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3년에 나온 사회과학 서적을 8년이 지나서 읽는다는 것은 참 미련해 보이는 일이다. 그 동안 지난 세월과 바뀐 정치지형은 또 얼마이며, 이 글이 씌여지던 시기는 또 어떠한가? 문국현에 대한 20대의 지지가 나오고, 미국산 소고기로 인한 촛불집회, 참여정부의 실패 이야기, 20대 개새끼론은 언제적 이야기이던가? 2021년에 2013년에 나온 책, 그리고 그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에는 2007년의 글도 있다고 하니, 슈가맨도 아니고, 과거의 글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 없이, 사놓은 책이니 읽고는 버리자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내용은 어렵지 않게 잘 넘어간다. "청년 논객"이라는 말처럼 당시 젊은 사람이었던 저자의 글은 어려운 말을 어렵사리 쓰는 그런 글이 아니라 간결하다. 그 덕에 책을 읽는 속도는 꽤 빠르다. 데이터 하나하나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니 이 또한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요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속도와 달리 던져 주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청춘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20대를 신경쓰는 정치인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들과 소통하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노력이 소통이 아닌 쇼통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얼마전 송영길 대표가 국회에서 교섭단체 연설을 하면서 자신은 청년들도 만나봤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모 당에서는 젊은 당대표가 탄생했고, 선거철만 되면 다들 청년들을 모아서 간담회를 하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요즘은 근엄했던 대선 주자들이 청년과의 소통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왜 그러나 싶다. 본인들이 잘 할 수 있는 포지션을 버리고 왜 자꾸 홍그리 버드(아는 사람은 아는) 스타일로 가는 지 모르겠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게 이런식으로 나가는 것은 그들의 생각 속에 젊은이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젊은이들은 생각이 없고, 들어주면 되고,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곁다리 취급! 이것이 젊은이에 대한 정치인들의 생각이고,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들의 생각이다. 얼마전 류호정 의원의 퍼포먼서는 보면서 "가만히 있어도 예쁠 나이인데"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회가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해줄께, 버릇없이 자기 생각 드러내지마." 아직도 젊은이들을 향하여 그렇게 외친다. 자기보다 아랫 사람들에게는 동양의 장유유서를, 자기보다 윗 사람들에게는 유럽의 평등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 이 시대 중장년층의 생각이 아닐까? 어느덧 중년층으로 분류되는 나이가 되면서 더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 이것이다. 어느새 나도 젊은이들을 그렇게 생각없고, 쓰다 버리는 용도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정말 한국에 극우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 정치 시스템이 극우 정당의 출현을 막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나도 여기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다. 20대의 정치 참여가 부족하다는 말로 20대를 꾸짖으면서 그들을 조금도 키우지 않는 현 정치체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20대를 키우지 않는 것은 보수나 진보나 동일하다. 386이 586이 되는 20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래에 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쳐내지 않았던가? 비례대표 자리 한 두개 던져주고 네 소신껏 해봐라는 것이 20대들에게 얼마나 어필했을까? 4년이 지난 후 단 한명이라도 생존한 사람들이 있었던가? 이런 일이 공고해지면 결국 그 힘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곳으로 흘러갈 곳이고, 그곳은 극우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이 멤버십을 공고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극우 정당은 그러한 방법을 택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냥 잡설이 길어졌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을 진심으로 위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거 계도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뿐이다. 젊은이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시민으로 인정하는 날은 언제나 올까? 10년이 더 지나면 그런 날이 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자유한국당 민경욱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4+1 협의체가 취약층의 마스크 지원 예산 114억 원을 삭감하면서 한국당에 설명도 없이 날치기 통과 시켰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감에 묻어 가면서 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전형적인 행태이다. 