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김대중 5 - 역사는 발전한다
백무현 글.그림 / 시대의창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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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을 쓰기 전에 다음에서 노욕(老慾)이라는 말을 검색했다. 한자는 제대로 썼는지, 혹 의미는 제대로 파악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검색하던 가운데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주세요.
내공은 있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성의 있는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지식에 올라와 있던 글이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부정적인 평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진영의 어떤 의도의 글인지 안봐도 비디오다. 그런데 저 재미있는 것은 이 글에 대하여 꽤 많은 답변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들이다. 그 답변들이 대체로 비난도 안 되는 쓰레기로 취급해야할 것들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내용을 조목조목 집어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들도 있다. 지역 감정 조장(박정희가 시작한 것이지만 김대중도 이것을 이용하고 나중에는 더 심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카드 대란, 홍삼트리오(절대 가수가 아니다.),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 정책(물론 IMF체제를 몰고 온 것은 김영삼이지만), 건설업을 통한 경기 부양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 등은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에 일어났던 대표적인 실책들이다. 

  정치 9단이라는 사람이 왜 이런 황당한 실책들을 저질렀던 것일까? 정치색이 전혀 다른 JP와의 연합이라는 무리수를 뒀던 것일까?(노무현도 이 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군자연한 태도와는 달리 상대방의 약점을 까발리면서 물고 늘어지는 구태의연한 정치계의 행동을 따라갔던가?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살아왔으면서도 대통령이 되기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포기 내지는 유보했었는가? 서민들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하여 중산층을 붕괴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차갑게 얼어붙은 내수 경제를 살리겠다고 카드를 남발하게 독려해 카드 대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이해 안 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은 노욕(老慾)이라는 말로 정리가 된다.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 그도 막판에는 노욕(老慾)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집권욕 때문에 이회창을 누르기 위하여 JP와 연대를 했던 것이며,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기를 원해서 무리한 방법들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깎아 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이 어땠는지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김일성 찬양하듯이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에 대하여 찬양하는 것이 가끔 눈에 들어온다.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면만, 혹은 긍정적인 면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책을 통하여 긍정적인 면을 봤다면 책의 구석구석에 쪼개져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지 못하면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갈 단점들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그저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욕을 떨쳐버렸다면 오늘처럼 진보진영이 분열되고 무기력하게 되었을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바위 위에서 투신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인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고,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불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말을 해본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각설하고 분명한 것은 그는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라는 사실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5권까지 책을 마무리한 백무현씨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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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김대중 4 - 시대의 한계를 넘어
백무현 글.그림 / 시대의창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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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삼국지연의에 보면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라는 말이 나온다. “두 호랑이가 싸워 서로 잡아먹게 하는 계략”으로 조조가 유비와 여포를 무찌르기 위하여서 사용한 계책이다. 이 계책에 얽힌 에피소드는 이렇다.  

  한말 대 혼란기에 실권을 잡은 조조는 어가를 허도로 옮긴 뒤 궁궐을 다시 짖고 종묘와 사직을 옮겨 모셨으며 성대(省臺) 사원(司院)의 아문(衙門)도 새로 세웠다. 천도에 따른 큰 일을 대강 정한 뒤 후당에 큰 잔치를 열고 여러 모사들과 장수들을 불러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다시 꺼냈다. 서주(徐州) 평정에 관한 의견을 수렴코자 한 것이다. 허저는 정병 5만만 주면 유비와 여포의 머리를 승상께 바치겠다고 호언을 하였다. 

  그때 순욱이 허저의 말을 가로 막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게 한 계책이 있으니 ‘두 범이 한 먹이를 다투게 하는 계교라 합니다.’(二虎競食之計). 명공께서 폐하께 주청하여 유비를 정식으로 서주목(徐州牧)을 삼은 뒤 몰래 글을 보내 여포를 죽이도록 하십시오. 여포를 죽이면 그에게는 달리 도와 줄 힘 있는 자가 없으니 그 또한 멀지 않아 죽일 수 있습니다. 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유비가 여포를 죽이지 못하면 이번에는 여포가 반드시 유비를 죽일 것이니 명공께서는 마찬가지로 유리합니다.” 서주란 먹이 하나를 두고 유비와 여포가 다투도록 하자는 계책이다.(이문열 삼국지 3권 참조) 

