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사용후기 -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한윤형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라는 책을 냈다고 하는데 난 그책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알라딘의 신간 도서 목록에서 보았을 뿐이다. 그대가 아마 악플러들의 악플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던 때 쯤일 것이다. 그래서 "올, 이런 책이 다나오네."하며 신기해했던 것이 전부이다. 그런 내가 이 책을 거금을 들여 구입하게 된 것은, 아직도 사놓고 읽을 책이 40권이 넘어가는 책 구매 속도와 독서 속도 사이에 버퍼링이 심하게 나는 지금에 굳이 이 책을 먼저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뉴라이트"라는 말 때문이다. "뉴라이트 사용후기"라는 제목도 흥미를 끌었지만 그것보다 더 흥미를 끈 것은 "상식인을 위한 역사 전쟁 관전기"라는 부제이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뉴라이트 사용후기"라는 말보다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라는 말 때문이다. 흥미를 가지고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었지만 글쎄 뭐랄까?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자가 하는 말은 알겠는데, 왠지 저자의 주장 또한 저자가 그렇게 비판하는 편가르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의 태도는 저자가 그렇게도 비판하는 나를 따르지 않는 너는 좌빨이야라고 말하는 보수우익들과 우리의 주장에 반대하는 너는 수구 꼴통이야라고 말하는 진보좌익들의 모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민족주의에 갇혀서 이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꽉막힌 사람이며, 철지난 이데올로기에 천착하는 비상식인이야. 대충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자가 이런 나의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이것은 순전히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민족주의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라는 속좁은 담론에 사로잡혀서 과거에 천착하는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정치세력들은, 그리고 국민들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모두 한민족, 반만년, 단군의 후손이라는 허구적인 민족 담론에 사로잡혀 있다. 아무리 우리가 주장하고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건다고 할지라도 민족주의하는 담론은 근대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일제치하에서야 형성된 것을 가지고 좌우로 나뉘어져서 피터지게 싸우는 것은 우스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의 싸움조차 정작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하지 못한채 변두리만 돌면서 변죽을 울리는 소모전일 뿐이라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기에 왕조국가였던 대한제국이나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농담이다. 오히려 우리는 3.1운동에서 그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어느정도 동의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를 대한민국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뭔가 마뜩치가 않다. 만약 우리가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를 딴나라 역사로 치부해 버린다면 고려와 남북조시대, 삼국시대와 고조선 시대는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통치자들이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단 말인가? 분명 이것은 아니다. 세련되게 말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그곳에서 찾는 정서적인 감정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저자는 민족의 정서적인 감정들이란 우리가 극복해야할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우익도 아니고 그렇다고 좌익도 아니다. 비록 민주노동당에서 일한 전력이 있지만 진보세력은 아니다. 그렇다고 보수새력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자신은 상식인이며 재수가 좋아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기의 위치를 포지셔닝하면서 뉴라이트를 비판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뉴라이트를 비판했던 사람들처럼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뉴라이트의 주장 가운데에서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것들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이 그가 여타 진보세력이나 뉴라이트 비판자들과 다른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뉴라이트의 주장은 순수하게 학설로 받아들일 때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단지 저자가 뉴라이트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들의 주장을 깊이 통찰한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순수한 학설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학문의 일관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분명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뉴라이트들이 어느 순간에는 극렬한 민족주의자들의 사상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치적인 목적(가령 친일 청산이라는 부분을 피해간다거나, 이승만을 복권시킨다거나, 통일에 관한 문제들 특히 햇볕정책을 비판하기 위해서)을 위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잠시 포기하는 비겁한 행동을 취한다. 이것이 문제이고, 뉴라이트를 비판하려면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뉴라이트를 비판하면서 진보세력들의 모습 또한 비판한다. 그들을 비판하려면 그들의 학설의 논점을 비판해야하거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학자의 양심을 버린 부분을 비판해야 하는데, 그들의 출신성분을 비판하는 진보세력들을 비판하다. 말이 비판이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며 그들의 멍청함을 조소한다. 저자에게는 김기협도, 진중권도, 안병직도 모두 그밥에 그나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양쪽을 모두 비판하면서 하는 주장이 무엇인가? 양자가 편가르기 하지 말고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익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요 빨갱이이다. 진보세력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은 수구꼴통이요 친일파일 뿐이다. 접점없이 자기의 생각만 내세우면 결국에는 우리는 한 나라에 살면서도 서로를 적대시하는 전혀 다른 인종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다. 집권층은 국론이 분열된다고 협박하는데 국론은 원래 분열되어야 하는 것이며, 분열된 국론을 토론을 통하여 하나로 모으는 것이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누가 집권을 하든지 이러한 민주주의의 절차와 방식만 살아 있다면 그곳에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내가 세련되지 못해서 뭐라 콕집어서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는 토론 문화가 없다. 그저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말싸움과 감정의 대립만이 존재할 뿐이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그건 니 생각이고."라고 토를 달기 시작한 순간 그 사람과 나는 이미 적이 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가 굳이 적을 만들면서까지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려고 하겠는가? 그저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킬뿐이다. 혹은 익명에 기대어 인터넷에서 상식이하의 키보드 워리어가 되던지. 그렇지 못한다면 사생결단의 의지를 가지고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상대방을 초전박살내는 방법밖에는. 여의도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토론을 통하여 정책을 만들어 내고 토의를 거쳐 입법을 해야하는 국회가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의 화랑도를 펼쳐보이는 장소가 되어버리고 사생결단, 초전박살, 견즉필살이라는 전쟁터의 논리가 현실로 나타나는 곳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성급하게 국론을 모을 것이 아니라 국론이 분열된 것을 인정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다자간에 이성을 가지고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방벙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감정이 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책의 주장 또한 대한민국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라는측면에서 한윤형이라는 사람은 진보와 보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한윤형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대한민국을 바라보는가? 나에게 새로운 상식인이 있음을 가르쳐 준 책이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해서 논하자면 1부는 솔직하게 실망이다. 뉴라이트 비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들의 생각을 살펴보고 간단한 코멘트를 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2부는 꽤 재미있다. 저자의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일까? 2부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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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들>을 리뷰해주세요.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유가에서 실학, 사회주의까지 지식의 거장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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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생각들! 

