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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착취 : 돌봄노동
알바 갓비 지음,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4년 11월
평점 :
강제적 이성애와 무성애의 섬 (feat. 수하님)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327166)
[젠더 트러블] 젠더는 반복된 일단의 행위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808169)
이성애와 성 범주와 관련해 이 글과 연관이 있는 예전 글의 링크를 올려둔다. 먼댓글이 없어져서 많이 아쉽다.
평소에는 자주 못 만나던 교회의 구역 식구들이 연말에 한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착하고 순한 엄마들 중에서 자기주장이 강하고 야무진 집사님 1인이 그러는 거다. 아침에 아이들 깨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10분만, 5분만. 딱! 5분만. 5분 뒤를, 그리고 10분 뒤를 말할 때, 그 시간에 맞춰 아이를 깨워야 하는 사람인 나는, 그 시간 동안 '대기'할 수밖에 없고. 대기하는 동안 내 시간은, 그렇게 그냥 흘러가 버리니, 그렇게 잃어버린 내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 그녀의 토로였다. 어느 집이든, 어느 집의 엄마든 겪어내는 일이기에 모두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 맞아요, 진짜! 진짜 그래요. '엄마, 나 5분 뒤에 깨워줘요!'의 상황이 이 책이 말하는 바로 그 '상황', 그 situation이다.
아침에 제시간에 착실히 일어나 작업장으로 착착 걸어 들어가는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가장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맡는다. 전통적인 핵가족 모델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중산층에 속하는 백인 여성은 돌봄노동을 주로 맡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여성의 일'로 여겨진다. 돌봄노동의 핵심은 '감정노동'일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인정을 원하는 우리의 정서 욕구를 채우는 데 무임금 재생산 노동이 필수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무임금 재생산 노동은 개별화된 욕구 충족을 통해 개개인의 차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한없이 복잡하다. (100쪽)
나는 인간이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그런 시도 자체가 모순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입속으로 무언가를 넣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에게 생존을 의탁한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 식물'만이 올곧이 존엄하고 완벽한 자존이 가능하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출생 직후 극도로 유약한 상태에서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신생아 뿐만 아니라, 성인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 친구와 이웃으로부터 얻는 정서적 지지, 정서적 도움이 생존에 필요하다. 생필품이라 할 만한 것들은 국가의 범위를 넘어 다른 국가의 사람들,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을 통해 얻어진다. 아침에 먹은 바나나는 스미후루 감숙왕 바나나.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이다.
요는 이러한 도움, 이러한 돌봄이 여성의 것, 여성'만'의 것으로 강제되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있다. 그것이 왜 여성의 일인가. 왜 여성만의 일인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곧 여성만의 영역이었던 출산에서 여성은 비로소 탈출하게 될 것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예언했던 바로 그 해방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출산은 여성, 가임기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출산을 제외하고 다른 영역에 있어서 여성이 할 수 없는, 즉 남성에게 가능하고 여성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여성이 할 수 있는데 남성이 할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없다.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 아이 목욕시키기와 밥 먹이기, '어린이집 데려다주기'와 '자전거 뒤쪽 잡아주기'의 어느 지점이 '여성적'이란 말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건 '여성의 성역할'로서의 돌봄노동을 의미한다. 이를 '여성적'인 일로 규정함으로써 남성 집단 전체가 받게 된 이익, 남성으로써 누리는 특권에 대한 제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면 이제는 이런 인식이 상식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스스로, 그리고 사회적 압력과 문화의 이름으로 '여성적인 일'에 복무한다. 복무할 것을 요청받는다. 요청받은 수행을 반복한다. 평생에 걸쳐.
이 지점에서 이성애 로맨스가 중요하다.
