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 베버 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 폴리테이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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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막스베버의 책이 나왔다고 해서 샀더니 쌩뚱맞게 절반이 최장집 교수의 강의이다. 책을 읽다가 포기해버리면 정작 막스베버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약간은 지루한 면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왜 갑자기 베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라딘에서 관련된 글을 검색하던 중에 프레시안의 "좋은 정치인?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먼저 따지자"라는 페이퍼를 정독하게 되었다. 이 페이퍼에 최장집 교수의 강의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의도에 대하여 조목조목 비판되어 있으니 이것이 궁금한 사람은 그 페이퍼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최장집 교수의 의도를 꿰뚫을 지식도 학식도 부족한 내가 프레시안과 같은 의도의 글을 쓸 힘도, 이유도, 그리고 마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최장집 교수가 막스베버의 입을 빌려 말하는 좋은 정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좋은 정치인이란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치인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막스 베버의 생각을 잘 요약해 놓았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본질이 힘의 정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치의 핵심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통치/지배할 때, 통치자 내지 지도자가 어떻게 피치자 내지 대중으로부터 정당성을 획들할 수 있는가에 있다. 베버는 지배의 정당성을 위한 기초를 세 가지 이념형으로 구분한다.  

  첫째 전통이나 관습, 또는 선례에 기초를 둔 전통적 정당성, 둘째는 법의 절차적 원리를 중심으로 한 합리적 정당성, 셋째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자질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카리스마적 정당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의 두 가지 정당성이 하나는 전통 사회,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사회에서 지배적인 방식을 대표하는 데 비해, 카리스마적 정당성은 전통 사회나 근대사회 어디에나 속하는 유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통치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가? ...... 베버는 민주주의를 카리스마적 지배 형태로 범주화한다. 물론 현실에서 정당성의 기반은 그것이 이념형적 유형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순수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혼합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중심적이라는 말이다.(p 44~45)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들여왔다. 과거에는 천자와 신수설로, 근대에는 법과 절차의 합리성을 근거로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사회에서 객관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이 두가지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한 가지 뿐이다. 법과 절차의 합리성을 통해서만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과거처럼 천자와 나랏님을 외쳐봐야 사람들은 코웃음칠 뿐이다. 노무현 개새끼, 쥐박이를 외치는 판에 나랏님 소리를 들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오직 헌법과 법 집행의 절차적 합리성을 통해서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카리스마적 정당성이라는 것은 마치 덤과 같은 것이지 베버가 주장하듯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카리스마적인 정당성이 집단 내에서야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도 있지만 외부로 확장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해 버린다.(북한을 보라.)  때론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내부적으로도 카리스마적인 정당성이라는 것은 동네 개이름만도 못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대단한 착각을 한다. 입만 열면 서민 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사고구조는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고 있다. 공공연히 사용하지 않지만 그들의 머릿 속을 꽉 채운 것은 나랏님이다. 이러한 사고가 국가의 정책에 그대로 드러난다. 결정은 자기들이 하고, 국민들은 따르기만 하면 된다. 감히 토를 다는 일은 삼족을 멸해야 하는 반역 행위이다. 그러니 빨갱이로, 좌파로, 용공 세력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카리스마적 정당성을 첨가하면 효과는 확실하다. 지난 총선 친박연대라는 아주 황당하면서 훌륭한 작명 실력을 보여주신 분이 있지 않은가? 한나라당도 아니면서 한나라당의 박근혜(좀더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겠지만) 의원과의 친분관계를 내세우면 표를 구걸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들을 찍어 준 사람들도 이해 안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느새 대선에서 정책이 사라져 버리고 사람 이름만, 그것도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 가득하다. 어느 정당인지, 그 사람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그럴 듯한 이름만 등에 업으면 표를 얻는다. 어쩌면 베버는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아주 우아하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 이런 기현상이 벌어질까? 이유는 간단하다. 법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법을 세우는 분들이라 그런지 법을 무시한다. 자기들은 국민들을 법이라는 쇠창살에 가두고 감시하는 교도관이요 자유인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국회에서 화려한 액션씬이 난무하는 것이 아닌가? 오죽하면 국K-1이라는 별칭을 얻었겠는가? 그들의 이러한 발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판결문이 있다. "절차는 위법이지만 결과는 합헌이다." 법적인 정당성이 설 자리가 어디있는가? 대한민국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오로지 전통적 정당성과 카리스마적 정당성밖에 없다. 전자를 주로하고 거기에 후자를 가미하는 것이 제일 효과가 좋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좋은 정부, 좋은 정치인인가 고심해봐야할 문제이다. 

