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서 있는 곳으로부터 탈출. 모든게 바뀌는 상황의 즐거움. 그러나 그 즐거움은 조만간 사라진다. 바로 인간의 쾌락적응 능력 때문이다. 감각적이고 생리적인 변화에 빠르게 익숙해지는 뛰어난 능력이 때론 행복의 지속을 방해한다.

살을 에이는 추운 날씨에서 따듯한 실내로 들어오면 천국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곧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공기가 답답해져 온다. 이런 생리적 감각적 적응은 쾌락의 변화라는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이사, 결혼, 직장과 같은 일상의 변화가 잠깐 동안만 행복감을 전해주는 것도 다 이런 쾌락적응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쾌락 또는 행복감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행복에 관한 파이 도표 이론에서는 행복의 개인적 격차 중 50%가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10%가 환경, 40%가 우리의 행동과 사고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10%라는 환경의 변화와 40%라는 행동과 사고의 변화에 있다고 하겠다.

행동과 사고의 변화가 주는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목표를 세워 그것에 즐거운 마음으로 도달하는 자세에 있다. 결국 행복이란 행동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일상이 무료하고 또는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목표가 무엇인가를 둘러보고, 혹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아왔다면, 당장 거창한 목표를 세우기보다 당장 배우고 싶었던 어떤 것을 목표로 세워볼 필요가 있다. 그 배움에 대한 열정이 행동의 변화를 줄 수 있고, 그 행동의 변화는 행복으로 향하는 승차권일 수 있다는 사실.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는 나른한 봄날에 활기를 되찾아 줄 방편임을 알게 된다.

알고싶고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한발 한발 나아가 보는 건 어떨까. 물론 지금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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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로 지구는 평평해졌다고 한다. 네트워크의 발달로 국경과 국경의 의미가 무색할만큼 서로 가까워지고, 세계화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생활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래서일까. 티베트라는 지구의 오지(?)에서 발생한 일도 바로 뉴스로 접할 수 있게 됐다. 달라이라마의 완전한 자치라는 양보적 입장과 완전한 독립이라는 운동가, 그리고 절대 독립을 허용할 수 없는 중국의 입장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설 수도 있게됐다.

하지만, 정녕 우리는 티베트의 참 모습을 보고 있는가. 중국의 통제로 라싸를 비롯해 티베트는 외부와 완전 차단됐다. 평평하다던 지구에 사각지대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네트워크도 힘으로 하드웨어를 점령함으로써 그 작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 평평한 지구는 권력의 평평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언제 어느 때고 기울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티베트는 보여준다.

하드웨어의 물리적 장악만 문제는 아니다. 하드웨어는 놔 둔 채 그 안의 소프트웨어를 장악하려는 의도도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러한 의도 또한 평평한 지구에선 낱낱이 밝혀질 것이라 예상하지만, 실제론 교묘하게 숨어, 또는 힘으로 그 정보를 왜곡시킨다. 개방된 라싸. 하지만 그것은 연출된 모습이었다고 티베트의 승려들은 주장한다.

정말로 평평함이 지구 전체에 퍼져나간다면 자치와 독립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경이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독립과 자치란 같은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치도 독립도 허용않는 중국을 지켜보며 아직도 지구는 평평하지 못함을 알게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 만이라도 어느 정도 평평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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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을 보다 약점에 대해 생각해봤다.

정순왕후와 장태우, 그리고 홍국영간의 역학관계는 한마디로 약점으로 인해 그 우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장태우를 몰아내기 위해 약점을 거머쥔 홍국영, 하지만 그 약점을 얻기 위해 정순왕후에게 약점을 잡히게 된다. 약점은 이렇게 힘의 관계로 나타난다. 하지만 반대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라는 영화에선 서로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친밀함을 더해준다. 이 비밀은 타인에게는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 즉 약점을 서로 공유하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냐 그러지 않는냐에 따라 이것은 힘의 역학관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친밀함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병헌이 자신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친밀함과 약점을 교묘히 이용했기 떄문이다.

때론 기꺼이 나의 약점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기도 한다. 둘만의 공유라는 것을 통해 보다 가까워지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약점이 누군가 제 3자에게 노출되면 이 친밀함은 깨질 수 있는 상태로 돌변한다.

