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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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프로야구 원년의 전두환 전 대통령 시구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축구는 현대화의 상징이 되었고, 곧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란의 역사가 호창 체하비의 비판이다. 축구가 스포츠가 아닌 정치화 되어 권력자들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비단 이란만이 아니다. 축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이며 동시에 가장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스포츠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예들을 들어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세르비아의 인종주의, 영국의 신교과 구교의 대립, 유대문제, 브라질의 카르톨라스, 우크라이나의 인종차별, 이탈리아의 사회 전반적인 부패현상, FC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중동의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이란의 축구,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국의 축구 형오라는 몇 가지 틀에서 축구의 심상치 않은 포스를 지적하고 있다. 오랜 세월 기자로 살아온 저자의 백그라운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통찰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한다. 그러나 축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 아무도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축구로 인하여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다국적 기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가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축구에 열광할 뿐이다.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하여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국가대표 경기,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는 그렇게 열광하면서(실제로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해 보라. 그렇게 많은 여자 관중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 팬들이 축구의 룰을 알고 열광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라.) K-리그는 왜 그리 텅텅비는지 관심이 없다. 박지성의 선발 출장이, 이영표, 설기현, 이동국의 EPL 진출을 연신 입에 올리고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우리가 왜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떠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작동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이것이 민족주의라는 이상 열기에서부터 비롯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요, 국위 선양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가? 오랜 세월 외세의 핍박을 받아온 우리 민족 특유의 혈연의 끈적함을 통하여 프리미어리거나, 국대들과 나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와 활약이 나의 성공이라 생각하는 대리만족 때문이다. 축구는 특히 이러한 대리만족과 공격성이, 그리고 동일시와 민족주의가 가장 강하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스포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축구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축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이다. 1997년 박찬호라는 첫 메이저 리거의 역투는 IMF의 한파를 넘고 있는 우리에게 잠시의 쾌락을 선사하였다. 그의 역투는 몰핀이 되어 IMF의 한파에 신음하고 아파하던 우리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박찬호의 선발 등판이 있는 날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국이라는 사회가 모든 일을 팽개치고 멈추어서서 그를 응원했던 일이 있었다.(물론 나도 대학 수업을 빠지고 응원을 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더 과거로 들어가보자. 우리 나라에 프로 리그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동대문 구장으로 대표되던 고교 야구가 죽고 프로리그가 도입된 시기가 언제인가? 5공시절이다. 불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권력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스포츠와 영화와 성을 이용했음을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프로야구에 열광하는 이들 중에서도 잘 모르는 사실은 우리나라 프로리그의 첫 시구자는 연예인도, 국회 의원도 아닌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축구가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일제 시대 많은 한국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준 것은 고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이렇듯 정치와 스포츠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대로 스포츠는 일차적으로 국민들의 체력을 길러 국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로 사용된다. 북한과 우리나라의 병사들의 체격차이를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스포츠는 국민에게 단체적 생활의 질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된다. 학교 체육이 추구하는 가장 큰 목적이 이것이다. 학교 체육이 입시 정책 때문에 약화되고 유명무실화 되면서 소위 말하는 싸가지 없는 학생들, 무법자를 동경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사실은 우리에게 심상치 않은 시각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스포츠는 선동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지금 스포츠의 가장 큰 역할은 이것이다. 정치적인 선동을 위하여 사용되는 스포츠는 역사상이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독일의 게르만 우월주의를 나타내기 위한 11회 올림픽인 베를린 올림픽(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여 히틀러와 악수한 올림픽)이 가장 큰 예이다. 이 올림픽을 통하여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더 선동하였고 이는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스포츠 정치학은 이러한 스포츠 이해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스포츠의 선동의 기능을 주목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미국인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이다.)를 통하여 스포츠 정치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상술과 스포츠를 도구화 하는 사람들의 야합이 맞아 떨어져 지금 축구는 전 세계를 정복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축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다. 미국이 축구를 거부하는 것은 미국 나름대로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야기는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세계화=미국=다국적 기업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였고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지만 저자는 세계화=다국적 기업은 옳지만 이것들과 미국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 일견 옳은 말인듯 느껴지지만 왠지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진 자의 불만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축구라는 운동이 어떻게 세계화를 이끌어 냈으며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는지 생각해보고 살펴보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세계화를 반대하고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축구를 행하거나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축구란 종목이 가진 기이함이 아닐까? 축구만이 가진 그 둥글둥글함, 그리고 광기, 에너지, 열정의 힘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고 난 후 이런 모순적인 내 모습을 발견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축구를 좋아하고, 맨유의 경기를 보며 열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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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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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16일 인수위에서 새정부의 조직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세부적으로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 골자는 작은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인력감축 및 혹독한 공직계의 구조조정이다. 지금까지 공직계의 무사안일주의, 사보타주가 국민들의 비난을 샀기 때문에 이명박 당선자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여기에는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하는 마당이다. 물론 나도 공직자들의 대충주의와 불친절, 철밥통이라 말하는 여러가지 관행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던터라 꼭 필요한 수순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인수위의 다음 말이다. 앞으로 우체국을 비롯해서 몇개의 공사를 민영화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공무원들의 수를 줄여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무원 신분은 유지하여 줄 것이다. 무슨말인가?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앞으로 공무원을 뽑을 문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인데, 지금가지 있던 사람들 정년 줄이는 방식으로 계속 줄여나가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공무원들을 등용하는 길을 줄여나간다는 말인데,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당황스럽고 아연실색케 만든 이야기는 "작은 정부"이다. 지금가지 많은 규제들로 한국의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었다. 공무원을 줄이는 것도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정부의 역할을 최소한도로만 주장하는 이명박 정권의 결론은 경찰국가, 즉 초기 자본주의가 활개를 치던 당시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설마하는 마음에 기사를 검색하다가 모든 규제를 풀어주겠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기업의 규제, 자본을 억누르는 모든 규제를 풀어주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면서 내 가슴을 내내 누르던 답답함과 불안함의 정체가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있었다. 종종 뉴스로 보게되는 이명박 당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던 것이다.

