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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판]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 실험 10장면, 특별보급판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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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리학과 정신분석의 차이가 뭘까? , 가끔 생각해 보지만 제대로 알아 본적은 없는 의문이다. 심리학과에 다녔으면 재밌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지젝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심리학에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됐다. 지젝이 뾰족하게 뭐라고 한 적은 없지만, 정신분석은 심리학을 개똥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심리학도 그러리라 나는 생각했다. 가장 친연성이 커보이지만, 서로 서로는 소 닭보듯 혹은 아예 없는 듯 무시하는 그런 관계처럼 느껴졌다. 

 

  독서회가 아니라면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또한 내 독서목록에 오를 가능성은 전혀 없는 책이다. 그래도 이런 기회에 심리학이 무엇인지 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약간의 호기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재미없다거나 지루하다거나 이런 것을 떠나 이 책은 무엇보다 불쾌했다.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10가지의 실험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도 불쾌했고, 저자가 감성적으로 개입하는 방법도 매우 불편했다. 심리학이 다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것이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씩이나 된다면, 심리학에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질 필요도 없겠다 싶다. 사람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8년 연속 장기 베스트셀러 행진!' 이라는 수식어를 헌정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독서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이유의 일단을 알게 되겠지만, 아마 나는 별로 공감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의 두 번째 실험인 '스텐리 밀그램의 충격기계와 권위에 대한 복종' 에 소개된 실험은 언젠가 우리나라 TV에서도 보여준 실험이다. 피실험자로 하여금 질문에 답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기 충격 장치의 버튼을 누르게 하는 실험인데, 오답의 횟수가 증가할수록 전압을 올리게 한다. 답을 하는 사람은 미리 섭외된 연기자로 전기 충격을 받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연기를 하는데, 반수 이상의 피실험자들이 상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도 지시대로 충실하게 버튼을 누른다. 밀그램은 이 실험을 통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한다. 독일국민들이 나치를 지지한 그 불가사의가 바로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 실험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을 지나는 식으로 슬쩍하고 넘어가는데,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렌트의 주장은 '악의 평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부재' 에 있다. 밀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조차 악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단지 사회적 분위기, 권위에 대한 복종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한 작업은 왜 그렇게 선량한 사람들조차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는가를 탐구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권위가, 그 명령이 합리적인지, 옳은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숙고하는 사유 능력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밀그램의 실험과 같은 것이 이른바 심리학이라면 심리학은 현상을 수집해서 분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에 관한 해석과 철학적 사유가 없다. 맞다. 사유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내내 불편했던 이유는 10명의 '위대한' 심리학자뿐만 아니라 저자조차도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에게는 낯간지럽게 넘치는 감성과 생뚱맞은 개입이 있을 뿐, 일관된 철학이 없다. 이 실험들을 선정하고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없는 것이다.  심리학적 실험 자체가 관점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증거를 최우선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실험은 이미 그 설계에 관점이 개입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10명의 실험자들은 뚜렷한 관점을 갖고 있는데, 저자만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쁜 것은 관점이 빈 자리를 생뚱맞은 공감으로 채워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실험자들과 그 가족 혹은 지인들을 찾아 다니며, 쓸데없는 감성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는 그 태도가 참 역겹다. 철저하게 실험 자체에 집중하든가, 일관된 관점으로 그것들을 해석하고 꿰어내든가, 뭔가 저술의 원칙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여하튼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다. 심리학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심리학의 입문서로는 더더욱 나쁜 책이 아닐까 싶다. 이런 것이 심리학의 정수라면 글쎄 심리학은 그저 실험기술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공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래서 공부를 계속했다면, 나도 이런 실험들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런 것들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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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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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8만원 세대 발제를 대신하여...

 

 

 

 

  막상 발제를 하려니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될까 걱정이다.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이 책을 조목조목 살펴보려면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간단히 요약하자면 서너 줄의 문장으로도 끝낼 수 있다. 출간한지 6년밖에 안된 이 책이 서술하거나 예견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너무 분명한 현실로 닥쳐왔기 때문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저자 한윤형은 이 책을 간단히 묵시록이라 정의했다.