  제목만 해도 거창하다. 그런데 담고 있는 내용은 더 거창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해 온 정치체제가 어던 흐름 가운데에서 나타났고, 발전해왔는지 서양과 동양의 흐름을 살펴본다. 서양은 르네상스 이후에 장원이나, 공동체, 기독교인, 유럽인이라는 집단의 모습을 탈피하여 개인이라는 자아발견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정치체제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 민족주의, 파시즘이라는 5가지의 형태로 정체를 설명하고 있다. 동양은 중국의 유가사상, 도가사상, 법가사상, 한국의 실학사상, 동학사상을 가지고 정체를 설명하고 있다. 총 10가지의 정치체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한가지이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사상이 이 책의 핵심 단어가 아니겠는가? 민심은 천심이라는 케케묵었지만 여전히 진리인 이 말이 모든 정체의 기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몰개성의 역사 가운데에서 개인의 발견, 그리고 개인의 존중은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물론 21세기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저자는 책의 맨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과연 냉전이 끝나면서 이데올로기는 종언을 맞이했는가? 좌와 우로 나뉘어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 전쟁은 끝을 맺은 것인가?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여전히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란 정치 사상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한 정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에 십분 공감하면서 생각해본다. 권력의 주체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과연 대한민국의 권력이 주체는 누구인가? 

