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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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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즘 CF의 문구이다. LG 광고의 문구로 기억하는데 요즘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광고 문구가 아닐까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 착각한다. 창조론으로 대변되는 기독교 신앙을 비롯하여 종교적인 가치들을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오직 물질과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한 과학만이 신의 위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라는 우상을 타파하면서 과학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세우는 격일까? 

  아직까지도 기억하는 사건이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일까? 내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것을 아는 과학 선생님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당시 수업은 진화론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분이 그렇게 무식할 줄은 몰랐다. 감수성이 한참 예민한 중3 남자애를 세워 놓고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아 진화론이 옳으냐 창조론이 옳으냐?" 내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반 아이들은 내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해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으로 받아가면서 무슨 대답을 해야할 지 모르는 나에게 과학 선생님은 결정타를 날리셨다. "어떻게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비이성적인 사람이 있지? 저혀 과학적이지 안잖아." 그 이후 나에게 과학은 정말로 짜증나는 과목이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물리학에 재미를 들려서 중3때 고등학교 물리책을 구해서 나중에 물리학도가 되겠다는 야심찬 꿈까지 꾸었지만 말이다.  

  시간이 흘러 과학과는 상관이 없는 문과대학을 갔고, 신학과 철학과 윤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곁가지로 진화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상처는 잊혀져 갔지만 다른 이유로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왜 아무 말도 못했던가? 왜 그 정도의 인품과 과학에 대한 맹신을 가진 사람이 과학 선생님이 되어 있는가? 물론 아직도 어딘가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계실터이다.  

  지금까지 과학은 자기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과학적인 맹신에 빠져 있었다. "개인 자신, 개인의 기쁨, 슬픔, 기억, 야망, 정체 의식, 자유 의지는 실은 신경세포와 그와 관련된 분자가 결합하여 활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P.252)"는 저자의 지적은 과학이 이미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리기화 되었고 신앙화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과학적인 맹신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본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적인 맹신이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맹신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진화론이 원래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어 점점 거시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져 갔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오류가 되는 것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들을 확대해석 하는 방향으로 과학을 왜곡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역설적이게도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오류가 명확해져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깊어질수록 자연의 신비에 대하여 경탄하게 되고 신을 더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핵물리학과 유전과학을 비롯하여 최첨학문에 종사하는 과학자 중에 종교인, 특히 세상의 창조를 주장하는 기독교인이 많은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니겠는가? 

  사람의 가치에 대하여 논한 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사람의 몸값은 얼마나 될까? 몸을 공업제품으로 환산해보자. 체중63kg 인 성인의 육체로 무엇을 얼마나 만들 수 있을까? 지방분으로 비누7개를 제조할 수 있다. 인으로 성냥개비 머리 2천 2백개와 마그네슘으로 설사약 한 봉지를 만든다. 인체에 포함된 철로 못 한 개와 탄소로 2천 자루의 연필심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5만원 정도에 불과 하다. 그러면 인체의 수분을 제거하고 화학약품을 만들면 그 값은 얼마나 될까? 화학자들은 인체를 재료로 수 십 억원의 약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인슐린 알부민 콜라겐 등은 매우 진귀한 것들이다. 인간 DNA와 호르몬 등은 수 억 원의 가치가 있다. 

  만약 사람의 가치를 이렇게만 판단한다면 너무 비정하고 차갑다고 사람도 아니라고 니난할 것이다. 진화론이 꼭 이렇다.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에 대한 것, 비 물질적인 것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과학의 정신일까? 정글의 법칙으로 사회를 설명한다면 너무 비정하지 않는가? 실제로 역사상 진화론를 맹신한 나머지 인종 청소라는 인류 최악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국가의 강제에 의하여 약자를 거세하는 비인간적인 만행이 자행되지 않았는가?  

