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전쟁 -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다신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가톨릭, 개신교, 힌두교)
도현신 지음 / 이다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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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카렌 암스트롱의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신의 전쟁"이라는 책이 걸린다.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내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도서관에 책을 신청했다. 책을 사면서 아내 눈치를 보는 것은 공간 때문이다. 아내는 아이들이 크기 때문에 방을 따로 주어야 한다고 했다. 딸에게는 방을 줬고, 그동안 서재로 쓰던 방을 아들에게 줘야 하는데, 아직 초등학생인 관계로 방을 따로 안줘도 된다면서 버티고 있었다. 이사를 몇번 하면서 책을 많이 처분했다. 알라딘 중고서적에 팔기에는 아까워서 후배가 작은 도서관을 한다고 해서 200~300권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도 아직 처분 못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아내의 결론은 책을 더 늘리지 말고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취미 생활로 하는 건프라도 올려 놓을 공간이 없으니 책 욕심을 많이 접었다.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받은 책이 "신의 전쟁"이다. 신의 전쟁은 신의 전쟁인데 암스트롱이 아니라 도현신의 책이다. 처음 들어보는 저자이기에 실망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읽을만은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처음 기준이 암스트롱이었다는 점이다. 암스트롱을 기대하고 이 책을 보니 눈에 찰리가 없다.


  게다가 이 책은 아이들에게 교과서로 읽힐 수는 있겠지만, 무엇인가 종교의 이름을 내건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원하던 내겐 눈에 차지 않았다. 물론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전쟁과 폭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제목에 부합한다. 그렇지만 책의 많은 분량은 기독교에, 그리고 그 다음은 이슬람교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니 신들의 전쟁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와 무슬림의 신들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게다가 각 전쟁을 규정한 타이틀도 상당히 작위적이다. 마카베오 전쟁을 "인류 최초의 종교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은 "왜?"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만든다. 역사에 대해서 조금만 아는 사람은 이 보다 더 이전에 종교전쟁이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부제를 잡았다면 그 부제에 맞는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냥 제목이 그러니 너는 그렇게 받아들여라는 투로 말한다. 


  책을 소개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가톨릭, 개신교, 힌두교 그리고 다신교, 이단 종파에서 조로아스터와 나미교까지 종교의 대립과 충돌에거 신의 전쟁으로 이어진 세계 역사를 들여다 본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소개를 보면서 뜨악했다. 다른 서적이라면 모르겠지만 최소한 종교를 다루는 서적이라면 기독교, 가톨릭, 개신교를 섞어서 사용하면 안된다. 구성 자체를 타종교끼리, 그 다음에는 한 종교 안에서 서로 다른 파벌끼리의 문제로 엮었다면 이러한 오해는 없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짜임새 있게 책을 엮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뒤죽박죽 같아 보이는 점도 있다. 또는 세포이 항쟁처럼 모든 사회, 계급적인 이유보다 종교적인 이유를 앞세운 것은 종교 전쟁이라는 틀로 엮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이런 이유가 있고, 그 중에서 종교적인 이유도 있으니, 이 책에서는 종교적인 면에 집중해 보자는 식의 솔직하고 논리적인 접근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주어진 분량에 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건드렸고, 가지치기에 실패하였으니, 읽는 재미는 분명히 있지만, 들인 품에 비해 얻는 것이 부족하다.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신의 전쟁"이라는 제목에서 "예비"를 작게 적는 후보 경선 포스터의 꼼수를 읽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가 생각 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께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책이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PS. 분명히 말하지만 보는 재미는 있다. 그러니 별 두개로 평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만큼은 아니기에 별 세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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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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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1.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2.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3.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라는 접두사에 대한 설명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개**"이 붙은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말이라는 의미인데, 요즘은 약간 다르게 사용한다. 아직 사전에 등재된 것은 아니지만 "아주"라는 의미로 개를 사용한다. "개이득" 이런 말이 그런 의미이다. 그런데 아직 나에겐 이러한 것들이 불편다. 그래서 아이들이 "개**"을 쓸 때마다 표준어를 사용하라는 말로 혼을 내곤 한다. 자기 친구들 다 사용한다는 말에,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괜찮지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항상 혼을 낸다. 그런데 어느날 중1인 딸이 텔레비전 앞에서 이 책을 보더니 매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그러나 싶었더니 "아빠도 이런 책 보네."였다. 아무리 그것이 철학책이라고 말을 해도 그 녀석에게는 제목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나 보다. 


