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레온 드 빈터의 '호프만의 허기'

  그러니까, 이 책은

  찾고 다녔던 절판된 책 중의 하나였다.

 

  폭식증에 관한 소설...

 

  폭식증, 거기에 대해

  개인적인 사연도 있어

  궁금했었고 마침 그것을 다루고 있다고 하여

  찾았던 소설...

 

  쉽사리 내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는 구나...

  이미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 때의 '만약'을 생각하며 읽고 싶다.

 

                                                      하지만 리뷰를 쓴다해도 거기에 대한 얘기는

                                                      쓰지 않을 생각... 상처는 때로 가만 놔두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으니까...

 

                                           

 

 

 

 

 

 

 

 

 

 

 

 

   매그레도 나오고 엘러리 퀸도 돌아왔으니

   어쩌면 당신도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역시 결국은 도착하고야 마는 편지 처럼 다시 찾아와주었다.

   그것도 전집이라니...

 

   당신의 시대를 사랑한다.

   대공황과 금주법으로 이름 높은 그 시대를...

   담배연기 자욱한 BAR, 그 연기처럼 흐르는 재즈의 선율...

   미묘한 눈짓과 어설픈 손동작으로 하룻밤을 기약하는 남녀들...

   중절모로 고뇌의 눈빛을 가리고 빈틈없는 정장으로 깃든 상처를 가린 수컷들...

   그 시대를 사랑하게 된 건 전적으로 대쉴 해밑 당신 덕분이다.

   기쁘게 다시 한 번 당신의 시대로 건너가고 싶다.

 

 

 

  히무라 아리스 콤비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두번째 장편

 

  제목의 '달리'는 살바도르 달리를 말한다.

  살바도르 달리를 신봉하는 피해자가

  프로트 캡슐이라는 명상 장치 안에서

  알몸으로 죽은 채 발견된다.

  '고치'란 바로 그 캡슐을 말한다. 

  

  피해자가 적어서 오히려

  풀이의 논리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독특한 매력이

  발산된 초기작...

 '주홍색 연구'를 읽은지 얼마 안 된지라

  더욱 읽고 싶은 작품이다.

 

 

 

 

  펭귄클래식에 이어

  문학동네에서  페렉의 책들이 나오고 있다.

  '인생사용법'은 이미 책세상에서 나온 걸

  가지고 있으니 되었고 그외 다른 작품들은

  보지 못한 것들이라 큰 관심이 생긴다.

 

  사실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하지만

 '사물들'을 읽어보면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많이

  연상시킨다. 소개글을 읽어보니

  재현과 복재, 재현의 재현을 다룬다고 하는데

  기실 그 느낌이 옳았던 것 같다.

  읽지도 않고 이런 말 하는 건 그렇지만

  '사물들'을 읽고 이 책을 읽으면

   더 잘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민음사에서 밀란쿤데라 전집이 나오고 있다.

 이미 대부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장정으로

 나오는 전집이고 보니 소장 욕구가 마구 생긴다.

 거기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탓에

 내용들이 가물거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뒤죽박죽 되어 있기도 하고...

 

 다시한번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느림'은 쿤데라 작품들 중에서 그리 만족을

 못 느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시한 번 읽으면 평가를 달리하게 될까?

 아무튼 쿤데라다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문득 사유의 균열을 일으킬 줄 아는...

 

 

 

 

 

 

 

  요즘 베스트셀러의 성공 여부는

  밀레니엄의 리스베트 살란데르 에서 보듯

  독립적이고 개성 강한 여성캐릭터를

  얼마나 잘 빚어내느냐에 있다.

 

  그만큼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 '카루'가

  나온다고 한다.

 

  캐릭터 공부 삼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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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02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번 신간페이퍼는 눈이 정말 즐겁습니다.
마지막 책은 전혀 책같지가 않고 영화 포스터 같은걸요 +-+

ICE-9 2012-02-05 20:47   좋아요 0 | URL
요즘 책들의 표지가 잘 나와서 그냥 상품 넣기하고
확대만 했는데도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
소설도 표지만큼 잘 나왔다고 하는데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2-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정말 전집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한권보다 전집으로 나오면, 더욱 혹한단 말이죠.
저는 엘러리퀸 전집을 갖추고 싶어서 안달인데, 저희 집에 쌓인 책은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어요.

ICE-9 2012-02-05 20:49   좋아요 0 | URL
이번에 나온 엘러리 퀸 전집은 저도 프랑스랑 네델란드 가지고 있는데 와 일부러 연출한 빈티지스러움이 정말 감탄스럽던데요. 제대로 기획을 해서 나온 것 같아요. 저도 곧 이사를 할 예정인데 책 짐이 정말 정말 문제에요. 견적내려 오신 분이 책을 보더니 한숨 부터 내쉬더라구요 ㅠ ㅠ
 
매치드 매치드 시리즈 1
앨리 콘디 지음, 송경아 옮김 / 솟을북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이번에 새로나온 판타지 소설인 '매치드'는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고 사실 '오피셜'이라는 지배적 관료집단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고 개인의 선택적 자유는 철저하게 억압된 '소사이어티'라는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읽어보면 단순히 판타지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은 주인공들이 모두 10대들이라 보편적 의미에서 성장소설로도 읽히지만 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현재 미국이 추구하고 있는 수월성 위주 교육에 대한 비판이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저자인 앨리 콘디는 전직 고등학교 영어교사였고 '매치드'는 주로 카시아가 다니는 학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비록 그 학교가 '소사이어티'라는 멀지않은 미래의 전체주의사회 속 공간이긴 하지만 지금의 학교 현실과 그리 달라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의 교육은 '소사이어티'를 지배하고 있는 관료집단 '오피셜'에 의해 배워야 할 것들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 특히나 그들은 문학, 음악, 미술등 모든 분야에 걸쳐 100위까지 순위를 정해놓고 거기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버린다. 한 마디로 100위 밖에의 것들은 그것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사람들의 머리속만 복잡하게 하지 배울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암기 위주의 입시 지옥에서 허덕이는 우리나라 아이들이라면 오히려 이런 조치를 환영할지도 모르겠다. 100위까지만 외우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오피셜'들은 모든 지식을 관리하고 통제하는데 특히나 개인이 뭔가 스스로 생각하고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수 있는 것을 철저히 제거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래서 철학도 없고, 시도 없다. 글씨를 배우는 것도 허락 안 되고 과거의 역사를 공부할 수도 없다. 그것은 비단 교육 현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으며 개인의 물건 역시 '오피셜'의 허락 없이 가질 수 없다. 하물며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이 남긴 추억의 물건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직업도 일할 곳도 입을 옷들까지 다 그들이 결정해 준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오피셜'들이 미리 짝을 결혼해야 할 짝을 정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목이기도 한 '매치드'란 행사다. 일종의 집단 맞선 행사 같은 것으로 통일교가 종합운동장에서 벌이곤 하는 단체결혼식 같은 것을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소사이어티'에서는 17세에 이르면 독신을 선택하지 않는 한 모두 이 '매치드'란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거기서 '오피셜'이 골라준 상대와 맺어지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배우자가 된다. 결혼 연령 또한 소사이어티에는 정해져 있는데 그건 스물 한 살이다. 그러니까 '매치드' 이후 부터 '결혼'할 수 있는 스물 한 살까지는 연애 기간인 것이다.열 일곱이란 한창 이성에 눈을 뜨고 사랑의 에너지로 충만할 시기. 소사이어티는 아예 처음부터 상대를 결정해 가장 '개성'으로 충만할 시기를 통제하는 것이다.

