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복음 - 이택광의 쾌도난마 한국문화 2008~2009
이택광 지음 / 난장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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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7대 대선은 몇가지 면에서 참 기묘한 대선이었다.  

  첫째, 정책의 실종과 경제 일변도.  

  대통령이라 함은 한 나라의 국정을 운영하는 최고의 책임자를 말한다. 즉 대통령이라는 말은 정치의 최고 정점을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2007년 17대 대선은 정치의 최고봉을 꼽는 자리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비정치적인 대선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에 신물이 나서 그런지 정치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이 있다면 대중들의 공격을 받게 될 처지에 놓였었다. 그러다 보니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민주노동당도, 창조한국당도, 심지어는 경제공화당도 북핵이니, 통일이니, 계급간의 갈등이니 하는 문제는 모두 쏙 뻬놓고 오로지 몇 %의 경제 성장율을 약속할 수 있는가, 실업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만 변죽을 올리다가 대선이 끝나 버렸다. 외신들도 이 기묘한 대선을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봤었고, 대서특필했었다. 

  둘째, 불변하는 지지도. 

  보통 선거를 치르면 그 사람의 병역 문제, 경제문제, 윤리적인 문제가 대선 주자의 지지율 변동에 큰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익히 알다시피 당선을 거의 따놓은 이회창씨가 대선에서 두번 미끌어 진 것은 다름아닌 아들의 병역 문제가 아니던가? BBK라는 비윤리적인 메가톤급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에는 변함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불리해져가는 정황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는 모른다고 잡아 떼었고, 결국 대한민국 검찰은 이명박 후보의 손을 들어 주었다. 검찰이야 그렇다고 쳐도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던 국민들의 지지율은 사상초유의 것이었다. 

  셋째, 기독교의 약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를 뒤집어쓴 정치 세력의 약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금란교회, 여의도 순복음 교회, 소망 교회 등을 위시한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명박 장로의 대통령 당선을 기도했고, 그를 뽑지 않는 것은 사탄의 짓거리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외쳤다. 마치 그의 당선이 곧 이 사회를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말이다. 또한 이명박 후보도 이러한 기독교 보수 세력을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렇게 자기의 종교색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사람도 드물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이 세가지 현상은 대성을 거치면서뿐 아니라 1기 집행부가 들어서고 2008년 총선을 거치면서도 여실히 드러났던 현상들이다. 개헌선을 넘어서는 여당의 자리획득, 강부자 고소영 인사라는 신조어, 덩달아 뜨는 소망교회, 도대체 질줄 모르는 만수 형과 시중이 형의 부상. 국민과의 소통은 무시한채 밀어붙이는 한반도 대운하.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히자 말도 안되는 4대강 정비사업을 급조해서 눈가리고 아웅하기. 농업은 후진 산업이니 내어주고 대신 수출을 강화하자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행동들. 이미 사회의 곳곳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깊숙이 개입해 있다.  