  “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대부분이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묵시록적인 예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 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될 거라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인데도, 요즘의 젊은이들이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어른들의 ‘상식’에 맞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후 세대의 평생 동안의 소득은 윗세대의 그것보다 적을 거라고 주장했다. 윗세대가 젊어서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취직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오늘날의 세대는 시간이 지나도 젊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급료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p176 ”

  최근 발간된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 역시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 준 미래는 지금의 20대들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한윤형은 1983년생, 최태섭은 1984년 생으로 2007년 『88만원세대』가 출간되었을 당시, 딱 20대를 보내고 있던 바로 그 88만원세대이다. 한윤형은 지금 미디어스라는 인터넷 매체의 기자로, 최태섭은 박사과정 중 입대를 앞 둔 자유기고가로 살고 있다. 만만치 않은 이력과 능력을 가진 이들의 경우, 아마도 자발적 선택의 비율이 적잖겠지만, 여하튼 변변치 않고(? 미안하다);; 불안정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그나마 『88만원세대』의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최태섭에 의하면 『88만원세대』이후 갑자기 불어 닥친 20대에 대한 동정론 덕분에 신문 귀퉁이나마 지면이 허락되고 여기저기 발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 2007년에 발간된 《88만원 세대》이후 한국 사회는 그 전에 없던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20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쌍한 20대를 위한 동정 여론과 지원을 위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자비로운 어른들의 지원을 받아 20대 당사자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쁘게 움직였던 것은 언론과 출판이었다. 세대론을 표방하는 책들, 힘든 20대를 위로하겠다는 책들, 멘토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신문들은 너도나도 청년들을 필자로 섭외해 2030칼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잉여사회』p35 "

 

  우리가 지금 수없이 보는 멘토들과 소위 힐링용 책들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과연 20대에 필요한 것이 동정과 위로일까? 결국 또 하나의 고문에 불과할 희망을 속삭이는 걸까? 아니 우리사회가 지금 부딪힌 문제들이 20대만의 문제인 것일까?

 

 

 

 

  『88만원세대』는 우리나라에 처음 ‘세대론’ 이란 말을 대중화시킨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 가장 충격을 받은 세대는 20대가 아니라 어쩌면 386세대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자부심에 넘치던 386세대는 아리랑치기라도 당하듯 뒤통수를 느닷없이 가격 당했다. 민주화의 주역으로 언제나 도덕적으로 당당했던 386세대는 졸지에 20대 나이어린 약자들의 몫을 강탈하는 파렴치한으로 전락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88만원세대』가 맨 먼저 지적하는 386의 과오는 거칠게 말해 민주화 운동의 정신과 실체적 삶의 이중적 태도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적 태도와 경제적 태도의 불일치이다. 프랑스 68혁명과 달리 우리의 87년 민주화 운동은 어떤 경제적 민주화도 요구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68혁명의 결과 모든 대학의 국유화를 성취했다. 대학 서열화를 폐지하고, 일 년에 50만 원 정도의 등록금으로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만약 우리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했다면, 20대 대학생들은 학자금 융자에이 허덕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한 사교육의 광풍에도 휘말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87년에 우리는 경제적 민주화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군부독재 정권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몰랐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은 ‘영광의 30년’이란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88만원세대』를 읽고 20대가 가장 격분했던 대목은 ‘서문’ 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지 않은 20대도 대부분 ‘서문’의 내용은 알고 있을 정도다. 서문의 시작은 007학점, 선동열 학점, 쌍권총, 기관총 등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전설적인 학점이야기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밑바닥 학점으로 졸업하고도, 이 억세게 운수 좋은 386세대는 척척 취직해서 쑥쑥 진급까지 하고, 현재 각계각처의 요직을 점령하고 있다. 영어도 못하고 능력도 없는 386세대가 ‘단군 이래 최대 스펙’ 인 20대들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이 어이없는 현실을 『88만원세대』가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이다.