 

 

  왜 이러는 것인지에 대해 '소사이어티'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이 매칭된 대로 선택한다면, 결혼 계약은 당신이 스물 한 살 때 이루어집니다. 여러 연구에서 양쪽 남녀의 임신 가능성은 24세에 최고조에 이른다고 나타났습니다. '매칭시스템'은 매칭된 사람들이 그 나이 즈음 아이들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건강할 후손을 가질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 (p. 22) 

 

 

 

 

 이 말에는 '소사이어티'가 행하고 있는 모든 관리와 통제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지도 나와있다. 그들은 언제나 통계나 과학적 연구 결과를 내세운다. 이건 개인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즉 '소사이어티'는 이렇게 개인은 행할 수 없는 사회 전체에 행해진 연구 결과를 내세워 자기들에게 권위가 있음을 설파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개인의 무력감 위에 기초하기에 개인들에게 '소사이어티'가 자신들 보다 더 잘 알고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만든다. 즉, 그들의 정당화 논리에는, 소사이어티는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개인이 알 수 없는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을 마땅히 잘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것이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다룬 판타지 소설만은 아님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소사이어티'의 정당화 논리는 지금 주인공 카이사와 같은 또래들에게 그들이 왜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지 내세우는 어른들의 정당화 논리와도 똑같기 때문이다. 미국 뿐만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의 어른들 역시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니들이 뭘 안다고 그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다 인생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니 잔말말고 따라.' '앞으로 한 번 살아 봐. 내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음을 알게 될테니...' 등등 우리는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얼마나 자주 하는가?

 

 

   앨리 콘디는 이렇게 소사이어티의 정당화 논리와 어른들의 정당화 논리의 유사성을 통해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받고 있는 교육 또한 소사이어티가 가하는 교육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소사이어티의 교육을 잘보면 그것이 현재 오바마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수월성 위주 교육' 정책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현재 미국의 교육 정책은 철저하게 성과 위주이다.

 

 

학업에서 정해진 성과를 내지 못하는 학급은, 학교는 가차없이 퇴출되거나 많은 불이익을 받는다. 따라서 교사들은 그 정해진 성과를 내기 위해 아이들 인성이나 개성은 뒷전으로 미루고 오로지 정부가 원하는 지식만을 가르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소사이어티'의 100위까지 정해진 문학, 음악, 미술과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수월성 교육은 학생 개인의 자아 발전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시스템상 아예 고려할 수 조차 없다. 교사 뿐만 아니라 아이들 역시도 자신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교육에 있어서 철저하게 선택의 자유가 배제된다. 즉 우리 사회가 바로 그 '소사이어티'며 우리 아이들이 '매치드'로 자신의 평생 반려자 조차 마음대로 고를 수 없는 '카시아'들 인 것이다. 사실 현재 미국이 추구하는 교육은 50년대 미국의 교육과 30년대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행했던 교육의 반복이나 마찬가지다. 50년대 미국은 정부 위주로 과학교육에 그 어느때보다 열을 올린 때가 있다. 무엇보다 소련의 스푸트닉호 발사 성공 때문에 과학기술에 있어서 만큼은 세계 최고라 자부했던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은 나머지 다시는 그 같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하여 뒤쳐진 국력을 따라잡는다는 명목으로 과학교육에 가열차게 집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견해에 의하면 그건 그저 명분일 뿐이고 사실은 소련의 성과로 인해 위기의식이 커져서 혹시나 미국인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가지게 될까봐 사상 통제가 더 큰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자면 30년대 일제 역시 우리나라에 그와 비슷한 일을 했다. 조선인들이 교육을 통해 의식을 키워 혹시나 일제에 맞서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하여 '2등국민'으로서 필요한 '산수'나 '글자' 같은 단순 지식만 습득하도록 했던 것이다. 50년대의 미국과 30년대의 일제 교육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교육을 받는 개인이 우선이 아니라 사회 지배 계급의 이익이 우선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매치드' 또한 전직 교사로 미국의 교육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했던 앨리 콘디의 지금 미국 교육이 추구하는 것 역시 50년대의 미국 교육 혹은 30년대의 일제의 교육과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이자 비판인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찾아가려는 여정은 그대로 앨린 콘디가 바라는 진정한 교육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그녀는 카이사의 탈주를 통해 지금 미국이 아니 교육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모습이 그와 같이 배움을 받는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꾸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매치드'는 단순한 판타지만은 아니다. 교육이 뭔지 정말 교육의 중심엔 무엇이 놓여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유의 여정이다. 지금 나온 '매치드'는 총 3부작으로 계획된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이후의 여정에서 콘디가 또 어떤 교육에 대한 사유를 보여줄 지 기대가 되고 미국의 교육 현실 보다 더 암담한 우리 교육의 현실상 한번쯤 벗해보는 것도 좋지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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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0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들어 판타지 소설이 너무 싫게 느껴지는 참이었어요. 따지고 보면 제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게 된것도 판타지 소설 덕분인데 요새는 판타지 소설을 너무 하급 취급하고 있지요. 제가 뭐라고.
그런데 이 책은 헤르메스님의 리뷰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인지 너무 괜찮게 보여요. 리뷰를 읽으면서 '닥터후'생각도 조금씩 나고, 여러가지 이미지가 겹치는 군요. 한 번 읽어봐야 알테지만 매혹적인 리뷰어요 .

