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주가 어떻게 지나갔나 모르겠다. 졸리는 눈을 손가락 두 개로 벌려가면서 자기 전에 책 한줄은 읽고 자려고 노력했던 한 주였다. 그래서 다른 때 같으면 하룻밤새에 다 읽었을 이 소설을 며칠이나 걸려 다 읽었고.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늘 비슷한 분위기다. 나른하고 환상적이나 그 이면에 깊은 상처가 있고 그리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이 있다. 이 책 <겨울이 지나간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있을 법하지 않은 상상 혹은 환각 혹은 체험??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주인공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몸은 매여 있으나 정신과 마음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을 용서하고 지켜야 할 사람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누구나 다 그렇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일생을 관통하며 지니는 상처가 있다. 어릴 때 겪은 일들일 경우가 많지만 어쩌면 살아오면서 어떤 이벤트가 나머지 인생에 내내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누구에게 딱 뭐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내게는 정말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영향을 주며, 어쩌면 매일 매순간 그 영향을 받기도 한다.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아 시설에서 자란 아픔이 있는 주인공 다케와키씨. 일생을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이란 걸 하고 난 후 정년퇴직을 하게 된 날, 지하철에서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된다. 65세. 요즘 같은 때 이제 드디어 제 2의 인생을 살아갈 시기이건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도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다케와키씨. 어쩌면 말하고 나면 너무 간단해지고 말 안하고 있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과거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원은 단 하나.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 뒤, 결혼을 해서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꿈을, 염불이나 신문 기사의 제목이라도 읊조리듯 단숨에 말했다. 평범한 사람은 다들 비웃겠지만 내게 그 꿈은 그들이 가진 그 어떤 장대한 꿈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p 354)
코로나 시국이 되고 보니,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게 깨지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간단한지를 마음깊이 느끼고 있는 시기라서 그런 걸까. 다케와키씨의 이 말이 정말 마음에 콱 박혀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남들은 아무 생각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는 일들이 내게는 버겁고 힘든 일이 되는 것. 딱히 분노나 좌절을 마음에 품고 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마음 속에 계속 켜켜이 쌓여온 불안감과 불행감이 문득문득 엄습하는 인생.
그래서 다케와키씨의 일생을 찬찬히 더듬어 가는 이 책의 내용 속에서 나마저도 괜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헛되지 않았다고. 어려웠고 힘들었고 그래서 돌이켜 생각하기도 싫은 나날들이 있었지만, 이제 와 보니 잘 살아내었다고.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일 수 있겠다 싶었다. 결말이 또렷하게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케와키씨가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들을 좀더 편한 마음으로 보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원하며 책을 덮었더랬다.
아사다 지로의 책은, 늘 위안이다.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척박했음에도 항상 따뜻함과 희망을 남기는 글을 쓴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 누구에게나 있는 겨울, 지금이라면 코로나의 겨울... 지나고 나면 또 좋은 세상이 올거라는 믿음이 마음에 아릿하게 남겨지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