  만만치 않은 상대가 서로 연합하여 있을 때, 상대의 갈등과 알력을 이용하거나 또는 조장해서 목적한 바를 이루는 방법으로 일종의 차도살인 수법의 변형이다. 별다른 투자 없이 상대방을 무력화 시킬 수 있으며 만약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별다른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왜 4권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생뚱맞게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라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는가? 이 책의 내용이 딱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이기 때문이다. 조조를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 세력으로, 허저를 군출신 강경파들로, 순욱을 공작정치의 달인 안기부로, 유비와 여포를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서주를 민주당으로 치환하고 위의 글을 다시 읽는다면 4권의 대강적인 줄거리가 나온다. 이래서 역사를 돌도 돈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김대중의 귀국부터 시작하여 직선제 개헌 투쟁, 김대중, 김영삼의 연합, 그리고 분열, 노태우 당선과 민자당 창당, 5공비리 수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이한열 열사의 죽음, 김대중의 정계 은퇴와 영국 유학, 그리고 정계복귀라는 숨가쁜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국민들의 열망에 의하여 억지로 떠밀려 직선제 개헌을 해야 했던, 그렇지만 여전히 북괴의 침략이라는 케케묵은 수법을 사용하여 국민을 협박하며 정치 공작을 일삼던 신군부 세력, 진짜 민주주의 실현을 대의로 걸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막판에 가서 권력욕 때문에 신군부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줘야 했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역사의 굴곡 속에서 피를 흘려 민주주의의 토양을 일구었던 무명의 국민들의 고귀한 희생 또한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실려 있다. 

  이 책은 김대중의 입장에서 그의 말과 인생을 조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에 대하여 좋게 포장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다. 대통령에 대한 그의 마음이다. 이호경식지계라는 것은 성인군자들 사이에서는 통하지 않는 계략이다. 능력도 비등비등해야 하지만 가지고 있는 욕심도 비등비등해야 가능한 계략이다. 유비가 아무리 인의를 내세우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황제의 자리를 향한 권력욕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비에 비하면 직설적으로 패권을 앞세우는 여포는 귀여운 정도이다. 조조와 순욱이 이호경식지계를 펼친 것은 인의로 포장된 유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권력욕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하여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이호경식지계를 걸 수 있었던 것도 양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향한 욕망을 꿰뚫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혹 꿰뚫어 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권력욕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권력에 대한 욕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전두환 노태우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겠는가?(그렇다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노태우와 손을 잡은 김영삼도 김대중의 단수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 기분 나쁜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로 김대중을 폄하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너무 멋들어지게 포장하여 역사의 모든 영광을 다 가져간 사람처럼 비추어 지는 모습에 반감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색깔론이라는 정치공작 때문에 평생을 고통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좌파라고 분류되는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김대중, 노무현은 절대로 좌파가 아니다. 중도우파 아무리 많이 쳐도 중도 좌파 정도가 되지 않겠는가? 우리 나라가 너무 우향우 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좌파로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감정 유발, 불출마 선언과 번복, 정계 은퇴와 복귀같은 행보에 대한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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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가질 수 없는가? - 마키아벨리로 본 이명박, 오바마로 본 노무현
박성래 지음 / 베가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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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통령다운 대통령이라? 서글프게도 대한민국은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가져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이승만(1~3대), 윤보선(4대), 박정희(5~9대), 최규하(10대), 전두환(11~12대), 노태우(13대), 김영삼(14대), 김대중(15대), 노무현(16대), 이명박(17대) 총 10명의 대통령을 찾아봐도 대통령다운 대통령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막은 대통령(이승만, 이명박), 국민들의 소리를 찍어 누른 대통령(박정희, 전두환), 기대를 저버리고 국민들의 마음을 기만한 대통령(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그저 자리만 차지한 대통령(윤보선, 최규하). 물론 이런 분류에 동의를 하지 못하는 분이 있을 줄로 안다. 그 중 노태우, 이명박, 김대중, 노무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는 왜 전두환과 같은 반열에 올리지 않았는가? 그가 대통령에 올라가기까지 많은 피를 흘렸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어서는 “보통사람”을 외치면서 국민들을 속이는데 몰입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김영삼 중간에 있는 것이 그저 위치만이 아니라 대통령으로서의 성향도 그렇지 않을까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강압적으로 내리 누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대통령들도 했을테니 귀를 막은 사람이라고 하자.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화라는 기대를 가지고 대통령이 되었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신자유주의를 고수했으니 기만이라고 표현했다. 지지층의 생각과 기대를 저버린 대통령이라는 말이다. 개중 누가 낫느냐는 판단은 보류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은 누가 낫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대통령다운 대통령이었는가를 판단하자는 것이다.

