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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ㅣ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세계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단연 ‘프랑스 혁명’ 이다. 『식탁 위의 세계사』 에는 <빵-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오해들> 이란 장에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였는지, 케잌을 먹으라였는지, 하여튼 그 유명한 말이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 란 말을 소크라테스가 한 적이 없다는 것과 겉보기에는 비슷하다. 사실을 정확히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 관해 하필 해야 할 이야기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일까?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그런데 혁명은 언제 끝이 났을까?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20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프랑스 혁명은 어떤 관점에서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까지 보지 않는다 해도 혁명은 거의 100년 가까이 걸쳐 일어났다.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시대별로 몇 가지는 된다.
처음 혁명군이 바스티유를 공격했던 1789년의 이야기는, 당연히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오스칼과 앙드레, 앙투아네트와 페르젠 백작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지만, 혁명을 전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앙투와네트의 빵 보다 더 유명한 ‘목걸이 사건’, 삼부회의 소집, 운명의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공격, 그리고 해외 도피를 시도하다 붙잡힌 국왕 일가에 대한 처형까지, 그 많은 사건들을 나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보며 우리 역사보다 더 생생히 느꼈다.
그러나 혁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났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가 몰락하며 혁명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5년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를 위한 길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이 반혁명의 비극 또한 만화로 배웠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다. 홍세화가 추천사를 써주고, 공공 도서관에 비치될 만큼 좋은 만화다. 물론 김혜린의 순정만화답게 절절하게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단순히 한 사람 혹은 한 정파의 몰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중 권력의 몰락이자, 혁명 정신의 쇠퇴였다. 프랑스 혁명은 우리의 얄팍한 상식에는 뜻밖이게도, 국왕에게 권력을 빼앗겼던 특권층에 의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상징하듯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권력이 왕에게 집중된 절대왕정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상황이 악화되자, 특권계급은 왕을 도와주기 보다는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이에 굴복한 왕은 특권계급의 요구대로 삼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막상 판이 만들어지자 잽싸게 끼어들어 주도권을 거머쥔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러자 국왕과 대립하던 특권계급이 왕과 한 편이 되어 버렸고, 부르주아지들은 굴복하거나 민중에 호소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프랑스 혁명은 처음부터 민중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특권 계급 즉 귀족 계급이 왕의 권력을 나누어 먹기 위해, 그 다음에는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민중이 부르주아지들의 마지못한 선택으로 혁명에 끼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번 발을 들인 민중은 광범위한 대중 동원력으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발력을 발휘하며 혁명을 키워 나갔다.
‘평등, 자유, 박애’ 라는 혁명 정신만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프랑스 혁명은 순수한 열정과 순고한 가치로 찬연하게 빛나지만, 실상 혁명 세력은 내부에서 이권에 따라 분열되어 있고, 혁명은 늘 반혁명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굳건한 연대만이 혁명을 지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혁명의 각종 세력 중 로베스피에르 파가 가장 민중과 가까이 있으며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부르주아지들은 평등은 외면하고 사적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민중이 요구한 것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자유였다. 그러므로 테르미도르 반동은 민중이 혁명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분수령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과 함께 민중의 동력을 상실한 혁명은 대번에 기세가 꺾여 버렸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을 향해 굴러 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종결을 언제로 보느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종결된 것으로 보고, 1789년부터 1799년까지를 프랑스 '대'혁명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프랑스 혁명이라고 할 때는 이 기간을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로베스피에르에 관한 내용은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머리말을 참고했다. 빌려놓고 아직 본문은 읽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정말 어지럽다. 1789년 혁명이 시작되었고, 1792년 프랑스는 역사적인 공화국을 수립하였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을 거쳐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1804년에 결국 나폴레옹은 공화정을 폐지하고 제정시대를 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하고 프랑스는 다시 절대왕정으로 복귀한다. 이후 1830년 7월 혁명이 있었고,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으나, 부르주아 계급의 이권을 중심으로 한 이 7월 왕정은 민중들에게는 여전히 불만의 대상이었다. 1832년 다시 6월 봉기가 일어난다.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뒷부분에 나오는 그 유명한 바리케이드 전투의 배경이다. 그러나 6월 봉기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7월 왕정이 이어지다가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한다. 2월 혁명의 결과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을 선포하고, 제2 공화정이 시작되었으나 투표에 의해 당선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가 3년 후인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는 제2 제정 시대로 돌입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반복한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정국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책이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20년간 집권했고 1871년 제 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약 100년 가까이에 걸쳐 ‘혁명’ 만 세 번이 있었고, 공화정-제정-왕정-공화정-제정-공화정을 반복했다. 프랑스는 위대한 혁명으로 단번에 오늘날 같은 근대국가로 도약한 것이 아니다. 100년에 걸쳐 희망과 배신과 음모와 무엇보다 피, 죄 있는 자와 순결한 자를 가리지 않은 무수한 피를 요구했던 험난한 역사였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그에 비하면 차라리 순탄하다고 할 정도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실 억울했을 수도 있다. 영화와 만화, 소설, 전기 등 현대의 대중문화가 전하는 그녀는 우아하고 기품 있고 순수하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혁명의 소용돌이에 비극적으로 휩쓸렸을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녀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실로 그녀는 무죄인 걸까?
