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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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들어 보지도 못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 2주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자는 총리의 간곡한 부탁에 많은 국민들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항상 그렇듯이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젊음을 과신하면서 이럴 때 더 놀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습관에 젖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권고는 권고일뿐 강제가 아니라는 신념으로 혹은 그러한 생각도 없이 전국을 활보하다가 여행지에서 확진 판정을 받는 사람도 있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 전 모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많은 교회의 교인들, 그리고 목사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민망함을 금할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한달째 청년들과 인스타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이 상황이 속상할 뿐이고,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질본 본부장의 나날이 야위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코로나-19라는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사람을 여럿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문득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골라든 책이 페스트, 콜레라 시대의 사랑, 데카메론이다. 질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의 기록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훨씬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전염병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 작품을 몇개 골라두고 틈틈이 읽고 있다. 첫번째 책으로 페스트를 선택하고 읽기 시작한지 1주일만에 다 읽었다. 작품의 분량이 대단히 많아서 1주일을 꼬박 읽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분량으로 치자면 내 팔을 두껍게 만든 류시화의 책에 비하면 1/3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데 1주일이나 걸린 이유는 첫째로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면서 내 체력이 많이 떨어지고 생활 리듬이 깨졌기에 집중이 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는 책장을 넘기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철학적이어서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소름끼치도록 이 시대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장을 읽어가면서 오통의 아이가 죽어가는 장면을 읽으면서는 목에 무엇인가 걸려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듣고 노라면 오늘날 보수적인 교회에서 목사들이 행하는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놀라고, 페스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사협회와 오랑시 책임자들의 관료주의에서 의사협회 관계자들과 대구시장, 그리고 정부에게 딴지 걸려는 미통당 관계자들의 작탤르 발견한다. 어떻게해서든 살려보려다가 지쳐가는 리유와 그의 동료들의 모습에서 오늘도 의료 일선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의 눈물겨운 싸움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다. 떠들썩하게 살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클럽과 주점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염병을 틈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코타르와 주변 인물들을 통하여 마스크 매점 매석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이들의 추악함을 보게 된다.


  책을 읽어가면서 만나는 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결코 소설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뮈의 페스트를 읽어가면서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된다.


  도피자의 모습으로 서 있는 랑베르,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결국은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파늘루,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페스트라는 상황을 즐기는 코타르와 주변 인물들, 뚜렷한 이상이나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돕는 자의 위치에 서는 그랑, 타인을 위한 삶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맞서 싸운 페스트에 패해 죽는 그래서 성자의 삶과 가장 닮아 있는 타루, 의사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지만 끝까지 싸우는 리유, 진실을 숨기는데 더 관심을 갖는 의사와 시 당국자, 가족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그러다가 나중에는 슬퍼할 힘마저도 잃어버리는 많은 사람들. 페스트를 코로나-19로만 바꾸어 놓는다면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 분명하게 리유와 타루의 삶을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꼽을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수능에 지문으로 나온다면 학원에서도 리유와 타루의 이름을 기록하고 밑줄 쫙, 반드시 외울 것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모습으로 읽는다면,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한다면 어떻게 할까? 파늘루일 수도, 타루일 수도, 리유일 수도, 오통일 수도, 그랑일 수도, 코타르일 수도, 오통의 아들일 수도, 랑베르일 수도 있다. 또는 이름없이 스쳐지나간 사람들의 입장일 수도 있다. 각자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옳음과 정의를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페스트를 이긴 것은 연대의 힘이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페스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연대의 힘이다. 랑베르처럼 겉돌아도, 타루처럼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파늘루처럼 고민과 체념으로 살아도, 리유처럼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접해도, 그랑처럼 어찌어찌 시작해도 결국은 타인을 향해 손을 내뻗는 연대의 힘, 함께 함의 힘이 페스트의 위기를 견디게 만들었음을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여야로, 남녀로, 좌우로 갈라져서 싸우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가 소설 페스트의 시대보다 더 암울하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거 때문에 재난소득 분배를 4월 16일부터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연대의 힘을 믿어야 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씁쓸한 하루가 오늘도 저물어 간다. 정총리의 사회적 거리두기 당부 후 8일째가 저물어 간다.


