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소문 -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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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얀시의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일까?

  쉽게 읽힌다는 것,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현학적이지 않다는 것.

  서로 다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이다. 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뻔히 속이 보이는 기복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적당한 깊이와 적당한 고민, 그리고 적당한 난이도. 이것이 필립 얀시의 책이 가지는 장점이고, 이런 이유로 그의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약간 다르다. 그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내공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글쓰는 포인트와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필립 얀시의 책 치고는 읽기가 쉽지 않다. 물론 내용이 어려워서 읽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읽었던 그의 책과는 달리 내용이 약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쏟아져 나오는 다른 기독교 서적에 비하면 우수하다. 단지 그의 이전 책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수상한 소문"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초대와 같은 내용(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같은 종류의 책)을 생각했는데,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것이다. 출판사에서 나름대로 제목을 붙인 것 같지만 원제 "A Skeptic's Guide to Faith"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 또한 포이에마가 하기에는 큰 실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원제가 의미하는 바는 살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역서는 번역을 한 것이지,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번역자도 꽤 번역을 잘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제목을 번역했다는 것은 판매를 고려한 출판사의 잘못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얀시는 책에서 이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원론적인 구조이지만, 이 책이 회의주의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이러한 용어 선택은 출발에서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회의주의자가 대상이라기보다는 필립 얀시의 새 책이라는 점에 흥미가 동한 기독교인들이 대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용어는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그리고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들에게는 그렇고 그런 용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는 사람들과 출판하는 사람들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 읽히는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고민 끝에 저 단어를 다시 사용한다면 인정하겠지만 고민 없이 그냥 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말 그대로 허공을 치는 소리요, 향방없는 싸움일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 너머에 있는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매일 내가 숨쉬면서 살아가는 세계와 내가 그리고 바라보는 세계 사이에 살고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세계가 천국일 것이고, 비기독교인에게는 이루고 싶은 세계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인이 실수하게 된다. 기독교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세계는 천국 뿐만이 아니라 이루어야 하는 세계가 포함된다.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게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분명히 명시하지 않는가? 얀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도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전통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나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의 봉사, 선, 자비, 베품과 같은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다. 얀시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에게 과연 이것이 믿음으로 인도하는 가이드가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회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믿음 안내서라는 포장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떡밥이라는(너무 막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이런 의도라면 틸리케의 "현실돠 믿음 사이"라든지 툼 라이트의 "광장에 선 하나님"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이 부분도 회의주의자들에게 의미있는 대답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얀시의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평타 이상은 한다. 기독교인들로 국한했을 때에만. 개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볼만한 것들도 많이 던져준다. 다만 회의주의자들에게는 아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꿨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신의 한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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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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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이들을 보면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릴 때부터 디지털에 특화된 센서를 달고 나오는지 기계를 다루는 일에 능숙하다. 나는 새로운 휴대폰이 나오면 이것저것 배워야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 만져보더니 능숙하게 다룬다. 물론 고급 기능이야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잘 다루기는 하지만 기초적인 것들은 아이들이 금방 더, 그리고 더 능숙하게 다룬다. 저자가 만하는 포노 사피엔스가 이런 것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나도 꽤 기계와 친하게 지내온 세대이다. 가리방, 타자기, 팩스, 도트 프린터, 복사기, 베이직, xt 컴퓨터, at컴퓨터. 도스에서 위도우즈로 정말 정신없이 변화되었고, 그 변화변화 사이에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간신히 기능을 익히면 다음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되기가 몇번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뒤쳐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얼마나 뒤쳐지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아마 내 세대 사람들은 컴퓨터를 끄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에 껐던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껐다가 컴퓨터 수리를 몇번 다녀온 후에 깨닫게 된 지식이다.) 