  책 제목 그대로 한국에서는 개소리가 넘쳐난다. 어떤 사람들의 말이 개소리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개소리다."라고 비판을 한다. 그런데 정작 왜 개소리인가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이 우리만은 아닌 듯 싶다. 그렇게 배웠다는 저자도 "개소리"에 대해서 파고들다니 말이다. 물론 영어 "bullshit"의 번역을 개소리로 한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꽤 적절한 번역이다. 예전처럼 점잖지 못하다는 말로 빈 말이나 헛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개소리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다. 최소한 거짓말은 자신이 남을 속이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은 자각을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고려한다. 진정한 거짓말은 대부분의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거짓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또는 아무리 100% 거짓을 말한다고 해도, 진실은 알아야 그것을 피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으므로, 거짓말이란 역설적이게도 항상 진실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소리는 다르다. 개소리에는 진실에 대한 고려나, 의식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개소리가 더 위험하고 해롭다고 한다. 그냥 뱉어내면 되기 때문이다.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내가 개소리라고 생각했던 말이 있다. 의도가 명확하게 담겨 있고,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고, 그래서 편 가르기에 딱 좋은 말. 그것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상관이 없는 말. "시선강간"이라는 말이다. 요즘 많이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을 개소리로 치부하거나 불편함을 내비치면, 분명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 지인들 중에도 있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개소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냥 내가 규정하면 그대로 따라라는 오만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안에는 상대에 대한 어떤 타협이나 이해도 없다. 이 말을 거부하면 시선강간을 찬성하는 마초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싫으면 이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지만 마초가 아닌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설 수가 없다.


  개소리가 대체로 그렇다. 대선을 앞두고 각 당마다 경선이 진행 중이다. 언론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정권이라 온종일 비판을 해댄다. 진보 쪽에서는 타협하는 현정권의 모습에 실망해서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마미손은 너는 부동산 정책에 실패해서 청년들에게 자기집 마련의 꿈을 빼앗아 갔으면서 왜 청와대라는 비싼 집에 살고 있냐고 한다. 방역과 국민의 기본권을 두고 토론을 한다. 곳곳에서 많은 소리들이 넘쳐나는데, 귀담고 들을 소식이 많지 않다. 한동안 뉴스를 꾾었던 이유가 이것인데, 요즘 다시 뉴스를 끊고 싶어진다. 내가 정의고, 내 생각의 틀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 곳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논리와 근거로 조금만 살펴보면 이해되지 않을 말인데도, 상관없다. 비판을 받아도, 허무맹랑해도 상관없다. 왜냐고?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토론이나, 타협의 목소리가 아닌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방 천지에 개소리가 넘쳐 난다.


  그런데 괜히 개에게 미안해 진다. 그들이 실제로 뱉은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멍멍" 소리 밖에 못내는 개들인데, 수없이 많은 말은 사람들이 하고, 거기에 애꿎은 "개"를 붙여 버리니 말이다. 개 보기가 부끄러워지는 2021년의 9월을 시작한다.


 PS. 이 책 또한 개소리가 아닐까? 물론 다른 의미의 개소리 말이다. 가끔 가볍게 농담처럼 던진 말을 진담으로 받아 끝없이 진지하게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분명히 무엇인가 대단한 지적인 토론과 근거가 뒷받침되는데, 결론은 "이걸 뭐 이렇게까지."이다. 이 책이 그런거 같다. 어느날 갑자기 저자가 개소리에 흥미를 느껴서 철학적으로 개소리를 연구한 끝에 내놓은 실없는 결과물! 이 책을 보고 "큭큭" 댄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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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21-09-0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요샌 뉴스를 열심히 피하게 되더군요..
 
