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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어릴 때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시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신 아버지! 그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린 시절 기억으로도 버티기 쉽지 않았다. 입하나 줄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할머니는 나를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 게다가 나는 할머니에게 상당히 귀여운 손자였었다. 사촌형들과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내가 5~7살 때 막내 사촌형은 고등학생이었다. 바로 뒤의 동생이 2살 아래인 여동생, 4살 아래인 남동생, 그리고 5살 아래인 사촌 동생이었다. 집안 형편으로보나 나이로 보나 할머니에게 금쪽같은 손자였던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보다는 할머니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고, 할머니 집에서는 내가 왕이었다. 그러다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두고두고 할머니가 생각이 난다. 얼굴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지만, 할머니의 냄새와 분위기, 그리고 촉감은 생각이 난다.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계속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집을 위하여 헌신하던 잠자! 어느날 갑자기 그는 벌레가 되었다. 지금까지 집안의 가장으로서 사랑받고 존경받았던 그였지만 벌레로 변하게 되면 그는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아야하는 꼭꼭 숨겨야 하는 치부가 되었고, 부모조차도 외면하는 존재가 되었다. 집에 있지만 없는 존재, 없는 것처럼 애써서 여겨지는 존재가 되었다. 화가 난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상처를 입어도 아무도 그를 치료해 주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가족들은 그를 위한다는 말응 하면서 그의 흔적을 하나씩 없애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날 잠자는 죽게 된다. 그가 죽은 날 가족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간다.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우울했던 분위가가 그렇게 밝게, 그리고 상쾌한 느낌을 주면서 끝이 난다.
가족들에게 잠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었던 것일까? 왜 잠자는 집안의 기둥이요 가장에서 치부요 짐으로 변해버렸던 것일까? 그의 외형이 바뀌어서일까? 벌레로 변한 그의 외형 때문일까? 아니다. 그가 그렇게 가족들에게 짐이 되어버린 것은 그의 효용성이 다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말이지만 "효용성"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졌다면 벌레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의 외모가 무엇을 바뀌었든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낌없이 베풀었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동생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그의 능력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그는 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잠자에서 짐으로 변신해 버린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할머니가 떠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잠자의 모습에서 많은 노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할머니도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다. 집에서 모시다가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모셨는데, 그날 가족들이 다 힘들어 했다. 평생 모시고 같이 사셨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정말 힘들어 하셨다. 자주는 아니지만 살아계시는 동안 아내와 병원에 찾아서 말동무를 해드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시는 말씀이 어떤 사람은 가족들이 아무도 안 찾아 온다는 것이다. 요양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한번도 안 찾아 보다가 돌아가시면 장례 치르기 위해서 나타난다고 하셨다. 그런 모습이 한 두 명은 아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입원 기간이 오래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래서 긴 병에는 효자가 없다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근력, 경제력, 또렷한 정신 등 여러가지로 말하겠지만, 결국은 "효용성"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능력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겟다. 능력이 없어지는 순간에 잠자에서 짐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능력이 없어지는 순간에 누구나가 짐이 될 수 있다. 차마 버리지 못해서 애써 외면하는 존재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런데 이 말이 최근들어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공정의 기준이 되었다. 능력대로 인정받는 세상, 능력대로 대우받는 세상! 그것이 공정이다. 시험 점수가 낮으면 비정규직, 업무 능력이 저하되면 퇴직, 근력이 딸리면 낮은 임금 등 여러가지 능력을 기준으로 공정한 가격을 매긴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적인가? 능력이 공정한 것이라면 그 공정은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것이고, 공정이 그러한 것이라면 난 기꺼이 불공정을 택할 것이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위 말하는 내 능력도 퇴보해 가고 있다. 경쟁력도 사라지고 있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샌가 나도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정해진 길이다. 그렇다면 공정 담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요즘들어 할머니가 유달리 보고 싶은 이유가 따뜻함이 그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번역은 엉망이다. 변신에 대한 몇 가지 번역본을 읽었지만, 이렇게 엉망인 번역은 처음본다. 번역한 사람들이 독일어는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