누군가에게 보다 가까워지고 싶다면 약점을 드러내라.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힘을 다투는 경우라면 절대 약점을 노출하지 마라. 하지만 때론 가까운 사람이 멀어져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약점도 간혹 세상을 떠도는 경우가 있다. 그럴땐 이미 떠도는 것을 붙잡을 수 없으니, 그것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그것을 장점으로 변모시킬 방법을 찾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혹,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담담히 포기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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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3-25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면 그만이지만 적은 더 가깝게 지내야 한다
뭐 그런 얘기죠?^^
리뷰를 그새 쫘르륵 올리셔서 읽느라고....
-뱃살의 약점을 극복 못하는 여우-

하루살이 2008-03-26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꿈보다 해몽이...^^
 

안양 초등학생 살해 피의자 정모씨의 범행동기를 놓고 말들이 많다. 정씨가 살해했다는 자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문점은 가시지 않고 있다.

경찰은 정씨의 집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음란물 동영상과 롤리타라는 아동 포르노물을 발견한 사실을 밝히고 정씨가 롤리타 컴플렉스를 지닌 인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문득 만화가 양영순의 아색기가 중 한 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직업이 킬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젊은 사내가 칼 또는 총에 맞아 거의 죽어가면서도 끝끝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죽기 직전 마지막에 한 행동은 컴퓨터에 저장된 야동을 지우는 것. 그때 당시엔 사람이 죽으면서도 체면을 지키려 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번 초등생 살인 사건을 보면서 만화 속 장면에 대한 또다른 생각이 꿈틀댔다. 특히 혼자 사는 독신남/녀의 경우엔 더욱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소비하고 욕망을 배설하는데 야동을 상당 부분 이용할 것이라고 본다. 케이블 텔레비젼의 19금 드라마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인터넷을 떠도는 그 수많은 야동들. 배급과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콘텐트 들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경향은 성에 대해 보다 솔직해짐으로 인해 감추어지고 억눌린 것들로부터 벗어나자는 추세이다 보니, 때론 포르노도 각광을 받는다. 그리고 19금 영화는 숨어서 조마조마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당당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냐에 따라 해석의 차이는 발생한다. 호기심이 왕성한 청소년이 보는 것과, 부부가 함께 보는 것이 다르듯 중년의 독신이 이런 영상에 집착하게 된다면 색안경을 끼게 된다. 무언가 정신적 또는 신체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생각을 먼저 갖는다. 과연 그런 해석은 정당할까.     

피의자 정모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이 사라진 것이 안타깝다. 정모씨의 평소 삶이 범행의 동기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또는 서스펜스 소설에서 말하는 우발성에 대해서도-물론 이 우발성은 그런 우발성을 가져올 경향성을 이미 지니고 있는 자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더욱 크겠지만- 또는 다른 무엇인가의 억눌림이 성적 배설로 소비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접근도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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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네 모녀 피살사건의 범행동기가 돈에 있다는 경찰의 발표를 들으며 안타까움이 더했다. 돈이 사람잡는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돈에 얽힌 참담한 사건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두번도 아니기에 새삼 놀랄 것도 없겠지만, 그래서 또 돈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쨋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번 사건의 경우 더욱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는듯하다.  

네 모녀가 사라지고 나서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실종신고가 들어왔다. 여행간다는 말 한마디가 이들의 실종을 단순한 자리비움으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이 오고 간 행적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아파트 생활이란 것이 철저한 독립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층간 소음을 허락할 수 없는 곳, 발꿈치를 들고 담장 넘어 옆집을 살짝 들여다보는 건 절대 불가능한 구조. 그래도 아파트는 더 낫다. 영화 추격자로 인해 다시 떠오른 유영철의 연쇄살인 사건에서는 그의 거주지가 오피스텔이었고, 그 곳에서 시체를 절단하는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원룸이나 오피스텔의 삶은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삶이다. 이번 마포 네 모녀 또한 한달이든 두달이든 집을 비우더라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철저한 소외 또는 스스로의 격리가 꼭 불행한 일만 초래하는 것일까. 근대로 들어오면서 자아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타인과 구별되는 나라는 생각은 나만의 것을 요구하게 됐고, 그 요구는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방해받지 않는 공간. 그것은 원룸과 오피스텔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파트도 가능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된 도시인은 그 안에서 (가짜)행복을 느낀다. 그 공간에서의 삶이란 오직 소비로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방송과 라디오를 통한 전파 속 목소리와 얼굴이 살며시 어루만져준다. 이것 또한 진짜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은 아니다.

나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 집착이 빚어낸 거주지의 변화, 그리고 변화된 삶의 양식. 내 머리 위에 누군가 살아가고 있고, 내 발 밑에 누군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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