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은 독서회 책을 표로 정리하다, 고전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해 보았다. 고전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시대상황을 가장 잘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씩 읽었던 고전들을 주욱 연결해 놓으면, 그 자체가 훌륭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가령 19세기 몇몇 고전들을 이으면, 그 속에 프랑스 혁명사가 그대로 녹아있다. 그런가 하면 동시대의 작가가 전혀 다른 시대상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오스틴의 소설에는 상류사회의 화렴함이, 디킨스의 소설에는 빈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있다. 두 작품이 동시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주로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책도 있고, 직접 읽지 않은 것도 있다. 방법서설 같은 것. 근대사상에는 워낙 중요한 책이라, 이정표로 삽입했다. 서양 근대에 유독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평등과 자유개념, 국민국가, 개인주의, 합리주의, 실용주의....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서구 근대사상에 기반했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대체로 그런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서 서구근대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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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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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 조 사코

  1) 지중해 작은 섬국가 몰타에서 태어난 미국인

  2) 역사, 특히 팔레스타인의 역사에서 지은이의 국적은 그의 세계관과 함께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됨. 극한 대립의 땅에 대한 중립적 시선은 불가능하기 때문.

  3) 충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가급적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는 평

 

2. 시기

  1) 1991년 12월과 1992년 2월, 두 달간의 취재 후 집필 

  2) 1차 인티파다(1987년 12월 ~ 1994년 5월)가 사그라들 무렵

  3) 출간 배경 : 9개의 시리즈물을  약 10년이 지난 2001년 한 권의 책으로 엮음  

 

3. 주요 방문 지역

  1) 입국 경로 : 카이로 → 시나이 반도 → 팔레스타인 입국

  2) 예루살렘 → 요르단강 서안지구 (웨스트뱅크) → 가자지구 → 텔아비브

 

4. 주요 내용

  1) 1967년 불법 점령지인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의 실태 : 실업, 시위, 탄압, 통금, 투옥, 빈곤

  2) 19948년 추방과 학살에 관한 증언

      이스라엘 건국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인 추방 및 학살, 재산 몰수 

      귀환권은 한 번도 협상 대상이 된 적이 없음 :  팔레스타인 민중이 협상을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

  3)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과 정착민의 만행

      웨스트뱅크의 2/3 점령, 강제 퇴거, 가옥 파괴

  4) 안사르 감옥과 고문에 관한 증언

  5) 인티파다

      가자지구 난민촌에서 발발

      투옥을 자랑스러워하는 소년들

      여성 인권의 문제와 히잡

  6) 팔레스타인 경제 파괴

      팔레스타인인의 토마토 경작 방해 : 과다한 세금, 물부족, 운송 지연

      올리브 나무 절단 :인티파다 동안 12만그루 절단

      이스라엘의 최하층 프롤레타리아

  7) 운르와 UNRWA : UN팔레스타인난민기구

      난민촌, 학교, 병원 등 지원 턱없이 부족

  8) 텔아비브(이스라엘 수도)의 이스라엘인들의 시각

 

5. 말, 말  

  1) 시온주의자들의 구호 : "다음해에는 예루살렘에서!"

  2) "땅없는 사람에게 백성없는 땅을"

  3) "팔레스타인 민족은 없다."

  4)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은 평화와 토지를 바꿀 마음이 없다"

 

6. 덧붙인 글 : <팔레스타인 역사와 분쟁> 최진영 

  1) 성서에 근거한 이슬라엘의 소유권 주장 (BC 2000년 경?)

      팔레스타인 = 필리스틴인이 살던 땅 = 가나안 (이스라엘, 가자, 서안지구 및 폭넓게는 골란고원, 레바논, 시나이반도, 홍해지역까지) 

     창세기: 하느님이 가나안을 영구 소유지로 약속 , 이른바 약속의 땅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했다 유대국 멸망 이후 디아스포라(BC 586년)  

  2)  로마지배 (1세기) → 아랍 이슬람 지배 (7세기 경) → 셀주크 및 오스만 투르크 지배 (10세기~19세기)   → 영국 위임 통치 (1917년)