  이제는 과학이 좀더 인간적이길 원한다. 따뜻하길 원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길 바란다. 진화론이라는 맹목적인 우상을 타파하길 바란다.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갖게 된 작은 바램이다.(물론 내가 기독교인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ps. 재미있다. 일반 과학서 보다 쉽게 쓰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하다. 읽다가 발견한 오타 한 부분 297페이지 2번째 단락 3번째 줄 "조건을 부여했다. 주었다. => 조건을 부여했다. 혹은 조건을 주었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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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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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책을 읽으면서 왜 자꾸 개그가 떠오르는 것인지? 역사의 공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는 동혁이 형의 개그가 떠올랐다면 이번에는 남보원이 떠올랐다. 특히 박성호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말이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내가 한 마디 던지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강기갑 의원을 패러디한 복장에 체신머리 없이 행동하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게 던지는 말 한마디.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누가 그랬던가? 이 시대 대한민국의 최대 화두는 먹고사니즘이라고. 살림살이로 대변되는 경제 문제 때문에 우리는 아주 황당한 대선을 치르지 않았던가? 유력한 후보자의 비리와 불법과 부도덕이 폭로되어도 지지율이 꼼짝도 하지 않는 기현상을 이미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듯이 경제에 있었던 것이다. 저자가 책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했던 말 "무능한 정부보다 부패한 정부가 낫다."는 것이 지난 대선을 바라보며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이유가 아닌가? 오죽하면 외국 유명 언론매체에서 정책은 없고 오직 경제문제만 있었던 기이한 대선으로 평가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이명박 대통령이 온 국민의 기대를 안고 대통령이 되었다. 대선 CF 중에 한 할머니가 나와서 국밥 한 그릇 퍼주면서 "이눔아 이제 다 먹었으니 경제를 살려라."하던 말 한마디가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치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치부하면서 이명박 정부는 747공약을 내세우며 불도저 식으로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얼리버드 시드롬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면서 정신없이 밀어붙인다. 종부세를 손보고, 제2롯데월드를 허가하고, 4대강 살리기에 돈을 쏟아 붓고, 고환율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외환을 쏟아 부으며 연일 강공 드라이브를 걸었다. 누구하나 브레이크를 걸지 못할 정도로 밀어붙이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저자는 노가다식 정치라고 평가한다.   

  MB는 1970년대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주요 건설공사들을 오히려 공기를 단축해 끝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공에 기초해 월급쟁이로 최단 기간 내에 CEO에 오르는 등 MB신화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 대통령이 이 같은 자신의 성공신화와 한나라당의 다수 의석에 기초해 속도전, 돌격전을 내세운 공기 단축의 '노가다 정치'에 나선 것이다. 즉 한나라당의 의원들조차 그 내용을 잘 모르는 85개의 법안을 제대로 된 심의도 없이 날치기 통과시켜 역사를 되돌리려는 강공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를 단순히 공기를 단축해야 할 건설공사 정도로 간주하는 이명박식 노가다 정치가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P.109) 

  이명박 대통령은 성공신화, 다수 의석을 기반으로 하여 속도전 돌격전을 벌이면서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면서 CEO 대통령의 이미지, 불도저식의 국정운영을 스스로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인가 정신없이 몰아치고 하루에도 수십가지 사건이 터지니 어설픈 코미디 보다 뉴스가 더 웃기고 재미있게 되었으며, 신경민 앵커라는 불세출의 명언가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잠깐 곁길로 가지만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남는 신앵커의 클로징멘트는 이것이다. 

  "이번 주에는 눈에 띄게 친절했던 기관들이 많았습니다. 대법원은 몰아주기 배당한 서울중앙법원 조사에서 끝없이 친절했습니다. 대교협은 의혹 받은 고려대 판정에서 망외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문방위원장은 기습 상정에서 누군가를 위해 몸을 던지는 친절을 보였습니다. 총 맞은 것처럼 친절했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단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도록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던 2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연일 서민을 위해, 국민을 위해라는 말로 수없이 많은 볍률들과 정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쪽에서는 한나라당을 따라오라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반MB를 위해서 연합해야한다고, 힘을 실어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한마디만 묻고 싶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MB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도, 한나라당을 밀어 과반의석을 준 것도 결국은 살림살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다른 것은 몰라도 살림살이 문제만큼은 목숨걸고 해결해야 한다. 그게 이치고, 예의다. 그런데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다. 곳곳에서 죽겠단다. 안치환의 "아이고"라는 노래 가사가 80년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청년실업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청년실업자는 통계라는 사기에 가려져 투명인간 취급당하고 있다. 7% 성장이 5년동안 총 누적 성장이냐는 농담이 진담으로 들린다. 비정규직은 노동의 유연화라는 말로 정당화 된다. 오히려 더 유연화하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정신나간 의원들도 있다.  

  야당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여당이 독주하면 야당이 막아야 하는데, 그들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있다. 책임을 회피하면서 무조건 여당이 잘못했다고 자기들을 밀어달란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같은 진보 정당들은 생존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정당들이 국민과 분리되어 헛다리를 집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기 대문이다. 손호철 교수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류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비례 대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비례 대표의 취지가 관철될 수 있도록 하한제 폐지, 독일식 도입, 비례 대표 선발과정의 투명화 등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46점 민주주의를 벗어나는 길이다. 문제는 허무주의를 넘어서 생산적 대안을 중심으로 민심을 조직하는 것이다.(P.168)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의 주장의 핵심은 단순히 쌍용차 사태의 진짜 책임소재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를 통해 미래를 배우자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다시 쌍용차의 해외매각설이 등장하고 있다. 77일간의 영웅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런 역사적 교훈을 배우지 못한 채 또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원죄문제를 쟁점화하지 못한 진보진영의 잘못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P.190)  