  이 충격적이고 강렬한 ‘서문’ 덕분에 저자들의 의도가 어찌됐건 간에 『88만원세대』는 표적을 빗겨, 세대 간 적개심의 화약고에 불을 붙여 버렸다. 그런데 20대들의 비참한 현실이 과연 386세대들의 이기적 탐욕에만 그 원인이 있을까?

 

 

 『88만원세대』는 경제학답게 그 원인을 밝히는 작업에 게으르지 않다. 우리가 급격한 경제 체계의 변화를 체험한 것은 물론 1997년 IMF 구제금융 때이다. 지금은 20대의 절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4~50대 실직 가장들의 자살이 연일 화제가 되던 때였다. 1990년대 10년간 소위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나는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한다. 명예퇴직자 명단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어느 과장님은 퇴직금을 받아 김가네 김밥을 열었네, 어느 부장님은 디자인 하청 사업을 시작 했네 따위의 소문들이 매일 돌았다. 무엇이 명예롭다는 건지, 쫓겨나기 전에 알아서 나가는 것이 명예라는 건지, 그 이름도 아햏햏한 명예퇴직의 광풍이 불고 나자, 부서 개편이 잇달았다. 처음 들어보는 팀제가 도입되고, 대리가 팀장인 팀도 과장이 팀원인 팀도 생겨났다. 그렇게 연공서열제는 파괴되고 성과급제가 도입되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IMF 사태는 당연히 우리의 잘못처럼 인식되었지만, 사실 그것은 세계경제가 1970년대부터 주요 경제 기조로 채택한 신자유주의가 우리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낸 최초의 사건일 따름이다. 약 10년 뒤인 2008년, 신자유주의의 종주국인 미국 역시 금융위기를 맞이했다. 사실상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실패가 확인된 상징적 사건이다.

  여하튼 전면적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장은 무한 경쟁에 돌입했고, 그것의 최종 결과는 ‘승자독식’ 사회이다. “the winner takes it all" 의 결과는 당연히 심각한 양극화이다. 이제 10:90의 사회를 넘어 'Occupy Wall Street'에서 보았듯 1:99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승자독식의 구조는 우리나라에만 특유한 현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세계화가 완성된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까지 이 잔인한 구조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독 『88만원세대』가 세대 간 경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승자독식 체제가 아무런 완충 지대 없이 그대로 국가 구성원 개개인을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막 경제 체제 안으로의 편입을 준비하는 20대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86세대와 특히 유신세대는 IMF 사태 당시 이미 실직의 피바람을 겪었지만, 그 당시는 아직 재기의 기회가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10년 동안 승자독식 구조가 단단해져감에 따라, 장벽은 높아지고 재기는 물론 최초 진입조차 힘겨운 시대를 맞이했다. 20대가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할 시기에 10:90 혹은 1:99의 구도가 완성 되어 버린 것이다.

 

  『88만원세대』가 386세대를 비판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 ‘완충지대’ 에 있다. 완충지대의 마련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할 386세대가 오히려 장벽을 높이고 경쟁을 격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386세대의 상징인 노무현 정권에 있다. 참여정부는 ‘선택과 집중’ 을 경제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 독과점을 강화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또 하나 386세대의 과오는 사교육 광풍에 있다. 인질 경제라고 할 만큼 사교육은 10대를 인질로 잡고 부모들의 경제력을 고갈시키고 있다. 386세대가 사교육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들이 가장 근거리에서 IMF의 칼바람을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원이나 대리, 기껏해야 과장 초년 차 정도에 IMF를 맞은 386세대는 명예퇴직의 1차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386세대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 문제와는 달리,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개인의 각개 돌파를 선택했다.

