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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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이다. 아마도 광우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민들이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왔을 때의 일일 것이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혔다. 엄마들이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미 사라졌던 전대협의 깃발도 다시 올랐다. 지칠 줄 모르고 거세게 타오르는 촛불을 명박산성으로 가로 막고 소통을 이야기하던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겸허히 불렀단다.  

  그 즈음 한나라당의 주성영 의원은 텔레비전 토론회에 참석하여 촛불집회를 보면서 천박한 천민 민주주의라는 황당한 드립질을 하셨다. 비슷한 색깔을 가지신 다른 의원들은 국민들이 떼를 쓴다고 민주주의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국민들을 계도하기에 바쁘셨다. 경찰청에서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하에 여대생에게 발길질을 하고 시위 진압 특별팀을 신설했다. 물론 온갖 시위 장비를 다 시험하는 실험 정신도 보여주셨다. 

  국민들도 반대편의 생각을 들어주지 않는 정부에 화가 나서인지 점점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닭장차 투어를 하게 되었다. 내 기억에는 초등학생도 이 투어에 강제로 참여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 혼란스러운 2년 반이었다. 스펙터클하고, 판타지하고, 서프라이징한 시간들이었다.(한국 말로 쓰면 감정 절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코쟁이 말로 슨다.) 이 시간이 그저 답답하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지난 2년 반동안 이명박 정부가 해 놓은 가장 큰 업적은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 때보다 사회과학 서적이 많이 읽혔으며, 정치에 대하여, 정체에 대하여, 헌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한 시간은 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거 번역된 책이 바로 이것이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인데 내겐 원제가 오히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민주주의, 어떤 상태에?"라는 원제를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보다는 "당신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신가?"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감벤, 바디우, 벤사이드, 브라운, 낭시, 랑시에르, 로스, 지젝이라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기록한 짧은 소논문들과 인터뷰문을 모아 놓은 책이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가벼운 분량에 12000원에 육박하는 책값이 부담으로 다가왔는데, 막상 읽어보니 진짜 부담은 책값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마음 잡고 읽으면 이틀이면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내용이 너무 어렵고 딱딱해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몇달을 끌어 간신히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란 대중이 주인이 되는 정체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주인은 대중이라고 배워 왔다. 역사적으로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의 주인은 자격을 갖춘 아테네 시민, 그 중에서도 남자만이다. 그런데 로스는 민주주의의 어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조지아 오버가 지적하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권력을 지칭하는 세 개의 주요 용어(군주제monarchia, 과두제oligarchia, 민주주의demokratia) 중 오직 민주주의만이 숫자에 무관심하다. 군주제의 [어근인] '모노소monos'란 일인 지배를 지칭하며, 과두제의 '호이 올리고이hoi oligoi'는 소수의 권력을 지칭한다. 오직 민주주의만이 "[지배자의 수가] 얼마나 많으냐?"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데모스의 권력은 주민 전체의 권력도, 다수의 권력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나의 권력이다. 아무나는 지배받는 자의 명칭이자 지배하는 자의 명칭이다.(P.150) 

  민주주의의 주인을 주민 전체의 권력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전체주의로 흐르기 마련이다. 독일의 나치즘도, 이탈리아의 파시즘도, 그리고 북한의 체제도 사실은 독재나 전체주의이면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자신들 앞에 내세우는 것을 보면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명확해 진다. 민주주의 권력의 주인은 아무나 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로 범주화할 수 있는 국민이나 대중도 아니고, 오직 개개인만이 권력의 주인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무나라는 말이 참 묘하다. 불특정한 개개인이 모두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아무나를 잘못 오해하면 주인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아무나 먹는 놈이 임자라는 말도 안되는 똥배짱이 생긴다. 이러한 똥배장을 가진 사람들이 떼법이다, 천만한 천민 민주주의다 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권력의 주인인양 행세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는 아무나 가질 수도 없고, 소수라고 무시할 수도 없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특정인에게 권력이 이양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이유때문에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손상시키면서까지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본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개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을 보장해 줘야 한다. 실제로 무늬만 민주주의였던 고대 아테네에도 민회가 있었고, 아크로 폴리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은 공적 공간의 도래와 뗄 수 없게 된다. 이 공적 공간이 말라 죽을 때 정치적 대의는 장난이나 웃음거리가 된다. 아렌트는 정치적 대의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우스꽝스런 가극'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아니면 비극적 코미디이거나.(P.71) 