  대통령다운 대통령으로 평가를 내리기 위해 내가 사용한 기준은 저자도 말한 국민과의 소통이다.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소통통로라든지 신문고가 아니라 정말로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대통령의 말을 들으려고 고민했는가를 대통령다운 대통령이라는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정말로 우리는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참 서글픈 일이다. 사마천 선생께서 말하지 않았던가? “국민과 싸우려고 하지 마라. 항상 국민이 이기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서글프게도 집권층과 국민과의 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참 국민 노릇하기 힘든 것이 대한민국 국민이다. 저자는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국민과의 소통을 말한다. 국민과의 소통이란 무엇인가? 국민의 보편적인 정서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근거가 있든 없든, 보편적 정서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민심과 함께하면 실패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민심 없이는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여론을 형성하려는 리더는 행정 업무를 집행하거나 판결을 내리는 리더보다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P.24) 

  두 번째로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은 반대파를 향한 인내와 아량이다. 어느 조직이든 답답한 사람들이 있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다못해 동창회를 해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고스톱 룰을 정할 때도 동네마다 룰이 달라서 온갖 잡음이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선택하는 룰이 무엇인가? 맘에 안 맞는 이들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룰을 적용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여유를 두고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4대강이라든지, 세종시라든지 요즘 최대 현안도 결국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밀어붙이기에 더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이기에 시간이 걸린다면 딱 한 발만 앞서서 기다려줄 수 있는 아량과 인내가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사회가 아닌가? 노예 해방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풀어가면서 링컨이 했듯이 말이다. 

  링컨은 백인 국민들의 여론을 살피고 여론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움직인 것이다. 여론의 판단이 항상 도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여론을 무시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일을 진행시키면 일을 그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론이 움직일 때까지 참고 기다렸던 것이다.(P.204) 

  세 번째로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가? 엄격한 도덕성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비록 먹고 살기 힘들다고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경제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을 뽑았지만, 많은 국민들이 왜 그렇게도 쉽게 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는가?(물론 이 대통령은 지지도도 조작하여 아니라고 귀를 막아버리지만) 도덕성이 아닌가? 많은 내정자들이 줄줄이 낙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도덕성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왜 그렇게 말년에 힘들었는가? 왜 투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가? 도덕성이다. 국민들은 비록 자신들이 비도덕적이라고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정치분야 대표선수인 대통령에게는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국민보다 도덕성이 낮은 대통령이라니... 그저 습쓸할 따름이다.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도덕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평소에 도덕이 관심이 없고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리는 것 같지만 리더에게는 엄격한 도덕을 요구한다.(P.244)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북한도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모든 나라들이 독재국가라는 말을 거부한다.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에도 형식상으로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주의 공화국이었다. 북한과 비교해서 우리가 우월하다 내세웠던 것이 무엇인가? 민주주의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쳤고 민주적인 절차가 무엇인지 가르쳤다. 학생들이 독재에 맞서 그렇게 맹렬하게 싸운 이유가 나는 학교에서 배운 민주적인 절차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 여기에서 연유하는 부조리와 실망이라 판단한다. 물론 나도 그랬었고. 저자는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명쾌한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반문한다. 