  386세대가 더욱 역설적인 이유는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전두환 정권의 교육정책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은 세대라는 사실이다. 딱 386인 나 역시 한 번도 사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학원은 전면 금지되었고, 몰래 받는 극소수의 최상위층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어떤 과외도 받을 수가 없었다. 부모들의 경제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딱 그 386세대가 부모가 된 지금, 어떤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제1 조건은 부모의 경제력이 되어 버렸다. 부가 세습되듯, 학력 또한 세습되고, 신분은 고착화 되어버렸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좋았던 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들은 경제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교육에 매달린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버는 족족 사교육비로 헌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의 결과는 뻔하다. 가난한 사람이 전부를 다 쏟아 붓는다 해도 부자들을 따라 갈 도리는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멈출 수가 없다. 국민 경제가 사교육에 매몰되어 버렸다. 그 결과 정작 자신들의 노후 대책은 거의 전무하다. 이제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먼저 그만둘 수가 없다. 죄수의 딜레마에 걸린 것이다. 개미지옥이라고도 하는데, 먼저 멈추는 자가 제일 먼저 먹히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승자독식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완충지대를 마련하고 있다. 일본은 연공 서열제로 세대간 경쟁을 약화시키고, 미국은 법원이 보호하고, 스웨덴 스위스 등의 유럽은 국가가 나서서 20대의 경제적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의 체제가 만든 승자독식 구조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유럽에서 심상찮게 일어나고 있는 네오파시즘, 일본의 넷우익, 미국의 그칠 줄 모르는 인종차별주의 등은 승자독식 구조의 패자들이 발산하는 광기어린 분노와 절망의 산물이다.

 

 

  나는 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 한 세대간 경쟁이건, 1:99로 표현되는 계급간 적대이건, 그 어느 것도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균열의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구멍만 틀어막는다고 무너질 건물이 멀쩡히 서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그렇게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88만원세대』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장 큰 희생양에 주목하면서, 20대에 덧씌운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암울한 세대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상대적으로 386세대에 너무 많은 책임을 돌려 버렸다. 그것은 한 세대가 과오보다 더 많은 질책을 받는다는 억울함의 측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위기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게 만드는 의도치 않은 전도를 야기한 것에 있다.

  실제로 얼마 전 공저자 중 한 명인 우석훈은 이 책의 절판을 선언했다. 자신이 해법으로 제시한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에 대해 20대가 엉뚱한 응답을 한 것에 대한 분노를 절판으로 표출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88만원세대』는 바리케이드를 치라고만 했지, 정작 바리케이드를 칠 적대의 전선에 혼란을 가져다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20대는 바리케이드 대신 386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며, 더욱 더 토플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386은 적개심의 대상일 순 있지만, 바리케이드를 칠 진정한 적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가 쳐져야 할 자리는 이 책이 해법을 제시하면서 전제조건으로 내 건 바로 그 자리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저자들은 3가지 제약조건을 규정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방정식의 변하지 않는 상수 같은 것이다.

  첫째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 둘째는 세계화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의 조건이라는 것, 세 째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능했던 포디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포디즘 시대는 말하자면 자본도 노동도 웬만큼 행복할 수 있었던 시대로 그려진다. 진짜 그 시절이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국이 하는 세계 시장의 하청 역할을 우리가 해내던 시대였다. 대량생산에는 반드시 대량소비가 필요한데 이 소비자는 다름 아닌 노동자들이다. 기업은 선의에서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생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정도의 급여를 지불해야 했고, 그 돈으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생산품을 구매함으로써 그 돈을 다시 기업에 돌려주며 경제를 선순환시켰다. 그런데 해마다 냉장고를 바꾸고 TV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성장한 세계경제는 더 이상 포디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첫 째와 둘째 역시 어쩔 수 없는 제약 조건인 것일까?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꿈꾸는 것, 그것이 시작이 아닐까?

 

 

  여하튼 이 글은 독서회의 발제를 목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니, 마지막으로 『88만원세대』가 제안하는 해법을 간단히 짚어 보겠다. 위의 3가지 제약조건 아래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이 물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실행할 수 있고 그 만큼 현실성이 높은 것들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라는 말을 한 것뿐이다.

 

  첫 째는 사교육 폐지와 대학의 국유화이다.

  두 째는 노무현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정책을 폐기하고, 정규직화 유도 등의 승자독식 구조 완화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다.

  세 째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보호하고 대기업의 공룡화를 제제한다.

  네 째는 알바시장의 청소년 노동자를 보호한다.