  개인의 생각을 자유스럽게 발언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이 말라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 민족주의이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개인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이 말라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인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닐까? 만약 국민 스스로 공적인 공간을 만들 요량으로 촛불을 들었다면 그것은 불온한 움직임으로 매도해서도, 폭력 시위로 몰아 강제 진압을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그러한 공적 공간을 말라 죽게 만든 정치인들 스스로 국민에게 석고대죄해야 옳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벤사이드는 영원한 스캔들에서 민주주의의 속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는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으려면 항상 더 멀리 가고, 그것의 제도화된 형태들을 영구하게 위반하며, 보편적인 것의 지평을 뒤흔들고, 평등을 자유의 시험대 위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불확실한 나눔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사적 소유로 인한 피해 그리고 공적 공간과 공공재에 대한 국가의 침해에 필사적으로 항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항구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평등과 시민권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키려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P.81) 

  민주주의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것, 일상적인 것, 자유와 평등 등 지금까지 사회가 유지해 왔던 가치관들을 끊임없이 흔들고, 기성의 체제에 도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애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살아 있는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안녕한가? 아니다. 절대 안녕하지 못하다. 반대 의견을 철저하게 숫자로 묵살하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기존의 가치 체계를 밀어붙이는 행태는 전혀 민주주의의 속성이 아니다. 스캔들을 일으킬 수 없는 민주주의는 이미 생명력과 매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의 제목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면서 왠지 노무현이 그립다. 최소한 그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반박하려고 했지 누구처럼 싹 무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을 때 햇병아리 검사들의 객기도 "이정도면 막나가자는 거죠?"라는 말로 받아 줄 수 있는 여유는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아량으로 보지 않고 체신머리없다고 보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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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9 0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10-09 13:12   좋아요 0 | URL
헉...그럼 리뷰로서 실수한거 같은데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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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본다. 

 에피소드1 

  휴가철만 되면 난다긴다하는 인사들의 휴가철 도서 목록이 중요한 이슈로 떠 오른다.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휴가 기간에 저렇게 생색을 내면서 나 책을 읽습니다라고 광고할까 하는 생각도 들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읽으려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하다. 리스트에 오르는 책들의 면면이 국제 관계나 자기 계발서에 머무르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정치인들이 휴가를 가면서 "불편해도 괜찮아", "시민의 불복종", "또 파? 눈먼 돈, 대한민국 예산", "삼성을 생각한다." 같은 책들을 가져간다면 이 나라가 훨씬 더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 빠져도 본다. 

  올해도 무슨 책들을 가져가나 궁금한 마음에 도서 목록을 쭉 훑어 보던 중 신기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박근혜씨를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이 가져가는 책의 목록에 이 책의 이르이 버젓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행보와 정의라는 말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혼자만의 상념에 다시 한번 빠져들면서 사놓고 아직 읽지 않고 뒤로 미루어 두었던 책을 펼쳤다. 궁금해서였다. 도대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길래 내 기준에서 생각하는 정의와 거리가 먼 행보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던 그들이 휴가를 가면서까지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이 이 책을 읽게 된 첫번재 이유이다. 

  에피소드2 

  알라딘 서재에 올라오는 글들과 내가 즐겨 찾는 이들의 글은 꼼꼼이 읽어 보는 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오는 글들 중 10~20% 정도는 이 책에 관한 글들이었다. 10~20%의 비율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매순간 알라딘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이 10개 중 1~2개는 이 책에 관한 것이라면 무시할만한 숫자가 아니다.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고 꼼꼼이 체크해야 한다. 게다가 이 책에 관련된 글들은 단순히 리뷰 수준이 아니라 이 책을 비판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면서 꽤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알라디너들이 이렇게 열정을 보이는 책이라니..이런 책은 꼭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게 된 두번재 이유이다. 