  대한민국 헌법 1조에 의하면 "1.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정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서 부터 나오는가? 지난 촛불집회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헌법1조노래를 불렀는가? 헌법1조 노래가 많이 불리웠다는 것은 결국 헌법1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왜 헌법1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우리가 헌법 제2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헌법 제2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 2.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헌법1조보다는 2조에 집착하고 있다는 말은 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법률에 의하여 대한민국 국민을 정한다는 헌법 2조는 잘못 악용되면 우리로 하여금 누가 국민인가라는 치열한 편가르기와 패싸움을 할수밖에 없도록 만드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사가 편가르기와 퍄싸움의 역사였다. 물론 지금도 한장 좌와 우로 나뉘어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권력자들이 너무나 쉽게 국민을 기만하지 않는가? 와하고 들고 일어날 때는 잠시 굽혔다가 가라앉으면 하나식 입건하고 가두고 있지 않은가? 뒷산에 올라가 겸허하게 아침이슬을 들었다는 그 분이 잠시 지나자 유모차 부대를, 진중권 교수를, 그외 수없이 많은 찍힌 이들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처벌하고 있지 않은가?  

  왜 권력을 쥔 이들이, 기득권층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우리를 개인이 아니라 묶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국민을 묶음으로 봤을 때 나치와 파시스트가 출현했던 과거의 경험을 우리에게 즁요한 반면교사가 된다.  

  어느 순간인가 부터 민중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대신 대중과 다중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대중문화, 대중 스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고, 대중이라는 말에 반발하는 이들은 대중이라는 말 대신 다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왠지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빨갱이요, 불순분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큰 무리, 많은 무리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묶음이다. 정치적인 용어라기 보다는 경제적인 용어가 아닐까? 정치적인 용어를 경제적인 용어로 교체해버린 순간, 우리는 소비의 대상, 공략의 대상이 되어버리지, 마케팅의 대상이 되어버리지 각성한 주체가 아니게 된다. 이것이 국민의 힘이 약해진 이유가 아니겠는가? 민심은 천심, 인내천이라는 말이 그냥 케케묵은 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의 힘을 오늘에 다시 되살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대중이나 다중이 아니라 민중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이 아닐까? 경제, 영어, 순위 경쟁에 몰두할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줄여서 이데올로기를 정립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치적인 주체로서 자기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생각하는 위대한 생각이란 결국 각성하는 민중이 아니겠는가? 수없이 많은 정체중에 동학사상을 최고의 가치고 생각한 것도 바로 각성하여 역사의 주체로 당당하게 선 농민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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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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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개콘의 제일 마지막에 나와서 "누가 끝이래~"를 외치시는 분이 계시다. 바로 이 분이시다. 개그만 윤형민이 오랫동안 울궈먹고 있는 캐릭터인 왕비호인데 항상 처음 외치는 말은 정해져있다.  

"우선 내 소개를 하지, 난 개그계의 안티, 연예계의 안티, 시청자의 안티로 새롭게 태어난 내 이름은 왕비호야!"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작되는 그의 독설은 개콘의 마지막 불씨를 다시 되살릴만큼 인기가 있다. 어던 연예인이 나왔든지 간에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는 그의 말은 비꼼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의 비꼼과 독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독설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보도되었던 많은 사실들을 토대로 해서 이리꼬고 저리꼬니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상처입히는 독설이 되어 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독설이 스스로 수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머릿 속에 바로 떠올린 것이 바로 이 왕비호인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면서 이산화탄소 배출에 관해 규제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그 결과물이 교토의정서가 아닌가? 그런데 교토 의정서에 참석하지 않은 미국의 과학자가 "지구온난화는 말짱 거짓말이다. 사기다. 교토 의정서도 순수한 과학적인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라고 외친다. 과연 그의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어필할 수 있을 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신선했던 것은 지구의 기후현상을  바라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이다. 하나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늘어남에 인하여 온실효과가 일어난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는 과거로부터 1500년의 기후 변동을 겪어왔고, 지금의 온난화도 그 과정의 일환일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사기성이 짙은 학설인지 조목조목 따지면서 반박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아주 간단한다.  