그런데 이 글은 부메랑이 되어 자한당에게 돌아갔다. 자한당에서는 전액 삭감을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뿐이 아니다. 사태를 제대로 콘트롤하지 못하는 문재인 정부를 비난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몇년 동안 꾸준히 방역 예산을 삭감하고, 방역 인력 충원에 딴지를 걸어서 충분한 인력이 충원되지 못하게 했던 과거의 행태들이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자한당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많은 국민들이 자한당에 대해 미련을 버린지 오래다. 물론 비교적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여전히 자한당을 지지하고, 보수 성향인 사람들도 자한당을 지지하지만 그것은 자한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안이 없어서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명박이 싫었던 사람들이 정동영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한당이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습게 생각한다. 한때는 여당이었고, 많은 국민들이 지지했던 정당이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을까? 나는 여기에 대한 답을 '사쿠라 진다'라는 책에서 발견했다.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패전 후 일본의 현대사는 묘한 모습을 갖게 된다. 주변 국가들은 사과하라고 말하고,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왜 사과하라고 하느냐면서 떼쓰지 말라고 말한다. 일본 국민들이 양심이 무뎌서 그런가? 아니다. 못 배워서 그렇다. 못 배웠다는 말이 무식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배우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패전 후 일본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한 가지 꼼수를 쓴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사실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다. 있었던 사건이 어찌 없어지겠는가? 그것도 수 천년, 수 백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의 사건인데 가능하겠는가? 일본 지배층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없앨 수 없으니, 일본 국민의 머릿 속에서만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패전이라는 말 대신 종전이라는 말을 쓴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군에게 패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나라는 분명한 패전국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종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전쟁에서 패했다는 말로 패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전쟁은 있으나 그 전쟁에 왜 일어났은지, 그 전쟁에서 누가 패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 사라진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서 일본은 맥아더와 합의를 하는데 천황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실제적인 정치는 내각에서 하더라고 일본의 상징적인 의미로 천황제는 유지하자는 그럴듯한 논리로 맥아더를 설득했다. 물론 미군이 순진해서 여기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소련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한 교두보로 일본을 이용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일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용인한 것이다. 그런데 천황제 유지가 일본 지배층의 뻔뻔함에 면죄부를 주었다. 독일의 전쟁 주범은 누구인가? 히틀러이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그러면 일본은? 일본의 전쟁 주범은 모호하다. 일본의 A급 전범들이 처벌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상징적인 주범이 없다. 그 주범이 누구이겠는가? 천황이다.(천황이라고 쓰니 기분이 나쁘지만 어쩔 수 없다. 일본의 황제에 대한 정식 명칭이라) 그런 천황을 계속 옹립하고 있으니 자신들의 전쟁에 대한 반성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전쟁에 대한 반성이 없으니 이후의 행동도 거침이 없다. 양심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되려 큰 소리 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러면서 주변 국가들을 떼쓴다고 몰아 부친다. 미국의 옥수수는 기꺼이 사주면서 한국에는 물건을 안 팔겠다고, 너희같은 것들에게는 팔 수 없다고 큰 소리 친다. 일본이 속해있는 동아시아에서는 고립되어 가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오직 미국에 가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오직 미국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고,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말은 무시한다.