  이 책에서는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의 기술과 그 기술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세대, 그리고 그 세대를 우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앞세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두 세대 사이에서 겪는 여러가지 불협화음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포토 사피엔스 세대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더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산업 모델로 나가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여기에 대한 저항이 있음 또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존, 애플과 같은 미국의 기업들, 알리바바와 같은 중국의 기업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업들이 등장해야 함을 말한다. 삼성이라는 굴지의 기업이 있지만 삼성에게는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뼈아픈 지적도 충분히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내용까지 전부 기술에 관한 이야기들, 데이터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마치 책은 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우리에게 결국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데이터를 생산해 내는 것도, 스토리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이며, SNS로 인하여 직접적인 만남이 없이도 만남과 물건의 판매와 구매가 가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사람 사이의 관계에 더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어디에 있어도 연결이 되는 초열결 시대를 살아가지만, 정작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은 만남이라는 고전적인 관계맺음이 금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데이터를 생산해 내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데이터에 집중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따뜻함,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결국은 사람이라는 점,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그리고 기업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보면서 아쉬운 점은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도, 데이터와 기술을 익혀야 하는 이유도 산업과 자본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것도 사람을 알아야 기업이 돈을 벌 수 있다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점들이 불편함을 준다. 그래도 한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며, 무엇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점이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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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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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에 나온 사회과학 서적을 8년이 지나서 읽는다는 것은 참 미련해 보이는 일이다. 그 동안 지난 세월과 바뀐 정치지형은 또 얼마이며, 이 글이 씌여지던 시기는 또 어떠한가? 문국현에 대한 20대의 지지가 나오고, 미국산 소고기로 인한 촛불집회, 참여정부의 실패 이야기, 20대 개새끼론은 언제적 이야기이던가? 2021년에 2013년에 나온 책, 그리고 그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에는 2007년의 글도 있다고 하니, 슈가맨도 아니고, 과거의 글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 없이, 사놓은 책이니 읽고는 버리자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내용은 어렵지 않게 잘 넘어간다. "청년 논객"이라는 말처럼 당시 젊은 사람이었던 저자의 글은 어려운 말을 어렵사리 쓰는 그런 글이 아니라 간결하다. 그 덕에 책을 읽는 속도는 꽤 빠르다. 데이터 하나하나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니 이 또한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요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속도와 달리 던져 주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청춘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20대를 신경쓰는 정치인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들과 소통하려고 애를 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노력이 소통이 아닌 쇼통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얼마전 송영길 대표가 국회에서 교섭단체 연설을 하면서 자신은 청년들도 만나봤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모 당에서는 젊은 당대표가 탄생했고, 선거철만 되면 다들 청년들을 모아서 간담회를 하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요즘은 근엄했던 대선 주자들이 청년과의 소통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왜 그러나 싶다. 본인들이 잘 할 수 있는 포지션을 버리고 왜 자꾸 홍그리 버드(아는 사람은 아는) 스타일로 가는 지 모르겠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게 이런식으로 나가는 것은 그들의 생각 속에 젊은이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젊은이들은 생각이 없고, 들어주면 되고,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곁다리 취급! 이것이 젊은이에 대한 정치인들의 생각이고,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들의 생각이다. 얼마전 류호정 의원의 퍼포먼서는 보면서 "가만히 있어도 예쁠 나이인데"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회가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해줄께, 버릇없이 자기 생각 드러내지마." 아직도 젊은이들을 향하여 그렇게 외친다. 자기보다 아랫 사람들에게는 동양의 장유유서를, 자기보다 윗 사람들에게는 유럽의 평등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 이 시대 중장년층의 생각이 아닐까? 어느덧 중년층으로 분류되는 나이가 되면서 더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 이것이다. 어느새 나도 젊은이들을 그렇게 생각없고, 쓰다 버리는 용도로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정말 한국에 극우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 정치 시스템이 극우 정당의 출현을 막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나도 여기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다. 20대의 정치 참여가 부족하다는 말로 20대를 꾸짖으면서 그들을 조금도 키우지 않는 현 정치체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20대를 키우지 않는 것은 보수나 진보나 동일하다. 386이 586이 되는 20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래에 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쳐내지 않았던가? 비례대표 자리 한 두개 던져주고 네 소신껏 해봐라는 것이 20대들에게 얼마나 어필했을까? 4년이 지난 후 단 한명이라도 생존한 사람들이 있었던가? 이런 일이 공고해지면 결국 그 힘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곳으로 흘러갈 곳이고, 그곳은 극우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이 멤버십을 공고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극우 정당은 그러한 방법을 택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냥 잡설이 길어졌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을 진심으로 위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거 계도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뿐이다. 젊은이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시민으로 인정하는 날은 언제나 올까? 10년이 더 지나면 그런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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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들 - 여신은 어떻게 우리에게 잊혔는가
조지프 캠벨 지음, 구학서 옮김 / 청아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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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라: 거짓말을 속되게 부르는 말, 이야기를 속되게 부르는 말, 거짓이나 가짜를 속되게 이르는 말