  하나는 168페이지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잘못된 정치체제 때문이다. 그런데 현 정치권은 더 악한 방향으로 개혁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과오를 떳떳이 인정하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서 장기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불신을 심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애초에 무능에 질려서 부패를 택한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었다면 능력은 보여줘야 하지 않았었는가? 능력이란 "살림살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저자의 바램대로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가 구현된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최우선적으로 "빵을 위한 정치"만큼은 충족시켜워야 하지 않을까? 여야 상관없이 정치권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빵을 위한 정치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뻔하다. 고용유연화, 민영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삽질, 뻘짓하면서 벌이는 토목건축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만약 해소가 어렵다면 적어도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리당략을 뛰어넘어 대승적으로 연합해서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그렇게도 애증을 갖고 쓴 소리를 해댄 노무현이 차라리 그립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겠는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명박 대통령 뽑아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저자의 생각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이 책을 낸 이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다. 정치평론이라는 것이 오답맞추기는 아니지 않은가? 시험 다 본다음에 답지 맞추어 보면서 그때 왜 그러지 못했는가 생각하기 보다는 저자의 말대(168, 190페이지 인용문)로 무엇인가 생산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어디에도 생산적인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저자의 깊은 생각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예전에 게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거봐, 내 말이 맞지?"라고 의기양양해 하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어떤 님이 서평을 쓰면서 이러한 출판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고 했는데, 나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자의 생각과 대안이 깊고 세밀하게 담긴 챕터가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 책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글 모아서 책으로 편집하시니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글샘님의 말대로 대충 눈에 보이는 오타를 찾아봤다. 띄어쓰기는 너무 많아서 아예 찾지도 않았다.  

  38p 2번째 단락 4번째 줄 매달려고 => 매달리고, 126p 2번째 단락 2번째 줄 버터 => 버텨, 127p 2번째 줄 외국어 표기상 프레미엄 => 프리미엄, 278p 7번째 줄 진조진영 => 진보진영, 319p 밑에서 두번째 단락 2006 => 1996, 김연철게이트 => 김현철게이트, 320p 2번째 단락 6번째 줄 발본적인 => 근본적인, 320p 밑에서 7번째 줄 후진이나 => 후진 일이나, 같은 페이지 밑에서 4번째 줄 거절하다 => 거절하자, 321p 양산 선거에서 간신히 => 양산 선거에서 간신히 승리한, 322p 위에서 3번째 줄 가두었고 => 거두었고, 326p 마지막 단락 수정을 하면 하는데로 => 수정을 하면 하는대로, 같은 페이지 같은 단락 딜렘마 => 딜레마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고 해도 이정도의 오타와 문법이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띄어쓰기는 아예 찾지도 않았음을 기억하자.) 조금만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영어 조기 교육을 외치며 국어 교육은 무시하면서 세종대왕 동상 하나만 광화문에 덩그러니 세워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편집과 맞춤법부터 배우는 것은 어떨찌? 책에 대한 평점 중 최소한 별표 한개는 여기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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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 2010-02-1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꼼꼼히 읽으셔군요!! 오타까지 다 찾으시다니!! 출판사측에 알려줘야겠네요^^

saint236 2010-02-20 11:32   좋아요 0 | URL
책은 잘 받으셨는지요. 동봉해서 보내주신 에코책은 정말 감사합니다.

전호인 2010-02-23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리뷰입니다.
운전기사까지 동원하여 세금포탈을 할 정도의 사적인 경제관념으로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능히 이 나라의 경제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국민의 살림살이도 챙겨주지 않을까 라고 위안을 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근성이라면 가능하겠지 라고 말입니다. ㅋㅋ 결국은 사기혐의까지 있다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국민을 대상으로 엄청난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거겠지요. 씁쓸합니다.ㅜㅜ

saint236 2010-02-23 17:37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렇게 아끼고 독하게 벌어서 혼자 먹으니 문제이죠. 문득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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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개콘을 못봤다. 시간도 안맞고 식상해서이다. 식상하니 인터넷에서 찾아서 검색해볼 이유도 없고.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도 개콘을 보게 되었다. 봉숭아 학당 코너였는데 역시 변한 얼굴이 없다. 다 그 놈이 그 놈이다. 그러다가 문득 깔깔이에 촌스러운 헤어스타일로 등장하신 그 분을 보았다. 그 분은 바로 동혁이 형님이었다. 바로 이분이다. 


