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들 - 여신은 어떻게 우리에게 잊혔는가
조지프 캠벨 지음, 구학서 옮김 / 청아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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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구라: 거짓말을 속되게 부르는 말, 이야기를 속되게 부르는 말, 거짓이나 가짜를 속되게 이르는 말


  구라에는 위의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거짓말쟁이를 "구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첫 번째 의미만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구라의 두 번째 의미에 기반해서 구라쟁이를 이해한다면 "이야기꾼"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전에 한국의 3대 구라쟁이라는 사람을 꼽은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후자의 의미로 꼽힌 사람들이다. 유홍준 씨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국의 3대 구라쟁이들 운운하면서 언급한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을 이런 의미에서 구라쟁이라고 부른 것이다.


  캠벨은 이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구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에 대해서라면 세계에서 한수 접어주는 사람, 서양의 신화만이 아니라 동양의 신황에도 잡다하고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재미가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은 나도 학생 시절에 접했던 책이다.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통과 의례처럼 꼭 읽고 지나가는 책이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여신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이 이것인데, 이 책은 내 기대를 생각보다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어떻게 여신들이 사라지는가, 어떻게 남신 문화가 여신 문화를 집어 삼키고 여신들을 지워나갔는가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의외로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두서 없다는 생각, 그래서 깊이가 딸린다는 생각을 책을 덮는 순간까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만신전의 여신들과 남신들이라는 챕터는 여신들과 남신들이라는 장의 이름이 무색하게 거의 남신들로 채워져 있으며, 남신들로 그냥 지나가면서 맛만 보고 지나간다. "여신의 귀환"이라는 장에서는 귀환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여신이라는 주제, 어떻게 남신 문화가 여신 문화를 집어 삼켰는가를 강의의 주제로 삼았다면 조금은 더 깊이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캠벨의 입장이 철저하게 서구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인도보다 유럽의 문화가 오래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장을 한다면 조금은 더 자세하게 기록해야 하는데, 뭘 이런 당연한 것을, 또는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라는 식으로 살짝 지나간다. 셈족 계열의 유대인에게 사르곤, 함무라비가 영향을 받아서 메소포타미아의 여신들이 남성 중심적인 구약의 사상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박하기까지 하다. 내가 잘못봤나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니 곳곳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유대인들이 받았다고 말하지 않나? 그래서 심한 경우는 "구약은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빌려다 쓴 구라다"라고 까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캠벨의 모습을 보면서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서양, 기독교 문명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를 생각하는 서구 중심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오디세이아를 해석하면서 오디세우스라는 남성의 인생의 여정으로 이해하는 점이다. 고 이윤기 씨의 책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는데, 5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을 비슷한 모티브로 해석했었다. 서로 다른 사건을 다루지만, 신화를 인생을 해석하는 열쇠로, 인생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것이 꽤 신선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캠벨에게서 그와 비슷한 해석을 보니 이윤기가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해봤다.


  분명 재미는 있다. 잡다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 캠벨의 구라에 빨려 들어가는 재미는 있다. 그런데 그 구라가 약간 딸린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이 구라는 아닐까 의심하면서 읽는다. 그래서일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글쎄?"라는 말을 감히 던지는 것이다. 여러가지 단편적인 의견들을 두서없이 던져주는 불친철한 책, 그래도 삽화를 한번씩 보는 것, 그리고 다른 신화화의 관계성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이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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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사사 - 하 일본군사사
후지와라 아키라 지음, 서영식 옮김 / 제이앤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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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만화 좀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봣을 법한 만화 중에 "남벌"이라는 만화가 있다. 이현세의 팬이라면 당연히 거쳐가는 만화다. 만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사이가 나빠져서 전쟁일 일어나고 한국의 대통령은 재일 교포를 구하기 위해서 남쪽을 친다는 남벌 작전을 진행한다. 남한과 북한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최첨단 무기를 무력화하고, 고물 an-2기로 일본의 방공망을 뚫고 일본을 굴복시킨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 그럴듯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폭주하는 일본 자위대 젊은 장교들에 의해서 일어난 쿠데타는 일본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는다. 아마도 2.26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만화를 가지고 그것은 허구라고 말하는 것을 "무슨 당연한 소리를 정색하고 하는가?"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나도 만화의 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허구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처럼 잘못된 군사 고증이니 어쩌구 저쩌구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자위대와 한국군의 존재 의미와 역학 관계에 대해서 살표본다면 남벌이라는 것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자위대의 창설은 미군의 필요 때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한다. 2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에(그들은 패전이 아니라 종전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패배를 가리고 있지만 분명한 패전이다) 맥아더를 필두로 하는 미군정은 일본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천황제 유지를 위해서 일본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군대를 해체하고 치안 유지를 담당했던 미군은 추후에 전략을 바꾸어 일본 군대를 재건하고 치안 유지 책임을 떠 넘긴다. 미군의 군비 절감과 일본의 군대 재창설이라는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 자위대의 출발이다. 물론 처음부터 군대라는 말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경찰 병력으로, 추후에는 본토 방위를 위한 군대, 더 먼 훗날에는 본토에 위협이 될만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작전 목적과 반경을 넓혀가고 이와 더불어 군사력을 계속해서 늘려갔다. 그러면서도 군대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기에 "자위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이미 그 군사력은 자위의 차원을 애초에 뛰어 넘었다.