  3) 7세기 이후 1400년 간 아랍 무슬림의 나라

  4) 1948년 이스라엘 건국비화 : 영국의 이중 약속

      아랍인 : 대 오스만 투쟁을 대가로 아랍 독립국 약속

      시온주의자 : 벨푸어 선언으로 유대국가 약속

      분쟁은 민족간의 대립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로 부터 비롯

  

7.  한겨레 21의 현 팔레스타인 정세 분석

   3차 인티파다의 징후들 : <제국주의의 균열 이스라엘의 발악>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77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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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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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반쯤 읽었는데도 재미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다 읽나 한숨이 났다. 좋은 책이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집중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슬렁슬렁 살았다 해도, 중년으로 보일 정도가 되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들이 꽤 되기 마련이라, 대부분 아는 내용들이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하숙촌에는 이름이 거창한 만화방들이 몇 군데 있었다. 또렷이 기억나는 이름은 집현전과 만화궁전. 24시간 만화방이었는데, 나는 가끔 등굣길에 기어들어가 해가져서 빠져나오곤 했다. 그때 ‘만화광장’ 이라는 월간 만화잡지가 굉장한 인기였다. ‘만화광장’의 꽃은 단연 허영만의 <오! 한강> 이었다. 들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오! 한강>은 안기부의 요청으로 그린 반공만화라고 했다. 일제강점 말기부터 80년 오월 광주까지, 주인공 강토의 파란만장 인생사의 끝을 놓고 보면 친공이랄 수는 없지만, 이런 것이 반공만화? 우리는 안기부의 뒤통수를 멋지게 후려갈긴 허영만에 환호하고, <오! 한강>에 열광했다. 그 후 ‘만화광장’이 폐간되었는데 (일시 정간이었는지, 폐간이었는지, 그 이후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 한강>때문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오! 한강>은 안기부가 선전용으로 기획했지만, 그 기획 의도의 촌스러움과는 정반대로 80년대 정치만화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이념을 별개로 한다 해도, 작품 자체만으로도 엄청 재미있고 잘 만들어진 만화였다.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책이다. 안기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지만, 이 책 역시 이를테면 계도 혹은 홍보의 목적으로 쓴 책이다. 아홉 가지 영역의 인권을 다루고 있는데, 쉽고 흥미 있게 다가가기 위해, 다양한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고 있다. 읽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이제 워낙 흔하기도 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라 일반적 독법으로 영화를 풀기 때문에 구미가 그다지 크게 당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물론 좋은, 혹은 선한 책이다. 아쉬움이라면, 좋은 책이니 더욱, 탄탄하고 짜임새 있게, 긴장감 넘치게 쓰였다면 하는 것이다.

 

삼분의 이 정도 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8장과 9장은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 9장 제노사이드 편은 더 그랬다. 중앙아프리카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벌어진 인종청소에 관한 사실들은 내가 모르던 것들이다. 간혹 르완다에 관한 단신을 들었던 기억은 나지만, 너무 먼 나라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던 선입견, 후진국의 미개한 종족 간의 분쟁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아프리카 종족들 사이의 학살전이 맞지만, 거기에는 벨기에와 독일의 과거 식민통치가 그 배경원인이라는 진실이 덧붙여져야 한다. 이 비극의 배후에는 서방세계의 제국주의가 있다. 영화 <호텔 르완다>는 유엔군이라는 명목으로 르완다에 들어온 서방국가들이 자국 국민들만 구해 나가고, 현지인들은 학살의 현장에 그대로 버려둔 냉혹한 ‘인권’ 의식을 고발한다. 그들의 인권은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 즉 서방세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권리인 것이다. 동물들에게 인권이 없듯 아프리카 현지인들에게도 인권은 없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언제나 인권을 떠든다. 북한의 인권이 어떻고, 중국의 인권이 어떻고... 고맙게도 그들에게 동양인들은 그래도 사람이긴 한 건가.

