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놓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우리는 습관의 폭압에서 벗어나려고 여행을 한다.

기원전 341년에 사모아섬에서 태어난 에피쿠로스는 어린 나이에 철학자가 되었다. 이유는 평범했다. 의문이 많았고, 어른들이 내놓는 답이 무척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쾌락은 의심스럽다. 쾌락은 어두운 곳에, 닫힌 문 뒤에 머문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겼다.

쾌락을 분석해서 욕망의 분류 체계를 만들었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6였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positive affect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고통 맨 위에 사소한 즐거움을 올려놓고는 왜 행복하지 않은지 궁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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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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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는 말을 과연 쓸 수 있을까? 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해와 공감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성으로 평가한다면 이 책은 많은 사회적 문제 (자살)를 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리고 약혼자가 있고 시간이 지나 결혼까지 하지 않았는가? 사실만 본다면 성실하게 사랑하며 잘살고 있는 로테와 알베르트의 가정에 풍파를 일으킨 격이 아닐까? 성실하게 사랑하는 알베르트도 죄가 될 수 없을 것이며 로테에게 불장난 같은 사랑을 일으키려 한 베르테르도 찬양될 수 없다. 그런데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훌륭한 고전이며 그 시대에도 지금의 시대에도 많은 이들의 진한 공감을 받는다. 마지막 즈음 로테에게 남기는 편지는 그 하나하나가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 편지를 대하는 모든 이들의 - 추신에 정신없는 속물로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 가슴을 녹이고 눈가를 적시게 한다. 작가로서의 괴테가 아닌 사랑을 했던 괴테로서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넘어 타인에 대해 자기 자신처럼 해석하며 이야기 속의 인물을 자신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일치시키는 것 같다. 거의 완벽한 이입.

왜 거의 완벽한 이입일까? 역시 허구 (fiction)이니 거의 대부분의 독자가 그렇게 권총으로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랑에 말 그대로 눈이 멀어 사인을 저지른 사람을 옹호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거의 완벽한' 이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의 완벽한' 이입이기 때문에 우리는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완벽하게 이입해서 자신과 동일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일기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하지 못했던 것, 그것들을 베르테르는 했기 때문에 우리는 몰입해서 읽는 것 같다.

그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거의 완벽하게 이입하지만, 대리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위는 몰입해서 읽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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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23 08: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 책은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베르테르가 보이는 감정과 행동은 과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초딩님 말처럼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리만족을 줬던 것 같아요~!

초딩 2021-05-23 12:10   좋아요 3 | URL
아 네 맞아요. 과잉~!
그래서 더 극적인 같아요. 언제나 리뷰에 더 좋은 의견주셔서 감사합니다!!!

붕붕툐툐 2021-05-24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름만 봐선 이미 읽은 책 같은데 사실 안 읽었네요~ 저도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요!ㅎㅎ

초딩 2021-05-24 09:08   좋아요 2 | URL
ㅜㅜ 정말 유명한 고전인데, 그래서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안 읽은게 많더라구요 ^^ ㅎ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mini74 2021-05-24 1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 새로운 계급인 독일청년들의 고뇌도 담겨 있어 저는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샤로테를 좋아해서 롯데라고, 카드이름은 샤롯데로 지었다는데 ~ 아주 기분 나빴습니다 ㅎㅎ

초딩 2021-06-05 18:17   좋아요 1 | URL
ㅜㅜ 맞아요 독일청년들의 고뇌!
그리고 카드 이름에 샤롯데는 ㅜㅜ 좀 밉네요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서니데이 2021-05-25 0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이 책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읽어서요.
고전은 시간 지나서 다시 읽으면 새롭다는 말도 생각나고요.
초딩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초딩 2021-06-05 18:18   좋아요 2 | URL
정말 고전은 두고 두고 재독해도 좋은 것 같아요.
영혼을 짜낸 그 많은 텍스트 하나 하나를 모두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니 :-)
그리고 한 텍스트도 자신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새롭게 보이는 것 같고요 ^^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 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 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쇼펜하우어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은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후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공부하며 불교를 가장 위대한 종교라 선언했다.

쇼펜하우어는 가장 읽기 쉬운 독일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를 연구한 학자인 브라이언 매기는 "저서를 읽을 때 쇼펜하우어처럼 손에 닿을 듯, 목소리가 귀에 들릴 듯 가까이 느껴지는"11 철학자는 없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그 누구보다 큰 상처를 입은 영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종류가 아닌 정도의 차이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약간의 쇼펜하우어가 있다. 우리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상처의 크기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왜 여기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거요?"
"여기가 환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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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표면surface’이라는 단어와 ‘놀라운 소식surprise’이라는 단어는 어근이 같다.

우리의 눈은 보통 1초에 최소 세 번 움직인다. 하루에는 대략 10만 번 움직이는 셈이다.

"쳐다보지 마세요!" 강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스캔하세요!"

우리는 응시할 때보다 훑어볼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전부 제시되어 있다.

겨우 20대 때 완성한 이 작품을, 쇼펜하우어는 "한 가지 생각의 산물"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설명하는 데에는 1156페이지가 필요했다.

책의 첫 문장부터 상당히 특별하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자기 정신에서 현실을 구성한다는 의미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그의 생각이고,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다.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였다

관념론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우리의 인식 능력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에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칸트는 이를 예지체noumenon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이를 이상적인 형태의 세계라고 불렀다. 인도 철학자들에게 이는 곧 브라만이었다. 이름은 다 다르지만 개념은 동일하다.

칸트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실재가 단일하고 통일된 독립체이며, 비록 간접적일지라도 접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의지는 끝없는 노력이다. 만족 없는 욕망이다. 영화 없는 시사회, 절정 없는 섹스다. 의지는 스카치위스키 두 잔으로 충분할 때 세 번째 잔을 주문하게 만든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예술은 의지라는 끊임없는 분투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유예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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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에게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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