  에피소드3 

  이 책을 구입해 놓고 한달이 지났다. 절반쯤 읽다가 지루해서 잠시 외도를 했는데, 그 외도가 그렇게 오래 갈 줄이야. 장장 보름을 수호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열권을 쉼 없이 다 읽고 나서 다시 이 책을 읽으려니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중에 도저히 이 책을 볼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한 장소에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그곳이 어디냐? 놀라지 마시라. 영화마을이다. 영화마을은 주로 장르 소설이나 만화책, 그리고 DVD를 대여하는 곳이다. 내가 주로 출몰하는 곳 중에 하나인데 하루는 새로나온 만화책이 없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영화마을에 들렀다가 신간 코너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보았다. 주인 아저씨가 혹 실수로 자기가 보던 책을 꽂아 놓았나 했더니 아니었다. 워낙 베스트셀러다 보니 간혹 찾는 사람이 있어서 일부러 구해다 놓았다고 한다. 우석훈씨가 그랬던가? 사회과학 서적은 2~3만권 팔리면 대박이라고. 그럴 정도로 인기가 없는 분야의 책이 재밋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마음에 꽂혀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큰 흥미거리로 다가왔다. 이게 내가 이 책을 마지막가지 읽게 된 세번째 이유이다. 

  왜 이렇게 긴 부분을 리뷰를 쓰기 전에 할애하는가? 이 책이 얼마나 세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지 말하기 위함이며, 돌풍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나의 소감이자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의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요, 다른 하나는 정의의 가치 중립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째 정의의 주체가 누군인가?

  이 책은 정의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정의를 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존 룰즈, 마이클 월쩌까지 많은 철학자들의 입장과 사상을 소개하지만 결국 샌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정의란 공동체의 영역인가, 아니면 개인의 영역인가? 정의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고민하고 다루어야 하는 주체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한다는 샌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 정의를 다루는 주체가 중요한가? 여기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정의는 정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때문이다. 정의가 이렇게까지 귀걸이가 되고 코걸이가 되는 순간 정의는 정의가 아니요 부정의가 된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자행되지 않는가? 정의와 법치라는 미명하에 사회적이 약자들을 떼쟁이 혹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빨갱이요 적으로 만들어 철저하게 짓밟아 버리지 않았는가? 용산에서, 대추리에서, 상암동에서, 종로에서, 광화문과 시청에서, 그리고 멀리 부엉이 바위에서.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아모스 선지자의 꿈은 그의 후예로 자처하는 한국 기독교에 의하여 철저하게 부정되고, 나만을 위한 혹은 우리만을 위한 정의로 왜곡된지 오래이다.  

  왜 그럴까? 정의를 개인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기 때문이다. 정의를 개인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덕목으로 치부해버리고 한계지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샌델은 분명히 이 부분에 지적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이 도를 지나쳐 공동체의 정의라는 덕목, 공공선이라는 부분을 무시해 버린 것이 이 시대의 문제점이라는 그의 판단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꼭 들어 맞기에 이 책이 그렇게도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분명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공공선을 이야기하고, 공동체의 책임과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샌델은 서사적인 역사를 말한다. 그런데 그 논리가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논리와 흡사하다. 파시즘과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의 논리와 샌델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같이 얽힐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부분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정의의 주체에 관한 논의는 자칫 전체주의로 흐를 수도 있지 않을까? 

  둘째 가치 중립적인 정의는 존재하는가? 

  지금까지 정의에 관한 논의, 법치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것,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 있다. 정의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샌델은 의문을 표한다. 진정으로 가치 중립적인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샌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례로 서구 사회를 만들어 온 기반인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떠나서 내리는 가치판단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샌델은 선언한다. 한 가지 예로 인공유산을 들수 있다. 우리가 흔히 낙태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인공 유산은 기독교 특히 가톨릭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이다. 인공유산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인공유산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이 또한 낙태라는 말로부터의 가치 중립 혹은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낙태라는 용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가치 중립이라는 말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꼭 가치 중립적이어야만 하는가? 절대로 가치 중립적일 수 없고, 가치 중립적이어서도 안된다. 가치 중립적이라는 말은 곧 우리의 정치적인 책임과 견해를 포기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하여 판단을 하고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절대로 가치중립적이어서는 안된다. 가치중립이란 말에 현혹되어서 자기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이득과는 상관없는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고 있는 답답한 대중들이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리지 않았는가?  

  샌델은 확실하게 말한다. 자신의 가치와 입장을 포기하지 말라.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정의는 불의가 되고, 정치는 쇼가 되고 자위의 도구가 된다고. context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text는 존재하지 않는다. context에 맞추어 text를 해석하는 것,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 정의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갖게 된 결론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너무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너무 소모적인 논쟁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너무 때 이른 걱정은 아니함만 못하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건설적인 에너지 소모와 토론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있었는가? 당연한 것은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의 대상이다. 전혀 반론도 없는 만장일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다. 제발 반장선거만도 못한 국회의원 선거는 그만하고 일단 한번 해보자. 더 나아지기 위한 에너지 소모는 낭비가 아니라 투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실천을 다짐한다.  

