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감독의 새 영화가 드디어 나왔다.
'쌍화점' 이후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 근데 제목이 '하울링'이다.
설마, 이번 영화가 리메이크인 것일까?
생각했었다.
왜냐면 제목의 '하울링' 은
'그렘린'으로 한 때 이름 꽤나 날렸던, 하지만
영화를 가지고 마음껏 장난치는 악동절 기질로
악명이 더 높았던 감독,
조 단테 의 데뷔작 제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조단테의 데뷔작은
'인간 늑대의 음모'라는 참으로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온 적 있다.(비디오 수집 시절 이 오리지널
판을 찾기 위하여 꽤나 애먹었던 기억도 새록하다.)
그러니까 조 단테의 '하울링'은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이 말해주듯 늑대 인간이 나오는 영화였다.
(늑대로 변하는 특수효과가 꽤 인상적이었다.)
그럼, 유하가 한국한 늑대인간 영화를 만드려는 것일까?
주연이 단 한번도 유하와 인연이 없었던 송강호인 이유도
늑대인간과 드랴큘라가 상극이라는 사실은 왠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테니까
일부러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 드라큘라가 되었던 송강호를 데려와
키치적 변주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였더 것일까?
이렇게 멋대로 상상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모든게 한낱 오해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으니...
사실 제목만 '하울링'일 뿐, 조단테 데뷔작의 리메이크는 아니며
아예 원작조차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히 늑대인간의 얘기도 아니라고...
그 원작이, 바로...
일본 작가 노나미 아사 의
'얼어붙은 송곳니' 라고 한다.
15회 나오키 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읽지 못했다.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어차피 영화 예고편에 다 나오므로 하는 말이지만
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연쇄살인을 다루는 작품
이란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의 제목 '하울링'은
개에 의한 연쇄살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붙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근데,
'뭐, 개에 의해 연쇄살인?...'
하자 이와 비슷한
영화가 예전에도 하나 있었음이 생각났다.
그 영화가 바로...
B급 영화의 거장으로도 유명한
사무엘 풀러 의 'WHITE DOG'이었다.
80년대의 미국은 늑대 혹은 개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
던 것일까? 앞서 소개한 조 단테의 '하울링'이 1981년에
나왔는데,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1982년에 나왔다.
(현재 드라마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틴 울프'
도 1985년 마이클 J 폭스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신보수주의로 무장한 레이거노믹스가 절정에 달할
무렵 이토록 야성성을 강조하는 영화가 왜 득세
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마견'이란 역시나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왔었다. 정말 휘귀했던 비디오로 보고
싶었던 많은 이들을 애태웠는데 제목이 저렇게
'마견'이 된 것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개에게
'WHITE'란 제목이 붙여짐으로 혹시 이 영화를 보고
반미주의적 의식이 움트면 어쩌나 하는 윗분들의 우려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충격의 복도, 언더월드 USA로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영화 세계를 보여주었던 B급 영화의 대부, 사무엘 풀러가 70세가 넘어서 만든 이 작품은 '얼어붙은 송곳니'와 마찬가지로 개에 의해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다룬다. 뭐, 제목만 보고서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잠깐 스토리를 소개해 본다면,
한 소녀가 자동차에 치인 개를 구하는데 그 개가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다. 흑인만 보면 이유도 없이 으르릉 거리며 날뛰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개는 한 백인 인종주의자에 의해 흑인만을 노려 살해하도록 훈련시킨 개였다. 한 흑인 개 조련사가 그 사실을 알고 그 개를 고치려고 나선다는 그런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영화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반골로 살아온 사무엘 풀러 답게 그저 그런 개가 나오는 공포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오로지 사무엘 풀러만의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유하의 '하울링'이 그랬듯이 따로 원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작을 말한다면 아마도 원작자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 '새벽의 약속'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쓴 '로맹 가리' 이기 때문이다.
그 로맹 가리가 1970년 10월 9일자 라이프지에 발표한
단편 'WHITE DOG'이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오른쪽의 표지가 'WHITE DOG'이 표제작으로
실린 프랑스에서 출간된 단편집의 초판 표지이다.
