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필요한 것은 정부로부터 받는 양육 지원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을 사 줄 수 있는 두 명의 부모이며, 그들은 아기에게 사랑 외엔 줄 것이 없는 미혼 엄마가 줄 수 없는 물질적 풍요를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권유하고, 회유하고, 강요하며, 수치심을 주고, 병명을 붙여 진단하고, 몰아붙이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입양 복지사는 이미 알지도 못하는 낯선 부부에게 (돈을 받고) 아기를 구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놓고는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면 자신들에게 아기를 넘기라고 위협한다. 미혼모는 사람들이 사랑보다 돈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61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아동 복지'라는 이름으로 미혼모의 아기에 대한 대대적인 입양 정책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극한의 경험 속에서 취약한 상태에 빠진 미혼모들, 특히 10대의 미혼모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가족들, 남자 친구, 애인과 분리되었고,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결정해야 했다. 친화적인 태도로 미혼모들을 도와주던 복음주의 기독교 여성 종사자들은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회 복지사들에게 그 역할을 빼앗겼다. 아기와 엄마간의 교감과 소통을 강조하던 이전의 기독교 여성들과는 달리 사회 복지사들은 미혼모들에게 아기를 키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더 '훌륭한' 부모에게 아기를 입양 보낼 것을 강요했다. 아기를 위해, 아기의 미래를 위해 입양을 선택한 미혼모들은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괴로워했다.이 책의 저자도 그런 미혼모 중의 한 사람이다.
문제는 수요다. 아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돈벌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아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 왜, 왜 아이가 필요할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기 퍼가기 시대'가 시작되던 미국 사회에서 무자녀 부부는 불완전하고 그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완벽한 가족 신화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자녀가 많은 가족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녀가 없는 가족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가운데 아이가 없는 부부는 여러 가지 다양한 압박에 노출되었다(Reid 1956). (110쪽)
가정의 중심은 부부다. 이는 너무 당연한 말이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완벽한 가정'의 그림 속에는 아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상화된 가정을 완성하기 위해 아기가 필요했다. 어떤 아기인가. 사람들이 원하는 아기는 파란 눈의 백인 여자아기였다. 입양 가능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 부부였고, 이들은 자신들과 닮은 파란 눈의 백인 여자아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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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프렌즈>에는 주인공 챈들러와 모니카가 나온다.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아기를 갖지 못한 이 부부는 여러 번의 다양한 시도 끝에 두 사람 모두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10대 미혼모(금발, 파란 눈의 백인)의 아기들(쌍둥이)의 입양을 위해 입양 신청 절차를 진행한다. 드라마 속에서 이 과정은 아름답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어리고 미숙하지만, 착한 마음을 가진 10대 미혼모가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좋은 부모가 될 열의와 사랑을 가진 두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통해 아기들을 입양시키기로 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이 책은 그러지 않았을 때의 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아기를 빼앗긴 미혼모의 고통은 새로운 아기를 얻는다고 해서 희석되지 않는다. 영원히, 그녀들은 잃어버린 아기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비도덕적 입양 강요가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 아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기를 원하는 백인 중산층 부부의 아내였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아기를 원한다. 나를 닮은, 남편을 닮은 예쁘고 귀여운 아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기를 원한다. 우리 가정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기는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것, 주문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아기는 남녀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고, 여성의 희생으로 완성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 나는, 우리 가정에는 아기가 필요하다. 아기를 줄 수 있는 여성을, 아기를 주고자 하는 여성을 찾아보자. 그 여성은 자신의 아기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이 아기는 혼외자이고, 경제적 불안 속에 성장할 것이 뻔하다. 그 아기를 우리 집에 데려온다면? 나는 그 아기를 내 아이처럼, 아니 내 아이로 키워낼 자신이 있다. 그 아기는 우리 가정에서 자랄 때 더 행복할 것이다. 그 아기는 우리의 아기가 되어야 하며, 내게는 그 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미혼모에게서 그 아이를 빼앗아야 한다.
바로 여기. 아기를 갖고자 하는 나의 욕망과 아기를 자신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는 미혼모의 욕망이 충돌한다. 타인의 욕망에 반하는 나의 욕망은 어느 지점까지 용납될 수 있는가. 나는 어느 선까지 나의 욕망을 타인에게 강제할 수 있는가. 나의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 입양 복지사 로우에 따르면, 입양 부모들은 입양할 아이를 고르기 위해 미혼모 시설에 직접 방문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마들의 극심한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입양의 날 느끼게 될 행복"을 망쳐 버리기 때문이다.(210쪽)
… 입양 부모는 친모를 계속 비가시화하고,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하려고 하는데, 왜 그런지 그 동기를 오랫동안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아무도 누군가의 희생이 전제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다. (212쪽)
백인 중산층 부부들은 '모른 척' 하기로 한다. 미혼모의 딱한 사정을 '못 본 척' 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행복,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게 된 행복은 진짜가 아니다. '아기 퍼가기 시대'는 그렇게, 미혼모들의 눈물과 불행을 통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