 

그런데 인권이 인간의 타고난 권리로만 규정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렇게 접근하면 인간 개개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식의 휴머니즘이 해법으로 제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권이란 사회구조와 결부되어 있다. 식민통치가 있는 한 식민지 원주민의 인권은 없다. 독재가 있는 한 그 국민들의 인권은 없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한 저개발국의 기아는 해결될 수 없다. 김두식의 한계도 여기에 있다.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지 통치는 잘 설명해 놓고도 결론은 이런 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매달 약간의 기부를 하면 충분합니까? 먹을 것을 줄여서라도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약간의 기부’와 ‘먹을 것을 줄여서 도우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리 많은 도움도 그저 ‘도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도움이기도 하지만, 잔혹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고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를 그 구조를 향한 진정한 분노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부추기는 갈등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중단시키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지젝이 말하듯 지구상 최고의 자선가 빌 게이츠는 한 편으로 그 어마어마한 빈부격차를 유발하는 장본인이다. 소로스 역시 그렇다. 그는 업무 시간의 반은 인도주의적 활동에 할애하지만 나머지 반은 금융투기를 함으로써 (바로 그 인도주의가 필요하도록) 빈곤을 만들어낸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p52 <폭력이란 무엇인가?>

 

김두식의 이런 시각은 5장 노동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설명한 후 비정규직으로 불안정성을 높이면 잘리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자본의 생각이 다음의 이유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불안정성이 외형적인 생산성을 높일지는 몰라도, 불안한 영혼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에는 혼이 빠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혼이 빠진 상품이 고객에게 감동을 줄 리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경제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면이 너무 많습니다.....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날로 행복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지고 양극화만 심화됩니다. p188” 날이 갈수록 경제가 악화되는 것은 상품에 혼이 들어있지 않아 사람들이 사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늘어가고, 임금이 낮아지는데, 혼이 들었건 넋이 빠졌건 어떤 상품이건 구매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순환이 가장 중요하다.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이 낮아지면, 단기간 자본의 이익은 증대하겠지만, 노동자 즉 소비자의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판매량 자체가 감소한다. 사고파는 흐름이 막히면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노름판과 마찬가지다. 큰 손이 싹쓸이를 하면 판은 끝난다. 고스톱을 칠 때도 개평이라며 딴 돈을 떼어주는 이유는 딴 놈이 착해서가 아니다. 고스톱 판이 돌아가려면 참가자 모두에게 일정액의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파산은 곧 소비자의 파산이다. 그것은 곧 자본가의 파산으로 이어진다. 물론 여전히 착취할 후진국이 존재하는 한, 원료는 싸게 사고, 생산품은 비싸게 팔 그런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자본이 쉽게 파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이 하나, 둘 손을 털면 자본도 끝장이다. 당장 눈앞에,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 아니라고 모른 척 하지만, 계산은 간단하다. 출산율 저하 운운하면서,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하느니 경제가 후퇴하느니 난리를 칠 때, 나는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일자리는 적고 일할 사람은 많아서 이 난리인데, 앞으로 기술이 더 발전하면 사람이 필요한 일이 더 적어질 텐데, 평균수명도 늘어나 일할 수 있는 연령도 훨씬 높아질 텐데, 왜들 문제라고만 할까? 사실 우리나라는 국토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많은 편이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와서 알게 되었다.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활동인구가 준다는 말의 진실은 일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생산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로봇이, 아무리 높은 기술이 저 비용으로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면 무엇할 것인가? 그걸 사 줄 사람이 없는데. 혹시 미래에는 로봇이 구매자가 될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소비자들의 목을 이렇게 옥죄이는 것일까?

 

 

여하튼.... 나도 훈훈하게 마무리 ;;

착한 책이고, 필요한 책이다. 특히 청소년들이 읽으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좀 더 폭넓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권감수성의 핵심은 ‘불편’이라고 한다. 불편해도 인권을 위해서라면 괜찮아. 좀 지루해도 인권을 위한,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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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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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를 다시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았는데, 올해 『투명사회』가 나오면서, 저자 한병철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자, 어느 회원이 제안을 했고, 『투명사회』보다는 『피로사회』가 읽기 쉽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2012년,『피로사회』가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던 여름 즈음, 나는 서점 간이의자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훑어보고 살까 했는데, 그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워낙 얇은 책이라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면역학에 빗댄 시작이 매혹적이었으나, 2012년 현재 우리사회와는 조금 엇나있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스스로를 닦달하며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자기 탓만을 하던 시기를 지나, 이미 구조의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2011년 9월의 ‘월가를 점령하라’를 통해 명시된 ‘99% : 1%’의 사회구조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1%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척할 수 없게 되었다. 알지 못했던 것, 알고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하필 미국에서, 그 경제 대국 미국에서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미쿡’ 사람들이 보따리를 안고 쫓겨나는 판에, 그깟 토익 만점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1%를 보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사회는 이미 피로사회를 지나 잉여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었다.