  이택광씨는 이러한 생각을 먹고사니즘이라 명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무례한 복음이라 주장한다. 대중문화도, 정치도, 학문도 결국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한국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올인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욕망의 평등을 외치는 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지만 욕망의 사유화, 공익의 사익화를 원하는 이들은 쾌락을 위해서 그들의 욕망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이시대의 특징이며, 이명박 정부의 소통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사실은 문화를 욕망이라는 코드로 읽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발전적인 것들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쾌락이 아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평등화가 곧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살놈만 살게하자는 지금의 먹고사니즘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사회는 그 누구를 대통령으로 앉혀 놓는다고 할지라도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저자의 날카로운 진단에 십분 동의하면서 우리 사회가 먹고사니즘이라는 무례한 복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책을 읽는 내내 쓸데없는 지식인의 아는 척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다. 쉬운 말을 놔두고 어려운 말로 한참 썰(說)을 풀다가 쉽게 말해 이런 뜻이다로 정리하는 것은 아주 않좋은 버릇이 아닐까? 소위 말하는 비평가들의 안 좋은 습관이 바로 이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쉬운말로 어렵게 해야 왠지 있어 보이는 것 말이다. 특히 1~3부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블로그의 글을 모아놓아서 그런지 왠지 매끄러운 글을 읽기보다는 학술 용어로 도배한 에세이를 읽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저자의 문체가 눈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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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
박노자.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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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전에 읽은 책 리뷰를 이제서야 쓴다. 책을 읽은 다음에 바로 리뷰를 쓰는 것이 습관인데, 아마 이 책을 읽을 때 쯤에는 동시에 읽기를 마친 책이 몇권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57권째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27번째로 읽은 책이다. 벌써 읽고 몇달은 족히 지났을 책인데, 이제와서 리뷰를 쓰는 것은 순전히 눈에 거슬려서이다. 책을 사놓고 열심히 읽고 있지만, 책을 사는 속도와 읽는 속도 사이에 버퍼링이 심하게 나는 것은 두 아이의 아빠로서, 직장인으로서, 해야할 일들이 많이 있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핑계를 대보지만 어찌되었건 게으름의 소산일 것이다. 아마 책에 대해서만큼은 지름신이 강림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그때그때 서평을 쓰지 않으면 책의 내용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바로바로 서평을 쓰는 것이 나의 책읽기 습관이지만 이번처럼 피치 못해서 뒤로 미루어 두는 경우도 간혹 생기는데, 이런 책들은 책꽂이에 꽂아 놓고 치우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책을 다 읽고 나면 옆에 있는 다른 책꽂이에 책을 꽂아 놓는 습관이 있다. 그런 나에게 아직 책상 위의 책꽂이에, 그것도 눈에 보이는 곳에 책이 꽂혀 있다는 것은 아직 책 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순전히 이런 이유로 정말 몇달은 지났을 책의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서론이 이만큼 긴 것도 결국은 책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아 자신이 없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나는 나나미의 책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로마인 이야기는 무척 좋아해서 몇번을 반복해서 읽곤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전권을 3번 이상은 읽었을 것이다. 물론 2권부터 시작해서 7권까지는 7~8번 정도 읽었을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보면 로마가 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존속할 수 있었으며, 많은 민족들이 로마의 패권하에 들어가는 것에 그렇게 심하게 반발하지 않았는지(물론 유태인들이야 워낙 별종이니 논외로 치고) 이야기하는 대목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로마인은 분할하여 통치하는 것을 아주 잘하는 민족이라고. 그렇다 로마가 주로 했던 일들은 분할하여 통치하는 것이다. 자기 패권하에 있는 민족들이 하나로 뭉쳐서 단결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기 때문에 로마식 통치가 그렇게 빨리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강압적인 것이든, 아니면 이익으로 꼬시는 것이든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본질적인 면에서는 다를바가 없다.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말! 참 새련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보자. 내편과 네편을 나누어 대결구도를 조장한다는 것이 아닌가? 더 까놓고 이야기한다면 편가르기와 길들이기가 아니란 말인가? 피정복민들에게 내편인지, 적인지 분명히하라 주먹으로 위협하면서 내편이 된다면 이런 것을 줄 수 있어라고 당근을 흔든다. 누가 안넘어 오겠느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로마인들이 무척이나 얍삽한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시라. 오늘날에도 그렇게 머리가 안돌아가는 정치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아니던가? 심지어는 유치원 코흘리개 아이들도 매번 사용하고 있는 수법이다. 그만큼 유용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국가는 국민들에게 내편인지, 네 편인지를 결정하라 강요한다. 여기서 네편은 적이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이런 편가르기가 잘 먹힌다. 친미냐 반미냐,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상류층이냐 하류층이냐 등등등... 한국에서는 정말 많은 편가르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편가르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교묘하게 사용한다.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은 불구대천의 적이요, 내 편인 사람들은 계속 충성심을 시험하면서 그들의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런저런 혜택을 베풀어 주지 않는가?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가 이 책의 부제인데, 한국 근대 100년은 이 편가르기와 길들이기가 더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차라리 고구려사, 조선사를 말하면 모르겠지만 개화기로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시절을 거쳐서 실용정부까지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 100년은 눈만 뜨면 편가르기를 하고, 국민들을 길들이기 위하여 충성심과 반공과 유치찬란한 경쟁심과 승부욕까지 사용하던 시기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더하여 박노자와 허동현의 논쟁이 지상격론이라는 어머어마한 타이틀을 가지고 벌어진다고 해서 무엇이 신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한쪽에서는 잘못되었다고 타박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해해야 한다고 편들 것이 아니겠는가? 이게 조금 강도가 심하냐 덜하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편지글이기 때문에 대화의 논조가 참 정중하다 생각한다. 백분토론보다, 여의도의 국회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고 논쟁적이고, 정중한 어조의 말들이 가장 마음에 든다. 헐뜯기가 아닌 자기 주장을 정중하게 내세우는 것이 왜 그 잘나신 분들이 모이는 여의도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거기엔 편가르기와 길들이기라는 사회를 통제하는 아주 유용한 방법을 몸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일까? 