  장 지글러는 세계의 많은 이들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하여 사막화, 전쟁, 부의 편중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어서 지적하고 있지만 그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가장 큰 원인은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시카고의 곡물 거래소를 장악하고 세계 곡물의 가격을 제맘대로 결정하는 다국적 기업, 세계 금융의 실체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곡물은 지금 인구의 2배인 120억을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 많은데 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명식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먹기싫다고, 맛없다고 꼬마 녀석들이 투정하면서 버리는 그 음식들이 없어서 수없이 많은 국가에서 그와 같은 나이 또래의 꼬마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먹기 싫어 버림과, 없어서 죽음 사이의 간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받아들여야 하며, 메워야 하는 것인가? 정당한 가격을 주고 네슬레로부터 우유를 사서 칠레의 아동들에게 무상 지원하겠다건 아옌데 정권의 몰락이 누구의 술책인가? 네슬레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과연 이것만일까?

  코트디부아르의 상카라는 왜 몰락했는가? 왜 남미에서 민중들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게 열광하는가? 그리고 그에게 당신은 "아옌데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라."경고하며 걱정하는가?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알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 그리고 북반구의 잘 사는 국가들이 자신들이 기근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좋아하지 않는가? 착취하고 뜯어낼 구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근에 처해 있어야 먹을 것으로 달래고 위협하지만 이들에게 식량이 주어진다면 이들은 꼼짝도 않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세계의 절반을 굶주림에 처해서 죽어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자본의 증대를 위해서.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그냥 굶주림에 처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 기근의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며 학교에서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지오 언급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들은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나머지 세계의 절반으로부터 격리된 존재들이다.