  1월의 마지막 주인 것 같았다. 왠 촌스러운 패션이냐. 개콘도 드디어 갈데까지 갔구나 생각하며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텔레비전을 바라보게 되었다. 학자금에 관한 동혁이 형의 독설이 구구절절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후로 이렇게 내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 준 사람은 없었는데, 동혁이 형이 가려운 부분을 아주 시원하게 긁어 주었던 것이다. 1월 31일자 동혁이 형의 주옥같은 대사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세상 누구보다 샤우팅을 사랑하는 형, 동혁이 형이야! 

  형이 짜증 안 내게 생겼니? 아니 뭔 놈의 대학등록금이 그렇게 비싸? 신문기사의 통계자료를 보니까 참나~ 아니 10년 동안 물가도 36%가 채 안 올랐는데 뭔 놈의 대학등록금은 116%가 오르냐고. 이거 왜 한 번 오르면 내려올 줄을 모르냐고. 

  아니 대학등록금이 무슨 우리 아빠 혈압이야? 아니 한 학년 올라갈 때마다 우리 아빠 얼굴에 주름살만 팍팍 늘어~ 우리 아빠가 무슨 뻔데기야? 어!? 대학총장이 우리아빠 얼굴에 보톡스 놔 줄꺼야? 이거 아니잖아~ 

  아니, 형 개그가 어렵니? 

  형이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니~ 그리고 뭐야 뭐? 학자금 상환제도? 아~~ 등록금이 비싸니까 돈을 꿔줄테니 취업 후에 갚아라! 그럼 취업 안 되면 안 갚아도 돼? 내가 만약에 돈 못 갚으면 나 잡으러 쫓아다닐거야? 니들이 무슨 추노의 장혁이야? 웃통 까고 식스팩 보여주면서 말 타고 올꺼냐고? 다그닥 다그닥! 오지호랑 이다혜를 잡아! 언년이를 잡으란 말야! 왜 불쌍한 대학생을 잡냐고~ 어!? 

  근데 말야 간과해서 안 되는게 하나 있다. 학자금 상환제도? 이거 나쁜게 아냐~ 제도는 좋아 제도는 아주 쿨해~ 근데 인간적으로 말야 이자가 너무 비싸잖아~ 이자가 너무 쎄다고~ 아니 대학이 세계적인 학자를 만드는 데지, 세계적인 신용불량자를 만드는데야? 옛날에 우리 아버지들이 소 팔아서 등록금 댔지만 지금 소 팔아서는 택도 없어요. 왜 불쌍한 우리 아버지들이 소처럼 등록금 대려고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냐고~ 우리아빠가 무슨 워낭소리야? 어버이날에 가슴에 카네이션 대신 목에 방울 달아 드려야 돼? 딸랑딸랑?! 이게 기쁘니? 어떻게 따뜻한 봄이 오면 쟁기질하러 갈까? 이거 아니잖아 슬프잖아. 가르침이 기뻐야지 슬퍼서야 되겠니? 어? 형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야!  

  등록금 인상 등록금 대출! 이런 소리하기 전에~ 그냥 쿨하게 등록금을 깎아주란 말야~  

  봐봐~ 사람들도 원하잖아~형이 괜히 형이니? 너희들의 동네 형. 그래 동혁이 형이야! 

