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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평점 :
1983년 보물섬에 처음 연재된 아기공룡 둘리!
요리보고 조리봐도 음음 알수 없는 둘리 둘리
빙하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나가자 아~~
귀여운 둘리는 초능력 아기공룡
호이호이 둘리는 초능력 내친구
어린 시절 나는 둘리와 함게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버릇없게 길동이 아저씨를 길동이로 불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이클 잭슨을 꿈꾸던 마이콜, 떼쟁이 희동이, 착하기만한 철수와 영희, 외계인 도우너, 서커스단을 탈출한 또치, 우리들의 주인공 둘리는 달려라 하니와는 또 다른 꿈과 재미를 주었다. 미국에 미키 마우스 패밀리가 있다면, 프랑스에 아스테릭스와 벨기에의 스머프(미국에서 애니메이션화 했지만 원작은 벨기에다), 일본에 아톰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둘리가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씩은 둘리를 그려본 일이 있으리라. 그 둘리가 올해로 30살이 넘었다. 둘리에게 주민등록증과 호적등본이 만들어질 정도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캐릭터다. 우리에게 유관순은 항상 누나이듯이 둘리는 아기공룡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아기 공룡 둘리가 나이를 먹어 성인 공룡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최규석의 만화는 이런 발칙한 가정에서 출발한다. 추천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둘리의 원작자 김수정 선생도 생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만큼 둘리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건이다.
둘리가 성인이 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성공한 사업가? 인정받는 마술사? 만화가 최규석은 이런 장밋빛 꿈이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둘리의 성인 시절을 그린다. 나이가 들어 직장을 잡은 둘리는 부족한 스펙 때문에 결국은 공장을 전전한다. 어떠한 활동가적 기질도 풍기지 않는 정말 평범한 노동자 인생이다. 그렇게 공장에서 일하던 둘리는 프레스기에 손이 잘리고 초능력도 잃어버린다. 이젠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일용직 신세가 된다. 도우너는 어떠한가? 그는 사기꾼으로 변신하여 자신을 키워준 길동이에게 사기를 친다. 길동이는 도우너에게 속아서 집마저 날려버린다. 또치는 어떠한가? 나이가 들어 화류계를 전전하면서 폐물이 된다. 동물원 갇혀 있으면서도 웃음을 파는 하류인생이 되었다.(우리가 가끔 잊지만 또치는 암컷이다.) 사춘기를 잘못보낸 희동이는 군대를 다녀와서도 사고만 치고 다닌다. 마이콜은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 아니라 밤무대의 딴따라로 전락한다. 철수는 희동이의 합의금을 위해서 도우너를 외국인 연구자에게 팔아 넘긴다. 만화에 등장하지 않는 영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애들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마트의 캐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더 끔찍한 것은 이 설정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꿈이 있고,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했던 그 캐릭터들도 세월과 성장 앞에서는 꿈을 잃고 소시민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런 그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팍팍하다.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어떻게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라는 철수의 외침은 그래서 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아이에서 성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것이 이렇게 슬픈 일이라니!
만화를 보면서 내 삶을 반추해본다. 어린시절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과학자요, 대통령이요, 장군이요라는 대답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내 삶이 싫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내 친구들은 어떨까? 지금 집에서 자라는 내 아이는 어떻게 성장할까?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8살 진이와 7살 현준이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까? 아기 공룡 둘리의 캐릭터들이 겪는 그 아픈 길을 내 아이들이라고 가지 않으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내 아이들의 미래로 가볼 것도 없다. 지금 20대 청년들이 겪게 될 미래는 무엇일까?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장미꽃 스무송이와 향수를 받으며 장밋빛 미래를 꿈꿀텐데 그들의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크다.
미생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만화가 드라마가 되고, 직장 초년생을 미생이라는 말로 부른다. 교회 사무실에 한 자리가 있는데 복사기를 등지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들의 일상을 감시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자리를 배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변의 젊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미생 자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자리마저 없어서 주말이 되면 교회 주변을 전전하는 이들이 있다. 아직 그들은 학생이라 자리가 없어도 크게 불편함이 없겠지만 그것이 교회 사무실이 아닌, 직장 사무실이라면 어떨까? 미생 자리마저도 없어서 오늘도 백수라는 딱지를 붙이고, 취준생이라는 말로 자기를 위로하는 이들에게는 어떨까? 취업 준비 기간이 너무 오래 되어서 실업율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젊인이들이라면 어떨까?
스무살이 되었다고 성년은 아니다. 세상에 나와서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들은 성인이 된다. 둘리가 길동이 아저씨의 무덤 앞에 누워 잠시만 쉬다갈께요라고 말할 때, 아기 공룡 둘리는 성인 공룡으로 변한다. 그렇게 성인이 된 둘리는 너무나 힘들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아프다고 한다. 오늘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렇게 슬픈 성인식을 감내하고 있다. 그들에게 뭐하고 위로를 할까?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원래 청춘은 아픈거라고, 아픈만큼 성숙한다고? 어느 연예인이 모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렇지 않아도 아픈 청춘인데, 그런 청춘들을 더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왜 당당하게 갑질하는 백화점 모녀에게 반항하지 않았냐는 모 교수의 말을 아픈 성인식을 지나고 있는 젊은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짧지만, 장편이 아닌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이지만, 그래서 정말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책들이지만 그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무게는 너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