여신들 - 여신은 어떻게 우리에게 잊혔는가
조지프 캠벨 지음, 구학서 옮김 / 청아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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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라: 거짓말을 속되게 부르는 말, 이야기를 속되게 부르는 말, 거짓이나 가짜를 속되게 이르는 말


  구라에는 위의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거짓말쟁이를 "구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첫 번째 의미만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구라의 두 번째 의미에 기반해서 구라쟁이를 이해한다면 "이야기꾼"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전에 한국의 3대 구라쟁이라는 사람을 꼽은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후자의 의미로 꼽힌 사람들이다. 유홍준 씨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국의 3대 구라쟁이들 운운하면서 언급한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을 이런 의미에서 구라쟁이라고 부른 것이다.


  캠벨은 이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구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에 대해서라면 세계에서 한수 접어주는 사람, 서양의 신화만이 아니라 동양의 신황에도 잡다하고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재미가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은 나도 학생 시절에 접했던 책이다.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통과 의례처럼 꼭 읽고 지나가는 책이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여신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이 이것인데, 이 책은 내 기대를 생각보다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어떻게 여신들이 사라지는가, 어떻게 남신 문화가 여신 문화를 집어 삼키고 여신들을 지워나갔는가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의외로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두서 없다는 생각, 그래서 깊이가 딸린다는 생각을 책을 덮는 순간까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만신전의 여신들과 남신들이라는 챕터는 여신들과 남신들이라는 장의 이름이 무색하게 거의 남신들로 채워져 있으며, 남신들로 그냥 지나가면서 맛만 보고 지나간다. "여신의 귀환"이라는 장에서는 귀환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여신이라는 주제, 어떻게 남신 문화가 여신 문화를 집어 삼켰는가를 강의의 주제로 삼았다면 조금은 더 깊이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캠벨의 입장이 철저하게 서구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인도보다 유럽의 문화가 오래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장을 한다면 조금은 더 자세하게 기록해야 하는데, 뭘 이런 당연한 것을, 또는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라는 식으로 살짝 지나간다. 셈족 계열의 유대인에게 사르곤, 함무라비가 영향을 받아서 메소포타미아의 여신들이 남성 중심적인 구약의 사상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박하기까지 하다. 내가 잘못봤나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니 곳곳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유대인들이 받았다고 말하지 않나? 그래서 심한 경우는 "구약은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빌려다 쓴 구라다"라고 까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캠벨의 모습을 보면서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서양, 기독교 문명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를 생각하는 서구 중심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오디세이아를 해석하면서 오디세우스라는 남성의 인생의 여정으로 이해하는 점이다. 고 이윤기 씨의 책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는데, 5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을 비슷한 모티브로 해석했었다. 서로 다른 사건을 다루지만, 신화를 인생을 해석하는 열쇠로, 인생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것이 꽤 신선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캠벨에게서 그와 비슷한 해석을 보니 이윤기가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해봤다.


  분명 재미는 있다. 잡다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 캠벨의 구라에 빨려 들어가는 재미는 있다. 그런데 그 구라가 약간 딸린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이 구라는 아닐까 의심하면서 읽는다. 그래서일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글쎄?"라는 말을 감히 던지는 것이다. 여러가지 단편적인 의견들을 두서없이 던져주는 불친철한 책, 그래도 삽화를 한번씩 보는 것, 그리고 다른 신화화의 관계성을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이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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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복음 강의 - 예수의 잃어버린 가르침을 찾아서
오쇼 라즈니쉬 지음, 류시화 옮김 / 청아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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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 복음 강의라는 말에 속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가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래도 읽기 시작한 책이라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래서 인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읽었다. 잘 넘어가지도 않고, 책도 무겁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이 책을 쓴 사람이 힌두교 계통의 요기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부제 때문에 읽었지만 책은 종 잡을 수가 없다. 동서양을 오락가락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펴는데, 과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 무엇인지 저자는 알고는 썼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고, 다시 한번 류시화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도마복음은 잊혀진 복음서임은 분명하다. 정경에 들어가지고, 그렇다고 외경에 들어가지고 못하는 위경이다. 도마복음은 다른 복음서처럼 예수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는 책이다. 도마에게 주어진 예수의 비밀한 어록에 대한 책, 구원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이해되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성경으로 받아들여졌고, 영지주의가 몰락하면서 함께 사라진 책이다. 세월이 흘러 그 사본이 발견되고 최근에야 대중에게 알려진 책이다. 최근에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2000년에 비해서 최근이라는 말이지 1~2년이라는 말은 아니다. 