  구라에는 위의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거짓말쟁이를 "구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첫 번째 의미만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구라의 두 번째 의미에 기반해서 구라쟁이를 이해한다면 "이야기꾼"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전에 한국의 3대 구라쟁이라는 사람을 꼽은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후자의 의미로 꼽힌 사람들이다. 유홍준 씨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국의 3대 구라쟁이들 운운하면서 언급한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을 이런 의미에서 구라쟁이라고 부른 것이다.


  캠벨은 이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구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에 대해서라면 세계에서 한수 접어주는 사람, 서양의 신화만이 아니라 동양의 신황에도 잡다하고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재미가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은 나도 학생 시절에 접했던 책이다.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통과 의례처럼 꼭 읽고 지나가는 책이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여신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이 이것인데, 이 책은 내 기대를 생각보다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어떻게 여신들이 사라지는가, 어떻게 남신 문화가 여신 문화를 집어 삼키고 여신들을 지워나갔는가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의외로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두서 없다는 생각, 그래서 깊이가 딸린다는 생각을 책을 덮는 순간까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만신전의 여신들과 남신들이라는 챕터는 여신들과 남신들이라는 장의 이름이 무색하게 거의 남신들로 채워져 있으며, 남신들로 그냥 지나가면서 맛만 보고 지나간다. "여신의 귀환"이라는 장에서는 귀환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여신이라는 주제, 어떻게 남신 문화가 여신 문화를 집어 삼켰는가를 강의의 주제로 삼았다면 조금은 더 깊이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캠벨의 입장이 철저하게 서구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인도보다 유럽의 문화가 오래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장을 한다면 조금은 더 자세하게 기록해야 하는데, 뭘 이런 당연한 것을, 또는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라는 식으로 살짝 지나간다. 셈족 계열의 유대인에게 사르곤, 함무라비가 영향을 받아서 메소포타미아의 여신들이 남성 중심적인 구약의 사상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박하기까지 하다. 내가 잘못봤나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니 곳곳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유대인들이 받았다고 말하지 않나? 그래서 심한 경우는 "구약은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빌려다 쓴 구라다"라고 까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캠벨의 모습을 보면서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서양, 기독교 문명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를 생각하는 서구 중심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오디세이아를 해석하면서 오디세우스라는 남성의 인생의 여정으로 이해하는 점이다. 고 이윤기 씨의 책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는데, 5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을 비슷한 모티브로 해석했었다. 서로 다른 사건을 다루지만, 신화를 인생을 해석하는 열쇠로, 인생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것이 꽤 신선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캠벨에게서 그와 비슷한 해석을 보니 이윤기가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해봤다.