  책을 읽으면서 박노자와 허동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왜 하필이면 박노자일까? 왜 허동현일까? 일단 허동현이 누구인지 모른다. 경희대 교수라고만 적혀있더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는다. 한나라당 아저씨들, 혹은 민주당 아저씨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하는 수준이 아니겠는가? "걍 내비둬. 걔네도 힘들어 이해해야지." 뭐 대충 이런 논지의 글이 아니던가? 박노자는 어떤가? 그는 태생적으로 특이한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 한국을 사랑하지만, 그래서 한국인으로 귀화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엄연히 소련의 교육을 받았다. 이것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태생적으로 반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반공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것도 정통 사회주의적인 시각으로. 이것은 한국에서 극히 드문일이다. 그래서 박노자가 선택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이 책은 좌와 우가 아니라 특이한 한국인, 아웃사이더 한국인과 주류 한국인의 시각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편가르기의 한 방법이겟지만 말이다.  

  오늘도 사회는 편가르기와 길들이기로 통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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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외치다>를 리뷰해주세요.
인권을 외치다
류은숙 지음 / 푸른숲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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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권리이다. 황인종이든, 흑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모두 동일한 인권을 갖는다. 또한 국가와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게 인권을 갖고 있다. 다만 누구의 인권을 먼저 고려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비록 이런 상황 자체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발생한다.) 보다 약자의 인권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상식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인권의 척도는 다를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으로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변하지 않는 사실은 인권이란 보다 약자를 배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말을 찾을 수 없어서 배려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인권을 논하는 자리에서 배려라는 말의 사용은 불가능하다. 배려라는 것 또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면서 인권은 종종 무시되어 왔고, 무시되고 있고, 무시될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전쟁이 그랬고, 2차대전이 그랬으며, 아부그라이브 형무소가 그렇다. 관타나모는 말할 것도 없고. 결국 인권이란 태초부터 사람이 가지고 태어난 권리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인류 공동의 노력과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책은 바로 이 사실을 말한다. 역사상 점차 발전되어 온 인권에 대한 개념과 그때마다 공포된 선언들을 역사적인 사건들과 거기에 대한 코멘트, 그리고 선언문을 첨부하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왕권에서 시민권으로, 시민권에서 여성과 아동과 노인의 인권으로 점차 인권의 개념이 확장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인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례를 들어가면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각 주제마다 첨부된 저자의 코멘트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 대한민국의 인권 현주소는 어떠한가라는 생각을 깊이 해본다.  

