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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프로야구 원년의 전두환 전 대통령 시구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축구는 현대화의 상징이 되었고, 곧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란의 역사가 호창 체하비의 비판이다. 축구가 스포츠가 아닌 정치화 되어 권력자들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비단 이란만이 아니다. 축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이며 동시에 가장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스포츠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예들을 들어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세르비아의 인종주의, 영국의 신교과 구교의 대립, 유대문제, 브라질의 카르톨라스, 우크라이나의 인종차별, 이탈리아의 사회 전반적인 부패현상, FC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중동의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이란의 축구,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국의 축구 형오라는 몇 가지 틀에서 축구의 심상치 않은 포스를 지적하고 있다. 오랜 세월 기자로 살아온 저자의 백그라운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통찰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한다. 그러나 축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 아무도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축구로 인하여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다국적 기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가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축구에 열광할 뿐이다.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하여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국가대표 경기,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는 그렇게 열광하면서(실제로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해 보라. 그렇게 많은 여자 관중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 팬들이 축구의 룰을 알고 열광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라.) K-리그는 왜 그리 텅텅비는지 관심이 없다. 박지성의 선발 출장이, 이영표, 설기현, 이동국의 EPL 진출을 연신 입에 올리고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우리가 왜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떠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작동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이것이 민족주의라는 이상 열기에서부터 비롯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요, 국위 선양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가? 오랜 세월 외세의 핍박을 받아온 우리 민족 특유의 혈연의 끈적함을 통하여 프리미어리거나, 국대들과 나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와 활약이 나의 성공이라 생각하는 대리만족 때문이다. 축구는 특히 이러한 대리만족과 공격성이, 그리고 동일시와 민족주의가 가장 강하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스포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축구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축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이다. 1997년 박찬호라는 첫 메이저 리거의 역투는 IMF의 한파를 넘고 있는 우리에게 잠시의 쾌락을 선사하였다. 그의 역투는 몰핀이 되어 IMF의 한파에 신음하고 아파하던 우리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박찬호의 선발 등판이 있는 날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국이라는 사회가 모든 일을 팽개치고 멈추어서서 그를 응원했던 일이 있었다.(물론 나도 대학 수업을 빠지고 응원을 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더 과거로 들어가보자. 우리 나라에 프로 리그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동대문 구장으로 대표되던 고교 야구가 죽고 프로리그가 도입된 시기가 언제인가? 5공시절이다. 불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권력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스포츠와 영화와 성을 이용했음을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프로야구에 열광하는 이들 중에서도 잘 모르는 사실은 우리나라 프로리그의 첫 시구자는 연예인도, 국회 의원도 아닌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축구가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일제 시대 많은 한국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준 것은 고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이렇듯 정치와 스포츠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대로 스포츠는 일차적으로 국민들의 체력을 길러 국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로 사용된다. 북한과 우리나라의 병사들의 체격차이를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스포츠는 국민에게 단체적 생활의 질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된다. 학교 체육이 추구하는 가장 큰 목적이 이것이다. 학교 체육이 입시 정책 때문에 약화되고 유명무실화 되면서 소위 말하는 싸가지 없는 학생들, 무법자를 동경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사실은 우리에게 심상치 않은 시각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스포츠는 선동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지금 스포츠의 가장 큰 역할은 이것이다. 정치적인 선동을 위하여 사용되는 스포츠는 역사상이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독일의 게르만 우월주의를 나타내기 위한 11회 올림픽인 베를린 올림픽(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여 히틀러와 악수한 올림픽)이 가장 큰 예이다. 이 올림픽을 통하여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더 선동하였고 이는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스포츠 정치학은 이러한 스포츠 이해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스포츠의 선동의 기능을 주목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미국인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이다.)를 통하여 스포츠 정치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상술과 스포츠를 도구화 하는 사람들의 야합이 맞아 떨어져 지금 축구는 전 세계를 정복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축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다. 미국이 축구를 거부하는 것은 미국 나름대로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야기는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세계화=미국=다국적 기업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였고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지만 저자는 세계화=다국적 기업은 옳지만 이것들과 미국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 일견 옳은 말인듯 느껴지지만 왠지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진 자의 불만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축구라는 운동이 어떻게 세계화를 이끌어 냈으며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는지 생각해보고 살펴보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세계화를 반대하고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축구를 행하거나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축구란 종목이 가진 기이함이 아닐까? 축구만이 가진 그 둥글둥글함, 그리고 광기, 에너지, 열정의 힘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고 난 후 이런 모순적인 내 모습을 발견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축구를 좋아하고, 맨유의 경기를 보며 열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