PS. 소설과는 상관이 없지만 카뮈는 참 잘 생겼다. 개인적으로 잘생긴 철학자와 문인을 뽑자면 카뮈와 비트겐슈타인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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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 연설문집
시애틀 추장 외 지음, 류시화 엮음 / 더숲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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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시화의 책이다. 류시화랑 내가 잘 안맞는다고 도마 복음 강의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 때만 해도 이해할만 하다. 인디언들의 생각와 철학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알게 해줘서 감사한 마음까지 품고 있으며, 나로서는 류시화에 대한 극찬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출판사의 독자 친화적이지 않은 만행 때문이리라. 책이 꽤 두껍다. 도마 복음 강의와 마찬가지다. 하드 커버도 아닌 소프트 커버, 그리고 어떤 알라디너가 지적했듯이 가독성이 떨어지는 판형!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조금 쉽게 이야기하자면, 책 안에 많은 것을 억지로 꾸겨 넣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면 되려나? 나도 과거에는 포켓 사이즈를 선호했던 적이 있다. 책을 들고 다니기 쉽게 편집되어 있는 판형들을 선호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책 옆에 있는 여백은 그다지 필요없는 종이 낭비라고 생각했기에 그러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다보니가 본문 옆에 있는 여백은 그냥 종이 낭비가 아니었다. 거기에 무엇인가를 끄적이는 용도로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다. 그 부분이 얼마나 적절하게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책을 읽는 속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후에 "유레카"를 외쳤던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내용과는 무관하게 상당히 불친절하다. 게다가 900페이가 약간 넘는 어마 무시한 분량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단 기가 질린다. 물론 이런 책을 책꽂이에 꽂아 놓는다면 상대방 제압용으로 좋기는 하겠지만 그런 의미로 사용할 것이라면 하드커버로 되어 있는 전집을, 그것도 영어나 일본어로 되어 있는 책을 꽂아 놓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이 책이 제압용이 아니라 독서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900페이지를 손에 잡고 읽는 것도 쉽지 않고,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도 부담이 된다. 학생도 아니고 기것해야 핸드백, 아니면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니는 성인들에게 900페이지의 책을 들고 나니는 것은 고역이다. 책을 소분해서 한 2~3권으로 만들었다면 어떨까?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은 인디언들의 사고 방식을 인정하는 다양한 사회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백인 지배층들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그래서 인디언들의 삶을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그 다음 수순은 야만의 인디언 문명을 파괴하거나 계도해야할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인디언 문명이 사라져 버리고 보후 구역 안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이 책은 이렇게 사라져 버린 인디언 문명의 외침이다. 너가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나도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이며, 네가 발언하는 만큼 나도 발언할 권리가 있다는 피맺힘 외침이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가 정말 인디언들의 목소리인가라는 점에서는 의문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인디언들의 연설이 백인들을 통하여 기록된 만큼 그 원래의 의미가 왜곡되커나 쇠퇴해 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품는데, 나도 여기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인디언들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려지도록 보존되었다는 점에서만큼은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씁쓸한 점은 그들의 이름을 영어로 기록한 부분을 보면서이다. 인디언들의 이름이 영어로 번역되어 기록된 부분이 그들의 원래 이름보다 더 귀에 익고, 그 이상한 이름을 들으면서 낄낄댔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더 씁쓸하다.


  여튼 출판사 관계자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책을 냄에 있어서 조금은 더 독자 친화적이고, 가독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책을 편집했으면 좋겠다. 같은 작가의 책을 보더라도 편집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강도가 다르다는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가능하면 독자들이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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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2-18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천페이지가 넘은 하드커버책의 경우 읽기가 참 조심스럽습니다.예를 들면 제가 주석달린 셜록홈즈(전 2권)를 가지고 있는데 천페이지가 넘고 거의 여성잡지만한 크기여서 솔직히 읽을 엄두가 날질 않더군요.이후 6권으로 분권된 주석달린 홈즈가 나왔는데 책장에 놓기에는 구판이 멋지지만 실제 책을 읽을려면 분권된 주석달린 홈즈가 훨 읽기 쉽지요.
출판사 입장에선 분권에서 팔기보단(혹 님 말씀처럼 읽기가 쉽지 않다면 1권말 살수 있으니) 한권으로 파는것을 더 선호하지 않나 싶어요.

saint236 2020-02-19 10:39   좋아요 0 | URL
출판사의 입장과 독자의 입장! 그 차이가 이런 무식한 책을 만들어 낸 것 같아요. 그래도 출판사에서 조금만 생각하면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사는 사람은 분권을 해도 보통 다 산다는 사실이지요.
늦었지만 카스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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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제주도 동백꽃을 치면 4월에는 꼭 놓치지 말아야할 풍경, 여행지라는 말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4.3의 상징이 붉은 동백꽃이 된 이유를 알면 그 꽃이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프다.


  동백꽃은 질때 벗꽃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툭툭 소리를 내는듯이 통으로 떨어진다. 붉은 동백꽃이 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느 재일 문학가는 4.3이 생각이 나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꽃을 바라보면서 4.3 당시 피해자들의 목이 떨어지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그런단다. 끔찍하다 못해 섬뜩한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처참한 일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것일까?


  여러가지 말들이 있다. 남로당의 지원을 받아서 빨갱이들이 일으킨 일이라고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육지 것들이 들어가서 판을 쳤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서북청년단들의 만행은 유명하다. 장모와 사위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가지라고 협박하고 죽이는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데 서북청년단들이 당시 영락교회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데, 아직도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없겠지만 말이다.


  4.3을 비롯하여 한국 근현대사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침의 대부분은 우리 민족에 의해서 주동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미국에 의해서, 소련에 의해서, 자본주의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외부에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날나라가 토막이 나고, 그들은 어느새 우리를 지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북에 있던 한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기독교와 공산주의, 지주와 소작인 등 평화롭게 어울리던 마을이 토막이 났다. 친구가 친구의 가족을 학살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다시 그들을 학살하고. 등장인물의 마음에 깊이 남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 깊은 속에 자리하여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외면하고. 그러다가 죽음을 통해서 화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지금까지 서로를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상처 받음과 상처 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서 풀려간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서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들고 피해자이고, 나도 피해자이다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갈라져 있던 인연의 물줄기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저승의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 함께 어울렸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그 땅, 외부 세력이 들어와서 지배했던 그 땅, 손님이 주인 행세를 했던 그 땅에 조그마한 유골이나마 묻히는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건네준다. 