(아래는 영문판의 표지)
아직 국내엔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 로맹 가리의 작품을 접해왔던 분들이라면 '세상에 사람을 물어 뜯어 죽이는 살인마 개의 이야기라니, 그런 걸 정말 로맹 가리가 썼단 말이야?'하고 정말 의아해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그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을 생각하면 나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럽의 교육'은 2차 대전이 한창 중인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실제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었던 로맹 가리 자신의 자전적 체험이
깊숙이 투영된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전쟁 얘기를 그대로 담아
전쟁이 가져다 준 증오와 광기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와
절망을 얘기한다. 미처 제대로 어른이 되기도 전에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교육'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스스로의 모습
을 절절하지만 빼어난 문장으로 한차례 걸러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
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전쟁이 주는 모든 경험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가지게 되어 그로부터 의식과 판단이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과 그렇게 규정되었지만 한 편으론 그 규정된 의식과 판단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영혼이 그 내부에서 격렬히 싸우고 있는 한 어린 영혼의 모습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과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이 한데 뒤엉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영혼의 전장이다. 거기서 로맹 가리는 말한다. 인간의 삶이란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 어쩌면 상상속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길들여짐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개체성을 획득하는게 아니겠느냐고...
바로 이러한 생각, 자유에로의 몸부림이 또한 단편 'WHITE DOG'에게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맹가리의 근본적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초적 체험이란 늘 남으로 부터 규정당한 것. 그렇게 길들여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그 길들여짐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는가? 확신할 수 없다. 그건 영원한 숙제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사무엘 풀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무엘 풀러 역시 'WHITE DOG'을 통해 이것을 묻는다.
애초에 한 인종주의자로 부터 조련된 개를 내세우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로맹 가리 처럼 한 쪽으로 사고하도록 길들여진,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 체험이 되어버린 존재를 다시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의 신체 내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의식으로 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로서 풀러는 인종주의의 근저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사회에 현상되는 인종주의는 어쩌면 그 길들여진 개 처럼 우리 자신 역시 그렇게 사고가 길들여져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 개를 다시금 조련시키려 하는 흑인 조련사는 사실 지금 영화로 관객들로 하여금 인종주의 자체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려는 사무엘 풀러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또한 조련 자체로 상징되듯이 80년대 등장했던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갈등을 '계몽'이라는 수단으로 개선시키려 했었던 주류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그 시대에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주제를 그 모든 논의되는 대안들과 더불어 정면으로 음미해 보려는 노장의 당당한 '참여'였던 것이다.
과연 길들여짐이 또 다른 재교육으로서 조정 가능한지 사무엘 풀러가 내놓은 답안은 혹시나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하여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려 한다. 또한 이 페이퍼는 어디까지나 유하의 신작에 대한 것이지 사무엘 풀러와 로맹가리의 것은 아니므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가 사회철학과 또한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정도로만 그칠까 한다.
아무튼, 바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 때문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유하가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를 '쌍화점' 차기작으로 선택했는지...
'쌍화점'의 얘기를 생각해보면,
'하울링'이 유하 작품 세계에서 가지게 될 연속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쌍화점'은 무엇을 말하는 영화였나? 단순히 말하자면 '왕의 사람'으로 처음부터 길들여져왔던 '조인성'이 그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왕비와의 '연정'으로 처음으로 이성애에 눈을 뜬 조인성은 그제서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어릴 때 부터 왕에 의해 일방적으로 길들여진 '동성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즉 '쌍화점' 은 궁극적으로 '길들여짐과 그것에 대한 거부'의 얘기였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 과 마찬가지로 외부로 부터 강요된 길들여진 정체성과 그것에 저항하는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서로 칼날을 겨누고 뒤엉키는 얘기인 것이다. 이것은 유하가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내내 천착해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그리고 '쌍화점' 이 일련의 영화들은 사실은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즉 박정희 이후 우리의 내면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그렇게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길들어질 대로 길들여진 우리 정체성에 관한 얘기인 것이다.(여기에 대해선 물론 세세한 근거를 댈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유하가 그 길들이는 권력 주체의 자리에 내내 '아버지'라는 존재를 가져가고 있음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정도만 언급해 둔다.)
그러니 '길들여진 존재'가 길들여진 그대로 충실히 살인을 수행하는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사실 그야말로 유하가 내내 천착해온 테마인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유하는 이 작품을 자신의 차기작으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유하는 같은 주제를 내내 다루면서도 그 접근 방법은 다 달랐다. '비열한 거리'와 '쌍화점' 만큼이나 이번 '쌍화점'과 '하울링' 역시도 그 접근 방법이 파격적으로 달라졌는데, 이 색다른 변주를 통해 독재에 의한 길들여짐을 집요한 정밀함으로 보여주었던 '쌍화점' 처럼 또 어떤 길들여짐에 대한 변주를 송곳니로 물어뜯어가며 연주해 줄 지 정말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