  둘째 좋은 정치인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한다. 정치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정치인도 공동체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자기 신념에 어긋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너무 타협을 해서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자기의 정치적인, 도덕적인 신념이 분명해야 한다. 상호 모순적인 이것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게 될 때 좋은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당이란 무엇인가? 비슷한 정치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모인 단체가 아닌가? 이것은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의 기조라는 것이 신념 윤리에 속하는 것이라면, 여러 가지 정치적인 타협이나 행동, 혹은 정치가의 선택은 책임 윤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가지만 확인해 보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무엇인가?자유선진당은? 국민참여당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한나라당을 견제하기 위하여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연합한다는 것이 가당키나한 일인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사람의 차이밖에 없다. 막말로 그 놈이 그 놈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떨어져도 민주당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민주당이 민주노동당과 연합전선을 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당의 기조를 생각한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야권대 연합이라는 것에 대하여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있다. 정권 획득을 위해서 고만고만한 똘마니들이 모여드는 것이고, 민주당이 양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게 신념까지 무시하고 모였다고 한나라당을 이기기나 하는가? 혹은 이기고 난 다음 정권을 획득하고, 금배지를 단 양반들이 한나라당과 다른 정책을 펼치기는 했던가?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기에 급급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도 의원의 급료를 올린다거나 하는 문제에는 일치단결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신념도 없고, 책임도 없다. 설령 신념이 있다고 할지라도 권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것을 포기할 줄 아는 상당히 현실 타협적인 부류일 뿐이다. 이들을 좋은 정치인으로 볼 수 있을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요근래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관한 관심들이 높아졌다.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참정권을 소중히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난생 처음 봤다. 지자체 선거에도 이 사람이 어느 당인가 유심히 살펴보는 일도 많아졌다. 젊은 층들의 투표율과 의지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신념도 책임도 없는 정치인, 법적인 합리성은 무시하고 결과만 자기들 입맛에 맞다면 만사OK라는 정치인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내년에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진다. 특히 대선은 빅이슈이다. 지금부터 누가 대권후보로 나올 것인지는 모두의 관심사이다.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이 빅3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오세훈, 김문수, 정동영은 탈당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면 대선 후보로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민노당에서는 아마도 권영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영길 외에는 사람이 없다. 대선후보감이 없어서보다는 안 키워서이다. 진보신당은 노회찬일 것 같고, 그 외에 군소정당이 난립할 것이다. 가만히 이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도대체 찍을 사람이 없다. 베버의 말대로 소명감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한번 더 깊어지는 대선과 총선이 되지 않을까 싶다. 투표 용지에 기권란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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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5-26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폭력의 세기>에 대한 짧은 댓글을 달러 왔다가...글 잘 읽고 가네요.^^ <폭력의 세기>는 1부가 좀 난삽하지만, 2~3부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평을 하자면 아렌트 번역물로는 그리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더군요. (실은 다른 번역본도 그리 낫지는 않습니다.--;) 글을 명료하게 쓰지 않는 버릇을 가진 독일어권 저자라는 한계 때문인지, 아렌트의 영문 저서도 그리 유려한 글은 아닌 것처럼 보이더군요. 줄입니다.^^

saint236 2011-05-27 11:34   좋아요 0 | URL
헉...그런가요? 난삽한 문장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 그리 콤마가 많은지...가끔은 친절한 의역씨가 그리워질 때도 있더군요.
 