ICE-9 2012-02-02 23:0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도 '닥터후' 좋아하시는군요. 저역시 '닥터후'를 엑스파일 다음으로 최고로 꼽는 팬입니다. 반갑고 또한 이렇게 공통점이 있다니 좋은데요^ ^
'매치드'는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현재 미국 교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라 소이진님이 읽으면 더 많이 와 닿는게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어쩌면 저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판타지란 제 생각이지만 그냥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언제나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허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2차대전으로 나타난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비판하듯이. 그렇게 전혀 새로이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사고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판타지를 좋아합니다. 소이진님의 판타지 리뷰도 언제 한번 듣고 싶네요. 더 듣고 싶은 건 물론 소이진님의 닥터후 이야기이지만요.^ ^

이진 2012-02-02 23:16   좋아요 0 | URL
저는 닥터후에 미친 사람입니다. 후후. 닥터후 전 시리즈를 다봤고(물론 우리가 알고있는 시즌말이지요)스페셜까지 모조리 섭렵해버렸습니다. 데이비드 테넌트에는 한때 엄청나게 열광해서 그의 모든 출연작까지 살펴보고 시즌 4의 도나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해서 그녀의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니까요. 자막도 없는 그 예능 프로그램이 어찌나 재밌던지. 아, 닥터후를 좋아하신다니 전 너무 반갑습니다. 너무요 ㅋㅋㅋ

마녀고양이 2012-02-0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개....
저는 트와일라잇과 비슷한 류의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나봐요. 아우, 정말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읽을 때는 잼났는데
이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는게 없더라구요. 그런데 요즘 정말 많이 나왔잖아요, 그런거.

매치드를 트와일라잇과 비교한다면, 통속성이 강한가요 아닌가요?

ICE-9 2012-02-05 20:53   좋아요 0 | URL
저는 별에 별 의미를 안두고 있어서 다섯개라고 해서 꼭 대단한 작품은 아니고 그냥 생각도 못했던 작품의 재미나 의미를 알려준다고 하면 다섯개를 주니까 너무 고려해 넣지 마세요^ ^ 제가 트와이라잇을 읽지 못해서 어떻게 비교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영화판을 염두에 두고 말하면 통속성은 그 보다 덜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원작을 못 봐서 자신은 못하겠네요. 아무튼 트와이라잇 성공후에 그 옛날 할리퀸 시리즈가 마치 판타지로 개작된 듯이 그런 류가 너무 범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는 저도 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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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미우라 시온의 이 소설은 꼭 붕어빵 같다.

 

  한 겨울에 한 입 배어먹는 붕어빵 만큼 또 따뜻한 것도 없지만 늘 먹어왔던 맛인데도 질리지않고 다시금 찾게 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아마도 그의 소설이 손난로 처럼 따스한 온기와 일부러라도 듬뿍 젖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리는 세계가 온기와 봄날의 조는 곰처럼 달콤한 평안을 머금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미우라 시온이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굳건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엔 그리 나쁜 사람은 없다는, 알고보면 정말은 착한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구레 빌라 연애 소동'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른 소설들 같으면 얼마든지 협박과 다툼으로 이어졌을 상황에서 조차 타인을 배려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참으로 자주 보여준다. 첫 단편, 'SIMPLY HEAVEN'에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아무런 갈등없이 한데 동거하는 모습도 그렇고 두번째 단편 '심신'에서 아내의 눈을 피해 성적 서비스를 받으려 집으로 불러온 여자가 그 때 아내가 나타나자 어려움에 처한 남편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가 관리하는 아파트의 한 주민으로 연기를 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세번째 단편, '기둥에 난 돌기'에선 지하철 플랫폼에서 우연히 만난 조폭 두목 조차 사람의 정을 소중히 하고 한번 정을 나눈 이를 위해서는 그가 아무리 하찮은 인연으로 엮어졌다 하더라도 잔정 가득한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레 빌라 연애소동'은 각 단편들마다 주인공들의 어쩌면 상궤에서 벗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욕망의 추구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묘사를 통해 사실은 그 이면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즉 주인공들이 그토록 자신의 욕망 추구에 충실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를 둘러싼 타인들이 무엇보다 그를 참고 그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미우라 시몬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단편 조차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검은 음료수'이다. 이 단편은 다른 단편과 달리 만일 그러한 타인의 참음과 배려가 없다면 한 개인의 일방적 욕망 추구가 과연 어떠한 파국을 불러오는지 보여주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미우라 시온은 그 모든 개인의 욕망 추구가 가능함의 이면에 인내와 배려로 모종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타인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레 빌라 연애소동'은 나를 둘러싼 타인에게로 먼저 눈을 돌리게 만드는 단편집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미우라 시온은 여러 다양한 세입자가 한데 모여 사는 '고구레 빌라'를 소설의 주된 배경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구레 빌라 처럼 우리 세계 역시도 나와 대등한 욕망을 가진 많은 이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으며 내가 지금 나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타인들이 그런 나를 참고 배려해 주고 있기 때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바로 이러한 미우라 시온의 시선, 나 이전에 나를 나답게 있게 해주는 타인을 먼저 염두에 두는 그 포용의 시선에 담겨진 따스함 때문에 '고구레 빌라 연애 소동'이 따끈한 붕어빵과도 같은 온기를  지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붕어빵은 봉지째 사더라도 바람이라도 훔쳐갔는지 먹다보면 어느새 쉬이 사라진다.

  그처럼 착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발산하는 따스하고도 달콤한 온기에 취해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것을 깨닫는 '착하디 착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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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5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번 리뷰는 간결하면서도 딱 떨어지는, 책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요약한 리뷰군요. 설마 저의 징징스러운 댓글때문에 리뷰의 양을 줄이신것은 아니실테지요ㅎㅎ 하지만 드디어 제가 헤르메스님의 글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붕어빵과같다는 비유에 자그마한 감동까지도 느꼈구요. 이리 별점 5개를 쏴주시니... 재밌겠습니다. 가뜩이나 요즘들어 추운데 가슴따뜻하게 해줄 소설도 필요했구요.