"지구온난화는 비과학적이다. 지금의 온난화 현상은 1500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지구 기후변동의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환경단체들이 자신의 이익과 정치적인 입장을 위하여 지구온난화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화석연료와 화학 비료가 오늘날 풍족을 가져다 주었고, 만약 이것을 멈추어 버린다면 오히려 인류의 위기가 닥칠 것이다. 아끼려는 생각하지 말라. 후손들에게 화석 연료를 불필요할 수 있다. 대체 에너지라는 말은 말짤 거짓말이고 사기다." 

  요약하다보니 조금 과격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저자들은 나름대로 과학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지만 때론 과학적인 입장이라고 선택한 것이 앞과 뒤에서 다르게 인용되는 부분들도 발견하게 되지만 그것이야 워낙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과학의 특징이라 생각하니 넘어간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무책임한 낙관주의라는 것이다. "기후변동은 원래 일어난다. 그리고 온난화 기후에 들어갔을 때 지구는 번성했다. 로마와 중국, 중세의 번성이 그 예가 아닌가?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인류는 이제 더 번성할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더 발전된 기술력(화학 비료, DDT살충제, 화석 연료 등)이 인류의 번성을 보장해 줄 것이다. 화학비료를 배제한 유기농법이라는 것은 무책임하면서도 구시대적인 것이다. 이런 것으로는 인류의 식량을 감당하지 못한다. 왜 미국과 1세계에만 희생을 강요하느냐?" 이런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도대체 이넘들은 뭐하는 놈들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더 나아가 후치족과 투치족의 전쟁을 그저 식량의 부족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며, 화학 비료 사용과 유전공학을 통한 유전자 변이 식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런 전쟁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 경고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제일 마지막에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아껴서는 안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사용할 화석 연료들이 많이 있다. 단지 생산비용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기술력이 발달한다면 그 문제는 충부히 해결될 것이다. 후손들은 화석 연료보다 더 좋은 에너지원을 사용하여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인들이여, 일주일에 차를 두번탄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그리고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를 만나는가? 그렇다면 이사가면 된다. 요즘은 이동이 얼마나 편리한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쓸데없는 에너지원을 개발하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수확을 위해, 에너지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더 기술력을 발전 시키는 것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거리야?"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여기에 비하면 왕비호의 독설은 애교수준이다. 이게 곡학아세라는 것일까? 

  "왜 이럴까?"라는 생각에 저자들의 경력을 보다가 허드슨 연구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시 정책의 열렬한 후원자, 온갖 강경 정책을 내놓는 곳, 민간 싱크탱크라 말하면서 전방위적으로 미국을 우향우하게 만드는 단제의 연구원이 쓴 책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속지말아야 할 것은 지구온난화가 아니라 이 책이 아닐까? 분명 저자들의 주장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모습을 스스로 취한다. 자기들의 주장, 나아가서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과학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 힘을 잃는 이유이다. 