  이명박 대통령의 반값 등록금 공약이 空約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대학 등록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선 후보이던 시절의 이명박 대통령은 "등록금 받으면 돼지."라는 말로 응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민경제, 반값 등록금에 대한 공약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고 깎아달라고 말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정당한 요구를 떼쓰기로 몰아붙이며 강제 해산해 버렸다. 각 대학들은 학원복지나,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낮춰주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학원 자주를 외치던 대학들의 그 의연한 기세는 어디로 갓는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왜 "역사의 공간"이라는 서평을 쓰면서 동혁이 형의 개그를 인용하는가? 왜 이 책을 읽는 내내 동혁이 형의 개그가 머릿 속에 맴돌았는가? 권력에 의해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소수자들, 주류에서 밀려나 타자가 되어버린 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을 그나마 시원하게 긁어 주는 것이 동혁이 형의 개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권력의 비리를 폭로하던 PD수첩도 사라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의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윤도현도, 김제동도 없어졌다. 인터넷 글도 실명제가 된지 오래이고, 요즘은 트위터도 감시하겠다고 한다. 맘에 안들면 입다물라고 얼르고 윽박질러서 침묵하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소통법이 아닌가?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컨테이너로 명박 산성을 쌓아버리는 현정부 하에서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침묵하던지 아니면 다른 우회로를 찾지 않겠는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들이 동아신질서나 대동아공영론에 대해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내선일체론자들이 시끄러운 수다를 펼치게 되었던 것이 그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식민주의자들의 고무와 요구에 기인하는 것인 만큼, '동아신질서'나 조금 뒤의 '대동아공영론' 같은 제국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의 침묵은 식민주의자들의 강력한 검열과 억압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치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사안에 대해 철학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지극히 곤란하게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특히 대동아전쟁의 발발 이후 여구되었던 '총력전 체제' 하에서, 정치적 사안을 직접 다루고자 하는 한, 어떠한 비판적 발언도 불가능하게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P.405)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던 그 시절 지식인들이 택했던 방법은 무엇인가? 문학이라는 우회로가 아니었던가?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CEO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대통령에게 있어서는 말 안듣는 사원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정치 외적인 것들일 수밖에 없고, 그 중에 한가지가 풍자 코메디가 아닐까? 풍자 코메디가 유행하던 시절이 어느 때인지를 떠올려 본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오버센스가 아님을 알 것이다. 아니 차라리 오버센스이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동혁이 형이 후련하게 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주 동혁이 형의 주옥같은 개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오늘은 동혁이 형께서 어떤 주옥같은 개그를 해주실까?" 한편으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는 것 같아서 걱정도 된다. 저러다가 한방 맞지 싶다. 한방에 훅 갈 수도 있을 정도로 수위가 높다. 물론 지금을 기준으로 수위가 높다는 말이다. 걱정반 기대반의 마음으로 매주 동혁이 형을 기다린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다. 동혁이 형의 개그는 개그라는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주기는 하는데 거기에서 한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정치인이 아니라 개그맨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정도의 사회 인식 능력과 위트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장 그 사람을 지지할 것이다.(현재 내 생각에는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고 외쳤던 노회찬씨 정도일까?) 이야기가 잠시 또 딴 길로 빠졌는데 내 말의 요점은 속은 후련한데,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동혁이 형의 개그에는 결여 되어 있다는 말이다. 더 까놓고 말하면 촛불집회 후 우리에겐 그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고 보수를 외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사회에는 꼴통들만 목소리를 높이는 도그빌이 되지 않았는가? 진보는 이합집산이 아니다. 정권 재창출을 목적으로 이합집산할 것라면 진보라는 말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자의 말 가운데 진보에 관한 다음 대목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그것이 내부 안에 자리 잡고 내부가 된다면, 내부가 된 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그 외부를 보고 다시 그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암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변환의 벡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보의 이념을 갖는 자들이 쉽사리 전략으로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주어진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진보의 이념은 주어진 세계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외부자들(outsider), 지배적인 가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수자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추방되거나 배제된 터자들을 향하게 한다.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없어서 보조금으로 버텨온 농민들에게 그만 염치 좀 있으라고 훈계하면서 결국은 농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시장과는 다른 경쟁력, 시장 바깥의 삶의 가능성을 찾자고 말하는 것; 불법체류자니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그들을 불법화하는 법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 난민적인 삶에 대해 동정하기보다는 거꾸로 난민적인 삶을 통해 난민들을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투쟁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내부에 그것의 외부를 끊임없이 창안하고 그 외부를 통해 자본주의와는 다른 종류의 벡터들이 다양한 영역, 다양한 방향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 어떤 '이념'없이도 우리가 진보의 이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우리 자신의 삶을 잡아끄는 외부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P.130 ~ 131)  

  진보란 말할 권리를 박탈 당한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들과 연대해서 그들에게 말할 공간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게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고, 그것이 사회가 정체되어 썩지 않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상하게 돌아간다. 경제 논리로 소수자들을 추방하고 착취한다. 판옵티콘으로 감시한다. 그렇게 하나씩 추방되고 타자화되면 결국에는 누가 남을 것인가? 오늘 끌려가는 사람은 유태인이라 침묵하고, 내가 아니라 침묵하고, 이런 이유로 침묵하고 그러다가 결국 내가 끌려갈 때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고 반성했던 독일인의 참담한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이 되지 않겠는가? 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43쪽 6번째 줄, 454쪽 밑에서 2번째 줄에 "보자보건법"이라는 말이 있다. 모자보건법의 오타가 아닌지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보자보건법이라는 말이 있긴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모자보건법과 똑같은 걸로 봐서 오타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읽기가 만만치 않다. 분량도 만만치 않고 내용도 꽤 어렵다. 글의 논지는 명확하다. 그런데 그것을 서술하는 방법이 꽤 어렵다. 다른 곳에 게재되었던 글들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꽤 어렵다. 인텔리들의 고질적인 병이 아닐까? 인문학이 비인기종목인 이유중 이 부분도 무시 못할 것이다. 1부와 3부는 내용도 좋지만 읽기에도 편하다. 그런데 2부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저자의 말대로 4장은 책의 흐름상 좀 쌩뚱맞은 구석이 있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면서 본인은 아니라하겠지만 여전히 대중은 지도자에 의해서 선동되고 인도되어야 한다고 저자가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이 또한 인텔리들의 고질병이 아니겠는가?  