  지글러는 이러한 오늘날 기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말한다. 인간성의 회복이란 멜서스 주의의 종말을 말한다. 멜서스 주의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봉되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이론이다. 지금 수없이 많은 기근과 이로 인한 사망은 자연이 인구를 조절하기 위한 자동적인 방어기재라는 것이다. 이말을 좀더 따라 들어가면 그렇기에 우리는 기근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이들을 기근에서 탈출하게 도와주는 것은 환경을 고갈시키는 일이며 지구를 파괴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멜서스 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근에 대하여 눈멀고 귀먹고 모르는체 하라." 그리고 그 사이에 그들은 기근에 빠진 사람들을 쥐어짠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는 북반구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나라를 선진국이라 착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다른 절반에 속해 있다. 철저하게 쥐어짜임을 당하고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보다는 더 교묘하게 그러한 상황에 청해 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 이래 역대 정부들은 문민-국민-참여라는 정부 이름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집중과 선택이라는 그럴싸한 논리로 포장한 신자유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IMF와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은 하지만 그래도 미사여구라는 가면은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눈치볼 것이 없어졌는지 이명박 정권은 규제 철폐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천명하였다.

  어제 장례식장을 갔다가 매제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한전에 말단 사원으로 있는데 한전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만간 매각된다는 이야기가 인수위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매제의 문제만도 아니고 한전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젠 규제와 첼폐가 없는 완전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살아남을 사람들은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 도태될 뿐이다. 국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세금을 거두기만 하면 된다. 국가의 역할은 사후 수습일뿐이지 적극적인 개입은 아니라는 것이 인수위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알다가도 모를 일은 그렇게 대단한 학문을 닦으신 분들께서 왜 장자크 루소의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는 사회계약론의 구절을 떠올리지 못하시는 것들일까?

  그렇게도 천명하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선두주자인 대처리즘도, 닉스노믹스도, 레이거노믹스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바이블인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 모형은 이미 문제점이 드러나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인수위에서 주위를 둘러봤으면 한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많은 국가들이 실은 자신들부터 자유주의가 아닌 규제와 통제를 통하여 그 정책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이다. 이미 그네들의 나라에서는 죽어버린 신자유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20:80의 법칙(인구의 20%가 소득의 80%를 차지하는 기현상)을 강화하는 인수위의 모습이 이내 마음에 걸린다. 신자유주의의 그 높은 파고를 어찌 넘을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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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경제, 공정 무역
마일즈 리트비노프.존 메딜레이 지음, 김병순 옮김 / 모티브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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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때 정말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게임이다. 코에이에서 나온 "대항해 시대2"라는 게임이다. 만일 XP에서 이 게임이 무난하게 돌아간다면 아직까지도 하고 싶은 게임이다. 이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주인공이 드 넓은 바다를 중심으로 모험을 하면서 무역을 하고, 맘에 안들면 해적질도 하면서 많은 돈을 모으고,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 하며 성공하는 게임이다. 어린 나이에 참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지만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너무 섬뜩한 게임이다.

  아직도 생각나는 게임의 꼼수가 있다. 모든 게임이 마찬가지이겠지만 돈이 많으면 한결 게임이 수월해 진다. 그래서 도박을 해보기도 하고 나름 무역을 하기도 하는데 무역을 하다가 발견한 무역 코스가 유럽과 아프리카와 신대륙을 잇는 것이다. 나름 이 항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세상을 가진 것 같았지만 실제 이 항로가 노예를 실어 나르던 노예 무역 항로라는 것을 알 았을 때 마치 내가 노예 상인이 된 듯 씁쓸한 기분이었다. 무역만으로는 돈을 쉽게 벌 수 없다. 한가지 방법을 더 사용해야 하는데 이 방법을 병행하면 백발 백중 부자가 될 수 있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방법은 물가 조작이다. 물가를 조작하여 최대한 싼 가격에 사서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판다. 이 게임을 하면서 자랐기에 지금 내 입장에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라는 시장 논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보기까지는.

  이 책을 보면서 예전 게임이 떠 오른 것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한다고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 자본의 논리, 시장의 논리에 빠져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대학원까지 나왔고 대학원에서 윤리를 전공한 사람인데 왜 이러한 생각을 못했을까? 최소의 투자가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그렇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대처리즘을 비난하면서도, 이명박씨의 실용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왜 나는 내 소비가 윤리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른 이에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이 사실을 아는 순간 내가 참 부끄럽더라. 매일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그리고 내가 그렇게 즐기는 스타벅스 커피들이 얼마만큼 제3세계 빈농들을 쥐어자서 만들어낸 것들이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뜨거워지더라. 스타벅스 커리 한잔, 내가 주로 마시는 것이 아메리카노인데 그란데 사이즈면 3800원이니 이 가운데에 생산자들 손에 쥐어지는 돈은 멀마나 될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최소한 20%에서 30%는 되어야 한다. 이것도 엄청나게 불합리한 가격이다. 커피를 위해 지불하는 돈 가운데에 최소 700~1000원은 커피 생산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경제의 차원을 떠나서 단순 계산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커피 농민들에게 주어지는 돈은 1%인 38원이란다.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더라. 순간 화가 나더라. 나같으면 안짓는다. 차라리 굶어죽지. 그러나 그들은 빚을 지면서 농사를 짓는다. 38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지불하는 커피값의 3762원은 어디로 가는가?