ICE-9 2012-01-25 23:39   좋아요 0 | URL
하하... 사실 소이진님의 댓글이 좀 영향을 미치긴 했죠. 이래뵈도 AS에 꽤 세심한 편이거든요^ ^ 이처럼 말의 양을 가급적 줄여보려고도 하고 있는데 잘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가 주는 별점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마세요. 제가 쓴 글을 훑어보면 아시겠지만 거의가 다 별 다섯이거든요^ ^ 저는 사실 별점 자체를 영화의 20자평 만큼이나 거부하고 있어요. 그런 저항의 의미로 별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도록 늘 별 다섯을 준답니다. 아무튼 소이진님 저의 별점에 낚이시면 안됩니다.^ ^

이진 2012-01-26 00:45   좋아요 0 | URL
후후, 저도 별점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저는 게다가 제가 제일 최고다하는 작품들만 리뷰를 쓰기에 (신간평가단 도서는 제외하고)전부 별 다섯개인데 그러기에는 또 민망해서 네개로 주기도 한답니다. 이 얼마나 웃긴일인지 ㅋㅋ 양을 줄이니까 저같은 사람은 편한데 헤르메스님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됩니다!

헤르메스님 좋은 꿈 꾸셔요)
저는 이만 꿈나라로 갈게요, 굿밤 :)
 
[활자잔혹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 무정한 당신이 끝내 남기고 싶은 것은? ...

 

 

  다작으로 참 유명한 작가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는 영국의 여류 작가 루스 렌들은 무엇보다 심리적 묘사로 이름이 높다. 아마도 그녀의 대표작이자 추리 문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만한 골든 대거상도 수상했던 '내 눈에도 악마가'란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내 말이 쉽게 수긍되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 역시 그 작품에서 보여준 타인들의 눈을 끔찍할 정도로 신경쓰는 한 소심한 범죄자의 내면에 대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집요할 정도로 언어로 모조리 담아내는 탁월한 묘사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공교롭게도 '내 눈에는 악마가'가 나온 76년 이듬해, 그러니까 77년에 나온 지금 얘기하려는 이 작품 '활자잔혹극'의 범죄자 '유니스' 역시 바로 전작의 범죄자 아서와 많이 닮아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볼까 신경쓰는 것이다. 나란히 나온 작품들이라 어쩐지 '소심증' 시리즈 연작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소설은 그 이유를 첫 머리에서 단적으로 밝힌다. 유니스, 그녀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스는 아서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글자를 모른다는 부분에 있어서만 남들의 눈을 신경쓸 뿐 그 외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너무나 신경쓰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섬뜩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다르게 '활자잔혹극'인 이유도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이 오직 글자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은 유니스가 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되는 걸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가족 네 명을 살해하게 되는데도 렌들은 그 이유에 대해 짐짓 모른체 한다. 하긴 '내 눈에도 악마가'에서도 그랬다. 아서가 그토록 소심증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래서 렌들은 내게는 '활자잔혹극'에서 그 어떤 미사여구나 감정이입 없이 마치 할 말만 하는 불친절한 가게의 아줌마처럼 아주 건조하고 무심하게 툭툭 내던지듯 써내려가는 그녀의 문장 만큼이나 무정한 작가로 보인다.

 

 

  내가 그녀에게 "왜 유니스가 이토록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죠?"하고 묻는다면

렌들은 100% 이렇게 대답할 게 틀림없다. "꼭 이유를 알아야 하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라고... 세상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유니스도 그런 존재라고 그냥 생각하면 안될까?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라구."

 

 

  건조하고 투박하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마저 없어서 무정한 그녀의 문장 때문에 자꾸만 '킬러들'의 헤밍웨이가 떠오르기도 하는 '활자잔혹극'은 하지만 그 건조하디 건조한 외형에 비해 그 깃든 내용에 있어서는 참으로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 그 다양한 해석의이채로움으로 풍성한 작품이다. 

 

 

 

 

  이미 이 책 말미에 달린 해설에서 장정일은 유니스의 '문맹'을 가지고 '문맹이 결과하는 사회기술적 곤란만 아니라, 문맹이 인격적 형성에 미치는피해' 를 얘기하고 1995년 이 소설을 가지고 '의식'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끌로드 샤브롤 역시 커버데일과 유니스의 관계를 부르조아 계급 대 노동계급의 갈등이란 관점에서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 바 있다.(사실 처음엔 '활자잔혹극'을 이렇게 유니스의 점증하는 계급의식에 맞추어 쓰려 했으나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포기했다. 장정일은 해설에서 이 영화가 소설이 가지는 세부적 장점들을 많이 놓치고 있다고 평했으나 그건 소설이 영화로 옮겨올 때 흔히 가지는 일반적 한계에서 오는 보편적 문제일 뿐이고 '계급'적 관점에만 천착해 본다면 영화적 묘사가 소설 보다 훨씬 뛰어나다.)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이미 한 얘기를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이 찾아낸 것으로 쓰는 게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의 시간 낭비를 막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물론 이 글이 이 책에 대한 해설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해서 그렇게 나가보려 한다.

 

 

 

   2.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써 보고자 함이었나? ...

 

      '말-중심주의' 에서 '활자-중심주의' 로

 

 

  이 책이 가지는 내용에 있어서의 다양함은 어쩌면 그 출발에 있어서는 단순하지 않을까 싶다. 즉 '유니스의 '문맹'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이다. 그렇게 장정일 처럼 '문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할 수도 있고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여 부르조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지 않은 노동계급만의 독자적 이데올로기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 역시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내포된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을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라고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흥미롭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유니스의 '문맹'과 커버데일 일가의 '활자'의 대립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나왔던 '말 중심주의'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으로도 얼마든지 읽힐 수 있음을 발견했다.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 발견했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적 독법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앞서 말했던 '활자잔혹극'에 깃들인 내적인 해석의 풍부함에 대한 충분한 방증이 되지않을까 하여 그것을 위해서라도 한 번 나만의 독법을 시전(始展)해 볼까 한다.

