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애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를 다 읽었다. (53쪽밖에 안 된다. 이 책 안 사신 분, 한 분도 안 계시길!!) 다 읽지 않은 상태에서 썼던 글(강제적 이성애와 정희진 만세!,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315994)에서의 내 예상이 옳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끝부분에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학자인 앤, 크리스틴, 샤론과 에이드리언 리치와의 서신이 포함되어 있는데,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논증이 너무나 훌륭하다.
저는 결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거짓 의식을 '세뇌당한' 상태로 헤맨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표현이 유용하거나 심오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호모포비아는 너무 널리 퍼진 용어라 이성애 페미니즘의 성적 유아론을 밝혀내고 대화를 나누기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에세이를 통해 저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이성애 경험을 비판적으로, 나아가 적대적으로 검토해 보길, 자신이 속한 제도를 비평해보기를, 여성의 자유를 위해 그 규범과 함의를 놓고 투쟁하기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제시하는 수많은 자료에 좀 더 마음을 열어주기를, 이성애 제도 안의 개인적 특권과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자는 해결책에 안주하지 않기를 요청하고자 노력했습니다. (284쪽)
강제적 이성애는 문화 속에 너무나 깊이 내재되어 있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여성들의 ‘원래,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가 사실은 사회, 문화적으로 여성에게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 남자 청소년이 아버지와의 동일시와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증하는 데 비해, 여자 청소년은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어머니에 대한 거부를 ‘강요’당하는 측면이 있다. 남성 간의 친밀감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장려되고 그 감정이 극대화되지만, 여성들 사이의 가장 흔한 감정은 ‘질투’라는 거짓말이 공고화 되어 있다.
강제적 이성애는 남녀 사이에 ‘성적인’ 관계 이외의 관계를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랩 걸>의 저자 호프 자런과 그의 연구원 빌과의 관계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남이 한 팀으로 일하는데, 그 팀의 보스가 여성이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지식과 열정에 대해 위탁한 사이이며,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는 것. 두 사람의 관계는 끝까지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나 역시, 빌에 대한 호프의 신뢰와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엔, 마지막엔, 끝에는 이 두 사람이 맺어지지 않을까. 호프는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고, 빌과 호프의 우정은 그 이후로도 오래오래 지속되었다.
지독한 프로이트주의자인 필립 로스는 소설 속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섹스 이외에 남녀를 이토록 매혹시키는 다른 일이 있을까. 여남 사이의 가장 중요한 일이 섹스라는, 서로의 가장 중요한 ‘볼 일’은 섹스라는, 끌어당기고 끌어가는 이 힘은 섹스 때문이라는, 로스의 말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여남 사이의 가장 중요한 일은 ‘섹스’다.
인간의 몸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에 대해 모두 알지 못하고, 또 우리를 움직이는 동인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예전에는 이를 인간 자체에 대한 명상,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설명하고자 했다면, 과학의 시대에는 이를 뇌과학으로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느낌, 감정, 마음, 사고, 판단, 결정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
성애는 분명 동물로서 존재하는 우리의 주요한 본능 중 하나이고, 성애의 많은 부분이 설명의 영역을 넘어서기는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떤 사람의 어떤 부분에 왜 끌리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생김새나 체취, 목소리 혹은 외모가 그런 판단의 요소 중 한 가지가 될 수 있지만,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적 본능이 우리가 가진 주요한 욕구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한데, 산업 사회의 발달로 인해 ‘경제적’인 이유, 즉 이윤 추구를 달성하려는 목적에 의거, ‘성욕’은 실제보다 훨씬 더 과장되게 인식되고 재현되고 있다.