 

오늘 독서회 책은『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다. 다음 주가 『피로사회』인데, 회원들의 반응이 큰일이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단다. 『투명사회』보다는 훨씬 나은 편인데,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하지 않는 회원들에게는 너무 압축적이어서 힘든 것 같다. 한병철은 길게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대중에게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발제해야 할 지 고민이다. 처음에는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먼저 책 내용을 쉽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내가, 쉽게 가능할까? ;;

 

  

 

 

 

(이게 더 어려울까? ::)

 

 

 

피로사회란 한마디로 성과사회의 이면이다. 성과사회란 자기가 자기를 달달볶는 사회다. 이거는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일일이 지시하고 통제하는 시대는 지났다. 9시 출근 6시 퇴근, 눈치 볼 것도 없다. 오후에 느지막이 출근하든, 아예 집에서 뒹굴든 관여하지 않는 회사도 많다. 규율과 통제가 사라져 간다. 다만 성과만 있으면 된다. 이제 호봉제도 옛말이 된지 오래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우리 기업들은 급속도로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회사 오래 다녔다고 월급 많이 주는 시대는 끝났다. 성과만 좋으면 대리도 팀장이 되고, 연봉이 과장을 능가할 수 있다. 무능하고 연차만 높은 상사들은 눈치가 보여, 쪽팔려서 회사를 떠난다. 성과사회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성과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없다. 자기착취의 시대가 온 것이다.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를 직접 착취하지 않는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아이들을 닦달하는 부모의 방식도 ‘성과사회’ 적이다.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저자 김두식이 딸에게 한 말이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데 대학을 가지 못하면 평생 열등감에 빠져 살기 쉽다. 네가 그런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공부 안 해도 괜찮다.” 이렇게 세련되게 나오면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이제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열 받아도 욕할 대상이 없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내가 무능하고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자신을 몰아붙여야 한다. 탓할 대상을 잃은 분노는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내 속에서 곪아터진다. 우울하다. 하나의 일에 느긋하게 집중할 시간도 없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멀티태스킹이 기본이다. 성과사회의 우리는 모두 집중력결핍과잉운동장애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할 수 없다. 특별한 목표 없는, 그래서 성과도 없는 어떤 활동도 낭비다. 여가활동마저 전투적이 되어버린다. 등산을 좋아하면 100대 명산을 모두 정복해야 하고, 여행을 다니면 20대에, 30대에 꼭 가보아야 할 명소는 다 찾아다녀야 한다. 산에서도 뛰어다니고, 여행지에서도 녹초가 될 때가지 걸어야 한다. 책을 읽어도 일 년에 50권 목표를 세운다. 등굣길에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하고, 차를 몰며 일어 회화를 들어야 하고, 청소를 하면서 고전읽기라도 켜 두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가장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제레미 벤담처럼 우리 역시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계산되어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나 과부하하가 걸린 기계가 정지하고, 무리하게 뛰는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것처럼 과잉활동의 결과는 완전한 소진과 고갈이다. 피로가 몰려온다.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증상이다.