미친 등록금의 나라 - 반값 등록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지금+여기 1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지음 / 개마고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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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대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10월 18일 이화여고에서 "어머니가 원하는 대통령"이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을 마친 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 참석자가 가뜩이나 비싼 등록금을 인상하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이명박 통령께서는 아주 인상 깊은 답변을 하셨다.  

  "등록금이 높아지면 장학금 받으면 되겠네." 

  상황과 답변을 보면 반어법이라고 느껴지겠지만 놀랍게도 반어법이 아니다. 정말 이명박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등록금이 정몽준 의원처럼 버스값으로 치부할 정도의 재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연세대 원주 캠퍼스(연대 신촌 캠퍼스에 다니는 이들은 원세대라 부르면서 같은 연대로 분류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를 1년 다니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한국 대학 등록금의 현실에 대하여 한번도 고민을 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대학 등록금에 관련된 이명박 대통령의 어휘는 정말로 주옥같이 화려하다. 

  "등록금이 높아지면 장학금 받으면 되겠네" 

  "나 자신은 반값 등록금 공약을 한 적이 없다." 

  "등록금 싸면 좋겠지. 그런데 너무 싸면 대학교육 질이 떨어지지 않겠나?"  

  이주호 장관이 한 같은 맥락의 말 또한 명작이다.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담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말이다." 어떻게 부담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현재 대학 등록금은 얼마나 될까?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옮겨온 글인데(http://hantory.tistory.com/348) 대략 등록금이 800만원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이정도 등록금이라면 얼마나 될까? (물론 이보다 더 싼 등록금도 있겠지만 계산하기 쉽게) 800만원으로 잡아서 등록금 상환을 계산해 본다. 한번 계산해 보니 피부에 확 와닿는다. 후불제 등록금은 복리로 계산한다는데 워낙 복잡하니 간단하게 단리로 계산해 보면 이렇다. 

  대출금 총 3200만원(4년*800만원) + 1년치 이자 5%(이것도 싼 거란다) 160만원=3360만원 

  졸업과 동시에 갚아야 할 비 3360만원이 생기는 것이다. 학자금 갚아본 사람이 있겠지만 대출을 갚는 것이 쉽지 않다. 3학기 대출받은 등록금을 졸업한지 4년이 지난 내 동생도 아직 상환 중이다. 1500만원을 기점으로 대출금을 상환해야 하는데 복잡하니 차떼고 포떼고 단순하게 계산하자. 2000만원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보험, 세금 등 실 수령액이 대략 1500쯤 된다고 계산하면 월 수령액은 125만원이다. 1년 이자가 160만원(절대 복리가 아닌 단리다. 복리는 상상을 초월한다.)이다. 무슨 말인가? 한달에 이자를 13만 3330원을 문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12만원씩 원금을 보태 25만원을 상환한다고 하자. 25만*12=300만, 즉 1년에 300만원을 상환한다는 말이다. 3360만원이면 대략 11년이 걸린다는 말이다. 125만원 월급에 25만원을 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년 월급이 오른다고? 뭔가 모르는 말씀이다. 월급이 오르는 것보다 물가 오르는 것이 더 빠르다. 무리해서 갚는다고 해도 생활은 해야 하니(먹고 출근하고 공과금 내고) 최소5~6년은 걸린다. 이 동안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갚아야 할 금액이 절대로 늘어나지 않는다고 말도 안되는 가정이다. 복리는 이자에 이자가 더 붙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에 더하여 한 가지 큰 함정이 있으니 졸업 후 3년 동안 상환을 하지 않으면 강제 상환을 실시하고 이 상태로 1년이 지나도 상환이 되지 않으면 원리금 전액을 상환하거나 보증인을 세우고 일반대출로 전환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이 몇 년간 젊은 청춘들의 미래를 잿빛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도 등록금을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대학과 정부는 한 목소리로 등록금이 싸니 더 올려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매년 10몇 퍼센트씩 등록금을 올린다. 한 자리수로 등록금을 인상하면 등록금을 인상하면서도 마치 큰 은혜나 베풀듯이 생색을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대학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이다.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마치 덜 떨어진 인간 취급받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니 최소한 인간 대접이라도 받으려면 대학 졸업장은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10명 중 8명 이상이 대학을 가는 상황에서 대학을 가지 않은 2명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머리가 나쁜, 나아가서는 불량품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를 만들어 놓고 대학은 원해서 가는 것이니 등록금을 알아서 하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다. 마치 군대에서 각 계급별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암묵적으로 다 정해놓고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과 동일하다.(군대 다녀온 남자들은 편하게 해, 괜찮아라는 말은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게다가 교육이란 것을 과연 사유재로 봐야 하는가도 문제이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산다면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과거 정권들이 왜 그렇게 교육에 목숨을 걸었던가? 왜 부모님들이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걸었던가? 개인적으로는 빈곤의 탈피도 있지만 그렇게 배움을 통하여 나라의 발전과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니던가? 교육은 사유재라기보다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하다. 하다 못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신지식인, 생활의 달인도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사유재로 봐서 누가 대학가랬는가 자기가 잘먹고 잘살려고 했으면 알아서 책임져라는 식으로 나몰라라 하는 것은 책임을 저버리는 행동이다. 과거에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지금의 대학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과거 교육가들은 미련해서 혹은 잘 몰라서 중고등학교 의무 교육을 시행한 것이 아니다. 교육에 대한 사고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육을 사유재가 아닌 공공재 혹은 그에 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교육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 교정이다.