 

  반성이 없는 역사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반성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그것을 반추하면서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하기 위해서 반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만 그런가? 한국도 그렇다. 험난한 한국의 현대사는 적폐청산의 시간마저 주지 않았다. 친일은, 친미로, 다시 친러로, 그리고 다시 친미로 돌아섰다. 그 사람들은 변검의 명장처럼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으며, 적폐청산이라는 말 앞에서 빨갱이라면서, 분열을 조장한다면서, 당시 전 국민이 친일이 아니냐면서 반성을 거부한다. 그 전략이 주효한 것 같다. 어느새 그들의 과거를 알던 이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패전을 모르는 일본 국민처럼 그들의 과거 행적을 모르고 오늘날 그들의 모습만 지켜본 이들에게 반성은 무엇이며, 적폐청산은 무엇이냐는 말이 심심지 않게 나온다. 그런데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냔 말이다.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안 새는가? 반성을 모르는 그들의 행적은 요즘에도 반복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행적은 잊힐 수 있어도 최근의 행적은 잊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이 그들의 과거 행적을 모두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쿠라 진다라는 책은 일본의 현대사의 기묘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기묘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자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란가방 2020-02-1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죽어도 그쪽 지지하겠다는 소리가 여전히 들리더라구요.... 아...

saint236 2020-02-12 11:17   좋아요 0 | URL
습관 같습니다. 그쪽 지지하는 것도 어릴 때부터 몸에 들어온 습관이요

2020-02-12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20-02-15 20:47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 나라가 망해도..참 서글픈 말입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인가부터 신문을 보면서 기사를 보고 신문사를 추측해 보거나, 신문사를 보고 기사의 내용을 추측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완전히 드러맞지는 않지만 70%의 비율로 맞추기 시작했다. 특별히 조중동은 거의 90%까지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신문의 곳곳에 나오는 특정 단어들과 논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북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기사로 다룬다고 해보자. 대체로 조중동에서는 남북관계=안보불안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쓴다. 반면에 한경오는 남북관계=평화시대라는 내용의 기사를 쓴다. 같은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그 글을 쓰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다. 어느 쪽의 기사를 택하든지 계속 그쪽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내 생각이 그들의 사고 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 조중동을 선호하시는 나이드신 어른들은 남북관계를 말하면서 안보불안, 남침의 위협, 핵전쟁을 이야기하신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이 분들이 남북통일을 하시자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나도 어느새 한경오의 프레임에 갇혀버렸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예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토론회를 본적이 있다. 정동영 당시 후보를 보면서 도대체 저 양반은 왜 저러는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도대체 인물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냐 아니면 선거 참모들이 무능한 것이냐 안타까워 했었다. 자꾸 이명박 후보의 경제 논리를 따라간다. 그럴수록 돋보이는 것은 이명박 후보의 경제 논리 뿐이다. 할 이야기가 그것만은 아닐텐데 그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한다. 경국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만약 당시 선거 참모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조금은 나아졌을까? 아니다. 그 사람들도 경제 논리를 우선시 했으니 나아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문재인 정부는 꽤 선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 남북통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온갖 프레임이 난무하고 있다. 누가 먼저 논쟁의 주제를 선점하느냐에 따라서 우위가 결정된다. 그렇게 본다면 정치력이란 끊임없이 논쟁을 생산하고 자기에게 맞는 프레임을 가져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들어 약간 불안한 구석이 있다. 보수에서 경제 이야기를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진보에서 슬슬 따라간다. 최저임금=경제위기라는 프레임을 떠들어 대는데 진보에서 국민들에게 어필할만한 이야기를 꺼내놓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딴지걸기를 하고 있다고 반박하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최저임금은 위험하다는 경고밖에 주지 못한다.

 

  진보 정치를 꿈꾼다면 보다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프레임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당에 이러한 태도를 기대할 수 없어서 정의당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기대는 헛된 기대가 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 마음이 더 답답한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책을 읽은 만족감(4년 동안 책을 읽었으니....)과 더불어 암울한 정치 무능에 답답한 마음을 괜시리 끄적거려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견만리 : 새로운 사회 편 - 정치, 생애, 직업, 탐구 편 명견만리 시리즈
KBS '명견만리' 제작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제목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알라딘에 "명견만리"라는 책 제목이 뜨는 것을 보는 순간, 개에 관한 책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명견만리"를 내용은 모르고 명견이 만리를 간다고 해석을 했던 것이다. 책을 보면서 도대체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가 싶어서 혼자 이불킥을 수도 없이 날렸던 기억이 있다.