  민주주의가 효율적인 체제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치라는 말에 코웃음을 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지배적인 가치라는 말의 뜻은 이렇다. 가령,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가 보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국민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좋은 대통령이라고 가르친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는 소중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공무원들은 국민들의 공복이라고 가르친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가르친다. 검찰은 민주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반장을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뽑도록 훈련시킨다. 반장은 반 친구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반장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면 나쁘다고 가르친다.
  학교에서 이렇게 배운 아이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P.308 ~ 309) 

  학교에서 민주적 절차를 배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는 선이라고 배운 국민들에게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겠는가? 부끄러운 대통령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무시하고 제한하는 대통령을 향하여 무엇이라 하겠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족의 태양이시오, 우리의 영도자시오,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이 아니다. 그저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 주는 소탈하고 인간적인 지도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많은 국민이 열광하고 자발적으로 봉사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자이툰 부대원들이 대통령의 전격 방문을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들의 말과 생각이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아주 작은 만족이 아니었던가? 만약 그게 체질상 맞지 않는다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덕목이고 의무이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명박 산성을 쌓아올리지 않고 국민을 만나 “미안하다, 생각이 짧았다.” 그랬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촛불을 밝혔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서 교훈을 얻는다.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의 말을 들어주자. 최소한 듣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듣는 척이라도 해주자.   

  저자와의 만남 시 저자가 물었다. "이 자리 왜 왔어요?" "답답해서요. 사회가 온통 깝깝하잖아요." 그렇다 소통이 막힌 사회는 그저 깝깝할 뿐이다.

  ps.가끔 후배에게 내 블로그에 방문자가 폭주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묻는다. “오늘은 어떤 부분을 씹으셨나요? 그러다가 조사 들어가면 큰 일 납니다.” 물론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을 조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왠지 그 말을 들으면서 살짝 겁이 나기는 한다. 그러면서 씁쓸해 한다. 도대체 이런 말도 못하는 세상이 제정신인가? 오늘도 제정신이 아닌 세상 속에서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서글픔을 애써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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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종말시계 - '포브스' 수석기자가 전격 공개하는 21세기 충격 리포트
크리스토퍼 스타이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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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지극히 테크노토피아적이며 자극적인 광고 카피이다. "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라는 책의 서평을 쓸 때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요즘 3D 텔레비전에 대한 광고를 하면서 우리의 머릿 속을 세뇌시키는 말이다. 한 알만 먹어도 배부른 약, 달나라 여행, 해저 탐험 등등 어린 시절 우리의 동심을 사로 잡았던 많은 공상들은 모두 "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지극히 테크노토피아적인 발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상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이 생각이 들었는지...  

  석유가 유한 자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언젠가는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걱정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시추해 낼 수 있는 석유의 양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환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아침에 텔레비전을 틀면 국제 유가가 얼마인지, 텍사스 중질유가 얼마인지 시끄럽게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확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기름 값이 10원 올랐다, 100원 올랐다는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드는 문제로 다가온다. 석유 종말의 시계는 바로 이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석유가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삶의 깊은 곳으로 초대하는 책이다. 책의 단원 또한 흥미롭다. 1갤런에 4달러부터 시작하여 6달러, 8달러, 10달러, 12달러, 14달러, 16달러, 18달러, 20달러라는 9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장은 1갤런의 유가가 이렇게 오를 때 어떤 현상들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날 것인지 예측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쉽게 읽힌다.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디테일한 부분을 예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4달러 시대의 SUV차량은 6달러 시대를 맞이하면서 도태될 수밖에 없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은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량 같은 차세대 기종들이 될 것이고, 초기 자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모색될 것이라는 식이다. 결코 직시하고 싶지 않은 석유의 고갈이라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지극히 긍정적인 책이지만 나에게는 왠지 긍정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이유가 무엇인가 끊임없이 되물었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 특히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발견했다. 이 책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저자의 지극히 미국적인 삶의 방식과 사고 방식, 테크노토피아적인 문제 해결 방식 때문이다.  