  분명 재미는 있다. 잡다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 캠벨의 구라에 빨려 들어가는 재미는 있다. 그런데 그 구라가 약간 딸린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이 구라는 아닐까 의심하면서 읽는다. 그래서일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글쎄?"라는 말을 감히 던지는 것이다. 여러가지 단편적인 의견들을 두서없이 던져주는 불친철한 책, 그래도 삽화를 한번씩 보는 것, 그리고 다른 신화화의 관계성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이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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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사사 - 하 일본군사사
후지와라 아키라 지음, 서영식 옮김 / 제이앤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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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만화 좀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봣을 법한 만화 중에 "남벌"이라는 만화가 있다. 이현세의 팬이라면 당연히 거쳐가는 만화다. 만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사이가 나빠져서 전쟁일 일어나고 한국의 대통령은 재일 교포를 구하기 위해서 남쪽을 친다는 남벌 작전을 진행한다. 남한과 북한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최첨단 무기를 무력화하고, 고물 an-2기로 일본의 방공망을 뚫고 일본을 굴복시킨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 그럴듯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폭주하는 일본 자위대 젊은 장교들에 의해서 일어난 쿠데타는 일본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는다. 아마도 2.26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만화를 가지고 그것은 허구라고 말하는 것을 "무슨 당연한 소리를 정색하고 하는가?"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나도 만화의 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허구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처럼 잘못된 군사 고증이니 어쩌구 저쩌구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자위대와 한국군의 존재 의미와 역학 관계에 대해서 살표본다면 남벌이라는 것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자위대의 창설은 미군의 필요 때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한다. 2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에(그들은 패전이 아니라 종전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패배를 가리고 있지만 분명한 패전이다) 맥아더를 필두로 하는 미군정은 일본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천황제 유지를 위해서 일본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군대를 해체하고 치안 유지를 담당했던 미군은 추후에 전략을 바꾸어 일본 군대를 재건하고 치안 유지 책임을 떠 넘긴다. 미군의 군비 절감과 일본의 군대 재창설이라는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 자위대의 출발이다. 물론 처음부터 군대라는 말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경찰 병력으로, 추후에는 본토 방위를 위한 군대, 더 먼 훗날에는 본토에 위협이 될만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작전 목적과 반경을 넓혀가고 이와 더불어 군사력을 계속해서 늘려갔다. 그러면서도 군대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기에 "자위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이미 그 군사력은 자위의 차원을 애초에 뛰어 넘었다.


  그럼에도 미군이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로, 더 나아가서는 강요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자위대를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를 묶어서 과거에는 대 소련 전선을, 이제는 대 중국 전선을 공고히하는 것이 미군의 전략이다. 미군은 전시에 미군의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본 자위대를 최전선에 배치하며, 일본은 유사시(북한의 침략과 같은)에 한반도에 자위대를 배치하는 것이 미군과 자위대가 함께 세운 기본 전략임을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즉 이는 한국군과 자위대, 그리고 미군을 거칠게, GP와 GOP, FEBA, 기계화사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중요도에 있어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비중이 있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군이 미군에게 있어서 손가락이라면, 자위대는 팔이나 다리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이 일본을 공격한다는 남벌의 생각은 말도 되지 않는다. 둘 사이가 벌어지게 미국이 내버려둘 리도 없고, 설령 둘 중의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일본보다는 한국일 가능성이 훨씬 크기에 셀제로 남벌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미군은 한국이 아닌 일본의 편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자위대는 철저하게 일본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설립된 조직이라고 이해한다면 자위대의 실체를 조금더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자위대가 위헌적인 조직이라는 것이다. 일본 헌법 9조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는데 이 헌법은 일본 우익에서 매번 실패하면서도 개정하려는 조항이다.


  일본국 헌법 제9조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외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많은 국방비를 쏟아부으면서도 군대라고 부르지 못하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력을 보유한 자위대가 위헌 논란에 휩싸인 조직이라는 것은 자위대가 참 묘한 조직이라는 것을, 아이러니한 조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자국의 이익이 아닌 타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군대, 군대 내에서 스스로 장비 소요를 설정하고 진행하는 군대, 이런 군대를 제어하지 못하고 헌법 수정과, 헌법 해석 수정을 토하여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우익 정치인.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일본의 자위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일본 총리들이 처음부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군국주의 부할을 꿈꾸는 총리들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면서 야스쿠니 신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 것 또한 이 책을 읽음으로 얻게된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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