  여러가지 고민과 논란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정치인들이 이 책을 휴가 때 읽겠다고 가져갔는데 공공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 특히 10장의 주제와 내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앞으로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면 이들이 이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으니 거짓말은 못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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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9-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억만년째 방치중인데...
이런 내용이라니 읽어볼만 하겠는걸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saint236 2010-09-06 13:46   좋아요 0 | URL
한번 읽어 보세요. 읽어 볼만 합니다.

마녀고양이 2010-09-06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엄청난 선전을 저도 봤는데,
저는 선전 너무 하는 책은 읽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성향이.. ㅡㅡ;;
그런데 세인트님의 리뷰에 맘 고쳐먹습니다.

saint236 2010-09-06 23:12   좋아요 0 | URL
선전이 엄청나긴 했죠? 아프님은 강의가지 다녀 오셨다던데. 그나저나 샌델의 생명 윤리도 결국 샀습니다.

책 읽는 아저씨의 회심 2010-09-10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출간되자 마자 구입해놓고서도 아직 읽지 못한 책입니다.
리뷰를 보니 조만간 읽어야 할 거 같네요... ^^

saint236 2010-09-10 10:10   좋아요 0 | URL
책은 읽어야 맛이죠^^ 한번 읽어 보세요. 재미는 있습니다.
 
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PD수첩 제작진.지승호 지음 / 북폴리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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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이 책을 살까 말까 고민했다. 지승호씨를 좋아하긴 하지만 인터뷰 스타일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의 책을 좋아하지 않음애도 불구하고 이 책을 고민 끝에 구입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의 주인공이 PD수첩을 만들어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PD수첩이 스무돌을 맞았다고 한다. 나는 PD수첩을 보고 자란 세대이다. 중고등학생 때야 원체 이런데 관심이 없었으니 초창기 방영분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1998년 방영된 것 중에 “담임 선생님, 바꿔주세요.”와 1999년에 방영된 “이단파문 이재록 목사!-목사님, 우리 목사님!”이다. 같은 MBC의 시사 매거진 중 “길 잃은 목자”도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었다. 이후로 나는 탐사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챙겨봤고, 그것이 알고 싶다, 뉴스 후도 열심히 챙겨 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황우석 사태와 광우병 파문을 겪으면서 오로지 PD수첩에 신뢰를 주기 시작했다. 다른 탐사프로그램들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부분들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즘에 입각한 살아 있는 프로그램은 오직 PD수첩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PD수첩 때리기라는 정권의 무리수도 내가 PD수첩에 더 애착을 갖게 한 원인이다. 직접 MBC 앞에서 촛불을 들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나는 PD수첩을 응원한다. 그들의 용기와 뚝심, 그리고 고집과 꼬장꼬장한 자존심이 있는 한 나는 여전히 PD수첩의 열렬한 시청자일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9명의 PD들이 모두 동일하게 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많이 후퇴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권과 한번도 친밀한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 도가 지나쳐서 입을 틀어막는 것이 5공 시절과 같다는 말을 한다. 5공 시절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건이 많이 열악해진 것은 사실이다. 특정 방송 프로그램을 콕 찍어서 정부 고위 공직자가 고소하는 것도 그렇고, 10명의 검사들이 달라붙어서 조사하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반론 보도를 내는 것도 아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반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죽일 놈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할까? PD수첩을 공격하는 이들은 그것이 오히려 PD수첩을 더 키워준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 것일까?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많은 재판들, 그리고 위협들! 빨갱이 아니냐고 공격하는 조중동과 극우파들의 의심의 눈초리들! 이것들이 PD수첩을 힘들게 하겠지만 오히려 그러한 고통이 PD수첩이 살아있는 증거라고, 잘못되지 않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언론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PD수첩의 미래에 대하여 말한 최진용 PD의 다음 발언은 아마도 PD 수첩을 거쳐 간, 그리고 PD수첩을 응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일 것이다. 

