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가지 책을 집중해서 잘 못 읽겠어서 차라리 이럴거면 원서를 읽자 싶어서 고른 책이다. 원서는 단어 하나하나 집중하게 되니까 집중이 어려운 이런 때 읽으면 내 주의 산만 치료약으로 꽤 괜찮다.
그래서 재밌다는 평이 많은 이 책을 골랐다.
처음에는 책이 좀 두껍나 싶었는데 읽다보니 훅 빨려 들어가서 꽤나 빨리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재밌었다.
소설의 배경은 뉴욕주 북부 애디론댁 산맥 안에 자리 잡고 있는 Van Laar Preserve 즉 반 라르 가문의 사유지다. 이 땅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호수를 중심으로 언덕이 있는 곳엔 반 라르 가문의 호화로운 저택이 있다. 그 저택은 이름도 있는데 거창하게도 자립(Self-Reliance) 이다. 읽다보면 자립은 개뿔, 반어법으로 이름 지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 땅엔 부유한 집안의 어린이들이 여름방학 동안에 참가하는 <에머슨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엔 캠프 시설 뿐 만 아니라 캠프 지도교사들 공간, 직원들 숙소, 예전에 운영했던 농장 시설 등이 있다.
한마디로 반 라르 가의 사유지 속에서도 부자들의 파티가 열리는 부지와 반 라르 가에서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부지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그로 인한 계층과 빈부의 차이가 확연히 보인다.
소설은 1975년 여름 에머슨 캠프의 마지막 날 13살 소녀 바바라의 실종으로 시작한다.
바바라 반 라르. 반 라르 가문의 유일한 어린 자손이고 아버지인 피터 3세와 어머니인 앨리스 사이의 외동딸이다.
사실 반 라르 가는 꽤나 단출하다. 피터 1세가 처음 이곳의 땅을 사서 별장과 캠프장을 지었고 그것을 물려받은 피터 2세는 당연히 피터 3세를 낳았으니 이렇게 대대로 외아들만 하나씩 낳아서 은행 사업과 땅을 물려받았다.
현재 피터 3세는 아들이 없어서 사업을 가족 변호사의 아들이 물려받을 거라고들 한다.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땐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딸이 있는데 피도 안 섞인 가족의 변호사 아들한테 사업을 물려준다고? 미국 부자들은 그런가?(그럴 리 없다) 하면서 의문을 품은 채 읽다보면 이유는 커다란 비밀과 함께 밝혀진다.
아무튼 이런 반 라르 가의 귀한 딸인 바바라가 실종이 되어서 캠프에서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수색작전을 펼치고 난리가 났는데, 정작 반 라르 저택에서는 여름의 막바지를 보내는 호화로운 파티가 열리는 중이다. 이름하여 “잘가라 흑파리”(Blackfly Goodbye) 파티.
이런 상황은 14년 전에도 있었다. 1961년 바로 이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파티가 열리던 와중에 8살의 베어 반 라르, 즉 바바라의 오빠가 실종이 되었던 거다.
그 당시 베어는 실종된 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높은 확률로 죽었다고 추정이 되지만, 확실히 밝혀진 결론이 없는 채로 사건은 종결 되었다. 유일한 유력 용의자는 베어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다는 정원사였고 수사 도중에 심장 마비로 죽어버려서 더 이상의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고, 반 라르 가족측과 경찰도 그 정원사가 벌인 짓이라는 추론을 믿으며 수색 작업은 중단되었다.
마을에서는 그동안 다른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베어가 실종될 당시 그 지역에서는 유명한 연쇄살인마 제이콥 슬루이터가 붙잡혔는데 그자가 베어를 납치한 거라는 소문이었다.
슬루이터 가문은 원래 반 라르 가문이 현재 소유하고 있던 땅의 주인이었고, 20세기 초 피터 반 라르 에게 땅을 팔았다. 슬루이터 집안 사람들은 나무를 벌목해서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정부에서 숲을 보호해야 한다며 벌목을 금지 시켜 버려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땅을 팔았지만 자연 보호에 적극적인 정부나 그걸 이용해서 땅을 사들이는 부자들에게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런 소문은 에머슨 캠프에서 아이들이 밤마다 모여 귀신 이야기 등등을 할 때 단골 소재로 떠오를 만큼 유명했다. 근데 또 마침 바바라가 실종되기 전 감옥에 있던 슬루이터가 탈옥을 해서 세상에 나와 있었던 터라 혹시나 14년 전처럼 지금도? 라는 의문은 당연히 들 수밖에 없다.
1975년 현재 바바라의 실종과 1961년 베어의 실종 사건을 넘나들며 사건에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의 사정이 펼쳐지고 와중에 미스터리는 점점 증폭되면서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이야기의 짜임이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미덕은 사건 중심으로만 흘러가 도파민만 채우는 그런 미스터리는 아니라는 점에 있다. 배경 설정에서부터 모를 수가 없는 계층의 차이, 엄청난 부를 가진 반 라르 가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마을 사람들의 차이.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끼워 놓은 점.
그리고 1950 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 여성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흐름도 있다.
부잣집 출신으로 18살에 띠동갑 차이나는 남자와 결혼한 앨리스의 숨막히는 결혼생활을 읽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내성적이고 그렇게 지적이지 못 한 앨리스는 남편의 자존감 깎아 먹는 지적질과 훈계로 기가 팍 죽어있다. 파티에서 위트 있는 유머를 뽐내는 안주인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앨리스에게 늘 냉정하게 윽박지르는 남편. 그깟 단어 맞추기 게임 좀 못 한다고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 라고 읽는 나는 분노했다. 앨리스는 파티에서 긴장하는 상태를 느슨하게 유지하고자 술을 마시게 되고 그것을 시작으로 언제나 술에 취해 있는 불안한 상태가 된다.
앨리스의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매우 똑똑했지만 부모님한테 대학을 보내달라고 했다가 비웃음만 사고 결국 결혼을 한다. 그런 시대였다.
그때의 여성들의 삶이란 아무리 부유하게 살았다고 해도 자신의 뜻대로 살기 힘들었다는 답답함을 앨리스의 비극적인 삶이 보여준다.
1970년대가 되어서 쥬디타와 T.J, 루이스, 그리고 바바라까지. 여전히 남성 중심적 사회이긴 하지만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는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사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 캐릭터들과 미스터리가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더욱더 풍부해 진다.
그 시대의 사회적 제약에 의해, 자신이 속한 계층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살거나 그것들을 넘어서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가고 또 가는 도중 서로를 돕는 여성 캐릭터들의 서사가 이 소설의 중심을 잡고 있다. 그래서 퍼즐이 다 맞춰지면 그만인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여운이 남는 이야기로 깊이를 더해 아주 재밌게 읽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누구를 캐스팅할까 생각을 해봤는데, 다른 인물들은 그냥 별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T.J 는 딱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사실 외모 묘사는 다르지만 나는 T.J가 나올 때 마다 영드 “데리 걸즈”의 수녀 교장선생님을 떠올렸다. 자꾸 T.J 대사 읽을 때마다 수녀 교장선생님의 애들 한심하게 쳐다보는 표정과 톤이 떠올라ㅋㅋㅋㅋㅋ 왜그런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