  소소한 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들도 있지만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1장과 2장의 내용은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내용들이다. 소수자를 위한다고 하는 일이 그들을 차별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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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2-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혁이 형 좋아합니다. 개그가 시원하잖아요. 근데... 싫어하는 넘이 있을까봐... 좀 걱정됩니다.
이진경 글은 저도 다 읽어 가는데, 서평단 도서로 오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책인 듯 싶네요.
그리고 논문 몇 편을 엮어서 책을 내다 보니, 일반 독자가 읽기엔 재미없기도 할 것 같구요.
그렇지만, 옛날 복사기 문건 시절 이진경의 말빨은 '사구체 논쟁'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의 관심사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머무는 것이 반갑습니다. 이 더러운 나라를 버리지 않고...
 
<불만합창단>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만합창단 - 세상을 바꾸는 불만쟁이들의 유쾌한 반란
김이혜연, 곽현지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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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색 표지에 불만 합창단이라는 상당히 불량스러운 제목! 

  이건 안봐도 불온도서라는 표시다. 과거라면 불온도서가 거의 삐라와 맞먹는 터부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깜찍한 국방부의 불온서적 이벤트 이후로 필독의 대상이다. 왠지 내 마음을 확 잡아 끄는 탐심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던 중 알라딘 서평 도서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제나 저제나 책이 올까 기다리다가 받아든 뒤, 지금까지 읽던 "SERI 전망 2010"을 뒤로 물려두고는 정신없이 읽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과하지 않은 두께, 중간에 실린 불만합창 페스티벌 사진, 부록으로 붙어있는 내용들, 게다가 상당히 읽기 편한 문체는 내가 단 몇 시간만에 이 책을 다 읽도록 만들어 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데 오해는 하지 마시라. 읽기 쉽다고 내용도 가벼운 것은 아니니 말이다. 

  불만합창단이라는 프로젝트는 동생을 통해서 들어보았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동생이 사회복지 공무원이 되라는 나의 현실적인 제안을 뿌리치고 들어간 곳이 희망 제작소이다.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는 것이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울 것이 뻔하고, 일도 많아 피곤해할 것 같아서 말렸지만 막내인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관심 갖고 지켜볼 수밖에. 물론 가끔 내가 생각하는 아이템도 제공하지만. 1달전에는 종이 이력제에 대해서 제안했는데 이녀석이 바쁜지 갈아뭉개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불만합창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고, 나도 외국에 그런 합창단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던지라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그게 이렇게 책으로 나오니 왠지 더 감격스럽다.  

  솔직히 이 책을 받아들고 제일 처음에 한 일은 동생의 얼굴을 찾아 보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동생에게 전화해서 이런 책이 나왔다고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위의 사진 제일 좌측에 기타를 들고 있는 녀석이 막내 동생이다. 이렇게 책으로 보니 감회가 새로운 것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춘기를 혼자 겪어온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노파심 때문인가?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책은 나에게 뜻 깊은 책이 되는 것이다. 

  어젠가? 윤도현의 러브레터 마지막회를 유투브에서 검색해 보고 축제를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대해서 두서없이 적었다. 워낙 두서없이 적었던 글인지라 자세하게 생각은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의미이다.  

  "대한민국은 수없이 많은 인간 군상들이 모여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몸으로 부딪힐 수 있는 축제의 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상대방을 용납하지 못하고 제거해야 하는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론을 분열시킨 가장 큰 원인은 축제의 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놀줄 모르기 때문이다. 썩 괜찮은 축제의 장인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그립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계속 머릿 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불만을 합창으로 표현해보는 것은 하나의 축제이다. 희망제작소에서도 페스티벌이라 명명하지 않았는가? 일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상대방을 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너로 이해한다면 그것 자체가 희망이고, 축제의 순기능이 아니겠는가?  

