을 설득해야 하고 더 많은 내용들을 공유해야 하고 더 많은 안건들을 거절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역시 사람과의 관계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정말 '지능'이 아닌가 싶은 거다. 몇 가지 독특한 직업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런 것 같다.

 

4. 우리 회사에도 보면, 학교 다닐 때 난다 긴다 천재다 수재다 했던 사람들이 그득그득한데 (난 뭥미..ㅜ) 다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을 못한다기보다는 고객이 거부하거나 팀 내에서 거부당한다. 대화기법이나 일처리능력이나 이런 면에서 자꾸만 부딪히고 자기 얘기만 하고 고객 수준을 맞춰주질 않는다. 물론 그들은 머리가 좋고 그래서 자기들의 이해력보다 아래인 사람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겠지만 사실 그런 '이해력 낮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인거다. 그래서 우리의 '난다 긴다' 팀원들은 잘난 체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 한국말 하는 거 맞냐.. 라는 학교에서는 절대 들었을 수 없는, 지진아들이나 듣는 지적을 당하면서 고스란히 사무실에 남겨진다. 팀장은 미워 죽으려고 하지만, '난다 긴다' 팀원들은 그것조차 그냥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바보인거지 내가 바보는 아니니까 라는 올곧은 정신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난 그들의 뛰어난 머리를 부러워하지만, 더할 수 없이 낮은 사회적 지능은 안타까와 한다. 조금만 사회성이 있으면 저런 자폐놀이를 하지 않아도 될텐데.

 

5. 뭐 그렇다는 거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면 공부를 잘 하길 바라고 수재 영재 천재 소리 듣는 걸 뿌듯하게 느끼는 부모가 많겠지만, 난 생각이 좀 다르다. 공부를 너무 잘 하고 머리가 너무 좋으면 학자가 되면 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아니고서야 학자도 요즘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 못 하면 왕따가 된다. 학자가 안되고 직업을 가지게 되면 다 사람과의 관계고, 의사소통이 key가 된다. 따라서 그런 능력을 키워주는 게 부모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개뿔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6. 바쁘니까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요즘의 시간이 힘들다. 최근에 산 명작들은 다 엄마가 접수하여 읽고 계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나 '카라마조프의 형제' 나 이런 책들은 그저 어딘가 쳐박혀서 좌악 읽고 나와야 하는 고전들인데, 난 사다놓고 표지만 쓰다듬고 있다. 이거 언제 읽을 수 있으려나. 슬퍼하면서 말이지. 책을 못 읽는 일상이 내겐 가장 슬픈 일상이라고 생각.

 

7. 내일 모레 프로젝트 결과물 제대로 내면 난, 내게 선물을 줄 계획으로 몇 가지 예약을 해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건, 이것, 백건우의 피아노 콘서트다. 이번엔 슈베르트다. 계속 베토벤 프로젝트를 수행하더니 이제 슈베르트로 돌아왔다.


 

 

“나이에 대해서는 마음 편하게 생각해요. 워낙 할 곡들이 많아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음악을 이해하는 면이 더 깊어지고, 가까워지고, 어떤 면에서는 더 편해져요. 또 역사적으로 보면 팔순 넘어서도 훌륭한 연주를 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피아노는 성악이나 현보다도 생명이 긴 거 같아요. 그만큼 악기가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레퍼토리가 많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다 못 해서 오히려 걱정이지.” (세계일보, 백건우 인터뷰 中)

 

 

 

 

내가 우리나라 연주자들 중에서 인정하는 몇몇 사람 중의 하나가 백건우이다. 꾸준하고 깊이있고 새로운 것에 대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연주에 인생을 걸고 있다. 쓸데없이 나와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고 성실하게 연주자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슈베르트의 음악을 제일 좋아한다고 할 순 없지만, (사실 그 전의 베토벤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지만, 시간이 없어서...ㅜㅜ) 이 가을에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는 선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 기대된다.

 

 

 

 

 

 

 

 

 

 

 

 

 

 

 

 

 

 

이 책들도 사다놓고 째리고 있다. 백건우 연주 듣고 와서 한번 스윽 봐줘야겠다. 가끔 클래식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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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3-09-1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객석에 백건우씨 인터뷰를 일전에 읽어보니 자신의 일을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임하고 있는지 알겠더군요. 백건우씨의 슈베르트연주 들어보고 싶네요. 가을이랑 잘 어울리겠다.

일 무사히 마치시고 스스로한테 상도 많이 주시는 가을되세요 ㅎㅎㅎ

비연 2013-09-10 22:5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감사해요~ 열심히 진지하게 일하는 사람은 어느새 표가 나는 것 같아요. 저도 이 가을날에 어울릴만한 연주라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