  저자의 논리를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다. “석유자원이 머지않은 미래에 고갈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최대한 효율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나머지는 기술이 채워 줄 것이다.” 아직 감이 안 오는가? 조금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바꾸어 보겟다.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4대강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나라 도로는 포화 상태이다. 국제 유가가 올라갈 것이고, 우리는 자동차 외에 다른 운송 수단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강이 있다. 그 강을 개발해야 한다. 그게 국토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여러 가지 부작용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가까운 미래의 기술 발전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테크노토피아적인 접근 방식의 극치가 가져올 부작용을 우리는 4대강 사업을 통해서 보고 있지 않는가? 생명과 자연에 대한 존중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을 보호할 가치는 생명의 존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한도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이 책이 주장하는 석유 종말의 시대를 대비하는 방식은 소로우의 월든에서 얻는 깨달음이 아니라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와 지극히 개발적인 논리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개발 논리가 오늘날 지구를 얼마나 황폐하게 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지막 장에 나타난 원자력 발전을 찬양하는 모습에서는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난다. 태양력 발전은 낮에만 가능하다는 것, 수력과 풍력 발전은 지형에 따라 한계가 있다는 것, 천연가스 발전은 유한 자원이라는 점, 석탄발전은 막대한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원자력 발전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주장한다. 원자력 발전 만세를 외치는 저자의 말을 들으면서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책을 끝까지 자세히 읽은 사람은 눈치 챘겠지만 원자력 발전을 위한 우라늄도 유한자원이기에 미래를 바라보면서 준비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혹 저자가 엑셀론의 대주주가 아닐까, 혹은 미국 원자력 발전 단체의 후원으로 이 책을 작성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시덥지 않은 생각도 해보게 된다.(“SERI 보고서”나 “지구 온난화에 속지 말라”와 같은 류의 책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만 물적 증거는 없다.) 

  미국 사람이 작성한 책인지라 석유의 단위가 갤런이다. 솔직하게 갤런이라는 단위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계산을 해봤다. 1갤런은 3.5리터이다. 그리고 3월 22일 환율은 1달러에 1150원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리터로 환산해 보았다. 거기에다가 이것은 미국 유가이기 때문에 국내 유가로 환산하자면 세계 탑랭크의 유류세를 반영해야 한다.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20%정도로 반영해서 계산을 해봤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계산한 것보다 훨씬 윗줄로 잡는 것이 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휘발유로 치면 어느 정도의 주유비가 드는지 계산해 보았다. 내가 보통 5만원을 주유하는데 그 정도면 30리터 근방이 된다. 그래서 30리터 주유 기준으로 잡았다. 그러고 나니 책의 내용이 확 다가온다.(계산이 쉽도록 소숫점 아래는 버린다. 

  4달러 - 리터당 1114 + 유류세 20% 222 = 국내 유가 약 1336 30리터 주유비 = 40,080
          삶이 빡빡해지기 시작함. 곳곳에서 경고의 메시지가 들림. 

  6달러 - 리터당 1971 + 유류세 20% 394 = 국내 유가 약 2365 30리터 주유비 = 70,950
          SUV가 도태되고 관공서들이 차량 운행을 줄임(ex 경찰의 도보순찰) 

  8달러 - 리터당 2628 + 유류세 20% 525 = 국내 유가 약 3153 30리터 주유비 = 94,590
          항공산업의 붕괴와 재편. 그러나 결국은 붕괴로 이어짐. 

  10달러 - 리터당 3285 + 유류세 20% 657 = 국내 유가 약 3942 30리터 주유비 = 118,260
           기존 차량 도태. 전기차를 비롯한 대안들이 나타나기 시작. 플라스틱 퇴출 

  12달러 - 리터당 3942 + 유류세 20% 788 = 국내 유가 약 4730 30리터 주유비 = 141,900
           스프롤현상이 사라지고 교외에서 도심으로 중심이 다시 돌아올 것임. 

  14달러 - 리터당 4600 + 유류세 20% 920 = 국내 유가 약 5520 30리터 주유비 = 165,600
           월마트의 붕괴. 대륙간 화물 운송이 어려워 질 것임. 