  불만합창단은 모두가 함께 자유스럽고자 했던 프로젝트였다. 불만합창 페스티벌을 마치고 나니 여러 곳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공통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그 행사의 성과에 대한 것이었다. '세속적' 의미에서 불만합창 페스티벌이 성공했는지 여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충분히 즐거웠고 유쾌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불만을 함께 소리쳐 노래하는 동안 우리는 자유로웠기 때문이다.(P.184 ~ 185)  

  페스티벌의 의미와 성과 여부를 따지기 전에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있는 시도요, 실험이 아니겠는가? 불만을 토로하면서 인터넷에 글만 올려도 잡혀가는 이상한 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불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도록 해준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하고 숨통 트이는 일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저자의 다음 지적은 상당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이 좀 더 많은 발언을 할 기회가 필요하고 감정을 호소하고 인정받는 장소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개인의 불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무시하는 사회가 파쇼다. 어쩌면 우리는로 깨닫지 못한 사이에 꽉 막힌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만을 듣고 공감한다는 것은 개인의 의견과 감정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의 시작이다. 불만을 노래하는 것은 결국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었다.(P.153)  

  소통의 부재, 국론의 분열은 결국 각자가 가진 불만을 토로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열려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려있지 않으니 상대방을 존중할리는 더더욱 없다. 촛불집회 때 왜 많은 사람들이 헌법 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그렇게 목이 터져라 불렀는지 납득이 된다. 국익을 위하여라는 거대한 슬로건 하에 개인들의 불만과 상대방이 불만을 무시하는 것이 파쇼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이 파쇼로 가고 있는 것을 걱정하고 우려하는 국민들의 간절한 외침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선거철만 되면, 무슨 일만 있으면 국익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라고 외치는 정신빠진 수구꼴통(절대로 보수가 아닌)에게 그리고 국민의 실생활과는 동떨어져 자유, 평등, 해방이라는 거대 담론만 외치는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책상물림들에게 이 말만은 꼭 전해주고 싶다. 특히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국회를 거수기 정도로 하는 모 당과,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도 대의에 입각하여 희생할 줄 모르는 모 당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

  영국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발전된 것은 맞으나 그것은 거대한 민주주의였을 뿐, 시민의 쳥범한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거대 담론이었단다. 지금 데모스가 정의하는 민주주의란 일상과 직장, 가정, 이웃에서 경험하는 삶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더 나은 민주주의, 더 가까운 민주주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민주주의가' 데모스가 추구하는 이상이었다.(P.70)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발전한 영국에서조차 거대담론으로만 가득한 민주주의의 폐해를 깨닫고 일상에 기반을 둔 "더 나은 민주주의, 너 가가운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있는 이 때에 왜 그렇게도 한국에서는 좌우와 상관없이 거대 담론에만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다. 삶의 소소한 부분들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인데 우리는 전체에만 올인하지 그 전체를 이루고 있는 소소한 일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민주주의를 하면 할수록 국민들이 더 피곤해지고, 갈등히 해소되지 않고 더 깊어져만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능하다면 불만 합창단을 삼청동과 여의도에서도 해보는 것이 어떨까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국회에 불만이 있다면 국회 의사당 앞에 가서 게릴라 콘서트를 갖고, 정부에 불만이 있다면 청와대 앞마당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갖는다면 얼마나 유쾌하겠는가? 물론 그 뒷 수습은 빨갱이로 몰려 CJD일보에대서특필 되겠지만 말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목청을 높여 당당하게 요청하는 바이다. 

  "불만을 許하라." 

사족) 

 1. 종이가 재생 용지 같다. 앞으로 책을 내면서 희망 제작소에서 내는 책이라면 처녀림을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재생지를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2. Left님이 올린 어플을 가지고 요즘 책을 읽으면서 메모하고 있다. 이 서평에 인용된 부분도 그렇게 메모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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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 공정무역 따라 돌아본 13개 나라 공정한 사람들과의 4년간의 기록
박창순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제목을 보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 지는 것 같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싶기도 하다. 어떤 거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책은 대안무역으로서의 공정무역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아름다운 거래"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시작했던 자료들과 공정무역을 소개하고 여기에 빠져들면서 저자가 수집한 자료들과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된 책이다. 지금까지 공정무역을 이야기하면 주로 외국저자들의 책을 접하게 되었었는데, 한국인 저자가 한국에서 공정무역을 뿌리내리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장면들, 그리고 한국에서 공정무역을 뿌리내리기 위하여 어던 모델을 택할 것이며, 어떤 어려움들을 당하게 되었는가를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책이기 때문에 더 공감이 가지 않았나 싶다. 

  공정무역(Fair Trade) 혹은 대안무역(alter trade)! 

  한국에서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90%의 사람들이 공정무역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으며, 공정무역 물건은 비싸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저자의 말에 십분 공감한다. 아직까지 한국은 공정무역의 불모지이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 여전히 우리에게 더 익숙한 개념은 자본주의는 절대선이요, 경제 발전은 오직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가야 하는 길이며,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치워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들의 머릿 속 깊숙이 박혀있다.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오직 자본주의를 찬양하며 신자본주의 체제에 어덯게든 편입되고 싶어하는 한국의 엘리트들과 지도층들에게 대안무역은 따먹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설공주의 독사과 내지는 우리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선악과일뿐이다.  

