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주장에서 옳은 점이 있다면, 여성 자체가 과정 중에 있는 용어라는 것, 즉 시작하거나 끝난다고 당연하게 말할 수 없는 구성 중에 있다는 것, 되어가는 중에 있다는 입장을 따른다는 점이다. … 젠더는 본질의 외관, 자연스러운 듯한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오랫동안 웅결되어온 매우 단단한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된 몸의 양식화이자 반복된 일단의 행위이다. (147쪽)
여성 자체가 과정 중에 있는 용어라는 것을 ‘완벽한 여성은 없다’로 이해해도 괜찮을까 싶다. (단정하는 게 아니고, 묻고 있는 중입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 혹은 ‘완벽한’ 여성상이 존재하고, 그 여성상에 가까운 사람에게 ‘당신은 매우 여성적이군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완벽한’ 여성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혹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여성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행동, ‘여성적’이라고 규정되는 행동의 수행이 자연스럽고, 능숙하기 때문인데, 그때 ‘여성적’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섹스보다는 사회적 압력과 합의에 의한 젠더와 더 큰 상관관계가 있다. 버틀러가 말한바 ‘젠더는 반복된 몸의 양식화’, ‘반복된 일단의 행위’란 이런 의미일 거라 생각한다. (강한 추측)
난티나무님의 놀라운 재발견에 따라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중 버틀러에 관한 부분을 다시 읽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존재가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거쳐 구성되는 사회적 규범(norm)이자 임의적 범주(category)라는 것이다.(40쪽) 이 문장에 다시 한번 밑줄을 그었다.
똑똑이 친구가 추천해준 조현준의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를 3분의 1 정도 읽었는데 중요한 부분은 여기 63쪽인 듯하다. 중요해 보이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그것이 버틀러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과 닿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젠더 트러블>은 이 사회가 이성애 중심 사회라면
1) 정말 여성/남성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지 ; 없다
2) 여성성/남성성의 내적 본질이 있는지 ; 없다
3) 동성애/이성애의 확고한 이분법이 가능한지 ; 가능하지 않다
를 심문합니다. (63쪽)
『젠더 트러블』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책의 번역자이기도 한 조현준의 문장 중에서는 특별히 71쪽에 눈길이 간다. 나는 또 새삼 프로이트가 궁금해지고.
마지막으로 나의 젠더는 사랑했던 사랑의 대상이 구성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무척 사랑했다가 이별했다면 그 대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습니다. 보통은 일정 기간 동안 대상을 끌어안고 있다가 서서히 잊게 되지요. 그런데 그 대상이 내 안에 남아서 나의 일부를 구성해 버리면 잊을 수가 없을뿐더러 그 대상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내가 사랑했던 대상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된 사랑의 대상을 애증의 감정 때문에 미워하게 되는 것 그래서 사실상 내가 나를 괴롭히는 것을 프로이트는 우울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던 대상이 나를 구성하는 방식은 우울증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71쪽)
오늘 서울 최고 기온 36도. 더위랑 버틀러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버틀러가 이긴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