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혼은 영원하다고 했다. 궁금했다. 어떻게 소크라테스는 그의 산파법으로 그것을 증명할 것인지. 나는 매료되었고 매료시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반하는 것들이 존재한다'의 명제로 시작하는 그의 논리에 나는 끄덕끄덕 했다. 2천년이 훌쩍 지난 때에 그의 변호를 하듯이 나는 재잘거렸다.
그랬다. 나는 탈무드를 읽고 성이 차지 않았다. 고른 책도 이렇게 얇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읽었다.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온통 뭔가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았고 좌초했다. 먼저 살았던 현인들의 아무 말이나 듣고 싶었다.
공감했다. 백년 동안 반복되어지는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반복 속에 배어있는 고독에.
나에게 참존가는 백년의 '짝지'이다. 참존가의 강렬한 첫 장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들에 매료되고 쿤데라의 말에 심취해있었다.
몇번이나 읽었다. 영원회귀, 백년이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나는 창작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창작하는 사람들. 그 창작의 쉬이 알아주지 못할 고통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곁에 있고 싶었다. 나도 무엇을 만들기는 하니깐.
나의 만듦을 창작으로 포장하고 싶었다. 창작하고 싶었다.
나는 나의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그런데 나는 나의 감정도 잘 알지 못했다.
박박 우겼다. 나는 이 작가와 이 책 모두가 싫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무척 좋아했다는 것을. 에밀 아자르를.
나는 내 감정에 대해 패배자였다.
생경했다. 이름 참 희한하네 라고 했던 그 작가의 책을 읽을 줄은 몰랐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선입견을 가졌다.
그리고 또 반했다. 몹시.
예측대로 되는 것이 어디있을까.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인데.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두번째 책이다. 한강 작가의. 그동안 나는 참 많이 변해있었다. 채 1년이 안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조금 천천히 마시게되었다. 아직도 맛은 모른다. 몰라서 담백하다고 생각하고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세계문학만 고집하던 내가 한국문학도 틈틈이 읽고 있단다. 문동 북카페에 가서 이 책을 신기하게 보았던 때가 추억된다. 비닐에 밀봉되어있는 책을 한참 바라보았다. 사람들도 한참 쳐다보았다.
나는 사진을 찍는다. 귀동냥과 몸으로 배웠다. 그래서 귀하게 읽었다.
이런 사람 처음봤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처음 봤다. 얼마나 많이 인용하며 찬사하며 재잘거렸는지 모른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이 러시아 문호들의 책을 겨울에 운치 있게 읽으며 나는 저 짧게 뱉어진 멋진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길을 잃었다.
책 속에는 길도 있고 답도 있다고 하는데, 길을 잃었다. 겨울에.
길을 잃었다고 길을 찾아나선다. 내 등 뒤에 거대한 태엽이 박혀있고 그 것을 그 새가 밤마다 돌리나부다.
나의 우물에 한줄기 단 한 번 비치는 저 빛. 그 것에 눈이 멀지언정 뚫어져라 보고 싶다. 싶었다.
비극도 희극적인 삶을 살 때는 그저 아름다워 보이나보다. 괴물의 머리 스타일을 상상하며 읽었다. 계절이 바뀌고 노란 은행잎이 권태로운 길 위를 덮을 때.
우리는 언젠가 다 죽는단다.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고 재고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까. 한정된 삶인데. 모든 한정은 부정이라고 스피노자가 말했단다. 그러면 삶도 부정인가보다.
삶이 모두 부정되어지면 인류의 공존이 위협 받으니 소크라테스는 인류애를 그토록 말했고 탈무드는 후세의 교육을 그리 강조했나보다.
그리스는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었고 유태인은 세계를 지배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말하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 유태인이 잘 된 것일까? 소크라테스의 말이 너무 어려웠던 것일까?
마음 내키는 대로 읽었다. 그래서 읽고 싶었던 1984를 집어들었다. 동물농장도 읽고 싶다. 인류의 사회라는 곳에 내가 살고 있다. '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윈스턴이 '줄리아에게 해'라고 한다. '윈스턴'은 '사회'에 속해 살고 있다.
그 '사회'를 벗어날 수 없을까? 심해로 잠수하는 삶의 행위로 나는 그 '사회'를 벗어날 수 없을까? 한정에 이어 '한계'가 여기 쓰여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먹어야하는 동물인 것인가 보다.
우리가 그 동물들에서 더 나아가버려, 먹는 것을 좀더 형이상학적으로 만든 경제 때문에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고, 사유로 벗어나 보기도 하나보다. 그래도 배가 고프면 안되는 것 같다. 날카로워지고 감정의 심연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드니.
게다가 인간의 탐욕은 동물의 본능보다 비극적인것 같다.
그래서 나는 따뜻한 롤빵에 감격했나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보다 '대성당'이 동물에 속하는 우리를 알려주는데 훨씬 따뜻하고 친절하고 정감가는 것 같다.
약처방이 필요할 만큼 생각에 생각을 했나보다. 공감간다. 그 내면의 의식의 흐름에 공감한다.
너덜너덜 해졌다. 독거시킨 마음이 나를 단죄한다.
억측스러운 두 노인이다. 그리고 개츠비.
우리는 나이들어감에 위안과 면죄부를 받고 싶어하나 보다.
그래도 '면죄부'는 나쁜 것이다. 역사가 그렇게 말해준다. 그래도 개츠비는 최고의 작품으로 미국에서 손꼽힌다.
나는 왜 책을 읽을까.
루쉰처럼 대중을 계몽하려는 명백한 이유도 없는데.
얄팍한 초딩인 나는 왜 책을 이렇게 읽을까.
'고민'은 선택하려는 숙고가 아니고 그저 사념의 덩어리인가. 아니면 '위로' 인가. 아니면 억압된 그 무엇이 '분출'되지 못한 상태의 동작인가?
이쑤시개에 촘촘히 무한히 각인할 나의 무의식을 위로한다.
계산사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 우리 모두의 그림자에 - 그 뜻을 아직 모르지만 - 애도한다.
나는 '초딩'이다.
우.또.다.고.그.흘.1.세.있.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