  1000만원에 육박하는 대학 등록금!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리고 더 절망스러운 것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매년 끊임없이 더 오른다는 사실이다. 800만원 등록금이 매년 5%오르면 40만원이 7%오르면 56만원이 오른다. 5%인상이면 200만원이 인상되는데 4~5년, 7%면 3년이다. 내 아이가 지금 4살이니 16년 후면 단순 계산으로도 600만원~1000만원이 오른다는 말이다. 그럼 1년 등록금이 1400만원에서~1800만원이라는 말인데 연년생으로 둘이니 2800만원 ~ 3600만원이라는 말이다. 솔직히 이 정도면 대학을 보낼 자신이 없다. 아니 생각이 없다.  

  상황이 이 정도인데도 정부는 해결할 생각이 없다. 구체적으로 그런 공약을 한 적이 없다는 유머러스한 답변으로 우리를 웃겨 준다. 그리고 높은 등록으로 우리를 울린다. 울다가 웃으면 ***에 털난다는데 이런 젠장이다.  

  어찌 되었든 이 문제는 조만간 해결이 될 것 같다. 정부에서 보조하여 등록금이 내려가던지, 아니면 돈 있는 사람만 대학을 가던지 해서 말이다. 전자라면 여전히 우리 나라는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지만 훌륭한 인재 즉 인적 자원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후자라면 대학 진학률이 대폭 하락하여 대학이 부도나서 정리가 되던지 아니면 알아서 등록금을 내리던지 하겠지? 물론 이렇게 가면 국민들이야 정말 죽어나겠지만 말이다. 아마 정부에서는 이것을 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죽여야 살릴 것이 아닌가? 4대강 살리기 사업처럼 말이다. 

  PS. 교육을 상품으로 보아도 그렇다. 담합은 공정거래법 위반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학등록금은 담합을 해도 처벌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슨 시장의 원칙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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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가 - 국제원조를 둘러싼 정치와 외교적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다
캐럴 랭커스터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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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국제 원조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개론서이다. 각국의 국제 원조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는지, 그리고 현재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인용하며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에 비례하여 재미가 떨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처럼 이쪽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정확한 데이어와 여러가지 기구 이름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질 지경이다. 혹 이 책을 사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이 쪽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이 있다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국제 원조라는 것은 최근에야 생긴 개념이다. 부자 나라에서 부를 덜어서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는 발상은 불과 100년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현상이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은 그 사람의 부도덕의 결과라는 생각이 보편타당하던 시기에 자신의 부를 덜어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할 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현상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인가?  

