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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의 동굴
호세 카를로스 소모사 지음, 김상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와 당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같은 유토피아일까? 서로 다르다면 유토피아는 60억가지의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셈일까? 누구나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유토피아란 불가능한가? 아마 그런 유토피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에 대한 이데아일 것이다. 그런 이데아는 존재하는 것이며, 도달 가능한 것일까.
소설은 이데아에 대한 이런 의문점을 내비친다. 플라톤과 필로텍스토스와의 대결. 지식의 5가지 요소인 이름, 정의, 심상, 토론, 이데아를 둘러싼 이들의 대결이 전체 맥락이다.
이 와중에 이성과 감정의 대립 또한 드러난다. [동굴]이라는 원본이라 여겨지는 액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이 그렇다. 플라톤이 이끄는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 죽으면서 발생하는 연쇄살인사건. 그리고 그 와중에 보여지는 디오니소스를 숭상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뛰어넘어 광기로까지 이어지는 종교집단이 등장한다. 소설의 재미는 이 사건의 범인과 범죄동기에 대한 궁금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함께 [동굴]이라는 원본을 번역하는 번역자가 역주를 달면서 점점 텍스트 속으로 빨려들어 현실과 텍스트가 교묘하게 뒤얽히는 모습에 있다.
그런데 아테네 시절의 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 수많은 텍스트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지금 맨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네가 똑같은 텍스트를 읽고 나서 반대의 주장을 하는 것 말이야. 책들 속의 단어들이 형성하는 심상이나 이데아들이 그렇게 깨지기 쉽다는 사실이 끔찍하다는 거지... 우리 주장과는 별개의 최종적인 이데아가 존재해야 해.-번역자
라고 우리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누구나 똑같은 이데아가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테네인들은 말장난이나 궤변, 텍스트나 대화에 대한 당신들의 열정 말이오! 듣고 읽고 단어를 풀이하고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논쟁과 반론을 만들어내며, 엉덩이를 의자에 붙인 채로 배우는 당신들의 방식 말이요! 아테네인들은 사유하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또한 글을 읽지도 쓰지도조차 못한 채 즐기며 고통받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더욱더 무수하지만 한 우두머리에 의해 지배받는 또 다른 나라요.(105쪽)
바로 우리의 모습도 그와 똑같지 않을까.
당신이 여기서 나가 첫번째 발견하게 될 것은 단 하나의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오.(107쪽)-크란토르
이 사람은 번역자요. 다른 언어로 쓰인 텍스트의 신비를 풀고자 하는 남자인데, 단지 단어는 새로운 단어로, 그리고 생각은 새로운 생각으로 유도되지만, 진리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오.(189쪽)
나는 단지 내가 볼 수 있는 것만 믿는다네. 추론은 사물을 보는 또다른 방법이지.(132쪽)-헤라클레스
이데아에 대한 맹목적 믿음, 하나의 진리란 없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태도, 과학적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소설 속 세 가지 태도에서 우린 쉽게 마지막 태도를 긍정하게 된다. 물론 액자소설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려니와 현대인의 태도와도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란토르의 경고를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언제나 설명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그것들을 꾸며내는 위험의 소지가 있지.(134쪽) 스핑크스는 자신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잡아먹었지. 그렇지만 헤라클레스, 가장 공포스러운 게 무엇인지 아나? 가장 공포스러운 건, 스핑크스가 날개를 지녔기에 어느 날 날아올라 사라졌다는 거야. 그때부터 사람들은 스핑크스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 엄청나게 더 나쁜 걸 겪고 있다네. 우리의 답변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일세(138쪽)
기하하적인 형태를 도안하고 엄격하게 규범에 따른 윤곽을 그리고 있소! 우리는 즉흥성과 힘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소!(183쪽)과거에 철학은 힘이자 충동이었소! 지금은 무엇이오? 순전히 지성이오! 무엇이 우리의 관심사였소? 만물의 물자체요. 그런데 지금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요!(185쪽)-조각가 메네크로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은 본능이 아니라 이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네.(348쪽)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이제 창조성을 중요하게 여기듯이 즉흥성과 힘과 아름다움으로 또다시 변모하고 있는 것일까.
숨겨진 이데아나 최종적인 열쇠나 궁극적인 의미 찾기를 중단하시오! 읽기를 멈추고 삶을 사시오! 텍스트에서 빠져나오시오! 당신들은 무엇을 보고 있소?단지 암흑만을? 더 이상 찾지 마시오!(366쪽)
액자소설 속에서 그리고 현실 속 번역자와 또 다른 번역자 간에 되풀이되는 논쟁. 결국 사건을 해결된다. 그리고 대결은 끝난다.
범인은 누구이고, 어떤 이유로 사건이 벌어진 것인지에 대한 추리소설적 재미가 소설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큰 요소이다. 그리고 또하나, 이데아와 열정이라는 이름의 본성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흥미를 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계속 굴러가는 텍스트에서 벗어나 현실에 정착하라는 것일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겨난 가상현실은 또다른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책을 덮고나서도 의문은 끝이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어쩌지? 이상도 열기도 사라진 차디찬 현실에 발을 내디뎌라? 그런데 그 현실이 이미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당신의 본능에 충실해야 할 것인가?
이상과 본능이 뒤얽힌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도대체 유토피아는 도래할 것인가? 쾌락은 충만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도 똑같이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단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