  전체적으로는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잘 쓰인 소설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도 만만치 않다. 다만 요섭에게 갑자기 등장했던 샤먼은 흐름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유골을 담아갈 뼈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의 등장은 굳이 그러한 설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등장한 신비한 인물은 소설의 장르를 판타지로 착각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후로 이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할지 관심을 가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책은 소설이 가지는 묵직한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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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가는 향기 정채봉 전집, 생각하는 동화 2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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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가 남녀 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안다는 말은 이 문구가 씌여있는 곳이 남자 화장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여자 화장실에도 씌여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 본 일이 없으니 알 방법은 없다. 그 글을 볼 때마다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인가? 내가 머문 자리는 어던 모습일까?

 

  종이에 무엇을 쌌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종이의 냄새를 맡아보면 안다는 불경의 구절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불경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안다.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 또한 너무 유명하기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안다. 그런데 알기만 한다. 그 구절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지는 않는다.

 

  어느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어떤 향기를 풍기고 있는가? 내가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어떤 냄새가 날까? 나의 말과 행동 속에서는 악취가 날까 아니면 향기가 날까? 멀리가는 것은 향기만이 아니다. 악취도 멀리간다. 그런데 멀리가는 향기라는 말을 쓴 것은 마땅히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서 향기가 나야한다는 매우 계몽적인 교훈이리라.

 

  사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고 하는데 나는 아내에게, 가족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그리고 알라디너들에게 어떤 향기를 풍기고 있을까? 문득 지난 알리딘의 생활들을 돌아본다. 많은 사람들이 왔었고, 많은 사람들이 갔다. 초창기부터 알고 지냈던 분들 가운데에는 여러가지 안좋은 이유로 알라딘 생활을 접으신 분들도 있고, 오랫만에 다시 돌아오신 분들도 있고,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의 글을 오랫만에 읽어보다 보면, 그리고 요즘은 북플에서 나의 지난 독서 기록을 보여주는데 그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자랑스럽고, 때로는 무시하고 싶을 때도 있다. 여기에 끄적거리고 있는 나는 10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나는 과연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날 때 무슨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내 삶에 대해서 겸허해지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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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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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없는 이야기"


  제목부터가 눈에 띈다. 왜 지금은 없는 이야기일까? 책을 읽어가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된다. 없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중의적인 이야기입니다. 없다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없다는 이야기이다. 동물이 하는 경우도, 식물이 서로 성공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이 책은 우화이니까? 다음으로 없다는 것은 이 책의 내용대로 가면 책의 주인공들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조금씩 타협을 하고 조금씩 퇴로 없는 경쟁을 하다 보면 멸종되어 버릴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


  저자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내용은 암울하다. 약자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경쟁하고 강자는 약자를 없애기 위해서 힘을 모으니 말이다. 


  어떤 동물 이야기에서 약간 특이하게 우는 동물을 골라내고 그 동물을 쫓아내는 이야기, 이 일이 성공하고 난 다음에는 또 다른 동물을 골라내고, 끊임없이 골라내다보니 결국에는 그 동물들은 사라져 버리는 이야기. 염소를 잡아먹는 늑대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는 날카롭다. 송곳이라는 그의 책의 제목처럼 현실을 바라보고 풍자하는 그의 시각이 무척 날카롭다. 그래서 더 아프다. 애써 외면하려는 나의 마음을 자꾸 불편하게 한다.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보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는 내 마음에 불편함이라는 짱돌을 던진다. 


  동물들의 이야기라는 상상 속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동물을 노동자로, 소비자로, 평범한 사람들로, 이 시대의 약자로 치환하여 읽으면 신문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현실의 이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무한경쟁의 시스템을 멈추기 보다는 그 안에서 나는 안전하니까, 나는 괜찮으니까라는 위로를 하면서 혼자서 살아남으려는 우리들에게 그러다 보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던져 준다.


  천사의 이야기는 더 신랄하다. 천사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다보니 나중에야 비로소 자신이 속아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속아서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파인텍 노동자들이 고공 농성을 해도, 신기록을 세웠다는 말 앞에서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다. 아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으니 아무렇지 않다는 말보다는 무관심하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면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물려주기 위해서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문득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옹알이를 하고 있던 큰 아이의 손을 붙잡고 "아빠가 미안하다."라고 사죄했던 그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과연 내 아이에게 지금은 미안하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무한 경쟁, 적자 생존의 시스템 속으로 내 아이를 밀어 넣으면서 미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작가는 나에게 묻는다. 아이에게 미안해 하던 당신은 어디로 갔는가? 과연 그 때의 나는 어디로 갔는가? 씁쓸함과 불편함과 미안함으로 복잡한 마음으로 끄적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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