  커피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외에 여러가지 물품들, 코코아, 옷, 가구, 열대 과일, 바나나 등 온갖 종류의 농산물들과 생산품들이 턱없이 낮은 가격에 팔려간다. 그러나 그것을 사는 사람들은 결코 낮은 가격이 아닌 꽤 많은 돈을 주고 그것들을 구입한다. 그렇다면 구입가와 판매가 사이의 괴리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돈들은 어디로 가는가? 단순히 중간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중간 상인이 먹는거다. 불로소득도 이런 불로소득이 없으며 날강도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단순히 중간에 끼어서 70%이상이 되는 돈을 갖는 것이다. 이게 네슬레고, 이게 스타벅스고, 이게 다국적 기업의 진실이가. 우리가 매일 접하는 물건들의 진실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것들은 자유경제, 시장경제라는 그럴듯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을 쥐어짜는 구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교육받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것을 고발하고 있다.

  인수위의 정책들이 발표되었다. 선심성 정책들은 역시나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계속되는 정책들은 이 땅에 다시한번 박정희식의 발전과 그것을 위한 민초들의 무한 희생을 강요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MB의 성공을 지켜본 SH는 동대문 구장을 헐었다. 그럴듯한 건물 하나 지어 무한경쟁을 다시 강화하고 이것을 통하여 청와대 입성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치열한 제로섬 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한미FTA, 한유FTA는 이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러나 왜 모르는 것일까? 시장의 논리에 충실하는 나라는 개도국뿐이라는 것을. 시장 논리를 전하는 미국조차도 이미 시장 논리를 반대하는 여러가지 정책들을 가지고 있음을. 이름뿐인 시장경제를 따르고 있음을 왜 모를까? 시장 경제에 충실하다보면 시장 자체가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른다. 왜냐 한국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 교묘하지만 말도 안되는 논리로 제로섬게임이 시작되었다. 이제 함께 개미지옥에 떨어질 일만 남았다.

  이를 뒤집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싼게 좋은 것이 아니라 정당한 값을 주고 소비하는 윤리적인자세를 갖자는 말이다. 우리의 소비는 사회를 바꿀 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공정무역은 한가지 화두와 해결책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소비는 힘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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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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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백, 열린 취업 5종 세트, 밥터디 등 이 시대의 20대들을 표현하는 이야기들은 많다. 졸업을 미루고, 취업을 위해 어학 연수는 필수로 가야 하는 시기이다. 고등학교에는 대학교를 위해서, 대학생이 되어서는 취직을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모든 희망과 꿈들을 저당잡힌 세대, 이들이 20대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저당잡혀서 얻는 것이라곤, 고시생, 다단계, 아니면 88만원 세대, 그리고 자발적인 백수이다.