  16달러 - 리터당 5257 + 유류세 20% 1051 = 국내 유가 약 6308 30리터 주유비 = 189,240
           어업과 농업이 대형화 글로벌화를 탈피하여 지역 친화적으로 바뀜 

  18달러 - 리터당 5914 + 유류세 20% 1182 = 국내 유가 약 7096 30리터 주유비 = 212,880
           철도 산업의 르네상스. 대중교통으로 철도가 각광받음(미국은 철도가 침체) 

  20달러 - 리터당 6571 + 유류세 20% 1314 = 국내 유가 약 7885 30리터 주유비 = 236,550
           에너지 리싸이클링 산업 활성화. 원자력 발전이 대안. 

  내 생활 패턴은 한 달에 2번 주유한다. 그럼 10만원쯤. 대략 5달러 선인 것 같다. 그렇다면 20달러가 될 때 나는 한 달에 주유비로 473,100이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난방비를 제외하고 이정도의 주유비가 든다면 나는 차를 포기할 것이다. 물론 8달러 선도 자동차를 포기하게 만들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만. 이런 면에서는 참 흥미있고 재미있는 책이지만 위에서 밝혔듯이 월든식이나 내핍식이 아닌 테크노토피아식 결론이 지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다.  

  ps. 오타 57페이지 그 기2본 구조가 => 그 기본 구조가, 79페이지 100대가 있어 차 한 대당 1000달러가 더 들면 100만 달러 => 100*1000은 10만이다. 그 외 여러 부분에서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도 한 가지 재미이다.(ex 10달러 선에서 이미 플라스틱은 퇴출 위기다. 그런데 농업의 변환을 다루면서 플라스틱으로 온실을 만들면 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플라스틱은 아무리 봐도 옥수수로 만드는 플라스틱은 아니다. 농업의 변환은 16달러대에 일어날 것이라 한다. 농업의 변환이 이루어질 때쯤이면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온실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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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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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국가 정상 추진 위원회라는 듣보잡의 단체에서 친북 반국가 명단을 발표했다. 트위터에서 처음으로 접했던 글인지라 믿지를 못했다. 도대체 이게 조선시대도 아니고 뭐하자는 짓거리들인가? "설마"하는 마음에 기사를 검색했더니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도대체 국가 정상 추진 위원회라는 단체는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단체란 말인가? 그들이 발표한 100명의 명단도 황당한데, 더 황당한 것은 그들의 친북 반국가적 행위가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뭐 카더라는 것도 아니고 한참 증권가에 돌았다가 물의를 일으킨 찌라시도 아니고... 



  100명의 명단 중에서 정치권의 명단만을 여기에 인용한 이유는 이 명단이 국가 정상 추진 위원회의 속셈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시비를 건 국회의원들의 출신 성분은 모두다 진보신당, 민노당, 대통합 민주신당 혹은 열린 우리당 출신인 것이다. 국민들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고 반국가적인 행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을 놔두고 유독 야당 혹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김대중 노무현 시절의 여당만을 명단에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국가를 말아먹은 수없이 많은 장관 중에서 유독 통일부 장관만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보수 단체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전 대통령의 이름이 친북 반국가 명단에 올라있지 않다고 그렇게 애석해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의 소망대로 잘 풀려서 정상회담을 했다면, 그래서 노벨평화상을 탔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름도 친북 반국가 인사 명단에 등재되어야 하는 것인가?(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노벨 평화상을 탄 것을 가장 배아파 한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는 것은 소문은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마지막으로 전 의문사 진상 규명위 위원장 한상범씨는 정말 쌩뚱맞음을 넘어서 이들의 똘끼를 그대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군대의 비리를 캐면 친북 반국가 행위인가? 그러면 하나회를 무너뜨리고 수없이 많은 장군들의 모가지를 자른 분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이 또한 김영상 전 대통령. 금융 실명제와 하나회 일소는 내가 이분을 보면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부분이다.) 