  그럼에도 미군이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로, 더 나아가서는 강요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자위대를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를 묶어서 과거에는 대 소련 전선을, 이제는 대 중국 전선을 공고히하는 것이 미군의 전략이다. 미군은 전시에 미군의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본 자위대를 최전선에 배치하며, 일본은 유사시(북한의 침략과 같은)에 한반도에 자위대를 배치하는 것이 미군과 자위대가 함께 세운 기본 전략임을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즉 이는 한국군과 자위대, 그리고 미군을 거칠게, GP와 GOP, FEBA, 기계화사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중요도에 있어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비중이 있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군이 미군에게 있어서 손가락이라면, 자위대는 팔이나 다리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이 일본을 공격한다는 남벌의 생각은 말도 되지 않는다. 둘 사이가 벌어지게 미국이 내버려둘 리도 없고, 설령 둘 중의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일본보다는 한국일 가능성이 훨씬 크기에 셀제로 남벌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미군은 한국이 아닌 일본의 편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자위대는 철저하게 일본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설립된 조직이라고 이해한다면 자위대의 실체를 조금더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자위대가 위헌적인 조직이라는 것이다. 일본 헌법 9조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는데 이 헌법은 일본 우익에서 매번 실패하면서도 개정하려는 조항이다.


  일본국 헌법 제9조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외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많은 국방비를 쏟아부으면서도 군대라고 부르지 못하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력을 보유한 자위대가 위헌 논란에 휩싸인 조직이라는 것은 자위대가 참 묘한 조직이라는 것을, 아이러니한 조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자국의 이익이 아닌 타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군대, 군대 내에서 스스로 장비 소요를 설정하고 진행하는 군대, 이런 군대를 제어하지 못하고 헌법 수정과, 헌법 해석 수정을 토하여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우익 정치인.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일본의 자위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일본 총리들이 처음부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군국주의 부할을 꿈꾸는 총리들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면서 야스쿠니 신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 것 또한 이 책을 읽음으로 얻게된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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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사사 - 상 일본군사사
후지와라 아키라 지음, 서영식 옮김 / 제이앤씨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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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역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러한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왜 한국 군대의 문화를 보면서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지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사람이 아닌 일본 사람이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일본의 군대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과 비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이 책은 한국의 군대를 비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만큼 한국 군대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리라.


  이 책에서는 일본 개항에서부터 2차 대전 종전까지의 일본 군대를 다루고 있다. 일본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만화를 통하여(가령 바람의 검심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신선조"로부터 시작하는 정부군과 막부군의 내전, 메이지 유신, 2.26사건,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의 규모가 커지는 양상에 대해서 기술하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원인과 결과 그 의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 군대는 묘한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하는 군조직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군으로 형태를 바꾸어가지만, 실상은 국민군이 될 수 없는 군대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메우기 위하여 군대와 민간의 벽을 견고하게 세우고, 군대로 하여금 명령에 복종하게 만든다. 국민군이 되기 위해서 군인 스스로 사고하는 모습이 필요하지만, 급작스런 체질 개선을 위해서 사고하는 모습을 제거하고 규율과 명령의 복종을 강조하는 모습을 이식한 시점에 일본 제국군은 기묘하고도 위험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출발하지만 점점 독일군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일본이 후에 나치와 파시즘과 함께하는 운명 공동체가 될것이라는 점을 기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규율과 복종, 이를 위하여 강제되는 여러가지 부조리한 모습들은 오늘날 한국 군대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분명 일본군에 대한 책인데, 그 안에서 한국군의 모습을 발견하는 그 기묘한 재미란...