  오로지 정치적인 이유때문이다. 2차 대전과 공산주의의 대두로 발생한 냉전을 겪으면서 어쩔 수없이 강요받게 된 정치적 선택이었다.그러나 그 효과가 꽤 좋았던지 오늘날에도 종종 사용되는 수법이다. 학자들은 별 효과가 없다고 하지만 원조는 여러가지 제재 수단 가운데 무력을 제외한 꽤나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원조는 오늘날에도 썩 훌륭한 외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물론 이 책은 원조의 성격을 여러가지로 세분하여 나누고 있지만 평범한 내가 보기에는 정치적인 목적이나, 외교적인 목적이나 그다지 다를바가 없다.) 적절한 당근과 채찍의 사용은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당근과 채찍의 적절한 혼용말이다. 

  MB정부 이후 대북 정책은 강경 일변도로 변했다. 과거에 퍼주고도 얻어맞았다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대북정책에 있어서만큼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강하게 대응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정부의 강한 대응을 북한은 지나가던 개가 짖는 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강경책이 되어 버린 것이 MB정부의 대북정책의 핵심이란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퍼주기를 멈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작정 퍼주고, 그것이 항상 북한군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돈 가지고 생색내보고 싶다는 졸부근성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굽실 거릴 거라는 얕은 생각 때문일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정부는 원조를 멈추었고, 민간 차원의 지원 또한 제재하지는 않지만 장려하지 않은 방관자적 태도를 취해왔다. 그런데 그 정책을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개성 공단을 폐쇄한다든지, 천안함이 침몰된다든지,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명확해서 우길 생각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북 원조라는 카드를 가지고 평화를 사왔던 것이다. 그리고 평화를 사왔던 대가치고는 꽤 사게 먹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려잡자 빨갱이를 외치는 대북단체들은 이러한 원조정책을 퍼주기만 한다고 비난해 왔으니, 도대체 그들이 때려잡고 싶은 것은 북한인지, 아니면 남한인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우리가 북한을 도와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평화의 대가이다. 그간 우리는 돈으로 평화를 사왔던 것이고, 앞으로 이게 가장 싸게 먹히는 방법이다. 물론 군사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둘째, 통일을 위한 포석이다. 만약 이대로 북한이 무너진다면 크게 두 가지의 시나리오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북한이 완전히 항복하고 남한과 하나가 되는 것인데 그 때 발생할 통일 비용은 아마 우리 나라를 몇 십년 후로 되돌려 버릴 것이다. 물론 남과 북은 하나의 나라이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좋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를 떠 올려보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이 무너지면서 남한이 아니라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이다. 중국은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북한과의 경제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북한의 정권이 무너질 시 중국이 북한에 진입하여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생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는 죽쒀서 개주는 격이 된다. 셋째,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이다. 북한은 지금 사상 최악의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기에다가 얼마전에 단행했던 화폐 개혁은 철저히 실패하였고, 그 결과 북한의 경제 사정과 식량난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국제 사회에서도 이들을 돕기 위해서 방법을 모색하는 판에 같은 핏줄을 자처하는 우리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이외에 여러가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위의 세 가지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충북히 북한을 도와주어야만 한다. 

  다소 어려운 말들, 헷갈리는 기구 이름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이 어려우면 그냥 건너 뛰어도 좋다. 다만 끝까지 읽고 나서 왜 우리 나라가 북한을 도와야 하는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만 있다면 이 책은 한번쯤은 읽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국제학이나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히 읽어볼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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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여호 2011-04-26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명박 정부 들어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정치화된 것 같습니다.
인도주의에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가 적용되어서도 안되죠...

좋은 책,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saint236 2011-04-27 12:10   좋아요 0 | URL
덴마크의 원조 정채에 관한 장을 읽다가 왠지 모르게 창피해지더군요.