PS. 오타가 너무 많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한 곳도 있고, 갑자기 문맥이 단절되는 느낌을 받는 곳이 한 두곳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별 3개를 주려다가 1개를 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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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장하준의 경제 정책 매뉴얼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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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 자동차 사태가 꽤 오랫동안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노조원들의 생존권 사수를 지지하는 측과 기업의 손해는 국부의 손해라 생각하면서 회사를 지지하는 측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미 쌍용 자동차 사태는 노조와 회사의 다툼이 아니라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좌와 우의 이념 투쟁으로 번져 가고 있다. 평택에서 최루액과 볼트, 화염병이 날아다니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면 인터넷에서는 노조와 사측으로, 빨갱이와 꼴통 보수로, 전라도와 경상도로, 민주당 지지자와 한나라당 지지자로 나누어져 서로에게 화염병보다 더 거센 감정의 불길을 지피고 있으며 곤봉이나 너트보다 더 치명적인 촌철을 뱉으며 살인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좌우 우로 갈라진 양 진영들은 서로를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생존권을 부르짖고 한쪽에서는 국가 경쟁력을 부르짖는 시대에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서로가 국미느이 편이며, 서민이라 주장하지만 도무지 진짜 서민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대중은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 해지고 시니컬 해지고 있으며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설득과 토론을 통하여 타협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이기고 죽이고 없애야 하는 적이 되었다. 이런 모습이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전쟁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돌아서서 한마디 욕하고 말았는데 왜 요즘은 이렇게 서로를 죽여야할 필사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난 신자유주의를 이것으로 이해한다. 이웃을 이웃이 아니라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대상으로 사물화 시켜버리는 것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 이해한다. 무한경쟁의 논리 가운데에서 단 한번이라도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호의를 베푼다면, 잠시라도 상대방을 이웃으로 생각한다면 상대방은 기꺼이 나를 밟고 올라설 것이라는 두려움을 우리에게 심어주면서 "경쟁은 좋은 것이여."라는 신자유주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자유는 좋은 것이고, 경쟁은 좋은 것인가? 시장은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한 손이 되는가? 장하준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의 신화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도 감정적인 제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서 조목조목. 거기에 더하여 단순한 반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책까지 제시한다. 그것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말 존경해 마지 않는 경제 대통령 박정희의 정책과 치적을 실증으로 들어가면서.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신자유주의를 복음으로 생각하고, 박정희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나라당과 MB정권에서 장하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하준을 친박계로 분류해 놓은 것인가? 

  몇십년전 영국에서 대처 수상이 "대안은 없다."라는 말을 모토로 영국의 경제를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게 재편한 일이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레이건이 레이거노믹스를 표방하면서 같은 일을 하였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영미식 경제라는 무한경쟁의 경제체제가 생겨났다. 미국의 꼬봉인 우리나라는 박정희의 뒤를 이어 미국의 인정을 간절히 원하던 전통 노통을 비롯하여, YS DJ 놈현을 거쳐 MB까지 이르는 동안 영미식 경제제도를 착실하게 이식하였다. 그래서 왠만한 경제 관료들은 민영화는 좋은 것이며, 경쟁은 사회를 활력있게 만든다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고용 안정보다는 고용으니 유동성이 더 필요하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하고, 파이가 작으니 파이를 더 키워야 한다면서 4만불 시대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워졌는가? 

  이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말하면서 밀어붙이는 방식들이 과연 바른 것인가? 합리적인 것인가? 왠지 이 물음에 대하여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내가 애국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순 때문인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는 감정의 골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다시 발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장이 만능이 아닐진대 시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거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히틀러의 등장과 양차 대전을 불러 일으켰던 역사적인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시장에 대한 막연한 희망, 만능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장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다. 쌍용차 사태는 이것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으까? 쌍용차 사태를 어떻게 푸는가에 따라 앞으로 한국이 발전할 것인가 퇴보할 것인가가 결정난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모한 생각인가? 쌍용차 사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저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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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토 2009-07-23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을 처음 읽을 때, 카테고리를 잘못 설정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오늘, 일식이 있었구, MB악법은 통과됐구, 저는 술 한잔 했습니다.
이 글, 안 읽고 잤더라면 후회했을 뻔 했습니다.
신자유주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 및 경제에 관한 탄탄한 생각이 단단하게 보입니다.
저는 철학도, 정치도, 이념도 잘 모르지만 탄탄한 글은 제법 구별합니다.

대위님이시네요, 남은 군생활 잘 마치시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saint236 2009-07-2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년 전에 전역했구요 사진이 없는 관계로 이 사진을 올려 놓았습니다.^^ 전 기독교인지라 한잔할 수는 없었고요 어제는 정말 울고 싶었습니다. 한나라당이 보수 꼴통이라 싫은게 아니라 그들이 오만하고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싫어하는데 어제는 오만과 독선의 끝을 본 것 같았습니다.
 