  저자는 군대가 통제를 일어간 결과가 2차 대전이라고 단언한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군대가 천황이라는 한 사람의 명령에 충성하는 존재가 될 때, 그리고 정부가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게 될 때, 그 군대가 얼마나 끔직한 일들을 할 수 있는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은 분명히 보여준다. 육해공 지휘부에서 전쟁 결정을 내리고, 그 전쟁을 수행하면서 나라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끌고 내려가는 것, 천황제 유지를 위해서 일본 전국토를 옥쇄의 전장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군대의 모습일까?


  문득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그리고 일본 육사 출신임을 떠올리면서, 한국군이 왜 그렇게 일본군을 닮아갈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간다. 한때는 사단장이 시장, 군수, 국회의원들을 자신들의 아래로 보고 때리던 시절이 있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검사시절에 사단장이 하도 술을 먹여서 빨리 취하게 만들려고 폭탄주를 만들었다는 전설따라 삼천리 이야기는 당시 군대의 권력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오직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만 경호하면 모든 비리와 부조리를 눈감아주던 그 시절의 군대, 그리고 그 군대의 모습을 벗어버릴 것을 요구 받는 오늘날의 군대, 그리고 그 시절이 좋았다고 지금 군대가 보이스카웃이지 군대냐고 말하는 일부 예비역들의 발언을 보면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 진다. 민간에 의한 통제가 그 답이다. 군대는 무력을 가지고 그 무력을 행사하지만, 무력의 행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일 때 군대가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군대여 일어나라"는 모 인사들의 과거 발언은 매우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다. 한국군에게 일본 제국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뿌리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권한다. 읽으면서 우리 군대에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서 배워온 것이구나라고 무릎을 치면서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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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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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들어 보지도 못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 2주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자는 총리의 간곡한 부탁에 많은 국민들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항상 그렇듯이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젊음을 과신하면서 이럴 때 더 놀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습관에 젖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권고는 권고일뿐 강제가 아니라는 신념으로 혹은 그러한 생각도 없이 전국을 활보하다가 여행지에서 확진 판정을 받는 사람도 있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 전 모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많은 교회의 교인들, 그리고 목사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민망함을 금할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한달째 청년들과 인스타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이 상황이 속상할 뿐이고,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질본 본부장의 나날이 야위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코로나-19라는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사람을 여럿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문득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골라든 책이 페스트, 콜레라 시대의 사랑, 데카메론이다. 질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의 기록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훨씬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전염병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 작품을 몇개 골라두고 틈틈이 읽고 있다. 첫번째 책으로 페스트를 선택하고 읽기 시작한지 1주일만에 다 읽었다. 작품의 분량이 대단히 많아서 1주일을 꼬박 읽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분량으로 치자면 내 팔을 두껍게 만든 류시화의 책에 비하면 1/3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데 1주일이나 걸린 이유는 첫째로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면서 내 체력이 많이 떨어지고 생활 리듬이 깨졌기에 집중이 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는 책장을 넘기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철학적이어서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소름끼치도록 이 시대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장을 읽어가면서 오통의 아이가 죽어가는 장면을 읽으면서는 목에 무엇인가 걸려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듣고 노라면 오늘날 보수적인 교회에서 목사들이 행하는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놀라고, 페스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사협회와 오랑시 책임자들의 관료주의에서 의사협회 관계자들과 대구시장, 그리고 정부에게 딴지 걸려는 미통당 관계자들의 작탤르 발견한다. 어떻게해서든 살려보려다가 지쳐가는 리유와 그의 동료들의 모습에서 오늘도 의료 일선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의 눈물겨운 싸움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다. 떠들썩하게 살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클럽과 주점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염병을 틈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코타르와 주변 인물들을 통하여 마스크 매점 매석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이들의 추악함을 보게 된다.


  책을 읽어가면서 만나는 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결코 소설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뮈의 페스트를 읽어가면서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된다.