  탐사저널리즘은 기본적으로 정부든 기업이든 거대한 세력과 맞서게 된다. 거대한 세력이 감추고자 하는 비리라든가 잘못 같은 걸 들춰내는 것이다 보니 사실상 대단히 정교해야 된다. 혹시라도 저쪽에서 역공할 수 있는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취재와 제작뿐만 아니라, 촬영과 편집과 방송 과정에서도 절대로 허점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비판적인 언론이 존재해야 한다. 비판적인 언론의 입을 틀어막게 되면 민주주의가 병이 들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병이 들면 모두 다 피해자가 된다. 탐사저널리즘 프로그램은 정부나 큰 기업체나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국익과 공익이라는 차원이라는 걸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될 의제에 대한 또 다른 의견이라고 생각하며, 탐사저널리즘의 비판적 기능을 인정을 해주고, "너희들은 왜 그렇게 보느냐. 우리는 이렇게 대안을 제시해주고, 대처를 해나가야겠다"하고 당당하게 나올 수 있지 않나 싶다. 정부나 기업은 대승적으로 같은 프로그램을 봐줬으면 좋겠다.(P.217 ~ 218) 

  20년 동안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 고생과 눈물이 오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심어 주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앞으로 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저널리즘의 대명사가 되기를 바란다. PD수첩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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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8-02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디 수첩, 20년간 고생많으셨습니다...... 절대공감.

saint236 2010-08-03 00:08   좋아요 0 | URL
글쵸. 20년 한길은 정말 왠만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탐사 프로그램으로서 20년은 뭐. 존경스럽더라구요.
 
정치를 말하다 -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6
가라타니 고진 지음, 고아라시 구하치로 들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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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이다. 대담집이기 때문에 읽기가 수월하지만 일본의 현대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전공투가 무엇인지, 일본의 사회주의 노선이 어떻게 되는지, 68 혁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1부는 읽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인 것 같다.  

  몇년 전 한미 FTA협상 중에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뛰쳐나왔다. 촛불을 손에 들고 정부의 한미 FTA 협상안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자녀들의 건강을 걱정하며 유모차를 밀고 나온 어머니, 야자를 땡땡이 치고 거리로 나온 학생들, 등록금이 너무 과하다고 대안을 요구하는 대학생들,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하는 일반 시민들을 빨갱이의 사주를 받아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불순분자로 몰아붙이면서 떼를쓰는 떼쟁이라고 비하했다. 천민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뻘소리를 해대시는 쭈모의원을 바라보면서 정치인들의 밑바닥을 보면서 좌절했었다. 비난 나뿐만 아닐 것이다. 알라딘에서 놀고 계시는 알라디너들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좌절감에 열심히 읽기 시작했던 책이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행동"이다. 아직도 다 읽지 못해서 뭐라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이 책도 직접행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가 필요하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발칙한 빨갱이적 사고이다. 그렇지만 직접 실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기득권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확고불변한 진리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하여 이렇게 고찰한다. 

  내가 말하는 반복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자본주의에는 반복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경기순환이 그렇습니다. 공황, 불황, 호황, 공황 -. 왜 이런 순환이 존재하느냐 하면, 자본주의 경제는 발전하면서 공황과 불황을 통해 폭력적인 도태와 정리를 할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반복은 반복강박적인 것입니다.(117p)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이 주인이 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자본의 지속 가능을 위해서라면 다른 무엇도 희생할 수 있는 체제이다. 이런 체제와 사람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가 미묘하게 결합된 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체제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특성을 여러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나는 평등과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과 사유 재산 보호를, 민주주의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분배와 평등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라고 하는 서구에서도 경쟁과 분배라는 두 가지 가치관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자본주의, 시장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등 모든 정치체제는 두 가치관 사이에서 중심을 어느 정도에서 잡는가에 따라 그 형태와 추구하는 점이 달라진다. 쉽게 말해 좌냐 우냐가 여기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부분을 분명히 깨닫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가치관에서 좀더 좌측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좌측으로 옮기는 동력은 데모이다. 

  고진은 일본에 데모가 없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너무나 빠른 시기에 정체가 바뀌어 시민이 시민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국가에 흡수되어 네이션이라는 모습을 갖춘 것이 일본에서 데모가 없어진 이유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몰락을 전공투보더 더 앞에 있었던 1960년에서 찾고 있다. 안보세대든, 전공투 세대든, 이유가 어디에 있든 간에 시민의 직접행동을 막은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고진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 고진이 주목한 것은 단독자이다. 고진의 단독자 개념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존재가 아니다. 고진은 단독자를 이렇게 규정한다. 