  친북 반국가 명단 발표의 의미는 명확하다. 친일 반민족 행위 인명 사전에 이름을 올린 측의 반격일뿐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는 나는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 집안이 친일 반민족 명단에 이름을 올리거나 친북 반국가 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 아니기 때문에 막말로 뭐가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이 두 명단이 나를 씁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통과 관용의 부재, 적개심이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아닌가? 가장 상위법이라는 헌법마저 헌재에서 정치적인 이해 득실을 위하여 왜곡되고 헌정질서 수호라는 미명하에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 위해 날뛰는 아수라장이 대한민국의 현상태가 아니던가? 이 상황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 민국은 헌정국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헌정 국가의 의미가 무엇인가? 헌법의 질서로 유지된다는 말이 아닌가? 헌법의 의미가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헌법은 소통과 관용을 통해 극단을 피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혼합정체 이론에 전제된 좋음이란 중용, 즉 모순적 가치들 사이에서 극단을 피하면서도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덕성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혼합 헌법은 중용의 원리가 이끄는 중도적 헌법이다. 귀족정과 민주당은 일면적 성격이 강조될 때 과두정과 중우정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혼합정체는 양자를 조정하는 것이므로 양자의 고유한 악을 피할 수 있다. 최고의 이상 국가를 염원했던 플라톤과 달리, 최선의 정부 형태를 찾으려 했던 서구의 고전적 헌정주의자들은 중용의 논리에 기초해 혼합정체라는 해결책에 도달했다. 이 온건하지만 어려운 해결책은 폴리스의 중추를 이루는 중산 계급에게 균형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까닭에 내부의 계급 투쟁에 의해서 폴리스가 붕괴될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P.57 ~ 58) 

  예나 지금이나 헌법의 가장 큰 역할은 양 극단을 피하여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다. 이를 통하여 국가는 내부 투쟁으로 붕괴될 위험을 줄이면서 지속적으로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 대한민국은 이런한 헌법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 케케묵은 색깔론으로 시비를 건다. 양극단으로 치달린다. 상대방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헌법이 이런 상황을 제어해야 하는데 정치적인 이해득실에 의해서 헌법의 기본 정신마저 왜곡해 버린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헌법은 중환자실에 입원해 버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헌정질서를 회복할 것인가? 국가 정상화 추진 위원회의 말처럼 리스트와 명단을 발표하면 헌정 질서가 수호가 되겠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사흘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들어갈 소리다. 오히려 리스트를 남발하는 것은 헌정 질서를 더 흐리고 무시하는 행위이다. 과연 대안은 무엇인가? 헌정 권력의 본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이처럼 헌정권력은 다양한 차이 속에서 공통의 것을 이끌어 내는, 다시 말해 그 누구도 특권적일 수 없는 평정한 네트워크를 전제한다. 여고생, 예비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와 아이, 아베크족, 장애인, 할아버지, 이주 노동자 등 이들의 모든 차이를 그대로 둔 채(레비나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모두가 모두에게 여전히 비밀인 채로), 그들 사이에서 공통의 것을 이끌어 내는 그들 자신의 권력이 헌정 권력이다. 따라서 헌정 권력은 언제나 소통과 연대, 재미와 창의성, 웃음과 감동, 다음과 하나 됨이 어우러지는 대동의 현장을 연출한다.. 이 대동의 현장이 헌법적 현장이다. 이 헌법적 현장은 대표와 피대표의 이분법을 사라지게 한다. 표상정치가 전제하는 무대와 관객의 이분법은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다. 무대가 있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가설무대일 뿐이며, 지금의 관객이 잠시 뒤면 배우가 될 수 있다. 모두가 배우이면서 동시에 관객이 될 수 있는 헌법적 현장의 생동감!
  헌정 권력은 주권이면서 인권이기도 한 매우 독특한 개념이다. 자유주의의 일방적 팽창과 민주주의의 작동 불량으로 찌그러진 근대적 헌정주의의 표상 정치를 보완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독특한 헌정 권력의 개념으로부터 주권과 인권의 논리를 보완하고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P.157 ~ 158)  

  헌정은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의 논쟁과 인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수없이 많은 형태로 흐르고.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절대로 포기될 수 없었던 한가지는 소통과 관용을 통하여 자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결점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끌어 안고 소통하면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헌정국가의 특징이자 장점인데 이 장점을 포기하고 헌법을 규범화하여 지키지 않으면 처벌한다고 윽박지르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헌정국가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오히려 전체주의 혹은 국가 사회주의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하고 공통의 것을 끌어 내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 균형이라는 중도를 버리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이 상황이, 불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상황이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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