  얼마전 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바뀌었다. 독립기구인 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려는 황당한 일을 겪은지 얼마 안되어, 인권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앉혔다고 각 단체들에서 단체로 성토하는 기사를 접했다. 사실 이 기사를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원위원회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우리나라는 인권을 중요시하고 보장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는 밑도 끝도 모르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이동의 자유를 외치며 시위를 하던 장애인들이 연행도중 차에 치이는 일이 발생하고, 생존권을 외치는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은 경제를 좀 먹는 아주 악질적인 반동분자로 몰려 얼굴에 테이건을 맞았고 스티로폼을 녹이는 최루액을 맞았다. 여전히 군대에서는 까라면 까라는 말로 비인도적인 관행이 지속되고 있으며, 건강권을 외치면서 대통령과 소통하기 원하는 시민들은 촛불좀비, 떼쟁이 민주주의자라는 이상한 허명을 쓰고 강제 연행되어 가고 있으며, 수억원대의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여전히 빨갱이라는 케케묵은 색깔론이 대두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인권도 무시되어 바위에서 뛰어 내린 후에도 세금을 축내고 죄를 피하기 위해서 자살했다는 오명을 썼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돌맹이를 던지다가 불에 타죽는가 하면, 5공시대에나 있었던 기무사의 민간 사찰이 다시 시작되었다. 국가 보안법이라는 도깨비 방망이로 모든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9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과연 이런 대한민국에 인권은 존재하는가? 여성들의 인권은, 아이들의 인권은, 이주 노동자의 인권은, 그리고 불법체류자의 인권은 고려되고 있는가? 아니 존재나 하는가? 복잡한 심경으로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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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김대중 1, 2>를 리뷰해주세요.
만화 김대중 2 - 행동하는 양심
백무현 글 그림 / 시대의창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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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가 좀 들렸다. 

  인물 중심이니 무협지처럼 제목을 붙여볼까? 이런 생각에 제목을 붙이니 1권이 그럴듯해보여서, 2권에도 제목을 붙여보려고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칠전팔기, 영웅출세"라고 적고보니 정말 그럴 듯하다. 칠전팔기라 함은 그의 정치여정이 무척이나 험난했음을 의미하는 말이요, 영웅출세라 함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박정희의 라이벌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매우 그럴듯해 보여서 혼자 자화자찬 해본다. 실없는 이야기는 이즘에서 마치고 2권은 부산 정치 파동으로 인하여 정치를 바로 세워보겠노라 풍운의 뜻을 품고 정계에 투신한 이후부터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웅은 쉽게 탄생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 정치에 큰 뜻을 품고 정계에 투신하지만 그의 길은 쉽지만은 않다.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그의 시작은 너무도 초라했으며, 너무나 늦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6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3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4번째가 됭서야 간신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의 기븜도 잠시 군부 쿠데타로 인하여 그의 당선은 무효가 되었고, 그의 정치 인생은 다시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숙적 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악연과 정치적인 대결은 그를 민주화의 상징으로 만들었으며, 그도한 민주화를 의식하고 초심을 잃지 않는 비결이 되었다. 물론 그 대가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마 박정희 정권 시절이 김대중에게는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을테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때가 김대중에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날이 아니겠는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올라 홈삼트리오라는 비난을 들었던 대통령의로서의 시기보다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순수하고 청렴한 정치인으로 인정받았을 그 때가 바로 그에게 가장 좋았던 시절이 아닐까? 

  아마 몇 년전이었을 것이다. 할 일이 없어서 주로 영화관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벌써 7년쯤 지났다. 그 당시 영화를 닥치는대로 봤었는데 김대중 대통령 납치 사건을 내용으로 일본 사람이 감독한 영화가 있었다. 배역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시나리오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그런지 매우 현실감이 잇는 영화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쪽팔렸다. 말로는 민주주의 국가네, 북한보다 우월하네 하면서 결국 뒤로 해왔던 일들이 파쇼정치가 아니었던가? 아마 내가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삐딱하게 봤던 경험일 것이다. 