  단독자란 홀로 있는 개인도 아니며 원자적인 상태의 개인도 아닌, 타인과 연대가 가능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다.(150p) 

  데모란 무엇인가? 데모란 단순하게 국가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데모란 단독자가 원자적 상태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다른 단독자와 연대하는 것이다. 단독자의 연대는 민의를 만들어 내고 사회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모가 없는 사회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살벌한 공간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가 아닌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하고, 친구나 동료라는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전력 투구하는 진흙밭이 우리 사회이며, 우리 교육의 현주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학생들이 촛불집회에 나선 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성숙한 시민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민주주의는 데모가 필요하다.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이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ps.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데모 없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4.19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민주화 운동을 지적한다. 일본의 지식인의 부러움을 사는 그 모습이 정작 한국에서는 빨갱이들의 선동을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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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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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사는 세상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신념이다. 그의 정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던 간에 그가 꿈구었던 것이 사람사는 세상이며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민주주의가 무엇일까?" 우연인지 몰라도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회과학 서적들이 예전에 비하여 잘 팔리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 비하면 불티나게 팔린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어떤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입소문만으로 10만부 이상을 팔아치운 책이다. 마치 80년대 선배들에게 말로만 들었던 금서를 몰래 구해 읽고 고민했다는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한동안 듬했던 사회과학의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일까?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자신들의 본분을 자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정치인들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내용을 헌법에서 밝히고 있지만 집권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 사실을 국민들이 깨닫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선거철만 다가오면 잘 살게 해주겠다, 부자 만들어 주겠다는 온갖 공략이 넘쳐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재개발이 아닌가? 우석훈씨가 이 책에서 밝히듯이 한나라당의 부동산 정책과 우경화 교육은 그들에게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인가? 아니다. 그들이 분명히 놓쳤던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에는 더 고차원적인 문제에 관심을 돌린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이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잘났다는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가? 알면서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그래도 자칭 엘리트들이라고 말하는 그들이라면 후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이 책의 핵심이다. "당신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십니까?"라는 책의 표제가 눈에 확들어 온다. 묘하게도 요즘 함게 읽고 있는 책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이다. 이 책의 원제가 "당신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십니까?"이다. 지젝, 낭시, 아감벤 등등 많은 석학들의 사상을 짧은 소논문으로 엮어 놓은 책이라 읽기에는 쉽지 않다. 너무 복잡한 부분은 건너뛰고, 이해할 만한 것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읽지만 쉽지만은 않다. 오히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다가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잠깐 곁길로 빠지자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 과두정을 선호한다고 할 수가 있겠다. 소수에 의하여 사회가 지배되는, 그것도 대물림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귀족정에 가깝다고 할까?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나 정체가 어떻든간에 사람이 중심이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곳이 사람사는 세상임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집권자들은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지만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는 없다. 시장이 살아가고, 기업이 살아가고, 권력이 살아가는 자리일 뿐이다. 사람은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사회의 부속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나마 투표의 권리를 주고 있다. 그렇지만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를 두려워 하지는 않는다. 유권자는 그거 거수기 정도일뿐이다. 북한이 공격하니 1번을 찍어야 한다, 1번을 찍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이게 그들의 논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 논리에 넘어가서 무의식적으로 1번을 찍고 있다. 과거 1번을 놓지고 한나라당이 2번이 되었던 시절, 그들의 득표율이 예상에 못미쳤던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1번을 찍는 습관에 젖어서 거수기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내 대답은 아니다. 이 무슨 빨갱이식 사고냐고 비난할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다른 국가들이 피를 흘리고 많은 토론 끝에 얻은 결과를 우리는 너무 쉽게 따먹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의해 강제 이식 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본질은 사라지고, 왜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는가라는 성찰은 사라지고, 투표와 정당이라는 껍데기만 붙잡고 있다. 이러니 투표권의 소중함이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껍데기는 민주주의지만 내용은 귀족정 혹은 왕정인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이다. 지역감정을 감안하면 이상한 형태의 봉건주의는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사람사는 세상이다. 내편만이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곳이 민주주의이다. 사람이 더 철저하게 존재의미를 잃어가고 사회를 구성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해가는 시기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는다면 다른 독재국가에서처럼 우리 나라도 말로는 민주주의지만 실상은 전체주의로 흘러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들이 꼭 한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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