등등의 세부적인 사항들이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 의해 암울한 예언서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언제나 불길한 예언은 적중률이 높은 편이다.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 어떤 해법도 실행하지 않고 그대로 이 구조가 정착되면 미래는 어둡기 짝이 없다고 예언했다. 6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어두운 긴 터널의 어디쯤에 와있는지도 가늠하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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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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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책을 ㅠ.ㅠ....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은 독서회에 가입했을 때, 이미 회원들이 읽고 있던 책이다. 매주 선정된 책과 별개로, 반년 정도를 잡고 조금씩 함께 읽는 책이라고 했다. '다산'만 해도 아득한데, '지식 경영법' 이라니... 반년이나 손때를 묻혀야 하는 책이니 빌려 볼 수도 없고, 책을 주문하면서도 울며겨자먹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의외로 흥미롭다. 한꺼번에 읽으면 지치겠지만, 1주에 2~30쪽 정도라 분량도 적당한데, 뜻하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오늘 읽은 대목은 '19강. 단호하고 굳세게 잘못을 지적하라' 와 '20강.근거에 바탕하여 논거를 확립하라' 이다.

 

이 책을 두고 어떤 회원은 석사 논문을 쓸 때 지침으로 삼았으면 참 좋았겠다는 말을 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책은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 가에 관한 방법론이다. 전체 10강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강은 5개의 목으로, 각 목은 4개의 결로 세분되어 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10강 50목 200결 체제다. 

 

...

 

다시, 오늘 읽은 19강으로 돌아가서, '절시마탁법'. 

 

  「글로써 벗과 만나는 것은 옛사람이 즐거워한 일이다. 다만 근세에 학자들은 서로 모여 강할 때, 매번 알갱이 없이 칭찬하고 거짓으로 겸손해하며 하루해를 마친다. 갑이 온통 치켜세워 찬양하면, 을은 몸을 받들어 물러선다. 다시 을이 두 배나 더 칭송하면 갑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겸양한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실지에는 절시마탁하는 보탬이 없다. 」

 

그림이 그려진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 겸양하고 매우 흔쾌한 듯 한데, 지나치게 가식적이다. 정약용은 여기에 돌을 던진다.  벗의 유익함은, 서로 칭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데 있다고 한다. 얼마나 무자비하냐하면 상상만해도 끔찍할 정도다.

 

"마땅히 돌침으로 뼈에 침놓듯이 어리석고 게으름을 경계하고, 쇠칼로 눈동자의 백태를 깍아내듯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여기엔 관계의 불평등이 있다. 엄마가 공부 못하는 자식에게 '잘한다, 잘한다', 엉덩이 살살 두드려 가며 어떻게든 공부 좀 시켜볼까 하는, 그런 종류의 냄새가 난다.  턱도 없는 일에 칭찬을 해도, 고래니까 춤을 추지 사람이면 반발이 먼저 생길 수 있다, 나를 진짜 바보로 아나..뭐 이런.

 

여하튼 다산의 교훈은 인정사정 두지 말고 논쟁하라는 것. 논쟁은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두고 하는 것이다. 나의 논지가 공격받는 것이지 내 인격이 공격받는 것이 아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쌍방히 온전히 승복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도 독서 토론이라도 할라치면, 누군가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말하기가 괜히 미안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다산이 옳다!

 

 

이건 우리 회원이 직접 만든 컵케잌 ^^ 보너스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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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우 2013-09-1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 이 책 읽어 봤어요, 아마 대학교 졸업반 무렵 어느 즈음인 것 같은데, '지식경영법'이라는 책 제목에 약장수의 향기를 읽었으나 내용은 꽤 그럴 듯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은 상식적인 얘기인데, 정약용 선생께서 옛 한문의 구문을 이용하여 설명하니 무릎을 탁 치고 말았더랬죠,,, ㅎㅎ

말리 2013-09-1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 지독한 OO . 사람들이 뭐 그러고 읽는답니다. 넘 깐깐해서 자식들 미치겠다고 ㅋ
 
고흐의 편지 1 펭귄클래식 112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정진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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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작품에 감수성이 거의 없는 나는 자연히 ‘고흐란 사나이’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속 가사를 통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다는 정도를 기억할 뿐이었다.