  일전에 읽었던 하류 지향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공부하지도 않고, 일하지도 않으면서 당당한 젊은이들을 일컬어 하류지향적인 인간이라 비난하면서 걱정하던 일본 기성 세대의 외침은 이 책을 보는 순간 낭만적인 걱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들은 하류를 지향하는 삶이지만 우리 20대들은 생존을 두고 개미지옥에서 싸우는 생존의 법칙을 벌이고 있다.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무한한 개미지옥의 투쟁 속에서 우리 20대들은 과연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일까?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취직 자리를 찾아가지만 우리는 이들에게 아무 것도 보장해 줄  수가 없다. 오히려 이들을 질타하고, 생각이 없다는 둥, 취직할 생각을 안한다는 둥,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없다는 둥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이들을 생각없는 세대로 몰아가고 있다. 20대를 매트릭스로 대변되는 철학 없는 세대라 말하면서 유신세대가, 386세대가 질타를 하고 있지만 20대들은 매트릭스 안에서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다만 아무도 이들의 철학과 정체성을 존재감을 인정해 주지 않을 뿐이다. 끊임없이 비난하고 비하하면서 이것들을 통하여 20대의 열정과 꿈을 빼앗고 이들을 비정규직의 자리로 내몰 뿐이다. 이들에게서 활력을 빼앗아가 놓고 이들을 착취할 따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세대간 착취가 20대를 멍들게 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 사회를 공황으로 빠뜨릴 것이라 말한다. 국가 경쟁력을 갉아 먹을 것이며 지금의 20대들은 얻은 것 없이 기성 세대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다가 이들이 40~50대가 되었을 때 자신들을 착취했던 세대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강요당할 운명에 빠졌다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살리기 위하여서는, 국가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들을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대간의 착취를 만들어 내고 가오하하지 말고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이득을 조금씩 포기하면서 20대를 위한 생존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세대간 공존의 모습이 필요하다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낭비와 부정부패로 사라지는 국가의 예산을 조금씩만 찾아낸어 사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대 88만원 세대의 탄생은 기성 세대의 낭비와 부정부패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며, 자본의 논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손해들은 20대에게 떠넘겨지고 있는 것이다. 20대가 받아야 할 것을 기성세대가 가져가고 있는 것이 세계의 문제이며 한국에서는 이것이 더 적나라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월급 명세표를 받았을 때에 가장 아까워 하는 부분은 국민연금이다. 이것은 기성세대보다 월급이 더 적은 20대와 30대에서 더 심하다. 내가 가진 돈을 적립해서 우리 윗 세대를 부양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합의도 없었던 것이며 국가에서 무작정 시행한 것이다.(적자로 돌아서는 건보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강한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젊은 세대들은 이것을 다음 세대 나를 위한 저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연금이라면 사보험을 드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한다. 왜 그럴까? 기성세대에게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으며 그저 욕만 하면서 자신들을 깎아 내리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을 자신들의 월급을 깎아내서 부양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젊은 세대들의 솔직한 속내일 것이다.

  자신들기리 모여서 그룹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서 바늘귀만한 정규직의 자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만들어진 사회 구조 속에서 아무도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자신들의 젊은 날들은 이들보다 더 반항적이고 나태했으면서도 "아 옛날이여"라는 말로 모든 것들을 미화하면서 20대를 질타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이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88만원을 받아도 된다. 니들의 존재 가치는 이것밖에 안된다."

  이러한 사회 가운데에서 신음하고 고민하고 절망하는 20대들에게 나는 당당히 말하고 싶다. 이 책에서 사용한 글 귀를 그대로 옮겨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세태에 순응하여 이것이 진실인양 자신을 속이지 말고 당당하게 들고 일어서라. 우리의 문제는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유신세대, 386세대, 486세대라 말하면서 자신들을 규정하지만 20대는 무엇인가? 마케팅을 위해서 사용될 뿐이요, 바보 취급 될 뿐이요, 욕을 먹을 뿐이다. 이왕 욕먹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라면 단결하여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그러면 바뀔 것이다. 순응하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사회의 시스템이요 기본적인 합의요, 기성세대의 속셈이다.