마녀고양이 2011-04-2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한 원조에 대한 이유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야 하고, 통일로 인해 우리의 한계성을 일부라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땅이었던 북쪽이 가장 먼 지역으로 평생 여행 한번 불가능하게 되었다는게 슬픕니다.

저는 MB의 생각이 무엇인지 방향성이 과연 있긴 한지...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

saint236 2011-04-27 16: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방향이 있기는 있는걸까요?

기념 2011-04-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쎄요 지원은 좋지만 김정일 체제를 위한 지원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것이며 국가에서 하는 일을 개인의 생각을 넣어서는 안됩니다.

saint236 2011-04-28 22:59   좋아요 0 | URL
국가가 하는 일이라...국가가 하는 일이 결국은 개인들의 생각이 모여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아닌가요? 국가가 하는 일에 개인의 생각을 넣어서 안된다면 투표도 안되는 것이고, 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안되겠죠.

유지훈 2011-06-13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갑니다. 꾸벅... 후후후

saint236 2011-06-13 21:59   좋아요 0 | URL
이 책 번역하느라고 고생하셨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쉽게 들통이 날 거짓말을 하려면 100% 거짓을 말해라. 그렇지만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을 하려면 90%의 진실에 10%의 거짓을 섞어라.  

  어디서 본 이야기인지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아서 출처를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몸으로 체득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여러 사람을 통해서 듣기도 하고, 심지어는 무협지에도 자주 등장한다. 꼭 감추어야하는 불편한 것을 9개의 평범한 사실로 가려두는 것! 지금까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하여 자주 사용했던 방법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이런 방법들을 하나하나 파헤친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우리에게 해 왔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90%의 이야기들을 먼저 들려주고 나서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10%의 불편한 진실을 까발린다. 저자의 이야기가 사실무근의 거짓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보수를 자처하는 꼴통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이유가 숨기고 싶은 10%의 불편한 진실을 까발리는 그의 무모함(나는 이것을 용기하고 부르고 싶다.)에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모함이 그가, 그리고 그의 책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아니겠는가? 

  23가지를 다 살펴볼 수 없지만 간단하게 기억에 남는 것을 몇 개 살펴보면 이렇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민족분열, 잦은 무력 충돌, 투자자를 보호할 제도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흑인들의 게으른 민족성 때문이다. 비단 아프리카 국가들 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저개발 국가들을 싸잡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들과 달리 근면성실하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한 것이라는 말은 어린 시절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분이 특별하게 보수적인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냥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해 지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이렇게 우리가 자주 들어온 이야기를 먼저 거론하고 지금까지 이 사회가 말하지 않았던 그 뒤에 숨겨진 진실에 대하여 들려준다. 

  아프리카가 최근 들어 성장 실패를 경험한 주된 이유는 정책, 즉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 강요한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에 있다. 특정 자연 조건이나 역사적인 배경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가 겪는 문제가 정책 때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진정한 비극은 만성적 성장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P 169) 

  왜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끌어내느냐? 규모만 다를 뿐이지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소름이 끼치도록 동일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가정 교육의 문제라든지, 혹은 개인적인 게으름이라든지, 혹 그것도 아니면 개인의 열등한 성품 탓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안고 풀어야할 고민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복지 정책이나 세금 정책을 세우고 진행할 때도 마치 성은이라도 베푸는 양 으스대거나, 아까워서 어떻게든 삭감하려는 것이 소위 양식있는 보수라고 자처하는 분들의 행위가 아니던가?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말을 가지고 지금은 복지보다는 파이키우기에 전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이 어디 한두분이던가? 이건희 회장(도대체 전회장인지 현회장인지...)의 국민소득 4만달러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말이라던지 이명박 대통령의 747정책이라는 꿈 또한 같은 말이 아니던가? 조금 유식한 말로 트리클 다운이론이라고 하던가? 장하준 교수는 이 또한 교묘한 거짓말, 구라라고 말한다. 