 

왜 우리 사회는 성과사회가 되었을까? 왜 자본은 더 이상 직접 착취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틀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자기착취의 원리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됨에 따라 착취의 방법도 발달했지만 노동자의 대응도 강력해졌다. 규율과 통제에 의한 강제적 착취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런 방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노동자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성에 목매달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해졌다. 성과급이란 같은 시간을 일해도 그 실적에 따라 차등 대우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 동료는 더 이상 나의 동지가 아니라 나의 경쟁자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내가 가져야 할 몫이 동료에게 넘어간다. 그렇게 성과급제가 도입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면서, ‘만인(의 동료)에 대한 만인(의 동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피로사회』의 개요만 짚자면 대충 이렇다. 이런 정도는 한병철의 고유한 분석도 아니다. 차라리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져온 사회구조적 현상에 대한 많은 통찰들이 빠져있다. 아무리 자기착취를 해도 낙오할 수밖에 없는 승자독식 체제, 무한 경쟁 체제에 대한 해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목받았던 것은 20세기의 규율사회를 면역질환으로, 21세기의 성과사회를 신경증으로 해석해낸 그 독특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병철 스스로도 “이러한 예상 밖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운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 밝히고 있다. 특히 20세기와 21세기는 우리가 모두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시기다. 면역학에서 신경증으로의 변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이 모두 우리가 직접 겪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0세기는 면역학의 시대다. 면역반응이란 나와 이물질, 나와 타자의 투쟁이다. 면역학의 시대란 타자와의 대립의 시대다. 타자는 나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주인이 되지 못한 우리는 복종의 주체가 된다. “~해서는 안된다” 혹은 “~해야만 한다” 라는 금지와 강제에 따라야만 한다. 규율을 어기면 범죄자가 된다. 규율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광인이 된다.

 

면역치료는 나를 침입하는 이물질을 길들여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다. 예방주사는 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을 우리 몸에 집어넣는 역발상이다. 약한 균을 미리 상대해 본 우리 몸은 자체의 방어력을 갖추게 되고, 진짜 실전이 벌어졌을 때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다. 헤겔식으로 하자면 부정의 부정이다. 한병철은 헤겔의 ‘부정성’을 철학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투명사회』도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에 기초해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대표되는 투명사회는 긍정성 과잉의 사회이다.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이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 한병철의 생각이다. 부정성의 회복,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가 그가 주장하는 해법이다. (『투명사회』리뷰)

 

21세기는 신경증의 시대다. 세계는 하나다. 우리도 더 이상 단일민족이 아니다. ‘살색’이란 말이 용납될 수 없는 사회가 된지 오래다. 다양성과 차이의 시대, 관용이 제 1의 덕목이 되었다. 그런데 타자와의 대립이 없는 동질성의 시대,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평화롭고 행복할까? 함정은 긍정성이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거부하고, 버리지 못한 것들이 모두 몸 안에서 쌓인다. 소화불량이 되거나, 비만이 된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더 이상 복종의 주체가 아니라 성과의 주체다. 무엇이든 “Yes, we can." 할 수 없으면 낙오자가 된다. 낙오에 대해서는 외부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오롯이 나의 탓이다. 젠장! 내가 못난 놈, 내가 쓸모없는 놈이다.

 

적이 사라지면 오히려 무기력에 빠진다. 맹렬한 적의는 분노를 불타게 하고 삶은 활력을 띤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적에게 돌려진다. 환상 속에 살 수 있다. 저 놈만 없으면, 저것만 없으면, 한순간에 유토피아가 열릴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장애물이 제거되면 사라지는 것은 환상이다. 문제는 그대로다. 현실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그런데 해결방법은 없다. 적은 상대하기 쉽다.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을 구조 짓고 있는 틀은 알아보기도 힘들거니와 바꾸기는 더욱 어렵다. 그것은 자연처럼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적응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틀 속에서는 어떤 해답도 없다. 젠장! 울하다..

 

독일인들이 그렇게 쉽게 반유대주의에 빠져들었던 이유다. 삶의 피폐를 모두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유대인이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을 몽땅 차지했다. 유대인만 사라지면 자본주의 경제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빈곤과 퇴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는 유대인 탓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속되도록 유대인이라는 적을 독일인의 분노 속에 던져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진정 피로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는 사회인가? 이제 좀 지나갔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멘토 열풍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악착같은 자기계발과 자기착취 속에 기진맥진하면서도, 힐링 주사를 맞아가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친다.

 

그러나 한편에는 더 이상의 자기착취를 거부한 인생들이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란 승자독식의 사회이며, 1~10%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낙오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07년 『88만원 세대』가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 이후 최근에는 88만원 세대로 지칭되는 이들 세대 스스로가 자신들의 사회학을 생산해 내고 있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태섭의 『잉여사회』, 그리고 약간 다른 각도의 분석이지만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등이 내가 읽은 책들이다.