  군산으로 내려온 지 석 달, 시립도서관을 통해 주부독서회에 가입했다. 회원들은 열성적이고 분위기는 따뜻했지만, 매주 1권씩 예정된 7월의 독서목록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혼자라면 절대로 읽지 않을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릴없는 객지에서 외롭기 보다는 독서 취향에 변화를 주는 쪽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었다. 나는 <고흐의 편지>를 읽었다.

 

 

  펭귄클래식 시리즈로 발행된 <고흐의 편지>1,2는 고흐가 쓴 칠백 통 이상의 편지 중 100여 통을 선별하여 싣고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그림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화가들에 대한 비평 등, 그림에 문외한인 내게는 사실 이 많은 편지들이 따분하고 좀 지루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읽었던 것은, 책을 읽으며 생긴 몇 가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도대체 고흐가 어떻게 미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지 속의 고흐는 정말이지 너무너무 멀쩡할 뿐 아니라 너무너무 건강하기까지 하다. 가난한 농부들에 대한 깊은 애정,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 고난을 헤쳐 나가려는 강인한 의지, 속물적 인간에 대한 혐오... 고흐의 어떤 문장, 어떤 사유 속에도 광기의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현실을 도외시한 천재적 예술가의 몽상이나 망상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고흐는 화가 조합 같은 것을 만들어 화가의 권익과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아무리 가난에 시달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좇긴다 할지라도 이런 사람이 미쳐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편지의 어디쯤에나 고흐의 광기가 흔적을 나타낼까 호기심에 이끌렸다.

  그러나 고갱을 만나 두 달을 함께 싸우며 살던 고흐가 귀를 자른 후,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지만, 사실 고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미치광이’는 아니었다. 고흐의 광기는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 질환이 아니라 신경과 질환이라 할 수 있는 간질 때문에 나타난 발작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고, 환각을 일으키고, 자해를 하지만, 발작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고흐’로 돌아왔다. 그의 사색과 언어, 그 어디에도 광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편집자가 선별한 100여 통의 편지만으로 그의 상태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고흐의 편지> 속의 그는 결코 광인이 아니었다.

 

  두 번째 나의 호기심은 동생 테오에게 있었다.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 대부분은 ‘돈’ 이야기로 끝난다. 화가로서의 꿈을 펼쳐 보이다가도, 동생 테오에게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도, 심지어는 세상눈에 휘둘리는 테오의 세속적 태도를 꾸짖으면서도, 고흐는 언제나 동생 테오에게 모든 경제적 짐을 떠맡겼다. 물감이 필요하다, 종이가 떨어졌다, 모델료를 지급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 식사량을 조금 더 늘여야 겠다 등등... 동생 테오는 형의 끊임없는 요구들을 10년이나 들어주었다. 심지어는 테오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형은 여전히 동생 테오를 의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테오가 마지막까지 지고 가야했던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남았으니, 형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이었다. 동생 테오는 형의 죽음에 대한 가책으로 동분서주하다, 형이 죽은 뒤 6개월 만에 쓰러져 죽었다.

  내게는 고흐 자신 보다 동생 테오의 죽음이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688통이나 되는 형의 편지에 대한 테오의 답장이 너무 궁금했다. 테오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애정으로 혹은 어떤 애증으로 형 고흐를 10년이나 뒷바라지 했던 걸까? 십년의 세월 동안 무시로 찾아왔을 갈등과 고뇌를 어떻게 극복해 냈던 걸까? 어쩌면 <테오의 편지>는 한 인간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분노에 대한 자기 고백은 아니었을까?

 

  세 번째로 나의 관심을 붙들어 주었던 것은, 삶에 대한 고흐의 깊이 있는 사유와 진실한 행위이다.

  고흐는 아버지와 끝없는 갈등을 겪었다. 그는 ‘나 자신을 찾았는데, 내가 바로 개야’라고 한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끼고 있어. 두 사람은 커다란 털북숭이 개가 젖은 발로 기를 쓰고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꺼림칙해 하듯이 나를 집에 들이지 않으려 하지.”(p322) 그러나 고흐는 스스로 개가 되는 것이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삶 보다는 낫다고 오히려 동생을 질타한다.