 

 

   짧은 리뷰로 데리다의 논의를 다 담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스케치하듯 간략하게 넘어가는 것에 조금 양해를 먼저 구해두고 싶다. 아무튼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에 왜 말 중심주의가 있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양 형이상학이 내내 진리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단순히 말하자면 '참-실재'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 그렇게 '아르케'의 추구로 부터 기원되는 서양 형이상학은 내내 진리란 이름으로 진짜 존재를 찾아왔었다. 그런데 진짜 존재란 무엇인가? 가상이 아닌 것. 플라톤에 의하자면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허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고대인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찾았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이라 불렀던 것. 그렇게 '양심의 소리'였다. 즉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내 양심 혹은 내 내면에 직접 들려오는 소리야 말로 '참-실재'가 아니겠느냐고. 왜냐하면 그 순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고-듣는' 과정에서는 그 어떤 감각적 왜곡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그것을 정초로 '진리'를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점차로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그 결과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중심주의'는 토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이 '말-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는 그것으로만 구성된, 그렇게 철저하게 동일성의 바탕 위에만 구성된 형이상학이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타자가 개입할 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이 전방위적으로 검토된 이유는 무엇보다 2차대전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파시즘의 출현이었다. 많은 철학자들은 파시즘이란 전체주의의 출현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의 존재라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시켜왔던 서양 형이상학 자체에 그 씨앗이 배태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것은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더 오래 더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과 신은 2인 3각 게임을 하듯 서로 보조를 맞추어 철저히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 오로지 혼자가 전부인 형이상학을 구축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하이데거는 '동일자의 철학'이라 비판했고 레비나스 역시도 비슷했다. 데리다 역시 거기에 가담한다. 하지만 그는 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동일자의 철학'을 낳게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훗설이 예비한 길을 따라가다 그 근저에 말-중심주의(혹은 소리-중심주의)가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유니스의 '문맹'은 바로 이 '말-중심주의'를 상징한다.

 

  데리다는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 '현재에의 집착' 그리고 '소유욕' 흥미롭게도 루스 렌델은 직접적으로 유니스가 이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는 오로지 그 자신만 절대이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동일자의 철학'에 있어 당연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유니스 역시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들킬까 염려하는 것 빼고는 전혀 타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 감정만이 전부이며 일가족 네명을 다 살해한 뒤에도 유니스는 자신이 받게 될 급료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이건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한 까닭에서도 나타난다. 유니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꾸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니스가 처음과 달리 점점 커버데일가를 경원시하게 되었던 것도 그들이 자꾸만 자신에게 간섭하고 자신의 세계를 바꾸려 들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단 하나 글자에 대한 두려움만 빼고.

 

 

 

   현재에 대한 집착 역시 유니스는 가지고 있다. '말-중심주의'가 현재에 집착하는 까닭은 진리의 집착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진리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바로 현재에 나타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의 상식이기도 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야 말로 절대 진실이라고 종종 우리는 여기지 않는가? 그렇게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루는 '말-중심주의'는 현재성에 집착한다. 그런데 유니스 역시 그렇다. 루스 렌들은 단적으로 이렇게 드러낸다.  

 

  현재에만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유니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당장 저녁 식사 오 분 늦는 사태가 십 년 전에 겪은 크나큰 슬픔보다 중요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P.71)

 

 

  소유욕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말은 내 의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이 '나' 즉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개성'은 다른 말로 하면 나만이 가진 것, 즉 소유권인 것이다. 즉 사유재산의 바탕이 되는 개인의 소유권은 바로 그 의식을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데리다 역시도 철학사에 있어서 언어에 보다 우위성을 두게 된 것은 '있음'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또한 '말-중심주의'에 그 연원이 있으며 그 정도로 '말-중심주의'는 '소유욕'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유니스도 이것을 대놓고 보여준다. 앞서 말한 급료의 집착이 그렇지만 아래 부분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유니스 파치먼이란 인간의 흥미로운 특성은 비록 살인이나 협박은 주저하지 않았어도, 물건을 훔치거나 주인의 허락 없이 무언가를 빌린 적이 평생 동안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물이란 신생처럼 특정 사람에게 귀속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조지도 사물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싫어했지만 유니스는 그 이상으로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P.79)

 

 

 

   이렇게 그녀는 데리다가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같이 일가족을 살해하는 동반자 조앤 스미스가 광신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앞서 ''말-중심주의'가 '유일신 신앙'과 보조를 맞춰왔다고 말했는데 유니스와 조앤의 관계는 바로 이것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조앤이 다니는, 그리고 유니스도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하느님의 강림을 믿는 사람들'이란 교회를 고려하면 이것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도 오로지 설교와 고백이라는 '말'로서만 이루어지며 아예 교리로 '기도서' 같은 책들을 읽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철저히 활자를 배제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렇게 렌들은 조앤과 교회의 존재로써 유니스의 문맹이 바로 '말-중심주의'의 상징임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쯤 이르면 왜 유니스가 그토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리도 활자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바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그러한 현실 역사에 폐해를 가져다 준 '말-중심주의'를 소거하기 위해서 '활자-중심주의'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은 바로 자신을 소거할 일종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루스 렌들은 유니스를 곤경에 빠뜨리고 파국을 가져오는 모든 계기들을 '활자'로 구성한다. 그러니까 결정적으로 조지가 유니스를 비난하게 된 것이 바로 '서류'였다는 것,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는 멜린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잡지의 '심리테스트'라는 것. 또한 유니스가 결정적으로 경찰에 체포되게 만들었던 살해 현장이 생생하게 녹음된 '테이프레코더'(행여 여기에서 녹음된 것은 '소리'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 같아 미리 알려두지만 활자가 소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똑같이 재현가능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음 역시 일종의 '활자'인 것이다.)라는 것 그리고 그 녹음테잎의 존재를 알리게 된 것 역시 재클린의 메모라는 것 등등에서 말이다. 렌들이 커버데일 일가를 유난한 책벌레들로 설정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활자-중심주의'의 역습을 찍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가장 활자에 집착하는 자일스의 존재가 정말 의미심장해 지는데 장정일은 자일스를 '문해'의 극단으로 보았지만 내 경우에는 '활자-중심주의'의 극단을 상징한다. 렌들은 의미심장하게도 유니스가 자일스를 처음 만날 때 유니스가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라고 쓴다. 유니스에게 있어 그는 거의 부재하거나 침묵의 존재이다. 또한 살해할 때도 자일스의 목소리만 녹음에서 들리지 않는다. 이건 왜 이럴까? 대답은 역시 하나뿐이다. 자일스가 '활자-중심주의'의 가장 극단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에게서 가장 멀어진 존재이기에 그녀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유니스를 끝내 파멸시킬 녹음 자체가 하나의 전체적인 '활자'이기에 자일스는 별도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 녹음된 모든 정황이 바로 자일스의 글쓰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는 유니스에게 활자의 두려움을 가장 처음 심어주었던 계기를 생각하면 더욱 확고해진다. 그건 바로 자일스가 달마다 종이에 써서 붙여두던 '이달의 격언'이었다. 또한 이 '이 달의 격언'은 유니스를 둘러싼 커버데일의 일가가 '활자-중심주의'의 세계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렌들은 유니스와 자일스의 정교한 대립을 통해 유니스로 상징되는 '말-중심주의'와 자일스로 상징되는 '활자-중심주의'의 대립을 가져온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했던 그대로...