<어린 왕자의 귀환>을 리뷰해주세요
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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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왕자의 귀환이라? 어린 왕자라는 소설을 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대감을 가지고 펴본 책은 날 당황스럽게 했다. 어린왕자의 귀환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따뜻한 동화나 어른들에게 삶에 관하여 생각하게 만드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편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은 만화였다. 그것도 데모하는 현장에서나 볼법한 찌라시에나 실릴법한 만화책은 어린 왕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너무나 간단한, 그러면서도 대충 그린 것 같은 그림체는 과연 이런 책까지 봐야 하는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한장씩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잡게 되었다.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결코 가벼운 내용들이 아닌 까닭이다.  

  내가 아는 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쉽게 설명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중고등 학생들에게 신자유주의를 설명하기에도 적합한 책이며, 대학생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신자유주의식 경제를 설명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책이다. 비교우위론, FTA, 그 안에 담겨진 독소 조항들, 민영화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니 대단히 존경스럽다. 만화에 덧붙인 우석훈의 주해가 만화에 깊이를 더했다고 할까? 

  그러나 한편으론 아쉬움을 느낀다. 만화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무겁다. 시사만화는 현실을 비꼬아 그 안에 촌철살인의 즐거움을 담아야 하는데, 이 만화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된 느낌이 강하다. 만화가 없다고 할지라도 내용이 이어진다면 만화책으로서의 가치는 많이 반감될 수밖에. 만화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무겁고, 책이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가벼운 것도 이 책이 가지는 아쉬움이 아닐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로 좌로 치우치거나 우로 치우친 책들에는 재미가 없다. 어려운 말을 늘어 놓고, 그것들을 사상적으로 설명하려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내용을 가볍게 할지라도 만만치 않다.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이 가지는 한계 또한 마찬가지다.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촌철살인의 유머가 약하다.   

  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이 왜 어린 왕자의 귀환일까 생각을 해봤다. 아무리 읽어봐도 어린 왕자의 귀환보다는 어린 왕자의 실종 내지는 멸종, 혹은 변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함에도 말이다.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결국 어린 왕자는 로또에 당첨이 되어 멀리 사라져 유유자적하고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왜 어린 왕자의 귀환이라고 했을까? 어린 왕자의 귀환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 왕자를 귀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린 왕자를 귀환시키고 싶다는 작가의 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어린 왕자를 어린 왕자로 만드는 것은 순수함이다. 그 순수함이 때묻는 순간 어린 왕자는 이미 어린 왕자가 아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어린 왕자를 어린 왕자가 아니게 만든가.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순수함 대신에 자본의 논리에 때묻고 쫓겨서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장미의 존재 가치를 배우기 전에 교환 가치아 사용 가치를 먼저 배워야 하는 어린 왕자들에게 어떻게 장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도록 만들어 줄 것인가?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절대 약자일 수밖에 없는 어린 왕자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인가? 좀더 솔직하게 말해서 어린 왕자가 멸종된 시대에 어떻게 어린 왕자를 다시 귀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얼마짜리냐?"는 대답 대신에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고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린 왕자의 실종 시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 왕자의 멸종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고민이어야 하지 않은가?

  위에 있는 사진을 보면서 다시한번 다짐한다. 생활 전선에서 자신을 상품화하는 것을 배우기에는 아직 어린 저 아이에게 다시 한번 웃음을 찾아 주자고. 다시 한번 어린 왕자로 꿈꿀 수 있도록 하자고. 아니 평생 어린 왕자의 꿈을 꿔보지 못한 저 아이에게 세상이 이렇게 상품 가치로 결정되는 냉혹한 곳이 아님을 알려 주겠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유니세프 회원이며, 유니세프 회원이 되도록 권한다. 그리고 열심히 책을 읽는다. 

PS. 신자유주의 전도사 역에 봉이 김선달을 캐스팅 한 것은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적절한 말발로 사기치는 봉이 김선달이나 신자유주의가 최고라고 말하면서도 자기들은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이들이나 동일한 부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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