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뱃속이 편안하다고 계속 안주하면 결국 죽음에 이를뿐이다.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고통을 통해 어른으로 성숙할 기회를 얻고 생명도 지속된다.

그렇다. 편안하다고 10개월을 넘어서까지 있다보면 모두에게 해만 끼칠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 밖으로 빨리 나오겠다고 서두르면 그것도 역시 해롭다.

안주와 고통 사이, 중용은 이곳에서도 필요하다. 생명을 지속하고 성장하기 위해선.

단 안주와 평온을 헷갈려서는 안될 것이다. 안주와 고통 사이 평온을 유지하며 우리는 성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성장이 괴로움으로 뒤범벅이 된다면 우리는 피터팬으로 남으려 할 것이다.

안주하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며 고통을 감내하는 법. 그것이 성숙으로 이르는 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림축구와 쿵푸덩크는 닮은듯 다르다. 쿵푸를 소재로 스포츠와 접목시킨 점, 화려한 특수효과, 그리고 포복절도할 만한 황당함 등등이 닮아 있다. 더군다나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가 그렇듯 갈등, 경쟁을 통해 끝끝내 승리하는 감동적 드라마를 선사한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소림축구와 쿵푸덩크는 차이를 보인다. 주인공들이 모두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그 색깔이 다르다. 그 다름은 달인과 천재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주성치를 비롯해 소림축구의 조연들, 그리고 이들의 영향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은 모두 쿵푸의 귀재가 된다. 차를 주차하고, 2층 버스에 올라타고, 넘어질 위기에서 덤블링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주인공들마냥 쿵푸 또한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쿵푸가 삶 속에 스며든 것이다. 모두가 쿵푸의 달인이 된 것이다. 삶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달인들-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보여지듯-을 떠올리게 만든다.

반면 주결륜의 쿵푸덩크는 천재들간의 싸움이다. 이들 천재들의 솜씨는 범인들이 쫓아갈 수 없다. 오직 멀리서 바라보고 응원하는 것 이외에는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오직 영웅적 이미지만 부각된다. 주걸륜 탄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반전과 그 뒤에 이어지는 일상으로의 복귀는 그저 천재의 인간적 성품일 뿐이다.

웃음으로 결말짓는 소림축구와 감동으로 결말지으려 한 쿵푸덩크. 사람 속에 들어와 호흡하는 방식에 있어서 역시 주성치가 한 수 위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 추격자의 인기가 거세다. 잔인한 화면이 눈에 거슬릴수도 있겠으나 영화 관람 내내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럴만하다고 생각된다.

추격자라는 제목이 풍기는 이미지에 걸맞게 도망치고 쫓아가는 장면들이 심장을 죄어온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재미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아 범인에게 근접해가는 것이 아니라, 범행이 이루어진 장소를 찾기 위한 과정에 있다 하겠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범행의 장소를 찾는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장소라는 것은 외딴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옆집이다. 바로 이 부분이 영화의 섬뜩함을 극대화시킨다고 본다.

시골도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집과 집 사이가 담이라기 보다는 울타리라고 여겨진다. 고개를 살짝 들어 서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곳. 물론 이런 삶은 꼰대가 있어 괴로운 부분도 있다. 소위 말하는 사생활이라는 것의 영역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담이 갖는 소통의 부재가 주는 고통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 집을 찾은 손님은 단 1쌍의 부부였을 뿐이다. 옆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범행은 태연하게 계속될 수 있었다.

영화의 또다른 재미는 살인 동기에 있다. 경찰이 기소를 하려해도 그 동기때문에 힘들어한다. 마땅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동기를 성적 불능으로 암시한다. 하지만 범인은 그것을 승화(?)시킨다. 범행 전 죽음을 당하는 피살자에게 물어보는 한 마디.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과연 범인을 납득시킬만한 생존의 이유를 댈 수 있는 피살자들이 있었을까? 지금 당장 나 자신에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보자. 과연 나는 무었때문에 생명을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당위성이란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가를 느낄 것이다. 논리로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없는 존재의 이유.

