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동안 개콘을 못봤다. 시간도 안맞고 식상해서이다. 식상하니 인터넷에서 찾아서 검색해볼 이유도 없고.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도 개콘을 보게 되었다. 봉숭아 학당 코너였는데 역시 변한 얼굴이 없다. 다 그 놈이 그 놈이다. 그러다가 문득 깔깔이에 촌스러운 헤어스타일로 등장하신 그 분을 보았다. 그 분은 바로 동혁이 형님이었다. 바로 이분이다. 


  1월의 마지막 주인 것 같았다. 왠 촌스러운 패션이냐. 개콘도 드디어 갈데까지 갔구나 생각하며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텔레비전을 바라보게 되었다. 학자금에 관한 동혁이 형의 독설이 구구절절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후로 이렇게 내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 준 사람은 없었는데, 동혁이 형이 가려운 부분을 아주 시원하게 긁어 주었던 것이다. 1월 31일자 동혁이 형의 주옥같은 대사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세상 누구보다 샤우팅을 사랑하는 형, 동혁이 형이야! 

  형이 짜증 안 내게 생겼니? 아니 뭔 놈의 대학등록금이 그렇게 비싸? 신문기사의 통계자료를 보니까 참나~ 아니 10년 동안 물가도 36%가 채 안 올랐는데 뭔 놈의 대학등록금은 116%가 오르냐고. 이거 왜 한 번 오르면 내려올 줄을 모르냐고. 

  아니 대학등록금이 무슨 우리 아빠 혈압이야? 아니 한 학년 올라갈 때마다 우리 아빠 얼굴에 주름살만 팍팍 늘어~ 우리 아빠가 무슨 뻔데기야? 어!? 대학총장이 우리아빠 얼굴에 보톡스 놔 줄꺼야? 이거 아니잖아~ 

  아니, 형 개그가 어렵니? 

  형이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니~ 그리고 뭐야 뭐? 학자금 상환제도? 아~~ 등록금이 비싸니까 돈을 꿔줄테니 취업 후에 갚아라! 그럼 취업 안 되면 안 갚아도 돼? 내가 만약에 돈 못 갚으면 나 잡으러 쫓아다닐거야? 니들이 무슨 추노의 장혁이야? 웃통 까고 식스팩 보여주면서 말 타고 올꺼냐고? 다그닥 다그닥! 오지호랑 이다혜를 잡아! 언년이를 잡으란 말야! 왜 불쌍한 대학생을 잡냐고~ 어!? 

  근데 말야 간과해서 안 되는게 하나 있다. 학자금 상환제도? 이거 나쁜게 아냐~ 제도는 좋아 제도는 아주 쿨해~ 근데 인간적으로 말야 이자가 너무 비싸잖아~ 이자가 너무 쎄다고~ 아니 대학이 세계적인 학자를 만드는 데지, 세계적인 신용불량자를 만드는데야? 옛날에 우리 아버지들이 소 팔아서 등록금 댔지만 지금 소 팔아서는 택도 없어요. 왜 불쌍한 우리 아버지들이 소처럼 등록금 대려고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냐고~ 우리아빠가 무슨 워낭소리야? 어버이날에 가슴에 카네이션 대신 목에 방울 달아 드려야 돼? 딸랑딸랑?! 이게 기쁘니? 어떻게 따뜻한 봄이 오면 쟁기질하러 갈까? 이거 아니잖아 슬프잖아. 가르침이 기뻐야지 슬퍼서야 되겠니? 어? 형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야!  

  등록금 인상 등록금 대출! 이런 소리하기 전에~ 그냥 쿨하게 등록금을 깎아주란 말야~  

  봐봐~ 사람들도 원하잖아~형이 괜히 형이니? 너희들의 동네 형. 그래 동혁이 형이야! 

