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세월호 의인 김동수씨'가 자해했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잊고 있던 세월호가 다시 돌아왔다. 세월호에 화물차를 싣고 승선했던 김동수씨는 소방호스로 학생 20명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도 못했다.

 

"다 보상받고 해결됐는데 왜 그때 일을 못 잊느냐는 사람들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면 그 학생들이 생각나고, 창문을 보면 세월호 창문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 일을 쉽게 잊겠어요. 사는 것이 너무 비참해요.”

 

어떤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다 보상받고 다 해결되었던가 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다음 달이면 세월호 1주기가 돌아오니까. 그만하면 잊을만한 시간이긴 하다. 충분히 잊어야 했을 시간이다. 그런데 세월호 생존자들에게도,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에게도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무엇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것도 없다. 제대로 책임진 사람은 있었던가.

 

사람들은 잊으라고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긋지긋하니 잊으라하고,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잊어야 한다고 걱정스레 말한다. 맞다. 잊어야 한다. 당사자들도 우리 국민들도 이제 세월호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귀를 틀어막고 입을 굳게 다물고 열심히 살면 잊히는 걸까? 기억을 꼭꼭 눌러 어둠 속에 묻으면 잊을 수 있는 걸까?

 

 

이번 주 우리 독서회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우리는 죽음을 떠나보내는 방식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했다. 벨기에 작가 브룩호번의 <쥘과의 하루>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알리스는 아침에 일어나 남편 쥘이 돌연사한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남편을 곧바로 장례라는, 공적 의례에 넘겨주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떠났지만, 한 평생 묻고 살았던 남편의 외도와 아이의 죽음, 그 한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한만 풀어 줄 대상 없이 덩그마니 남았다. 그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한 쥘은 알리스에게 영원히 되돌아 올 것이다. 알리스가 죽은 쥘과 일상처럼 하루를 지낸 것은 쥘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다. 쥘을 잊기 위한 알리스 식의 의식이다. 알리스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보낸 편지를 꼼꼼히 기억해 낸다. 기억하기도 싫을 그 편지를 한자 한자 되살린다. 죽은 남편 옆에 앉아 맨 먼저 알리스가 했던 일이 남편이 사랑했던 여자를, 남편의 배신을 생생히 되살리는 것이란 사실이 처음에는 너무 의외였다. 사랑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라 영원히 묻어두려 했던 남편의 외도를 찬찬히 되돌아보는 앨리스가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알리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도였다. 쥘을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기억 속에 억압했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오므로.

 

장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영원히 잊기 위한 마지막 기억이다. 망자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지 않도록 말이다. 수많은 민담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모두 단 하나의 소원을 가지고 돌아온다. 다시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다. 저승으로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한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귀신 이야기는 결국 산자들의 두려움이다. 어떤 죽음에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있을 때, 죽은 사람의 명예가 손상되었을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한다. 그 죽음은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어느새 되살아난다. 억압하면 할수록 되돌아온다. 이것이 귀신이나 유령 같은 허황된 이야기에 아직까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억압된 기억이 귀신을 만들어낸다.

 

김동수씨가 지금도, 창문에 매달린 아이들을 보는 것은 그 아이들의 죽음이 여전히 의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당사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300명이 넘는 목숨이 한꺼번에 물속에 가라앉은 그 죽음을, 아직 살아있는 목숨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면서도 그대로 죽어가게 했던 그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영원히 보낼 수 있을까..

 

거기다 날이 갈수록 세월호에 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폄훼가 난무한다. 우리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미친것처럼 날뛴다. 그것을 단순히 어린 아이들의 철없고 위험한 유희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상대할 필요도 없다고? 그 바탕에는 어른들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억울하게 죽는 목숨이 어디 그뿐이냐고. 서둘러 덮으려는, 재빨리 잊으려는 그 마음들 위에 아이들의 위험한 장난이 미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장난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장난으로도 그런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는 단호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 한 세월호는 두 번 세 번 죽음을 되풀이 할 것이고, 우리는 그 죽음의 기억에서 놓여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독서회는 다음달에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기로 했다. 올해 1월에 발간된 이 책은 작가들이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을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읽기가 힘들 것이다. 나도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구매를 미뤄왔다. 오랫동안 우리 집 근처 대형마트에는 노란 깃발들과 함께 유가족들의 편지를 판넬로 전시했다. 오다가다 잠깐 서서 조금만 읽어도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혔을 이 책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왜 이 고통을 되살려야 하는지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를 진정으로 잊기 위해서라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생존자들과 희생자의 가족들은 여전히 극한의 고통 속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 고통의 천분의 일을, 만분의 일을 알 수 있을까... 김동수씨는 화물차를 잃고 생계마저 막막하다고 한다. 그들의 고통은 세월호가 제대로 해결되어야, 아니 어느 정도라도 납득이 되어야, 그나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도 세월호의 상흔에서 놓여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억하기일 것이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독서회는 십여 명의 작은 모임이지만, 구석지고 작은 곳에서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세월호가 기억 아래 억압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세월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서로 알리면 좋겠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백만부가, 천만부가 팔린다면 그것이 그대로 해일 같은 여론이 되어 정부를 압박하고, 위험한 욕설질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회원들도 이 책만큼은 사서 읽기로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판매 부수가 그 자체로 국민의 힘을 보여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더불어 <눈먼 자들의 국가>도 함께 구입하겠다는 회원들도 많았다. 이 책은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와 가을호에 게재된 12명의 작가들이 쓴 세월호 추모 글을 모은 것이다. 이 두 책과 함께 어제 나는 <세월호를 기록하다>도 주문했다. 일주일 전에 출간된 이 책은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을 기록한 책이다. 세월호 사건을 다시 정리해 보기에는 딱 알맞은 책이 될 것 같다. 띄엄띄엄 뉴스로만 들었던 재판 내용 이외에 어떤 진실들이 드러났는지 혹은 어떤 조작과 은폐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볼 계획이다. 마침 택배 아저씨가 곧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잠시 후  벨이 울렸다.)  

 

 

*이글은 독서회 카페에 올린 것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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