삶은 살아있음으로 인해 살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오직 그뿐이다. 그것을 이해 못하고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범죄가 되는 것이다. 

영화 속 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삶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자. 그것이 밤하늘에 빛나는 빨간 십자가가 구원이 되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상이 바이러스에 오염이 됐다. 소수만이 면역체를 가지고 있다. 오염된 사람들은 괴물로 변한다. 그런데 왜 꼭 이런 괴물들은 식인의 습관을 지니게 될까. 어쨌든 모든 사람이 대피를 했지만 결국 99% 오염. 1%만이 생존한다. 하지만 그 생존이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가? 괴물은 생존자를 먹어치울텐데... 그래서 해결책은 괴물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 영화는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박사(윌 스미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여기까지면 실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구성.

여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다. 윌 스미스에게 나타난 다른 생존자. 그들은 소위 엘도라도 또는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는다. 생존자들만의 땅. 그곳으로 향하는 사람들. 하지만 윌 스미스는 믿지 않는다. 그런 곳은 없다고. 설상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지금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갈등은 쉽게 해결이 된다.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이 산산조각 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윌 스미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그의 노력과 남은 사람들의 희망이 결국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에 부딪히면 도망가려고 한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첫번째 방법이다. 회피. 이것처럼 좋은 것도 없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회피일 뿐이다.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윌 스미스는 그래서 문제와 정면대결하려 했다. 유토피아로 도망을 가면 과연 그들만의 행복한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더 빌리지'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도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한다.

윌 스미스의 선택은 어찌보면 정답인 셈이다. 물론 그 정답을 위해선 용감하고 똑똑해야만 한다. 보통 사람들은 갖기 힘든 덕목이다. 그래서 '나는 전설'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제를 피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결국 그것에 답이 있는데... 전설을 꿈꾸는 수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스포츠 영화의 특성은 한마디로 도전으로 표현될 수 있다.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에 대한 도전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열에 들뜨게 만든다. 좌절과 실패는 양념일뿐 메인 요리는 아니다. 도전과 성과라는 줄거리를 맛있게 만들어주는 고추이자 마늘인 것이다.

록키 시리즈는 이런 기본적인 구도를 줄곧 지켜왔었다. 물론 록키 발보아 또한 마찬가지다. 빠바밤~ 빠바밤~ 이라는 음악과 함께 록키의 훈련 장면이 보여지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도전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뻔한 이야기임에도,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기 때문에 동일시가 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선 이것 이외에도 시간이라는 양념이 추가된다. 아들이 장성한 나이먹은 록키. 아내는 3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록키. "나이를 먹으면 회한만 커진다"는 그의 말은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 인생이란 상대에게 얼마나 강한 펀치를 먹였는냐가 아니라 내가 두들겨 맞았어도 쓰러지지 않고, 혹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 속에 있다고 말하는 록키는 그야말로 서구 개척자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어찌 카우보이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이겠는가. 쓰러지지 않고 걸어가야만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명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원하던 길이었는지가 문제일뿐.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는 야수를 끌어내 이윽고 한바탕 놀게 만든 후 스러지도록 한 록키의 권투 장면은 반복된 스포츠 영화의 전형이다. 오히려 이 영화가 빛을 발하는 것은 엔딩 타이틀이 오르는 그 짜투리(?) 장면 속에 녹아 있다. 일반인들이 록키가 뛰어오르던 계단을 오르며 록키처럼 함성을 지르고 새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진 엔딩 타이틀 속의 작은 화면들은 환희로 가득차 있다. 영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지 그 작은 화면을 통해 깨닫는다. 사람들은 괴로움을 피하고, 쾌락만을 좇는다고 생각했던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사람들은 도전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도전이 결과에 상관없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록키가 그렇듯 힘차게 계단을 뛰어올라 세상을 향해 고함을 친다. 그러나 진정 그 고함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해 삶의 힘이 되어준다.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의 매력은 메인 요리보다 오히려 후식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다랗고 가파른 계단을 두려워않고 뛰어오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