  늦었지만 이 땅에 68세대가 일어나길 꿈꾼다. 88만원 세대여 당당히 일어나 68세대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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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우선 첨바원바의 "텁섬핑"이라는 노래를 지식채널에서 복 난 후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읽기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책 제목인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If i can't dance, it's not my revolution!)이라는 엠마 골드만의 이야기를 따온 것이라 한다. 부제로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제목만으로로 예전에 금지목록이 되었을 빨간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책을 아무런 걱정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 그자체가 이미 한국 사회의 발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에 이미 소개되었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것들에 대하여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한 것들이기에 쉽게 읽으면서도 이러한 것들이 이러한 의도로 이렇게 변형되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역사란 사실을 열거할 수 없다. 다만 오늘날에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다."라는 해석의 모습을 여기에서 보게 된다.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민중에게 전해줄 것인가?"를 고민했던 미술가들의 생각(특히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계열)을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잇다. 이들의 모습은 좀은 과격하고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솔직하다. 오히려 이들을 비난하는 자본의 논리는 더 교묘한 모습으로 이 사회에 숨어서 자신들의 체제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남미 투쟁의 상징적 인물인 체 게바라를 상품화 하는 모습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첨바웜바의 이야기이다. 철의 여인 대처라는 영광 밑에 눌려 신음하던 항만 노동자들의 모습을 지지하던 첨바웜바의 모습. "이것은 배신자의 몫이다." 당당히 외치던 첨바웜바의 멤버의 모습은 투쟁이 무엇이며, 혁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솔직하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의 첫 음반의 표지에 기록된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의미를 던진다.

"우리의 음악이 단지 즐거움만 주고 행동을 고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음악은 실패한 것이다."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노래이기에 이 노래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사람들을 움직이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한가지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렇다면 어떤가? 기독교인의 삶을 고민하는 나는 어떤가? 첨바웜바의 이야기를 살짝 바꾼다면 "내 신앙이 단지 가치관과 사유의 영역에 머무르고 삶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나의 신앙은 실패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중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말하는 모습은 되지 않을까? 세상은 세상,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의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한국 교회의 기형적인 신앙임을 고민하는 나에게 있어서 이 말은 나를 향한 격려요, 포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느꼈지만 아쉬운 것들이 몇가지 생각나서 끄적거려본다.

  하나는 이 책이 운동권을 위한 책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이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책은 좌파를 지향한다. 운동을 지향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한다. 물론 북한의 전체주의적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은 공산주의도 아닌 파시즘이요 나치즘일 뿐이다. 그러나 박정권과 전정권, 노정권이라는 군사독재의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도 파시즘과 나치즘을 겪어왔다. 극우를 달려온 우리 나라에서 이 책이 과연 얼마만큼의 설득을 얻을 수 있을까? 다수에게 읽히기 보다는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알음알음읽히다가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 아쉬움이 남는다.

  둘째는 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좌파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오는 것이다. 지금부터 10년 전 스무살에 집회를 따라다닌 경험이 있었다. 물불 안가리고 다녔다. 그것이 정의이고 진실인양 다녔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진실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었다. 그저 헤게모니 다툼으로 비춰졌다. 오늘의 모습도 이렇게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더 비정치화되고 무관심을 갖게되는 오늘에 이데올로기와 학습이라는 것은 과연 얼마만의 효과와 영향력을 가질까? 아무런 영향력이나 도움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갈등할 것이다. 미선이 효순이 광화문 촛불집회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운동권은, 좌파는 헤게모니 다툼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들이 선동하고 자신들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투쟁을 지휘해야 한다는 헤게모니 주장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 많은 침묵하는 다수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민주노동당을지지하면서 권영길씨에게 투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셋째 이 책을 지은 사람은 물론, 운동을 이끌어가는 사람들, 소위말하는 지도부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엘리트주의가 마음에 걸린다. 공산당 선언에도 언급이되지만 프롤레타리아의 각성은 이탈한 지식인들에 의하여 시작된다. 이들에 의하여 시작되고 이들에 의하여 주도된다. 자칫잘못하면 민중은 도구가 되어버릴뿐이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소모품이 될 뿐이다. 오늘날 많은 공산권 국가의 몰락의 이유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민중을 섬김의 대상이 아닌, 역사의 주체가 아닌 소모품으로, 조종할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각성시킬 대상으로 바라보고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마지막 4부 인터네에는 아주 명확하게 이 이야기가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엘리트 주의, 선동주의에 입각해서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선동할 수 없다면 좌파가 아니다."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버리지 않는한 이 땅에는 소수의 이탈한 지식인과 이들을 거부하는 대다수의 민중이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요구하고 싶다. 깃발을 내려라. 단상에서 내려와라. 선동하려 하지 말아라. 그들과 하나가 되어라.

  오랫만에 쉽게 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내가 즐겁게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언젠가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즐기는 이 순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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