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어머머! 재미있어!!” 라 했을 것 같다. 훌륭한 책, 걸작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세이 분야에서 특히 여행(?) 에세이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책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참 오랜만에 낄낄거리며 읽었다.

 

알라딘 서점의 프로필에 올라온 빌 브라이슨은 산적 같다. 책을 읽으며 내내 카츠는 이런 모습일 것이라 상상했던 딱 그 얼굴을 브라이슨에게서 보다니, 너무 놀랐다. 카츠가 혹시 브라이슨이 아닐까? 브라이슨이라면 캐릭터 바꾸기 쯤은 유쾌하게 해치울 것 같다. 카츠 같은 브라이슨과 진짜 뚱뚱이 카츠가 ‘스루 하이커’를 꿈꾸었던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이렇게 생겨먹었다. 미국이 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참 길다!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 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천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맘이 설레는 블루리지, 스모키, 컴벌랜드, 그린 마운튼, 화이트 마운튼을 지나간다. p13”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전히 종주하려면 적어도 5개월이 걸린다. 2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150일을 매일매일 걷는다면 얼마나 신날까! 진짜? 종주를 결심한 브라이슨은 맨 먼저 흑곰에 희생된 불행한 하이커들의 이야기로 오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숲은, 깊은 숲일수록 으스스하다. 큰 숲을 걸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 타박타박 걸을 때는 정말 으스스하다.

 

『나를 부르는 숲』은 그 유쾌함으로 또는 그 유쾌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산과 숲, 자연에 관한 것들 뿐 아니라 사람에 관한 생각들, 특히 사람에 관해서 그렇다. 브라이슨의 동반자 카츠도 독특한 인물이지만, 나는 메리 앨런을 보며 너무너무 웃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앨런. 플로리다 주에서 왔고 카츠가 공포에 질린 어조로, 순간적으로 지어낸 ‘한 편의 걸작’이라는 별명이 영원히 따라붙었다. 소파에 누워 있던 개가 소파에서 내려와 다른 방으로 피신할 만큼 격렬하고 강력하게 코를 풀어 귓속의 유스타키오관을 정돈할 때 -자주 그렇게 했다- 외에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나는 살다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과 얼마간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게 신의 섭리라는 것을 안다. 메리 앨런은, 심지어 애팔래치아의 깊은 산중에서도 그 섭리를 피할 수 없다는 증거였다. p86”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내 교우의 상․ 하한치를 훌쩍 뛰어 넘는 ‘한 편의 걸작’이 불쑥 인생에 뛰어들 때는 있다. 앨런처럼 모두 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불쑥 사라지지만 어떻게 감당할지 몰라 쩔쩔 매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이상하게 보였던 사람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고 누군가의 인생에서 ‘한 편의 걸작’으로 남아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1852년부터 산 위에 지어진 호텔들, 산을 중심으로 한 관광산업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 전에 본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생각나게 했다. 톱니바퀴 궤도 기차에 수영장, 골프 코스, 엘리베이터를 갖춘 호텔들이 우후죽순으로 세워져, 1890년대까지 화이트 마운튼에는 200개의 호텔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자동차는 사람을 한 곳에 머물러 있게 두지 않았다. 호텔들은 관광객이 최소한 2주일을 머물 것이라는 가정 아래 지어졌지만 사람들은 하룻밤이면 미련 없이 떠나갔다. 20세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한 곳에 충분히 오래 머무는 시대는 아니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렇게 사라져 간 호텔 중에 하나인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주변의 곳곳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입구를 연상시킨다. 브라이슨이 유머 속에 비판하는 관광지의 상술과 행락객들은 딱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공원 관리국의 행정도 어쩜 그렇게 우리와 비슷하게 엉망진창인지, 누가 뭐래도 미국은 형제의 나라라는 또 다른 증거 같기도 하다. 물론 주미 한국대사가 칼침을 당하면 미국인들도 석고대죄에 부채춤과 북소리로 용서를 구할지는 의문이다.

 

『나를 부르는 숲』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브라이슨과 카츠가 대충대충 트레일을 건너뛰는, 슬렁슬렁 정신이다. 끔찍한 스모키에서 내려온 그들은 택시를 타고 남부를 떠나 단박에 버지니아까지 가버린다. 스루 하이커가 되기로 한 결심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운동화 신은 할머니가, 우드로라는 이름의 인간 비치볼이, 그리고 3천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캐터딘까지 종주에 성공했는데 내가 그 욕구를 포기한 기분이 어땠을까 -사실, 괜찮았다. 나는 여전히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단지 그 전부를 걷지 않았을 뿐이지.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카츠와 나는 벌써 50만 발자국을 찍었다. 그리고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어떤지 알기 위해 앞으로 450만 발자국을 더 찍어야 한다는 건 필수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p182”

 

어쩌면 우리는 집단적으로, ‘필수적’에 강박 되어 있다. 산에 가면 ‘필수적으로’ 정상에 올라야 하고, 일단 결심하면 ‘필수적으로’ 100대 명산을 모두 정복해야 한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게으르고 나약한 인간이 된다. 대학에 가려면 SKY를 가야하고, 수술을 하려면 최고의 명의를 찾아야 하고, 밥을 먹어도 맛집을 검색해야 하고, 빵을 하나 사도 전국 3대 빵집 앞에 2시간의 줄을 서야 한다. ‘필수적으로’ 최고를 찾는 정신이 우리의 삶을 무한경쟁으로 내몬다.

 

브라이슨은 일 때문에 한 달간 등산을 중지하고, 8월에 카츠와 다시 만나 메인 주의 트레일 구간을 함께 걷기로 했다. 그때 카츠는 브라이슨이 올 때 까지 혼자 전 구간 종주를 잠깐 계획한다.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난 감사하게 생각해. p254”

 

“그가 말했고 나도 동의했다. 우리는 에미캘롤라를 떠난 이후 800킬로미터, 125만 발자국을 걸어왔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충분한 근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등산가다. 우리는 숲에서 똥을 누었고 곰들과 함께 잤다. 우리는 산사람이 되었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p254”

 

브라이슨과 카츠를 가짜 산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8월에 다시 만난 이들은 카츠가 길을 잃고 헤맨 후 결국 트레일을 포기한다. 카츠가 묻는다. “그래, 트레일을 포기해서 기분이 언짢니? p411”

 

“확실치가 않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대해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갖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트레일이 지겨웠지만 여전히 이상하게도 그것의 노예가 되었고, 지루하고 힘든 일인 줄 알았지만 불가항력적이었으며, 끝없이 펼쳐진 숲에 신물이 났지만 그들의 광대무변함에 매혹되었다. 나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싶기도 했다. 침대에서 자고 싶기도 하고 텐트에서 자고 싶기도 했다. 봉우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 했고, 다시는 봉우리를 안 보았으면 싶기도 했다. 트레일에 있을 때나 벗어났을 때 항상 그랬다. p411”

 

그냥 산행을 할 때도 그렇다. 한때는 매주 한 번씩 번질나게 북한산에 올랐다. 바위를 엉금엉금 기며 내가 여기를 왜 또 왔나 후회하지만, 내려와 매표소가 눈앞에 보이면 벌써 다음 주에는 어느 코스를 오를까 궁리하곤 했다. 그래서 산은 삶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브라이슨의 묘사는 삶에 대한 은유기도 하다.

 

끝내 마운트 캐더딘을 아쉬워하는 브라이슨에게 카츠는 말한다. “다른 산은 봤잖아, 브라이슨. 너는 얼마나 많은 산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 p412”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산들에 올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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