  각설하고 2권을 읽으면서 문득 선덕여왕의 한 부분이 생각난다. 9월 21일 월요일 상영 분 가운데 문노와 비담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문노가 비담에게 묻는다. "왜 그랬느냐? 왜 승부를 조작까지 하면서 유신을 풍월주로 만들려 했느냐?" 그러자 비담이 말한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왜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갑니까?" 그러자 문노가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를 한다. "어리석은 녀석아 쉽게 갈 수 없기 때문에 대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떠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버릴 줄도 알고 굽힐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다.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도 된다고 한다. 국가를 위해서는 국민이 희생해야 하고,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생계가 위협받고 착취당하는 것쯤은 참아내야 한다고 한다. 모두가 대의를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대의란 무엇인가? 2권에 나오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모습을 보면서 대의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다음 대 대통령을 위해서 타협하는 김영삼, 무식하게 들이받는 김대중. 역사는 과연 누구를 대의를 다라간 사람이라고 평가하는가? 후자가 아닌가?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도 결국은 대의를 위하여 우직하게 묵묵히 한 걸음식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2권을 읽으면 나는 단언한다. 2권이 기록된 시기야 말로 정치인 김대중의 고난의 시기이자 최고로 영광된 시기였다고. 그리고 정치인 김대중이 가장 깨끗했던 시기이며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2권을 영웅출세라 부르고 싶다.

  마지막으로 1권에서 지적했듯이 만화의 한계이겠지만 설정이 너무 단순하다. 김대중은 선하다. 박정희는 약하다. 김영삼은 얍삽하다. 이 책이 배트맨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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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김대중 1, 2>를 리뷰해주세요.
만화 김대중 1
백무현 글 그림 / 시대의창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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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늙은 나이에 한쪽 다리를 절룩이면서 힘겹게 등장하는 대통령 김대중! 

  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보수우익에서는 빨갱이라고 말하면 선거대마다 색깔론을 제기했으며, 진보측에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요 선생님으로 불리운다. 한 인물을 바라보는 간극이 이렇게 큰 것은 어찌된 일일까? 참으로 많은 부침을 당하고 이승을 하직하고 떠난 故 김대준 전대통령의 삶을 만화로 그린 책이 나왔다. 바로 이 책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와 거의 동시에 책이 나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 대통령의 서거에 편승해가는 만화인 줄 알았다. 그래서 구입할까 말까 고민을 하던 차에 알라딘에서 서평도서로 받았기 때문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1권의 내용은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 선조의 정신나간 농담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되는 하의도의 수난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반 섬과는 달리 하의도는 농사를 주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하여 넉넉한 편이지만 실제 하의도의 역사는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엇다. 이중과세의 문제 때문이다. 풍산 홍씨집안에 하사된 농지 20결의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만나 섬주민들을 working poor의 상태로 만들었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자기들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하의도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혼란한 한국사의 모습과 농민들의 각성과 저항, 그리고 권리찾기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왜 작가는 하의도 주민의 삶과 애환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하의도 주민들의 삶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의도 주민들의 각성과 저항, 그리고 권리찾기라는 역사적인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평생동안 투쟁한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출발점은 핏속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조상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열정과 어린 시절 겪은 삶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그를 궂이 하의도의 인동초로 지칭하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니겠는가?

  1권은 우리에게 혼란한 조선말과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그리고 통일 후 이승만 정권의 혼란한 부정부패의 시기를 지나면서 하의도에서 핀 인동초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말해준다. 여운형의 건준, 조선신민당, 한민당을 거치는 다양한 정치적인 스펙트럼은 김대중이라는 인물에게 정치에 대한 안목을 심어주지 않았겠는가? 아마 그의 뛰어난 현실 감각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겠는가?  

  또한 1권은 한국 현대사의 면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이 태어난 시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걸으며 정치에 투신하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풍운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린다. 마치 삼국지 1권과도 같은 기분으로 책을 넘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1권은 만약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교재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을 한가지 지적하자면 인물 평전이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을 꼼꼼이 읽었다는 저자의 말때문인지 약간은 편향적인 모습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잘못과 과실도 있을 것인데 마치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고 초반부터 영웅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현실감이 떨어진다. 마치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처럼 김대중은 선하고 박정희는 악하고 김영삼은 얍삽하다. 물론 이 구도는 2권에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이것이 아마 만화의 한계가 아닐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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