  일반 국민에게 공정무역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공정무역을 그저 웰빙의 트렌드로 혹은 유기농으로 혹은 자선사업 정도로 치부해 버리지 않는가? 실제로 얼마전 27살짜리 남자 청년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가운데 공정무역은 "돈가진 사람들이 돈쓸데가 없어서 돈지랄하는 것이 아닌가요?"라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 청년이 무식해서도 아니고, 심성이 고약해서도 아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공정무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환경 친화적인 농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딱 그정도이다.  

  굳이 공정한 거래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다지 불편함이 없는데 왜 공정무역을 의식하고 생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리고 왜 유럽인들은 공정무역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소비에도 윤리적인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얼게 설명한다. 

  카탈로그는 '당신이 수공예품 구매에 100를 쓴다면 그 돈은 어디로 갈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질문에 대한 답도 친절하게 해놓았는데 공정무역의 분배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자료를 보니 일반상점에서 사면 판매상과 중개상에게 40루피, 운영비 20루피, 마케팅비 10루피, 재료비와 생산비 20루피를 제외한 나머지 10루피가 생산자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큐트 마힐라 비카스 상가탄과 같은 생산자단체에서 바로 사면 재료비와 생산비 30루피, 마케팅과 운영비 10루피, 여성 공예가 단체에 30루피, 그리고 시골 생산자에게는 30루피가 돌아간다. 여성공예가 단체에 들어가는 30루피는 공정무역의 초과이윤으로 공예작업에 재투자되고 사회적 요구에 따르는 데 쓰이고 있다 (P.82)  

수익을 창출하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짆아요. 문제는 누가 이익을 얻는가 입니다. ... 그러나 제품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생산자에게도 '공정한 몫'이 돌아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고 그것이 바로 공정무역의 핵심요소다.(P.282 ~ 283)  

  생산자에게 생산품으로 인한 이익이 일정부분 돌아가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게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아닌가? 그런데 자본주이가 발달하면서 초심을 잃어버렸달까? 최소한의 노력과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데에 급급하다 보니 정당하게 치러야할 값도 치르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폐해가 아닌가? 결국 오늘날 자본주의의가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위하여 무한질주하는 모습을 우리는 매일 접하고 있지 않는가? 제로섬 게임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의 미래는 잿빛이 짙어질뿐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나는 공정무역이라 생각한다. 아직은 시작단계이지만 우리가 공정무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이 당에 정착시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한경쟁이 아닌 상생의 경제학,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아니겠는가?   

  코끼리 똥 종이에 발견한 가치는 큰 수확이다. 나는 공정무역 활동의 자세를 코끼리 똥에서 본받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대립되어 있던 농민과 코끼리들을 화해시키는 정신, 그리고 수익금 일부르 사회에 환원하는 정신은 공정무역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공정무역으 단순히 착한 소비가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이다.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거래다. 코끼리 똥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온 것처럼 공정무역이람 아름다운 거래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아 힘이 솟는다.(P.422)  

  상분지를 통하여 농민과 야생코끼리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듯이, 적당한 선에서 적당한 가격을 치르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경제학이 앞으로 우리가 몸에 익혀야 하는 경제학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런 경제학으로 공정무역을 생각한다. 내가 지금 구매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지구 반대편의 어느 한 사람에게는 생존을 위한, 그리고 미래를 꿈꾸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희망을 품게 해 줄 수 있는 귀한 재물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면 소비자로서의 욕구충족에 더하여서 윤리적인 책임감까지도 감안한 소비습관을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공정무역에 대해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공정무역은 적선이나 동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정무역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공정무역을 적선이나 원조로 오해하는데, 분명 잘못된 것이다. 공정무역 상품도 분명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이다. 품질에 따라 시장에서 자연 도태될 수 있는 물걸이라는 뜻이다. 물건을 생산하는 사람도 원조를 받거나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다. 공적무역이 초기 단계인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공정무역은 어느 일반에 유리하도록 조건없이 팔아주는 것이 아니므로 소비자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좋은 품질을 갖추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공정무역 단체들은 소비자의구매성향에 대한 연구와 생산자 지원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P.101)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기보다는 기술을 배우게 하여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P.137) 

  제 3세계의 사람들을, 저개발 국가의 사람들을 나와 동등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자립을 돕는 것, 그들에게 공정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는 것, 그래서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공정무역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비록 작지만 저자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나라에 졸부정신이 아니라, 물질만능주의가 아니라 상생의 정신, 책임있는 소비자 의식이 싹트길 소망해 본다.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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