  “나는 너한테, 내가 이른바 개 같은 길을 택하고 있고, 그런 개로 남아 가난하게 화가가 될 것이고, 자연 속에 사는 인간이길 원한다고 말하는 거야. 머릿속이 항상 이것을 지키고 저것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찬 사람은, 그런 것을 지키느라고 정말이지 자연에서 멀어졌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살다가 보며 누구든 흑백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돼버리기 십상이지. 원래 생각하고 믿던 자신과 완전히 딴판이 되는 거야. 예를 들어 볼까? 지금까지 너는 가장 고약한 의미에서 사내로서의 열등함을 두려워하고 있지. 왜 네 영혼 속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꺼뜨리고 죽이려 드는 거지? 그래.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 될지도 몰라. 혹시 별 볼일 없어지진 않을까? 왠지 알아? 그건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에 복종하고 순응하면서, 세상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 절대로 맞서지 않고 대중 여론을 따르기 때문이야! (이 멍청아!)”(p328)

  고흐는 경제적 삶을 전적으로 동생에게 의존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절대로 꺾지 않는다. 어쩌면 동생 테오가 세상에 ‘복종하고 순응하면서,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고흐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는데도 고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혹은 뻔뻔하게 동생을 멍청이라고 질타한다.

  고흐는 그림을 시작한 이후, 늘 인물화가가 되기를 원했다. 모델료가 없어서 정물이나 풍경을 그려야 할 때도 많았지만, 고흐의 관심은 늘 사람, 가난한 삶 속에 거칠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있었다. 고흐는 사람을 사랑했다. 사촌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이 “안돼, 절대로 안돼.”라는 말로 단호히 거절당한 이후 고흐는 거리의 여자 시엔을 사랑한다. 이 문제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지만, 고흐는 결코 시엔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나 나나 둘 다 함께 걸으며 짐을 나누는 불행한 인간이지. 바로 그렇기에 불행이란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고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게 되는 거야.”(p231) 시엔과의 관계가 끝나고, 동생 테오 역시 거리의 여자와 한때 사랑에 빠져 비난받을 때, 고흐는 이렇게 썼다.

  “너도 나도 차갑고 무자비한 길에서 풀이 죽고 슬픈 여자와 마주쳤어. 그러고 너나 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인간적 양심을 따랐지. 이런 만남은 마치 계시와 비슷해 보여. 최소한 그 창백하고 슬픈 모습에서 어둠 속에 떠오르는 에케-호모를 연상시키기도 하고..”(p281).

  에케-호모란 “원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본티오 빌라도가 한 말(요한 19 : 5)” (다음 백과사전)로서 15~17 세기 서구 미술의 주요 주제였다고 한다. ‘차갑고 무자비한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풀이 죽고 슬픈 여자’ 에게 고흐는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고흐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늘 책 읽기를 권유했다, 빅토르 위고나 디킨스 등등. 고흐는 천재적 광기에 사로잡혀 하루 밤에 걸작을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창백하고 슬픈’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거칠고 투박한 ‘삶’의 모습을 꼼꼼히 담아내는 사유의 화가였다. 고흐는 해바라기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언제나 ‘감자 먹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한 ‘농촌 생활화가’ 이고자 했다.

 

  1890년 7월 27일, 권총으로 자신의 복부를 쏜 후, 이틀 만에 빈센트 반 고흐는 죽었다. 그의 영원한 지원자였던 동생 테오 역시 6개월 뒤 형의 뒤를 따르듯 죽었다. 질 떨어지는 물감, 값 싼 화폭, 거친 음식조차 늘 궁핍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지금 경매시장의 가장 값비싼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의 <해바라기>는 500억이 넘는 돈에 낙찰되어 일본의 어느 전시관에 결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란 노랫말로 남아있다.

  광인 아닌 광인으로, 불행 아닌 불행 속에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가 있었고, 그는 10년 동안 897점의 그림을, 18년 동안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688통의 편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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