  도마복음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이유는 교회라는 시스템에 의해 편집되지 않았다는 평가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라는 시스템에 의해서 배제되었다는 것을 그저 기득권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잊혀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는 말이며, 이것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을 하고 살펴보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저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 나간다. 타 종교의 경전을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 나간다는 점에서는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곧 더 많은 연구와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책 어디에도 그러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끌어다 놓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예수가 인도에서 공부했고, 그가 말하는 모든 가르침이 힌두교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는 철지난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 또한 불편하다. 도마복음이라고 쓰지 않고 도마 복음이라고 쓴 데에서도 책의 저자가, 그리고 편집자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지를 단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힘들고, 불편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거의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읽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저 내 팔뚝만 굵어졌다는 것은 무척이나 서글픈 일이다. 

  왜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나왔는지 잘 가르쳐 주는 책이다. 도올의 도마복음 강의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도올의 도마복음 강의로 넘어가보려고 하는데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한다.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철대 추천하지 않을 책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별점을 두 개나 준 것은 끝까지 읽은 내 자신이 기특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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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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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책을 읽고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독서의 즐거움이다. 나는 이 책을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또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회에 패자부활전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일까? 꿈이 없다는 것? 젊은 사람들이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 창의적인 사람이 없다는 것? 여러가지 이유를 말하면서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한번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직시하지 않고 그저 도전 정신이 없다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닌 말로 꼰대 짓이 되어 버린다.


  정재승이 진정한 혁명은 "5%의 확률이 있다면 20번 도전하려는 사람"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 패스트 팔로워가 넘쳐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의 확률로 20번 도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도전하려는 개인적인 의지도 중요하지만 도전하려는 개인을 용인해 주려는 사회 시스템도 필요하다. 도전자를 참아 주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없다면 아무리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것을 쉽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할 것이다. 도전해봐야 낙오자로, 실패자로 낙인찍히느니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복지부동을 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스티브 잡스를 키워내야 한다는 10만 스티브 잡스 양병성을 말이다. 스티브 잡스라는 창의적인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는 창의적인 생각도 놀랍거니와 패자부활을 용인하지 않는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잡스를 길러내겠다는 창의적인 생각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아무도 창의력이라는 것도 창의력을 길러주는 학원에서 한다면 된다는 사고 방식이 이러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지도 모르겠다.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서 우리는 개인적인 덕목으로 치부해 버린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일을 위해서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네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너희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리 노오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그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시간과 배경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노오력을 하다가 지쳐 버릴 뿐이다. 간혹 1만 시간의 법칙을 구현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들을 용인해 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공한 것은 우연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집에서 논다. 요즘 코로나 19로 학교에 가지고 못하고 학원에 가지고 못하고 그냥 집에서 논다. 집에서 노는 모습을 보면 솔직하게 불안하다. 하루 종일 게임을 하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면서 논다. 두 아이를 바라보는 나와 아내의 시선이 불안하다. 저러다가 성적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에게 특별히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또 불안해 진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을 용인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경탄과 불안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러다가 읽은 정재승의 책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창조적으로 키우는 것은 결국 그들을 용해 주는 부모의 몫인 것처럼 창조적인 인재가 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적인 용인이 아닐까? 


  ps.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특이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책은 읽고 쓰냐는 답글을 다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공간이고, 책에 대한 내 느낌을 쓰는 공간인데 여기에서도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계속 글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느덧 알라딘도 이이상하게 번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과거 알라디너들이 이곳의 생활을 접은 이유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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