소설 『레미제라블』은 지루하다. 그러나 재미있다. 원작 5권을 1권으로 줄인
다면 분명 덜 지루하겠지만, 소설의 지루함만이 줄 수 있는 ‘잉여적’ 재미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지루할 틈 없이 사건이 연속되는 『28』과 『검은 꽃』이 왜 책을 덮는 순간 그걸로 끝나 버리는지, 어떤 점이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과의 차이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것들에는 고전이 갖고 있는 ‘잉여’가 없었다. 하품을 깨물게 하고, 책장을 건너 뛰게 하는 그런 ‘잉여’가 없다. 여관주인 테나르디에가 전사자의 주머니를 털며 보여주는 워털루 전투의 장면도, 꼬맹이 가브로슈가 파리의 뒷골목을 누비며 보여주는 민중들의 비참한 삶도, 미리엘 주교가 숲 속의 국민공회 의원 출신의 노인과 벌이는 논쟁 같은 것이 없다. 그런 잉여적 모습들이 없어도 레미제라블은 여전히 레미제라블이겠지만, 과연 고전이 될 수 있었을까 싶다.
말이 엇길로 새었지만, 『레미제라블』의 배경은 1800년대 초반부터 1832년 6월 봉기까지이다. 대혁명이 지나갔지만, 민중의 삶은 여전히 참혹하다. 빵 한 덩이,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빵은 앙투아네트의 빵이 아니라 아마도 장발장의 것일 텐데, 그 빵 한 덩이가 19년형이 되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민중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어린 조카가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장발장은 빵을 훔쳤다. 그렇게 죽어 가거나 가브로슈처럼 도둑질을 하며 거리를 유랑하는 아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레미제라블』의 초반부에는 미리엘 주교와 국민공회 의원을 지낸 노인의 매우 흥미로운 논쟁이 그려져 있다. 노인의 임종 소식을 듣고 숲속으로 찾아간 미리엘 주교는 국왕 루이16세의 처형과 어린 왕자(루이 17세)의 참상을 언급하며 국민공회의 잔혹함을 비판한다. 어린 왕자는 아무 죄도 없었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렇다고 한다. 왕자는 죄가 없다. 그리고 또 가난해서 죽어간 프랑스의 수많은 아이들도 죄가 없다. 그러나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민중의 편을 들겠다고. 민중이 훨씬 고통 받아 왔으니까.
「국민공회 의원은 손을 뻗어 주교의 팔을 잡았다. "루이 17세!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거요? 죄 없는 아이에 대해서요? 그렇다면 좋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겠소. 하지만 왕자에 대해서라면,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소. 카르투슈(1693~1721년. 파리 부근에 출몰했던 도적단의 두목. 산 채로 수레바퀴형에 처해졌음)의 동생은 단지 그의 동생이라는 죄만으로 그레브 광장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묶인 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려 있었소. 이 죄 없는 소년의 죽음은 루이 15세의 손자라는 죄만으로 탕플 성의 탑 속에서 죽어간 루이 17세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을 비유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카르투슈를 위해서요, 아니면 루이 15세를 위해서요? 어느 쪽을 위해 항의 하시는 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교는 이곳에 온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기묘하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국민공회 의원은 말을 이었다. "아! 당신은 비정한 진실을 좋아하지 않는구려. 그리스도는 그것을 좋아하셨지요. 그분은 채찍을 들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셨소. 불이 일 듯한 그의 채찍은 엄하고도 분명하게 진리를 말해 주었소.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태복음> 19장14절)' 외쳤을 때, 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소. 그는 바라바(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 대신에 용서를 받은 죄인)의 아들과 헤롯(잔학하기로 유명한 유태인의 왕) 왕의 아들을 대등하게 부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어요. 죄 없는 마음이 그대로 왕관이 되는 거요. 왕손일 필요가 없소. 누더기를 걸치고 있든 백합(왕가의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든 똑같이 훌륭한 것이오."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주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듭 말씀드리오만," 하고 국민공회 의원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루이 17세의 이름을 꺼냈소. 이 점에 관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싶소. 우리들은 죄 없는 사람들, 순교자들, 어린아이들, 신분이 높고 낮은 것에 관계없이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자는 거지요? 그건 나도 동감이오. 그렇다면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793년 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특히 루이 17세 이전 시대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오. 나도 당신과 함께 국왕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소. 당신이 나와 함께 민중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신다면." "저는 모든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하고 주교가 말했다. "평등하게 말이지요!" 하고 G가 외쳤다. "만약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민중 쪽이어야 할 것이오. 민중 쪽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으니 말이오."」
