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일일드라마 <미우나 고우나>가 인기를 끌면서 그 주인공들 또한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나선재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시끌벅적하다.

일일드라마를 볼만한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 자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선재에게 관심이 쏠리는지 궁금하다. 잠깐 본 드라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끄는 건 봉수아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명절 때 고향집에 내려가면 하는 일이 드라마 보는 것이다. 부모님은 저녁 때가 되면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시간순서에 맞추어 채널을 돌려가며 보신다. 부모님과 대화를 피하고 싶을 때도, 또는 반대로 부모님과 대화를 하고 싶을 때에도 이 드라마는 가장 큰 효과를 가져다준다.

각설하고 그 많은 드라마 중 부모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는 것은 미우나 고우나 였다. 물론 이 드라마 방영 시간대가 황금시간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쩃든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할 캐릭터로 선재를 꼽으신다. 도대체 그 성격과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선재보다도 수아에게 관심이 쏠렸다. 어른들은 그냥 철부지 며느리라고 치부해버리고 넘어가지만, 수아는 정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많은 생각거리와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봤던 수아는 이 시대 결혼이라는 제도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게끔 만든다. 설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친정집으로 가겠다는 수아. 난 내 할아버지를 모시고, 남편인 선재는 선재의 조부를 모시는게 당연하다는 생각. 그래서 같은 시간에 제사가 이루어진다면 궂이 함께 있을 필요없이 각자의 집에서 각자 따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말한다.

또 한번은 카드로 인한 말썽. 시아버지 월급보다 더 많은 카드 영수증. 하지만 그 카드는 친정집에서 대주는 것이다. 내가 시댁에 피해 안 끼치고 친정 집 돈으로 마음껏 쓰겠다는데 무슨 문제인가라고 주장하는 수아.

수아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말도 안되는 처사이기 때문에 충격을 주었다기 보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 차원을 넘어 공감할 수는 없다.

도대체 수아의 기존관념을 뒤엎는 이런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수아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개인과 개인을 넘어 집안과 집안의 관계맺기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 자신은 개인이라는 울타리보다는 자신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행동의 준거로 삼는다. 수아가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가족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 새로운 관계가 탄생했음에도 이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다. 그녀의 결혼은 자신의 가족이 선재의 가족과 혼연되지 않고 잠시 거주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수아에게 이혼은 큰 일이 아니게 된다. 그저 잠시 옮겼던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관념. 즉 나 또는 내 가족이라는 누군가 넘어올 수 없는 담을 가진 정체성은 현재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심중에 모두 도사리고 있는 것들이다. 배타적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나 가족이 가족일 수 있는 이유로 인해 자아는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한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 의해 그 자아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순간 자아는 외부로부터 도망을 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퇴행을 보여준다.

수아는 이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표상이다. 그래서 일견 이해가 되면서도, 그것이 마땅한 자세가 아니라는 점에서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마땅한 자세라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가치관이나 전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마땅함은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오고감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그 자체일 뿐이다. 그래서 수아의 굳건함은 불편하다. 수아의 굳건함이 현대인의 한 단면을 비추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마땅함이 이 시대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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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TV 에서는 인간탐구 대기획 5부작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1부는 남과 여, 2부는 도덕성, 3부는 자아존중감, 4부는 다중지능, 5부는 나는 누구인가로 이루어진 다큐는 아이의 사생활을 넘어 인간의 뇌와 심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많이 소개했다.

이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1부 남과 여의 차이가 생체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

여성은 공감형 뇌를, 남성은 체계화형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렸을 적 남아와 여아간 행동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망막의 두께 차이로 인해 여성은 색의 변화에, 남성은 동작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도 새롭다. 이러한 차이는 성호르몬과 손가락 길이의 관계를 밝힌 존 매닝 교수의 연구가 더해지면서 흥미를 더욱 끌게 된다. 남성적 뇌를 가진 사람은 네번째 손가락이 두번째 손가락보다 훨씬 길고,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통계를 통해 보여준다. 다만 이 비율상 애매모호한 17%가 있는데, 이들은 남성이면서도 여성적인 뇌, 여성이면서도 남성적인 뇌를 지니고 있다. 이런 소수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갑작스러운 변화로 동시에 모두가 소멸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본다.

이런 연구들은 남아와 여아를 키우는데 있어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것과, 소수자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런 차이를 인정하면 차별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4부 다중지능에서도 드러난다.

기존의 아이큐라는 단편적인 인간 뇌의 측정이 아니라, 8가지로 나뉜 다양한 영역에서의 지능, 즉 다중지능을 통해 개인이 가지는 적성과 능력, 그리고 그것에 맞춘 직업을 갖게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8가지 영역은 공간, 언어, 음악, 논리, 신체, 자기이해, 대인관계, 자연 친화로 나뉜다. 이 8가지 중 가장 뛰어난 세가지 영역이 자신의 소질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음악과 대인관계, 자기 이해 능력이 좋다면 음악가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분류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기 이해 능력이다. 반대로 현재 직장인들 중 직장을 그만두거나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자신의 상위 3개 능력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라는 것이 놀랍다.