  이명박 대통령의 반값 등록금 공약이 空約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대학 등록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선 후보이던 시절의 이명박 대통령은 "등록금 받으면 돼지."라는 말로 응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민경제, 반값 등록금에 대한 공약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등록금이 너무 비싸다고 깎아달라고 말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정당한 요구를 떼쓰기로 몰아붙이며 강제 해산해 버렸다. 각 대학들은 학원복지나,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낮춰주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학원 자주를 외치던 대학들의 그 의연한 기세는 어디로 갓는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왜 "역사의 공간"이라는 서평을 쓰면서 동혁이 형의 개그를 인용하는가? 왜 이 책을 읽는 내내 동혁이 형의 개그가 머릿 속에 맴돌았는가? 권력에 의해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소수자들, 주류에서 밀려나 타자가 되어버린 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을 그나마 시원하게 긁어 주는 것이 동혁이 형의 개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권력의 비리를 폭로하던 PD수첩도 사라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의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윤도현도, 김제동도 없어졌다. 인터넷 글도 실명제가 된지 오래이고, 요즘은 트위터도 감시하겠다고 한다. 맘에 안들면 입다물라고 얼르고 윽박질러서 침묵하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소통법이 아닌가?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컨테이너로 명박 산성을 쌓아버리는 현정부 하에서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 침묵하던지 아니면 다른 우회로를 찾지 않겠는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들이 동아신질서나 대동아공영론에 대해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내선일체론자들이 시끄러운 수다를 펼치게 되었던 것이 그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식민주의자들의 고무와 요구에 기인하는 것인 만큼, '동아신질서'나 조금 뒤의 '대동아공영론' 같은 제국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의 침묵은 식민주의자들의 강력한 검열과 억압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치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사안에 대해 철학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지극히 곤란하게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특히 대동아전쟁의 발발 이후 여구되었던 '총력전 체제' 하에서, 정치적 사안을 직접 다루고자 하는 한, 어떠한 비판적 발언도 불가능하게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P.405)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던 그 시절 지식인들이 택했던 방법은 무엇인가? 문학이라는 우회로가 아니었던가?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CEO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대통령에게 있어서는 말 안듣는 사원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정치 외적인 것들일 수밖에 없고, 그 중에 한가지가 풍자 코메디가 아닐까? 풍자 코메디가 유행하던 시절이 어느 때인지를 떠올려 본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오버센스가 아님을 알 것이다. 아니 차라리 오버센스이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동혁이 형이 후련하게 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주 동혁이 형의 주옥같은 개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오늘은 동혁이 형께서 어떤 주옥같은 개그를 해주실까?" 한편으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는 것 같아서 걱정도 된다. 저러다가 한방 맞지 싶다. 한방에 훅 갈 수도 있을 정도로 수위가 높다. 물론 지금을 기준으로 수위가 높다는 말이다. 걱정반 기대반의 마음으로 매주 동혁이 형을 기다린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다. 동혁이 형의 개그는 개그라는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주기는 하는데 거기에서 한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정치인이 아니라 개그맨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정도의 사회 인식 능력과 위트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장 그 사람을 지지할 것이다.(현재 내 생각에는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고 외쳤던 노회찬씨 정도일까?) 이야기가 잠시 또 딴 길로 빠졌는데 내 말의 요점은 속은 후련한데,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동혁이 형의 개그에는 결여 되어 있다는 말이다. 더 까놓고 말하면 촛불집회 후 우리에겐 그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고 보수를 외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사회에는 꼴통들만 목소리를 높이는 도그빌이 되지 않았는가? 진보는 이합집산이 아니다. 정권 재창출을 목적으로 이합집산할 것라면 진보라는 말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자의 말 가운데 진보에 관한 다음 대목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그것이 내부 안에 자리 잡고 내부가 된다면, 내부가 된 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그 외부를 보고 다시 그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암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변환의 벡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보의 이념을 갖는 자들이 쉽사리 전략으로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주어진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진보의 이념은 주어진 세계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외부자들(outsider), 지배적인 가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수자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추방되거나 배제된 터자들을 향하게 한다.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없어서 보조금으로 버텨온 농민들에게 그만 염치 좀 있으라고 훈계하면서 결국은 농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시장과는 다른 경쟁력, 시장 바깥의 삶의 가능성을 찾자고 말하는 것; 불법체류자니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그들을 불법화하는 법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 난민적인 삶에 대해 동정하기보다는 거꾸로 난민적인 삶을 통해 난민들을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투쟁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내부에 그것의 외부를 끊임없이 창안하고 그 외부를 통해 자본주의와는 다른 종류의 벡터들이 다양한 영역, 다양한 방향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 어떤 '이념'없이도 우리가 진보의 이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우리 자신의 삶을 잡아끄는 외부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P.130 ~ 131)  

  진보란 말할 권리를 박탈 당한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들과 연대해서 그들에게 말할 공간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게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고, 그것이 사회가 정체되어 썩지 않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상하게 돌아간다. 경제 논리로 소수자들을 추방하고 착취한다. 판옵티콘으로 감시한다. 그렇게 하나씩 추방되고 타자화되면 결국에는 누가 남을 것인가? 오늘 끌려가는 사람은 유태인이라 침묵하고, 내가 아니라 침묵하고, 이런 이유로 침묵하고 그러다가 결국 내가 끌려갈 때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고 반성했던 독일인의 참담한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이 되지 않겠는가? 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43쪽 6번째 줄, 454쪽 밑에서 2번째 줄에 "보자보건법"이라는 말이 있다. 모자보건법의 오타가 아닌지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보자보건법이라는 말이 있긴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모자보건법과 똑같은 걸로 봐서 오타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읽기가 만만치 않다. 분량도 만만치 않고 내용도 꽤 어렵다. 글의 논지는 명확하다. 그런데 그것을 서술하는 방법이 꽤 어렵다. 다른 곳에 게재되었던 글들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꽤 어렵다. 인텔리들의 고질적인 병이 아닐까? 인문학이 비인기종목인 이유중 이 부분도 무시 못할 것이다. 1부와 3부는 내용도 좋지만 읽기에도 편하다. 그런데 2부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저자의 말대로 4장은 책의 흐름상 좀 쌩뚱맞은 구석이 있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면서 본인은 아니라하겠지만 여전히 대중은 지도자에 의해서 선동되고 인도되어야 한다고 저자가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이 또한 인텔리들의 고질병이 아니겠는가?  

  소소한 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들도 있지만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1장과 2장의 내용은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내용들이다. 소수자를 위한다고 하는 일이 그들을 차별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10-02-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혁이 형 좋아합니다. 개그가 시원하잖아요. 근데... 싫어하는 넘이 있을까봐... 좀 걱정됩니다.
이진경 글은 저도 다 읽어 가는데, 서평단 도서로 오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책인 듯 싶네요.
그리고 논문 몇 편을 엮어서 책을 내다 보니, 일반 독자가 읽기엔 재미없기도 할 것 같구요.
그렇지만, 옛날 복사기 문건 시절 이진경의 말빨은 '사구체 논쟁'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의 관심사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머무는 것이 반갑습니다. 이 더러운 나라를 버리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