 

 

  그런데 데리다는 왜 그것의 교정으로써 '활자-중심주의'를 가져오는 것일까? 단순하게 말해 '활자-중심주의'는 자아의 동일성을 허물고 타자성에게로 개방시키기 때문이다. 활자 자체는 외부에 씌여진 기록이며 어떤 것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늘 추정케 하며 또한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당당히 진리를 주장할 수 없고 언제나 비판가능한 하나의 담론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씌여진 활자'는 나 아닌 타자를 대면하게 한다. 활자 세계의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와는 다르게 내내 유니스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단적으로 렌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이것을 강조한다.

 

  문맹은 일종의 시각장애이다.(P.38)

 

 

 그렇게 유니스 그녀는 타인을 전혀 보지 못한다.

 

  글에 의해 통제되거나 억압되지 않는 본능으로 (P.40)

 

 

  그녀는 전혀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렌들은 이러한 커버데일의 유니스에 대한 관심을 부르조아 계급의 위선적 태도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내 관점은 어디까지나 '말 중심주의' 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에 기초함으로 한계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함을 어느정도 양해해주길 부탁드리고 싶다. 이는 또한 유니스에게 가장 인간적으로 대하는 멜린다가 영문학 전공(문학은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다루는 활자의 장르가 아닌가)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렇게 렌들은 데리다가 언어가 아니라 활자에 더 우위를 둠으로써 타자에 대해 우리의 눈을 돌리려 했던 것을 그대로 형상화한다. 어쩌면 렌들은 그래서 커버데일 일가는 하필 '돈 지오바니'의 음악을 텔레비젼으로 보고 있을 때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시점이 중요한데 멜린다를 포함하여 커버데일 일가 모두가 유니스와 완전 결별했을 때, 다시말하면 그 때까지 유니스가 안경을 통해 활자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스스로 위장했듯이 커버데일 일가 또한 위선적인 이타적 태도로 그들의 자기애를 위장했던 것이 최종적으로 끝장났을 때 그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렌들은 그 시점의 폭발을 은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는데 그 처음은 자일스의 변화이다. 즉 절대적인 부재와 침묵 속을 떠돌던 그가 점차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이윽고 종교에 귀의까지 하도록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로 인해 서서히 활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의 단적인 상징이 된다. 그렇게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점차적 나아감이 끝내 저택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돈 지오바니'의 오페라로 완성되는 것이다.(또한 그들은 유니스의 상징이기도 한 텔레비젼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음도 상기하라.) 그리고 그렇게 유니스의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그 모든 소리를 제압하는 그래서 죽음의 소리이며 유니스가 이해하고 좋아하는 유일한 소리이기도 한 총소리로 대체되고 활자 세계의 인물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것은 렌들에게선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렌들은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들어섬을 이기심의 확장과 경로를 같이하게 만들어 오히려 활자 세계로의 머무름이 타자에 대한 관심의 유지임을 강조해 보여주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3.  보다 깊은 그녀의 속내는? ...

 

 

  이러한 렌들의 주제는 그러나 전작 '내 눈에는 악마가'와 비교하면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작에서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비극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찌된 연유일까? 뭐, 양 극단은 지양하고 자기애와 타인의 대한 관심을 적절히 조절하자 정도로 편하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렌들이 그런 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면 전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작품을 써서 렌들 스스로 데리다적 결론에 이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도 된다. 데리다가 활자에 우위를 두고 '차연(혹은 '차이'라고 부르자는 학자들도 있다.)'를 가져오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오로지 하나의 해답만, 근거만, 결론만 가능하다는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 대대로 내려온 '아르케'의 집착을 버리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데리다는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의 잠정적 담론이 되길 원하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과정 자체가 되길 원한다. 그래야 수많은 독자적인 해석들이 왁자지껄 제 목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론 남들의 얘기에 귀도 기울여가면서 서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바로 이 '활자잔혹극'에서 장정일과 끌로드 샤브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바로 그래서 렌들 역시 이렇게 전작과 완전히 상반된 주제에다 또한 내용상 다양한 해석의 가능함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하나의 해답만을 가지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려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있을 또다른 무언가를 향해 늘 열려진 태도를 유지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렌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도 '활자잔혹극'도 그  모두 느닷없는 폭발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서의 죽음도 유니스의 살해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마치 삶이 모조리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고 암시하듯이... 렌들이 권유하는 부단한 재조정 재설정을 위한 열려진 태도는 정말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정의하기를 '차연이 직조해가는 시공간적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이라 했다. 이 말은 그대로 삶에게도 통용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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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에다 표지에, 리뷰까지 다 멋있군요.
하...하지만 여전히 저의 달리는 지식으로는 전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ㅋㅋ
이거 안되겠습니다. 다음 기에는 직접 소설을 신청해서 읽어보는 수밖에요..후후

ICE-9 2012-01-25 20:30   좋아요 0 | URL
루스 렌들의 활자잔혹극은 정말 추천할만한 걸작인데 어쩐지 저의 리뷰가 거리를 좁히긴 커녕 오히려 넓힌 것만 같아서 심히 걱정스럽네요 ㅠ ㅠ 안 그래도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어째 점점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염려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올해엔 보다 쉽고 보다 짧게를 모토로 해야겠어요. 성향상 얼마나 지켜질 지는 미지수지만 하하... 다음 소설 신간평가단에 소이진님도 꼭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제가 또 연임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에요. 하하...