  단순히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더 많은 부가 사회 전체의 혜택으로 파급되게 하려면 국가는 각종 정책 수단(예를 들어 부자와 기업의 감세를 허용하는 대신 투자를 조건으로 제시)을 통해 부자들로 하여금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하며, 복지 국가 같은 매커니즘을 통해 전 사회 구성원들과 성장의 과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P 197) 

  이렇게 같이 나누어 먹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일이요, 북한의 지령을 받고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이적 행위로 몰아서 강제로 진압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체제에 순응한 사람들을 통하여 유포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애국심 고취가 아닌가? “우리가 남인가? 그래도 국산품을 애용해야지! 그 기업들이 국민 먹여 살려 주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조금은 황당무계한 말로 부의 재분배를 뒤로 미루거나 무시하는 행위를 정당화한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 정부, 기업, 국민들도 이러한 논리가 과연 옳은지 그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덮어놓고 믿고 있지 않은가? 어떤 부류는 구라를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부류는 정말로 몰라서 사용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요즘들어 뜨겁게 논란이 되는 아이폰과 갤럭시S, 아이패드와 갤럭시 탭의 대결구가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기계적으로, 소프트웨어적으로 나으냐라는 상식적인 토론도 있지만 “그래도 삼성인데, 국산품인데, 어떻게 외국 기업에게 부를 넘길 수 가 있는가?”라는 이상한 토론이 더 활발하다. 이런 토론이 활발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민간 기업이 부와 일자리, 세수입을 창출하는 데 장점들을 역할을 한다. 기업이 잘 되면 결국 경제도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거론되는 기업이 1950년대의 GM처럼 규모도 크고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는 기업이라면 그 기업의 성패와 운명이 경제 전반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수많은 납품 업체, 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들, 그 기업에서 일하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고용인들이 구매를 상품의 생산 업체 등 거대 기업 하나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꼽자면 한이 없다. 그래서 거대 기업의 경영 성적이 국민 경제 번영에 특히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P 254 ~ 255) 

  그래서 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미지니스 프렌들리를 외치지만 그것이 진실인가? 만약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자본은 미련없이 다른 나라로 발걸음을 돌릴 것인가? 공장을 이전하고, 자본을 이전하고, 그래서 국민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국민 경제를 위해서 기업의 편의를 봐주어야 하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규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가 많더라도 기업이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 합법적이기만 하다면 경영권이 위태하지 않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돈이 없어서 국민 경제가 침체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서 사업하기 힘들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들이 대량의 현금을 금고에 넣어두고 유사시(가령 경영권 방어라든지) 사용하기 위하여 묶어 두기 때문이다. 어떻게 금고문을 열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제조 설비에 투자하여 고용을 창출하게 할 것인가가 지금 정부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기업 정책을 세우고 시행하는 고위 공무원들은 과거처럼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는 도저히 기업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또한 재미는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쁜 사마리아인들만은 못한 것 같다. 37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에 23가지를 넣자니 깊이 있게 다룰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개정판을 낸다면 책의 내용을 도식화해서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표로 만들어 주는 것도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가려진 10%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여기에서부터 더 나은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편함을 솔직하게 까발려 준 장하준 교수에게 감사하며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다만 이 책으로 인하여 그가 또 공격을 받게 될 것 같아서 안타깝다. 누가 알겠는가? 이 책이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 목록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지 말이다. 