  살다보면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하나씩 터지기 시작한다. 내 기억에 남는 굵직한 사건은 알파고였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이세돌이 이길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알파고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를 두고 이젠 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 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것이다, 사회가 많이 바뀌게 될 것이다라는 말들이 봇물터지듯 흘러나왔다. 초등학교에서 코딩을 가르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나도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데 방과후 수업으로 코딩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에 살짝 빠졌었다.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이 가르친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가르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쳐진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무척 다르게 진행될 것이다.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쫓아가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시각은 어쩌면 과거에 더 이상은 필요없는 시각이 될 수도 있다. 정치도, 직업도 남북관계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간다. 그런데 그런 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과거에, 지금까지의 모습에 얽어 맨다면 우리의 인새잉 어떻게 바뀔지는 말 안해도 분명하다.


  요즘 청와대 앞을 지나가면서 답답할 때가 많다. 태극기 부대를 봐도 답답하다. 시대적인 상황이 이렇게 바뀌는데 그분들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때려잡자 빨갱이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북 관계 개선을 말하고, 비핵화를 만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과연 통일을 원하기는 하는가 의문이 든다. 반대쪽에서 집회를 하는 노조의 집회를 봐도 답이 안나온다. 그들이 그렇게 외치는데 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가? 그들의 행동방식 또한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외치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 


  이 책은 우리에게 유연한 사고를 가지라고 말하다. 조금더 멀리보고 사회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갈라파고스 군도가 아니다. 


  사족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가지는 생각은 소위 말하는 베스트셀러들이 이상하리만치 호흡이 짧다는 점이다. 시선을 멀리 가지라고 말하지만 책의 구성 자체는 시선을 멀리 가질 수가 없다. 짧은 분량 안에 많은 것들을 구겨 넣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은 지식 e 시리즈를 참고한 것 같지만 지식 e 시리즈가 보여주는 여운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책을 읽는 트렌드가 바뀌어 간다는 것인데, 이렇게 투덜대는 나도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서 꼰대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시창!

 

  제목부터가 마음이 짠하다. 한창 꿈이 많을 청년의 때에 그들이 처한 현실이 시궁창이라니.

 

  사노라면 언젠다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겠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날이 새는 판자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예전에 축가로 많이 불렀던 노래다. 그런데 요즘은 이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다. 청년들에게 괜히 이 노래를 불러줬다가 돌을 맞지나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선다. 그들도 꿈이 많고, 밝은 미래를 계획할텐데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현실은 시궁창과 같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눈물나겠는가? 그들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서 그저 눈물만 글썽인다. 째째하게 군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산다고, 미래의 성공만 꿈꾼다고, 눈만 높다고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이미 새파랗게 젊은 것이 한 밑천이 아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괜시리 미안해진다. 이 책이 나오지 6년이 넘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낯선 것도 아닌데, 이미 신문으로 봤던 기사들인데 문득 낯설게 느끼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내가 그들을 잊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마트에서 일하다 죽은 청년, 용광로에 떨어져 죽은 청년 등등 그들의 삶을 보면서 분노하고 안타까워했던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내 삶이 바빠서 그들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누군들 그들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은 그들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는 부제가 눈에 자꾸 걸린다. 마음에 아프게 와서 박힌다. 누구보다도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일텐데, 같이 눈물 흘려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것이 오늘날 그들이 처한 현실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자신의 삶을 시궁창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부제를 살짝 비틀어 보았다. 대한민국이 그들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아무런 공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위로 받은 자격이 있다는 말로 바꾸어 보았다. 그들을 향해 위로의 손길을 뻗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해도 함게 울어줄 마음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을 일으켜 줄 손이라도 뻗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내어 줄 것이 없다고 해도, 그냥 내게 있는 것만이라도, 함께 울 수 있는 가슴만이라도 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글을 쓰고 취재를 하는 동안 비가 왔다는 저자의 말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 용광로의 쇳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기계로 만들어져서 어딘가에서 깎이고 마모되고 있지 않을까? 이것이 청년들의 삶일 것 같아서, 고통받는 약자들의 몸부림이고 눈물일 것 같아서 답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