이진 2012-01-25 23:24   좋아요 0 | URL
아니어요. 안되요 ㅠㅠ 제겐 어려운 매력으로 읽는것이 헤르메스님의 리뷰인데 쉽게 쓰신다니 아니되어요. 겨우 이 미천한 저를위해 헤르메스님의 모토를 버리신다니 안됩니다. 헤르메스님의 이런 글을 좋아하시는 분이 얼마나 많으실텐데요! 아마 헤르메스님이라면 되실겁니다... 저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하하...
 

 

  유하 감독의 새 영화가 드디어 나왔다.

  '쌍화점' 이후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 근데 제목이 '하울링'이다.

  설마, 이번 영화가 리메이크인 것일까?

  생각했었다.

 

  왜냐면 제목의 '하울링'  은

  '그렘린'으로 한 때 이름 꽤나 날렸던, 하지만

  영화를 가지고 마음껏 장난치는 악동절 기질로

  악명이 더 높았던 감독,

  조 단테 의 데뷔작 제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조단테의 데뷔작은

 '인간 늑대의 음모'라는 참으로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온 적 있다.(비디오 수집 시절 이 오리지널

  판을 찾기 위하여 꽤나 애먹었던 기억도 새록하다.)

  그러니까 조 단테의 '하울링'은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이 말해주듯 늑대 인간이 나오는 영화였다.

 (늑대로 변하는 특수효과가 꽤 인상적이었다.)

 

 

  그럼, 유하가 한국한 늑대인간 영화를 만드려는 것일까?

  주연이 단 한번도 유하와 인연이 없었던 송강호인 이유도

  늑대인간과 드랴큘라가 상극이라는 사실은 왠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테니까

  일부러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 드라큘라가 되었던 송강호를 데려와

  키치적 변주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였더 것일까?

 

  이렇게 멋대로 상상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모든게 한낱 오해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으니...

  사실 제목만 '하울링'일 뿐, 조단테 데뷔작의 리메이크는 아니며

  아예 원작조차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히 늑대인간의 얘기도 아니라고...

 

 

 

 

  그 원작이, 바로...

 

  일본 작가 노나미 아사  의

 '얼어붙은 송곳니' 라고 한다.

  15회 나오키 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읽지 못했다.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어차피 영화 예고편에 다 나오므로 하는 말이지만

  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연쇄살인을 다루는 작품

  이란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의 제목 '하울링'은

  개에 의한 연쇄살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붙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근데,

  '뭐, 개에 의해 연쇄살인?...'

  하자 이와 비슷한

  영화가 예전에도 하나 있었음이 생각났다.

 

 

 

 

   그 영화가 바로...

 

  B급 영화의 거장으로도 유명한

  사무엘 풀러  의 'WHITE DOG'이었다.

  80년대의 미국은 늑대 혹은 개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

  던 것일까? 앞서 소개한 조 단테의 '하울링'이 1981년에

  나왔는데,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1982년에 나왔다.

  (현재 드라마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틴 울프'

   도 1985년 마이클 J 폭스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신보수주의로 무장한 레이거노믹스가 절정에 달할

   무렵 이토록 야성성을 강조하는 영화가 왜 득세

   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마견'이란 역시나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왔었다. 정말 휘귀했던 비디오로 보고

  싶었던 많은 이들을 애태웠는데 제목이 저렇게

  '마견'이 된 것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개에게

  'WHITE'란 제목이 붙여짐으로 혹시 이 영화를 보고

  반미주의적 의식이 움트면 어쩌나 하는 윗분들의 우려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충격의 복도, 언더월드 USA로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영화 세계를 보여주었던 B급 영화의 대부, 사무엘 풀러가 70세가 넘어서 만든 이 작품은 '얼어붙은 송곳니'와 마찬가지로 개에 의해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다룬다. 뭐, 제목만 보고서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잠깐 스토리를 소개해 본다면,

   한 소녀가 자동차에 치인 개를 구하는데 그 개가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다. 흑인만 보면 이유도 없이 으르릉 거리며 날뛰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개는 한 백인 인종주의자에 의해 흑인만을 노려 살해하도록 훈련시킨 개였다. 한 흑인 개 조련사가 그 사실을 알고 그 개를 고치려고 나선다는 그런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영화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반골로 살아온 사무엘 풀러 답게 그저 그런 개가 나오는 공포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오로지 사무엘 풀러만의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유하의 '하울링'이 그랬듯이 따로 원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작을 말한다면 아마도 원작자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 '새벽의 약속'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쓴 '로맹 가리' 이기 때문이다.

 

 

 

 

 

 

 

 

 

 

 

 

 

 

 

 

 그 로맹 가리가 1970년 10월 9일자 라이프지에 발표한

 단편 'WHITE DOG'이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오른쪽의 표지가 'WHITE DOG'이 표제작으로

 실린 프랑스에서 출간된 단편집의 초판 표지이다.

 (아래는 영문판의 표지) 

 

 

 

 

 

 

 

 

 

 

 

 

 

 

 

 

 

 

 

   아직 국내엔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 로맹 가리의 작품을 접해왔던 분들이라면 '세상에 사람을 물어 뜯어 죽이는 살인마 개의 이야기라니, 그런 걸 정말 로맹 가리가 썼단 말이야?'하고 정말 의아해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그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을 생각하면 나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럽의 교육' 2차 대전이 한창 중인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실제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었던 로맹 가리 자신의 자전적 체험이

  깊숙이 투영된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전쟁 얘기를 그대로 담아

  전쟁이 가져다 준 증오와 광기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와

  절망을 얘기한다. 미처 제대로 어른이 되기도 전에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교육'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스스로의 모습

  을 절절하지만 빼어난 문장으로 한차례 걸러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

  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전쟁이 주는 모든 경험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가지게 되어 그로부터 의식과 판단이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과 그렇게 규정되었지만 한 편으론 그 규정된 의식과 판단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영혼이 그 내부에서 격렬히 싸우고 있는 한 어린 영혼의 모습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과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이 한데 뒤엉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영혼의 전장이다. 거기서 로맹 가리는 말한다. 인간의 삶이란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 어쩌면 상상속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길들여짐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개체성을 획득하는게 아니겠느냐고...