 

『잉여사회』에서 가장 가슴 아픈 구절은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이다.(리뷰) 나는 25년 전쯤에 입사원서 딱 두 장을 쓰고 취직했다. 그러나 이런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수십 수백 장의 자기소개서를 쓰고도, 겨우 계약직으로나 사무실 책상을 가질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구조적으로 많은 임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나 골라 쓸 수 있는 예비 노동자들이 항시 대기 중인 한 아무 문제도 없다. 여전히 많은 청춘들이 성과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자기착취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잉여사회다. 취업준비생의 사회는 잉여사회, 그것도 탈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잉여사회다. 애써 외면하며 “노력이 나를 바꾼다.”고 써붙여 보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처지가 바뀌지 않을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 신물이 난 청년들은 스스로 잉여를 선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잉여다. 우리가 병맛이다. 개콘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잉여들, 자신을 희화하며 차라리 즐긴다. 그 극단에 일베가 있다.

 

물론 우리사회는 여전히 성과사회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자기착취가 한쪽에서는 자기 희화가 일어나고 있다. 성과사회인 동시에 잉여사회이고, 자기착취인 동시에 자기 희화이다.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성과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해법은 ‘부정성’ 이다. 헤겔의 부정성, 니체의 ‘아니오’ 이다.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을 성과사회의 ‘과잉활동’과 동일시하여 비판한다. 생각 없는 활동의 연속은 천재 백치, 자폐적 성과 기계를 낳는다. 니체는 “활동적인 사람은 보통 고차적으로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고 했다. 멈추어 서는 부정성, 무위의 부정성이야말로 사색의 본질이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부정성의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한병철이 아렌트를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 인상이다. 아렌트는, 잘 모르지만 몇 권 읽은 책으로는, 행위와 노동을 엄격하게 구분 한다.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활동은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이지 행위가 아니다. 설마 아렌트가 돈 받고 하는 일은 노동, 자유롭게 하는 일은 행위 따위로 단순하게 구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다.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유이다. 아렌트는 노동이 아니라 사유와 행위를 주장했다. 한병철의 과잉활동은 그것 자체로 성과사회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다. 과잉활동을 굳이 아렌트의 행위개념과 무리하게 연관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하튼 과잉활동에 대한 무위의 부정성을 강조하면서 한병철이 가져오는 것은 ‘바틀비’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I would prefer not to ~" 로 유명세를 타면서,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한병철은 바틀비의 무위를 규율사회의 무감각과 동일시하며 기각한다. 사실 『필경사 바틀비』를 직접 읽어보면, 이게 뭐? 하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의 필경사인데, 맡겨진 일들을 하나씩 거부한다. 그는 항상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며, 긍정문을 써서 거부한다. 끝내는 모든 일을 거부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가라는 말도 거부하고, 감옥에 가서는 먹는 것도 거부하고, 죽는다. 그런데 짧고 어이없는 이 단편을 두고, 많은 철학자들은 찬사를 쏟았다. 들뢰즈는 “바틀비는 간장병과 위축증 환자이면서도, 실은 환자가 아니라 병든 미국의 의사, 메디슨 맨, 새로운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형제다.” 라 했다. 내가 바틀비를 처음 접한 것은 지젝을 통해서다. 지젝 역시 한병철과 마찬가지로 무위의 부정성을 역설했다. 이것저것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 조용히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과는 달리 바틀비를 그 무위의 부정성으로 보았다. 여기서 지젝을 설명하는 것은 복잡한데, 단순히 말하자면 이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틀 자체를 건드릴 때, 바틀비의 무위는 어떤 행위보다 파괴적인 전복이 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동시에 이제부터 “우리는 삼성의 주식을 사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라고 선언하면, 삼성은 일시에 파산할 것이다. 삼성의 주가는 삼성의 생산력 자체와는 관계없이 움직인다. 삼성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주가이지,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따위가 아니다. 혹은 “우리는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라며, 한꺼번에 모두가 현금을 인출한다면 금융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은행은 가상의 돈으로 움직인다. 은행에는 실제로 모든 예금을 인출해 줄 돈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삼성이 만들어 놓은 시장의 틀,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무너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죽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단순한 거부나 무기력, 무력함이 아니다. 목숨을 건 투쟁이다. 바틀비는 결국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가 무시무시한 부정적 힘이 되는 것이다.