성욕은 기본적인 인간의 다른 욕구와 마찬가지로 사회문화적인 구조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그 조정이 가능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식당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음식을 빼앗아 먹지 않듯이, 요의가 느껴진다고 오페라 공연을 보다가 그 자리에서 소변을 보지 않듯이, 성욕 역시 그 욕망에 사로잡혔다고 해서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다. 섹스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아무 때나 섹스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인에게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그 욕망의 좌절에 대해 그 일을 불가능하게 한 ‘세상’과 ‘여성’에 대해 (오히려) 분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체슬러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분이다. (혹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 세상에 나온 게 1970년이다.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은 1970년에,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는 1972년에 출간되었다. 당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이 하나의 계급으로, 성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생산 수단과 재생산 수단을 통제할 수 없었던 여성은 성적으로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 치욕을 당했다는 걸,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여성과 광기>, 25쪽) 이들 여성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 세계 가부장제의 상징이었다. 이들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다.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공범으로 아버지의 강령을 시행하는 사람이었다. 이들에게는 남편이 없었다. 남편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억압했듯이 그들을 억압했다. 그들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서로에게 아버지, 어머니, 언니, 동생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남편이었고, 애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서로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이 자기 성애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는데, 아직 주류 사회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케이트 밀렛이 이런 경우다.
레즈비언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운동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1970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 도중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부터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밀렛은 힘겹게 "레즈비언"이라고 답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이라며 치켜세웠던 《타임》은 "페미니스트들을 레즈비언으로 치부하는 회의론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밀렛의 고백 이후 많은 진보적 페미니스트가 등을 돌렸다. (<성 정치학> 작가 소개)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 단일한 계급과 카스트로 억압받는 상황에서 ‘이성애’는 자매들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 면에서 한결같이 ‘나는 그래도 남자가 좋아’라고 외쳤던 필리스 체슬러는 정말 대단하다. (후에 필리스 체슬러 역시 동성애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선봉대장이었던 베티 프리던 같은 이는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시점에 레즈비언들이 젠더 이슈보다 섹슈얼리티를 의제로 내세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여성운동의 동력이 상실될까 두려워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이 글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는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레즈비언들의 이론적 근거는 에이드리언 리치에게서 나왔다.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어니즘의 이러한 경합은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게 만든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작년에 ‘영어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로맨스 소설을 여러 권 연달아 읽었다. 이 쪽(?) 방면으로는 전혀 읽어보지 않았기에 내게는 말 그대로 새 세상이 열렸는데, 때는 바야흐로 뜨거운 여름이었고. 나는 종종 ‘뜨겁다. 덥다. 땀난다.’ 이런 글을 알라딘에 올렸던 것 같다. 그 때, 비밀댓글을 나누는 사이인 알라딘 이웃 수하님이 이런 댓글을 남겨 주셨다.
나는 말 그대로 ‘빵’ 터지고 말았는데, ‘성애’에 대한 이런 무심함이 너무나 새롭고 신선했다. ‘귀찮죠’의 이 3음절은 성애 과몰입 사회에 대한 따끔한 일침 아닌가. 여남 간의 가장 중요한 ‘볼’ 일은 섹스라는 믿음과 강제적 이성애에 대한 반항과 결투, 그 중간 지점에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그 섬은 바로 ‘무성애’의 섬. 더위와 귀찮음에 굴복하는 세계. 섹스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세상. 그런 세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세상은 이성애 세상이라 이것만이 전부라 말할 수 없겠지만, 3년 이상 함께 살고도 가슴이 콩닥콩닥,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 하는 로맨틱한 관계가 가능할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세상은 그런 세상은 아니고. 다만, 그것 말고도 다른 관계, 다른 모습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산다면(1인 가구) 친구가 필요하고, 이웃도 필요하다. 특별히, 서로 의지하고 의탁하는 ‘committed long-term relationship’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 관계에서 로맨틱한 부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적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 관계의 많은 부분은 ‘무성애의 섬’에 걸쳐져 있다는 걸, 여기에 써놓고 싶다.
나만 그런 거 아니겠지. 다행이다. 내게는 수하님이 계신다.
노래는 달콤한 걸로. 우효가 부릅니다. <민들레>. 우리 손 잡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