 

  바로 이러한 생각, 자유에로의 몸부림이 또한 단편 'WHITE DOG'에게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맹가리의 근본적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초적 체험이란 늘 남으로 부터 규정당한 것. 그렇게 길들여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그 길들여짐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는가? 확신할 수 없다. 그건 영원한 숙제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사무엘 풀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무엘 풀러 역시 'WHITE DOG'을 통해 이것을 묻는다.

  애초에 한 인종주의자로 부터 조련된 개를 내세우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로맹 가리 처럼 한 쪽으로 사고하도록 길들여진,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 체험이 되어버린 존재를 다시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의 신체 내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의식으로 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로서 풀러는 인종주의의 근저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사회에 현상되는 인종주의는 어쩌면 그 길들여진 개 처럼 우리 자신 역시 그렇게 사고가 길들여져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 개를 다시금 조련시키려 하는 흑인 조련사는 사실 지금 영화로 관객들로 하여금 인종주의 자체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려는 사무엘 풀러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또한 조련 자체로 상징되듯이 80년대 등장했던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갈등을 '계몽'이라는 수단으로 개선시키려 했었던 주류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그 시대에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주제를 그 모든 논의되는 대안들과 더불어 정면으로 음미해 보려는 노장의 당당한 '참여'였던 것이다.

 

  과연 길들여짐이 또 다른 재교육으로서 조정 가능한지 사무엘 풀러가 내놓은 답안은 혹시나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하여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려 한다. 또한 이 페이퍼는 어디까지나 유하의 신작에 대한 것이지 사무엘 풀러와 로맹가리의 것은 아니므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가 사회철학과 또한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정도로만 그칠까 한다.  

 

 

  아무튼, 바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 때문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유하가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를 '쌍화점' 차기작으로 선택했는지...

 

 

 

 

 

 

 

 

 

 

 

 

 

 

 

 

 

 

 

  '쌍화점'의 얘기를 생각해보면,

  '하울링'이 유하 작품 세계에서 가지게 될 연속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쌍화점'은 무엇을 말하는 영화였나? 단순히 말하자면 '왕의 사람'으로 처음부터 길들여져왔던 '조인성'이 그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왕비와의 '연정'으로 처음으로 이성애에 눈을 뜬 조인성은 그제서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어릴 때 부터 왕에 의해 일방적으로 길들여진 '동성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즉 '쌍화점' 은 궁극적으로 '길들여짐과 그것에 대한 거부'의 얘기였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 과 마찬가지로 외부로 부터 강요된 길들여진 정체성과 그것에 저항하는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서로 칼날을 겨누고 뒤엉키는  얘기인 것이다. 이것은 유하가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내내 천착해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그리고 '쌍화점' 이 일련의 영화들은 사실은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즉 박정희 이후 우리의 내면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그렇게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길들어질 대로 길들여진 우리 정체성에 관한 얘기인 것이다.(여기에 대해선 물론 세세한 근거를 댈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유하가 그 길들이는 권력 주체의 자리에 내내 '아버지'라는 존재를 가져가고 있음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정도만 언급해 둔다.)

 

 

   그러니 '길들여진 존재'가 길들여진 그대로 충실히 살인을 수행하는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사실 그야말로 유하가 내내 천착해온 테마인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유하는 이 작품을 자신의 차기작으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유하는 같은 주제를 내내 다루면서도 그 접근 방법은 다 달랐다. '비열한 거리'와 '쌍화점' 만큼이나 이번 '쌍화점'과 '하울링' 역시도 그 접근 방법이 파격적으로 달라졌는데, 이 색다른 변주를 통해 독재에 의한 길들여짐을 집요한 정밀함으로 보여주었던 '쌍화점' 처럼 또 어떤 길들여짐에 대한 변주를 송곳니로 물어뜯어가며 연주해 줄 지 정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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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이시당 ><
저는 유화감독은 모르지만, 쌍화점을 알고. 하울링은 모르지만 얼어붙은 송곳니는 알아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안그래도 곧 영화를 보러갈건데 참 감사합니다, 생각햇는데 담달 개봉이군요... 씁쓸합니다 ㅠ

ICE-9 2012-01-24 23:15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설날은 잘 보내셨나요?
소이진님은 다음달에 바쁘신 모양이로군요.
그런데 저도 그래요. 흐엉 ㅠ ㅠ...
너무나 기다렸던 유하의 신작이지만
밀린 일이 많아서 2월달 안으론 못 볼 것 같아요...
ㅠ ㅠ...

맥거핀 2012-01-2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울링'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사무엘 풀러와 로맹 가리를 거쳐, 다시 유하감독이 하울링을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돌아오는 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무릇 소개글이란 이렇게 써야하는 건데...덕분에 유하 감독의 신작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관심이 부쩍 생기네요.

ICE-9 2012-01-24 23:28   좋아요 0 | URL
박정희가 주입한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남겨진 '근대화적 정체성'에 각각 다른 변주로서 내내 천착한다는 점에서 유하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작가입니다. '쌍화점'은 동성애를 가지고 독재와 개인의 저항을 절묘하게 풀어간 그 절정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데 그래서 그 이후의 작품이 어떤 것을 보여줄지 더욱 궁금했는데 이번엔 아예 내내 은유적으로 담아왔던 '길들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 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드는군요. 여기서 문득 맥거핀님이 신작을 기다리는 누굴까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또 기대작이 하나 늘었어요.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세상에 이 영화가 개봉된다는군요. 극장에서 만나는 타르의 영화는 처음이라서 마구 두근거려집니다. 2월은 정말 바쁜데 이 영화만은 어떻게든 만사제치고 볼 생각이에요. 타르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고...

맥거핀 2012-01-26 00:45   좋아요 0 | URL
아..벨라 타르 영화가 개봉을 하는군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아주 평이 좋았다고 하던데, 저도 챙겨서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