여기에 이성애 로맨스와 가정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홍보가 따랐다. 이성애 결혼이 곧 좋은 삶이 되었고, 모두가 핵가족이라는 규범적 재생산 제도를 원하는 듯 보인다. 이성애는 무임금 노동의 자연화다. 이성애를 통해, 젠더화된 노동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며 좋은 것이 된다. 로맨스 이데올로기는 감정노동을 일이 아니라 보상으로 보이게 한다. (120쪽)
왜, 왜 이성애가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는가. 될 수 있는가. 여성이 남성을,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잠깐. 누가 여성인가? 누가. 누가 남성인가. '누가' 남성이 될 수 있는가. 누가 누구를 '여성'이라고 혹은 '남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모니크 위티그가 주장한대로, "성 범주는 남성이 여성의 재생산과 생산을, 결혼 계약으로 실제 여성 개인을 전유하는 이성애 사회의 생산물이다(<스트레이트 마인드>, 51쪽) 즉, 일방을 남성으로, 다른 한쪽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인간의 성을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 한정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인위적으로 범주화된 두 종의 인간, 여성과 남성이 구분되고, 이성애만을 긍정하며, 또한 이성애 결혼을 권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가 공고화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젠더 관계를 이념적으로 재정하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던 “여성 논쟁”에서는 두 개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 첫째로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형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 지은 새로운 문화적 규준이 구축되었다. 둘째로 여성은 과도하게 감정적이고 욕망이 넘치며 자기통제능력이 부족한 만큼 선천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성의 통제 아래에 놓여야 한다는 명제가 확립되었다. (『캘리번과 마녀』, 164쪽)
They call it love.
사랑이라 부르며 요구되는 착취 속에 여성들은, 대부분의 여성은 이 명령을 내재화했다. 자신을 희생하라는 요구, 규범적 여성성의 핵심적 요구에 부응했다. 오랜 기간 그것이 여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를 거부한 여성은 폭행당했고, 살해당했고, 미친년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가 온다.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순응하기를 거절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재생산을 거부하는(182쪽), 자주적으로 살기로 결정한 새로운 세대가 온다.
돌봄 노동에 관한 부분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 다루어야 하는 기본 전제를 정연하게 정리한 책이어서 1독을 권한다. 논의는 돌봄 노동 거부를 넘어 가족 해체까지 나아가는데, 4인 핵가족의 한 사람이며, 정형화된 삶의 규준이 강조되는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가족', 다른 '공동체', 다른 '그 무엇'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에 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표지에 속으면 안 되는데, 읽다 보면 사실 이렇게나 예쁜 분홍분홍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니, 우리가 요구받는 그 무엇, 친밀함과 다정함, 그리고 사랑이 이렇게 분홍분홍한 것은 사실이니, 그런 측면에서 제대로 된 선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책, 실비아 페데리치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페데리치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좋은 모델이자 레퍼런스가 된다는 건 신나는 일일 것 같다. 페데리치님, 그거 아세요? 알바 갓비가 페데리치님 좋아한대요. 분홍분홍하대요!

즉 노동 행위가 주체를 존재하게 한다. 주체는 기억, 욕망, 습관을 통해 안정된 실체로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어떤 유형의 노동을 능숙하게 반복하면서 내면화된다. 주체는 사회적으로 성립된 자아를 사회보다 앞선 진정한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감정노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 P45
이성애는 재생산 노동의 자연화고, 재생산 노동에는 자본주의의 자연화가 따른다. 페미니스트는 이런 자연화에 도전해야 한다. - P125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맞서 투쟁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본과 국가의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비용을 지속적으로 늘 리는 주거와 보육 서비스의 무상 지원같이 새로운 사회적 욕구를 만드는 것이다. - P130
사회학자 디무트 엘리자베트 부벡DiemutElisabet Bubeck이 말하듯, 모든 여성은 직접 착취당하지 않아도 젠더에 기초한 착취에 취약하다. 이성애 제도는 자본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이로운 방식으로 착취한다. - P141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 노동은 자주적 주체성과 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이런 유형의 노동이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보다는 그러한 욕구가 노동 주체를 순응시키는 힘이된다. 따라서 자주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재생산 노동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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