이런 결과들은 게놈 프로젝트에서 말한 게놈이라는 것이 마치 주역 등을 통한 운명과 많이 닮아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유전자이든 운명이든 자신의 능력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능력에 맞추어 발전시킨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이런 점에서 3부의 자아존중감은 또다른 의미에서 중요하다. 나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하고, 또 인생을 즐기며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아존중감이 높고 낮은 원인에는 선천적인 기질도 있지만 부모의 태도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부모가 자식을 설득하려하거나 가르치려고만 들지 않고, 먼저 공감하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부모와 어린 자식간의 관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듯 싶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마땅히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이 5부작 중 가장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2부 도덕성과 성공확률이다. 도덕성은 단순히 착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도덕성에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심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 능력도 중요하다. 도덕성의 3대 요소로 민감성, 판단력, 용기를 꼽는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 있다. 도덕성이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것인가에 대한 접근이다. 성공이란 의미도 체제 순응적 성공만을 말하는 것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체제에서라면 과연 도덕성은 어떻게 작용해야 할까. 그리고 그 체제에서는 어떤 사람이 성공한 것일까.

도덕성이 가치 판단을 필요로 하듯 도덕성과 성공의 관계 또한 가치에 대한 접근이 필요할 터이다.

아무튼 이 다큐멘터리는 은연 중 소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남성과 여성의 뚜렷한 구분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는 17%의 소수와 제대로 된 도덕성을 갖춘 소수자들(?), 아이들에 억압적이지 않고 행복을 대물림할 수 있는 소수(?)의 부모들 등등. 타인과 같은 또는 비슷한 행동을 통해 또는 소속감을 통해 안심하고 안주하던 때로는 불평하던 것에서 탈출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의 길을 또는 아이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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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3-0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나!
제 네번째 손가락이 (양 손 모두) 두번째 손가락보다 길어욧!
내 뇌의 정체성이...*.*

하루살이 2008-03-06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럼 17%에... 오히려 이런 분들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그래서 희망의 부피도 크다는 것을 ^^
 

요즘 갑자기 홍콩 느와르가 그리워진다. 이쑤시개를 입에 문 주윤발의 모습과, 코피를 흘리는 유덕화, 총에 맞고 쓰러지는 장국영 등. 고등학교 시절 푸른 빛이 감도는 홍콩영화에 반해 프라모델 소총까지 샀던 기억이 있다. 동생과 함께 BB탄을 날리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착각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홍콩 느와르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세월이 하 수상키 때문일련지도 모르겠다. 홍콩 느와르라는 것이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감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자꾸 우울하기 떄문에 당시의 기분으로 되돌아가고싶어하기 때문이지 않는냐는 것이다.

1980년대말, 1990년대 초 홍콩영화의 소재이자 테마는 의리였다. 주인공들이 비록 조직폭력배이거나 범죄자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동경했던 것은 목숨을 내주고서라도 의리를 지키는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이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 악용이 되다보면 처참한 복수의 연쇄로 이어지겠지만, 당시 피끓는 나이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목숨도 바칠만큼 끈끈한 그 무엇을 나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의 의리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웅본색에서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는 주윤발의 모습의 영향이 가장 클 듯 보인다. 돈이면 다 될 것 같은 세상, 돈으로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세상을 대하다보니, 너무 우울하다. 그런데 그 돈을 불쏘시개 정도로 생각하며 친구를 위해, 가족을 위해 피를 바치는 모습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감동적이다.

그렇게 불쏘시개마냥 돈을 대할 순 없을까? 그렇게 목숨을 바칠만큼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순 없을까? 점차 시대에 묻혀가는 내 자신을 돌아보며 홍콩의 푸른 빛 밤거리를 떠올려본다. 영화 포스터처럼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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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비-소백산


동고비 날다-소백산


까마귀-소백산


까마귀 날다-소백산


독수리-철원


독수리 날다-철원


인간 날다-남산


인간 훨훨 날다-남산

날고 싶다는 욕망의 근원은 무엇일까.

하늘을 나는 우리의 자세는 새와 닮아 있나.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만 하는 숙명. 그 숙명에 대한 거부는 비행이다. 팔이 날개가 된다. 그래서 하늘을 난다. 그것은 자유가 된다.

하지만 저 인형들을 보라. 줄에 매달려 있다. 날아간다는 것 조차 의지해야만 하는 것. 끝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는가.

나는 것들의 슬픔을 얼핏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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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올까 말까 하늘은 잔뜩 찌푸린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바람소리가 쌩쌩 추위를 가늠케 한다.

집에서 꼼짝않고 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뒹굴었다.

그시간이 그시간같았다. 세상은 그대로고 나도 그대로 인듯..

창밖으로 시선이 갔다.

어떤 이야기와 영상을 담았는지 모를 전파를 받기 위해 꿋꿋하게 서 있는 안테나 뒤로 구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구름 뒤편엔 자신의 할 일만은 꼭 하겠다는 투로 태양이 반짝였다. 짓궂은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더라도 그의 움직임엔 한치 흐트러짐도 없다. 다만 그 장나꾸러기 구름만이 형형색색 변화할 뿐이다. 그 때 문득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구름이 변화하듯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가듯 내 모습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난 뭘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방구석에 드러누워 몸이나 지지며 망각 속으로 기어들어가려 하다니... 안테나라도 되어 추억이라도 붙잡으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쉬는 날엔 으레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태양처럼 버티고 있는 것인가?  

문득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라져가는 구름이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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