  도피자의 모습으로 서 있는 랑베르,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결국은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파늘루,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페스트라는 상황을 즐기는 코타르와 주변 인물들, 뚜렷한 이상이나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돕는 자의 위치에 서는 그랑, 타인을 위한 삶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맞서 싸운 페스트에 패해 죽는 그래서 성자의 삶과 가장 닮아 있는 타루, 의사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지만 끝까지 싸우는 리유, 진실을 숨기는데 더 관심을 갖는 의사와 시 당국자, 가족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그러다가 나중에는 슬퍼할 힘마저도 잃어버리는 많은 사람들. 페스트를 코로나-19로만 바꾸어 놓는다면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 분명하게 리유와 타루의 삶을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꼽을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수능에 지문으로 나온다면 학원에서도 리유와 타루의 이름을 기록하고 밑줄 쫙, 반드시 외울 것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모습으로 읽는다면,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한다면 어떻게 할까? 파늘루일 수도, 타루일 수도, 리유일 수도, 오통일 수도, 그랑일 수도, 코타르일 수도, 오통의 아들일 수도, 랑베르일 수도 있다. 또는 이름없이 스쳐지나간 사람들의 입장일 수도 있다. 각자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옳음과 정의를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페스트를 이긴 것은 연대의 힘이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페스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연대의 힘이다. 랑베르처럼 겉돌아도, 타루처럼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파늘루처럼 고민과 체념으로 살아도, 리유처럼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접해도, 그랑처럼 어찌어찌 시작해도 결국은 타인을 향해 손을 내뻗는 연대의 힘, 함께 함의 힘이 페스트의 위기를 견디게 만들었음을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여야로, 남녀로, 좌우로 갈라져서 싸우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가 소설 페스트의 시대보다 더 암울하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거 때문에 재난소득 분배를 4월 16일부터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연대의 힘을 믿어야 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씁쓸한 하루가 오늘도 저물어 간다. 정총리의 사회적 거리두기 당부 후 8일째가 저물어 간다.


PS. 소설과는 상관이 없지만 카뮈는 참 잘 생겼다. 개인적으로 잘생긴 철학자와 문인을 뽑자면 카뮈와 비트겐슈타인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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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복음 강의 - 예수의 잃어버린 가르침을 찾아서
오쇼 라즈니쉬 지음, 류시화 옮김 / 청아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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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 복음 강의라는 말에 속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가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래도 읽기 시작한 책이라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래서 인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읽었다. 잘 넘어가지도 않고, 책도 무겁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이 책을 쓴 사람이 힌두교 계통의 요기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부제 때문에 읽었지만 책은 종 잡을 수가 없다. 동서양을 오락가락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펴는데, 과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 무엇인지 저자는 알고는 썼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고, 다시 한번 류시화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도마복음은 잊혀진 복음서임은 분명하다. 정경에 들어가지고, 그렇다고 외경에 들어가지고 못하는 위경이다. 도마복음은 다른 복음서처럼 예수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는 책이다. 도마에게 주어진 예수의 비밀한 어록에 대한 책, 구원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이해되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성경으로 받아들여졌고, 영지주의가 몰락하면서 함께 사라진 책이다. 세월이 흘러 그 사본이 발견되고 최근에야 대중에게 알려진 책이다. 최근에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2000년에 비해서 최근이라는 말이지 1~2년이라는 말은 아니다. 

  도마복음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이유는 교회라는 시스템에 의해 편집되지 않았다는 평가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라는 시스템에 의해서 배제되었다는 것을 그저 기득권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잊혀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는 말이며, 이것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을 하고 살펴보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저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 나간다. 타 종교의 경전을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 나간다는 점에서는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곧 더 많은 연구와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책 어디에도 그러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끌어다 놓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예수가 인도에서 공부했고, 그가 말하는 모든 가르침이 힌두교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는 철지난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 또한 불편하다. 도마복음이라고 쓰지 않고 도마 복음이라고 쓴 데에서도 책의 저자가, 그리고 편집자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지를 단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힘들고, 불편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거의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읽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저 내 팔뚝만 굵어졌다는 것은 무척이나 서글픈 일이다. 

  왜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나왔는지 잘 가르쳐 주는 책이다. 도올의 도마복음 강의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도올의 도마복음 강의로 넘어가보려고 하는데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한다.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철대 추천하지 않을 책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별점을 두 개나 준 것은 끝까지 읽은 내 자신이 기특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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