ps. 이상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삼성이,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재벌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들이 해왔던 이야기들이 묘하게 이 책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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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사교육 - 내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학부모를 위한 교육 필독서
이범 외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 교육감 선거 때 곽노현 후보를 찍었다. 그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망만 더 할 뿐이었다. 온갖 진보적인 정책들을 내세우고 실행하겠다고 하던 그였지만 결국 자녀 문제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아들도 외고에 입학했던 것이다. 교육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하는 교육감도, 그것도 거의 빨갱이로 몰아가는 진보진영의 후보라고 불리는 곽 교육감마저도 자녀 교육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한민국이 처한 가장 큰 위기를 꼽자면 사교육 문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주거 비용, 인구 감소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인구 감소가 가장 커다란 쿤제로 꼽힌다.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서 강남구는 3째인가 5째인가를 낳으면 몇천만원을 준다는 소리까지 들리던데, 진실이 어떻든 간에 각 자치단체에서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서 당근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구 감소 추세를 둔화시키거나 증가로 돌이켜 세우지 못한다. 약간의 당근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교육과 턱 없이 높은 주거비용이다. 이 두가지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당근만 제공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언 발에 오줌누기식 처방이다. 정부는 왜 이것을 잡지 못하는가? 직접적인든 간접적이든 기득권층들이 교육과 부동산에 이익의 줄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현실적이고 좋은 정책을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곽 교육감과 같은 웃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교육과 부동산 문제에서만큼은 전국민이 이해당사자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답을 선뜻 제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손만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 이 상황이 지속되어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존재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이라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많은 대답을 내 놓았지만 그것들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교육의 문제는 신뢰의 문제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중졸 혹은 고졸, 넓게는 전문대 졸까지)도 사회 안에서 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 믿어 주는 부모, 우리 사회는 비교적 정의로운 곳이라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보편적인 믿음 등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교육 문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법을 지키고 정직하게 행한다면 손해본다면 누가 법을 지킬 것인가?  

  어제 저녁의 일이다. 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 시간에 한 여자분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자식이 고2인데 학원을 다니고 싶지 않다고 하기에 걱정이 된다는 말로 고민을 털어 놓으시기 시작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아들이 단과 학원을 다니는데 하루에 3시간씩 영어 수학을 격일로 공부하는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른 공부를 할 수 없어서 답답하기에 그만 다니고 자기가 부족한 공부를 스스로 해보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 대견하긴 하지만 다른 아이들 다 학원 다니는데 자기 아들만 학원을 안다니면 성적이 떨어질까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계셨던 모든 분들이 이구 동성으로 한 말이 무엇인줄 아는가? 믿어주라는 것이다. 자식이 결정했으면 한시적으로 기한을 정하고(예를 들어 중간 고사라든지) 믿어주라는 것이다.  

  이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육문제는 결국 신뢰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부모의 불안감을 최대한 조장하는 것이, 그리고 자기 자식은 특별하다라는 환상감을 지속적으로 심어주는 것이 사교육 시장의 시스템이 아닐까? 이 불안감에 휩싸여서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치르고 있다. 쓸데없이 자주 정책을 바꾸거나, 말로만 하는 탁상공론이나, 경쟁을 가속시키는 무의미한 일들을 젖혀두고 어떻게 하면 교육에서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교실에 에어컨 하나 더 놓는 문제로 학부모 모임을 소집하지말고 교육의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역 사회 모임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사교육 없는 세상을 향해 진지하게 모일 수 있는, 더 나아가 진정한 교육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움직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은 조약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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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1-03-1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알라디너 바람구님께 교육문제는 사회문제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바람구두님은 (제 이야기가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바라보면 문제가 너무 커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saint236 2011-03-19 12:02   좋아요 0 | URL
문제가 커져도 그게 현실이지요. 괜히 덮어두면 수습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마녀고양이 2011-03-18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인트님, 절대 공감합니다.
마립간님의 말씀처럼 교육은 사회 문제와 따로 바라보면 안 된다는 점 역시 공감합니다.

중졸, 고졸이어도, 3D 업종이어도, 일한 만큼 제대로 받고
너무 큰 임금 격차가 나지 않는다면..... 왜 머리 쥐어싸는 대기업에 들어가려 하겠습니까.
저는 임금 평등화 및 고용의 촉진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육을 덜 시킬겁니다. 솔직히 학원에서 외우는 교육을 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요.. ㅠ

saint236 2011-03-19 12:03   좋아요 0 | URL
월급뿐 아니라 일하는 기업의 크기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것도 문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