 

한병철이 바틀비를 기각하는 데에는 성과사회에 대한 그의 대안이 다분히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부정성을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성과사회가 한병철의 말대로 자기착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현상일 따름이다.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와는 달리 외부의, 타자의 착취가 없다는 한병철의 주장은 틀렸거나 제한적이다. 성과사회에서는 아니 잉여사회에서는 구조 자체가 착취를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승자독식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무한 경쟁을 유발하며, 자기착취에 빠져들게 한다. 수레를 훔친 도둑의 이야기와 같다. 수레를 샅샅이 뒤져도 무엇을 훔쳤는지 찾지를 못했는데, 사실 그 도둑이 훔친 것은 수레에 실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수레 자체임이 밝혀졌다. 성과사회 안에서는 착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과사회라는 수레 그 자체가 착취이다. 스스로를 잉여로 칭하는 잉여사회의 우리 젊은이들은 그 속임수를 벌써 알아챘다. 그 수레를 되찾기 위해, 그 틀을 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성과사회를 사는, 잉여사회를 사는 우리의 과제이다.

 

구조의 착취에 눈을 감은 한병철의 결론은 그러므로 모호하다. 결론에서 그는 난데없이 나쁜 피로와 좋은 피로를 구분한다. 피터 한트케를 가져와 ‘부정적 힘의 피로’를 주장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한병철이 원하는 사회는 ‘오순절-사회’와 같은 피로사회다.(신자가 아니므로 이 비유는 더욱 절망적이다.)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가 무장을 해제하여 막간의 휴식과 평화를 주는, 그런 피로 사회다. 그의 피로사회는 긍정성이자 또한 부정성인데, 그래서 그런 부정성의 피로가 말 그대로 ‘막간’의 휴식 외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카프카의 말처럼 피로사회의 끝에 치유가 저절로 올까?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한병철 역시 돌고 돌아 성과사회의 그 많은 ‘힐링’ 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 뿐인가?

 

한병철은 재독 철학자다. 그는 독일사회와 한국사회가 본질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사회의 이 잉여들을 어떻게 설명하지 궁금하다. 처음에 나는 독일은 아직도 피로를 느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 오히려 부러웠다. 독일이 상황이 좋은 것인지 한병철이 일면만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도 『투명사회』도 우리사회와는 어딘지 어긋나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하튼 저자 소개에 의하면 한병철은 『피로사회』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피로사회 잉여사회 부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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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9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좋은 리뷰를 본 적 없는데 이 리뷰는 책보다 좋군요....

말리 2014-07-09 19:34   좋아요 1 | URL
무슨 말씀을 ^^ ;; 감사합니다.

말리 2014-07-10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기: 어제 '너구리'가 몰고온 열기에 컴터 열기까지 더해, 끙끙거리며 리뷰를 쓰다 지쳐 버렸다. <우울사회> 편의 건강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기록해둘 가치가 있는데, 힘이 빠져서 그냥 끝내버렸다. 조금 덧붙여 둔다. P112~113의 내용이다.

자본주의의 관심사는 좋은 삶이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심을 뿐이다. 삶은 어떤 가치가 아니라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다.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의 건강이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왜 건강해야 하는지, 건강하게 오래살아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생각은 사라지고, 건강 자체가 목적이 된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아감벤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울사회의 우리는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이다. ... 요즘 우리사회의 건강 열풍에 딱 맞는 말이다. 건강하게 오래살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이 알려지고 너나할 것 없이 따라하기 바쁘지만, 정작 그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사고는 전혀 없다.