어린 왕자, 루이 17세는 왕자라는 이유로 탑에 갇혀 죽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그렇다. 사치와 낭비가 심하고, 오스트리아의 공주였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의 왕비였기 때문에 민중의 분노와 오해를 샀다. 중요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행동이 아니라 그녀가 왕비라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들이 훌륭한 행동을 해서 왕자와 왕비가 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들의 행동이 개인적으로 나빴기 때문에 처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민중을 수탈한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다. 인간적으로 순박했다고 알려진 루이 16세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과오는 그가 프랑스의 국왕이라는 것에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평등 자유의 공화정임을 선포한 이상 국왕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외국으로 탈출하다 붙잡혀 온 국왕을 두고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논쟁이 일자 생쥐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군림하거나 아니면 죽어야 합니다.... 누구도 죄 없이 군림할 수 없습니다. 군림하는 왕의 광기는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왕은 반도이며 찬탈자입니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p364」
왕과 공화국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왕가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는 이유로 군림할 수 있었다면, 단지 왕가의 핏줄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죽음도 받아들여야 한다. 프랑스 혁명은 그 왕가의 혈통들이 민중을 기아와 빈곤 속으로 몰아넣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오해들은 민중의 분노가 만들어낸 허구일지라도, 민중의 분노는 정당하고 위대하다.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 억울함에 대해 먼저 귀 기울여야 할 대상은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장발장과 팡틴, 가브로슈이다. 늙은 국민공회 의원이 말했듯 민중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 받아 왔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민중 쪽이어야 할 것이오. 민중 쪽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으니 말이오."
『레미제라블』의 마지막은 실패로 끝난 1832년 6월 봉기다. 1848년까지 지속된 입헌군주제 아래 부르주아지의 권익은 상당히 확장되었지만 민중은 여전히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결과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했다. 왕정이 폐지되고 다시 공화정이 선포되었는데, 투표를 통해 집권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였다. 3년 후 루이는 영구 집권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1848년 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 프랑스 제2 공화정의 수립과정과 몰락을 다룬 일종의 연작 칼럼이다. 이 책은 160여 년 전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시론이지만, 현재의 우리 정치상황에 대입해도 어색할 것이 하나도 없다.
루이 보나파르트가 선거로 당선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혼란에 시달리던 프랑스 농민과 민중들은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에 홀딱 넘어갔다. 나폴레옹처럼 프랑스를 구원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 보나파르트는 한낱 룸펜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다.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2월 혁명으로 구성된 임시 정부에는 노동 프롤레타리아, 민주공화파 쁘띠부르주아지,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심지어는 왕당파 야당까지, 다양한 정파가 참여했다. 그리고 곧바로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맨 처음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제거되었고, 그 다음엔 쁘띠 부르주아지, 그 다음으로는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최후의 승자처럼 보였던 왕당파 야당 연합인 ‘질서당’이 마지막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 축출 당했다. 혁명은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역사는 거꾸로 돌았다. 제 2공화정은 폐지되고 제2 제정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축출당할 때 모른 채 했던 부르주아지들은 결국 차례차례 제거 당했다. 그들을 지켜 줄 수 있었던 것이 최고 전위의 노동 프롤레타리아란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오랜 기간, 얼마나 극심한 혼란과 패배와 후퇴를 반복하며 전진했는지 생각하다, 뜻하지 않게 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가 프랑스 역사를 세세히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와 프랑스 혁명이 절대 무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근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프랑스 혁명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프랑스 혁명은 ‘진정한 근대’ 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자유, 평등, 국민주권, 헌법, 인권 같은 개념들이 구체성을 획득하며 역사에 정착한 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에 기인한다. 프랑스 혁명시기의 우리나라는 정조 치세 정도에 해당하는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정조 치세의 결과라기보다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에 바탕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영화, 소설, 만화들에 그토록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마도 프랑스 혁명이 이루어낸 성과들이 우리 정신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위안은, 혁명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패배는 긴 혁명의 역사에서 한 발의 후퇴에 불과할 뿐일지 모른다. 인내하며 생각을 가다듬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