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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소문 -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필립 얀시의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일까?
쉽게 읽힌다는 것,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현학적이지 않다는 것.
서로 다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이다. 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뻔히 속이 보이는 기복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적당한 깊이와 적당한 고민, 그리고 적당한 난이도. 이것이 필립 얀시의 책이 가지는 장점이고, 이런 이유로 그의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약간 다르다. 그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내공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글쓰는 포인트와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필립 얀시의 책 치고는 읽기가 쉽지 않다. 물론 내용이 어려워서 읽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읽었던 그의 책과는 달리 내용이 약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쏟아져 나오는 다른 기독교 서적에 비하면 우수하다. 단지 그의 이전 책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수상한 소문"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초대와 같은 내용(이현주 목사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같은 종류의 책)을 생각했는데,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것이다. 출판사에서 나름대로 제목을 붙인 것 같지만 원제 "A Skeptic's Guide to Faith"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 또한 포이에마가 하기에는 큰 실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원제가 의미하는 바는 살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번역서는 번역을 한 것이지,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번역자도 꽤 번역을 잘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제목을 번역했다는 것은 판매를 고려한 출판사의 잘못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얀시는 책에서 이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원론적인 구조이지만, 이 책이 회의주의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이러한 용어 선택은 출발에서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회의주의자가 대상이라기보다는 필립 얀시의 새 책이라는 점에 흥미가 동한 기독교인들이 대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용어는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그리고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들에게는 그렇고 그런 용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는 사람들과 출판하는 사람들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 읽히는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고민 끝에 저 단어를 다시 사용한다면 인정하겠지만 고민 없이 그냥 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말 그대로 허공을 치는 소리요, 향방없는 싸움일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 너머에 있는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매일 내가 숨쉬면서 살아가는 세계와 내가 그리고 바라보는 세계 사이에 살고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세계가 천국일 것이고, 비기독교인에게는 이루고 싶은 세계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인이 실수하게 된다. 기독교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세계는 천국 뿐만이 아니라 이루어야 하는 세계가 포함된다.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게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분명히 명시하지 않는가? 얀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도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전통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나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의 봉사, 선, 자비, 베품과 같은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다. 얀시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에게 과연 이것이 믿음으로 인도하는 가이드가 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회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믿음 안내서라는 포장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떡밥이라는(너무 막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이런 의도라면 틸리케의 "현실돠 믿음 사이"라든지 툼 라이트의 "광장에 선 하나님"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이 부분도 회의주의자들에게 의미있는 대답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얀시의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평타 이상은 한다. 기독교인들로 국한했을 때에만. 개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볼만한 것들도 많이 던져준다. 다만 회의주의자들에게는 아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꿨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신의 한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