말리 2014-07-1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글을 읽다가.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은 적은 없는데, 어떤 글에서 보게되든 놀랍다. 한 편의 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회원들에게 소개해주려고 여기 옮겨 놓는다.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제가 누더기 옷을 벗고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제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 옷을 힐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저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은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의 어깨나 벽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얼룩지니까요.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08 15:37   좋아요 1 | URL
자본주의는 좋은 삶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다만, 판타지를 제공합니다. 아메리카드림'이나 코리안드림처럼 말이죠.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열려 있지 않은 데 말입니다. 가짜 판타지를 작동시키고는 사람들이 그 목표를 향해 뛰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뛰죠. 문제는 그게 다람쥐집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다람쥐집 통을 돌릴 때 나오는 에너지로 먹고 살죠. 결국 희생은 ....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 / 행복한마음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주부 독서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책 선정이다. 스무명 가까이 되는 회원들의 입맛을 고루 맞추기는 불가능하다. 어떤 책이든 한쪽 구석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온다. 아~ 어려워!! 아~ 이게 뭐야!! 그러니 책 추천하기도 만만치 않고 해놓고도 신경이 계속 쓰인다.

전시륜의『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을 추천한 회원이 카톡을 보내왔다. "읽고나서 문자 주세요. 어떤 저자가 추천했길래 제안했는데, 읽고 나니 토론할만한 책인지 의문이예요... 저자의 단상들일 뿐이고...ㅇㅇ씨도 '쩝~'하는데, 바꾸는데 동의하신다면 그렇게 해볼까 싶어서요."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며 나중에 말씀드리겠다고 답했다.

 

이 책은 7월 첫째주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7월 마지막으로 순서가 밀렸다. 도서관에 책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중소도시에는 시립도서관을 비롯해 부설 작은 도서관까지 10여개의 도서관이 있다. 고전이나 베스트셀러의 경우 왠만하면 빌려 읽고 토론하기가 어렵지 않은 환경이다. 가끔 어느 도서관에도 없는 책일 경우, 담당사서가 신청해 주기도 한다. 이 책도 신청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나니 조금 미안했다. 신청해서 구비해 놓을만한 책은 아닌 것 같아서..

 

전시륜은 1932년 생이다. 6.25 때문에 대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중년 이후에는 글쓰는 일과 관련된 일을 했다고 소개되어 있다.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며, 1998년에 작고했다. 이 책은 저자의 말년에 쓴 글로 사후에 발간되었다. 육십대 노철학자의 인생 경륜담인 셈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철학' 이라고 할만한 내용은 사실 없다. 삶 속에 녹여낸 철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인생철학이라는 것이 토론할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 엄마, 삼촌, 고모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종류의 철학이다. 입담이 뛰어나지만 월간지의 인기 칼럼을 넘어서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토론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30년 전쯤의 아메리칸 드림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식인들이 어떻게 친미주의자가 되는지도.

히치하이커를 할 때, 차를 태워 주고 밥까지 사준 미국 청년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그리도 많은 외국인들이 반미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미국 사람들은 나그네에게도 호의를 베풀고 후대해 주는데, 수많은 신생국들이 미국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미국 유학생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반미 감정을 표현하는 사실에 대해 미국 청년 뿐만 아니라 저자 역시 난감해 한다. 심지어 그 유학생들은 미국 시민이 낸 세금으로 장학금까지 받아가며 공부를 하는데 말이다.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외국 유학생들이 진짜 미국을 모르고 귀국하기 때문이라고. 미국 가정을 방문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자신의 미국 가정 편력기를 나열하면서, 유학생들은 캠퍼스에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미국 가정을 방문하라고 권유한다.

저자를 비판하기 전에 참 해맑은 할아버지란 생각이 먼저 든다. 미국인 개인의 인간성 혹은 한 가정의 따뜻함을 곧 제국주의 미국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들 뿐이 아니겠는가.

마침 이번 주 독서회 선정작은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이다. 미군정의 발포로 촉발된 4.3 사건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아마 전시륜은 미국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한반도에 개입했다고 믿을 것이다. 그에게 4.3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수많은 신생국' 들이 왜 미국을 비판하고 항거하는지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비록 '무명' 이지만 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의 역사와 제국주의 정책에 그렇게 감감할 수 있을까? 나도 그 미국의 착한 청년에 못지 않게 궁금하다. 그리고 그 착한 미국 청년에게는 미국이 제3세계에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조금만 공부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메리칸 드림은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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