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 몽키스 구단 에이스팀 사건집
최혁곤.이용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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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넓고 미스터리의 소재 또한 그만큼 다양합니다. 당연히 야구도 자주 미스터리의 소재로 쓰였었죠. 야구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한국에선 야구를 소재로 이렇다할 미스터리가 없었는데 드디어 그런 소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본격 야구 미스터리 소설'을 표방하고 나온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가 그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이 소설을 소재 보다 작가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제가 한국 최고의 스릴러 소설 중 하나로 치는, 흔히  'B 시리즈'라고 알려진 'B컷'과 'B파일'의 작가 최혁곤이었거든요. 지금까지 그가 쓴 소설은 거의 다 읽어본 것 같은데,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 작가가 이번엔 야구를 소재로 미스터리를 썼다고 하니, 호기심 때문에라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최혁곤 작가만의 소설은 아닙니다. 공동 저자입니다. 경향신문에서 야구 기사를 쓰는 이용균 기자가 함께 썼습니다. 이렇게 미스터리에 강한 사람과 야구에 강한 사람이 함께 써서 그런지,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야구 이야기는 야구 이야기대로 모두 어디 흠 하나 얼른 잡아내기 어려운 작품이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다 만족시킬만한 소설입니다.




 표지에 소설의 주요 인물이 다 나와 있네요. 중간에서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여인은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프로야구 팀, 몽키스 구단의 젊은 단장 홍희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그녀를 내려다 보는 남자는 이 소설에서 주로 탐정 역할을 하는 몽키스의 프런트 팀장 신별입니다. 맞은 편에서 카메라를 내려다 보고 있는 저지 차림의 여인은 신별과 같은 프런트 팀으로 왓슨처럼 탐정의 조수 역할을 하는 기연이구요. 사실 신별과 기연, 이 둘이 거의 활약을 다 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의 사건만 나오는 장편은 아니고 모두 6막에 걸쳐 여섯 사건이 등장하는 단편집입니다. 그리고 미스터리 스타일도 종막을 제외하면 살인이나 거대한 음모 같은 게 등장하지 않는 일상 미스터리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 일상이란 게, 프로야구 세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이야기 자체가 아주 새롭습니다. 그 세계에 발을 깊숙이 담그고 있어야만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막, '악마의 리스트에는 마구가 숨겨져 있다'는 소설의 이러한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에피소드는 구단 사이의 선수 트레이드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어떤 선수를 주고, 어떤 선수를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구단 사이에 벌어지는 머리 싸움이 거의 첩보전을 방불케 합니다. 저야 물론 언론을 통해 트레이드 결과만 볼 뿐이라서 소설이 묘사하는 현실의 트레이드라는 게 이토록 치열한 수 싸움을 통해 이뤄진다니 많이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언론을 통해 잘 드러나지 않는 프로야구 계 막후의 현장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재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해 보도록 하죠. 주인공 신별은 원래 경향스포츠 야구 전담 기자로 있다가 최근 몽키스 구단의 프런트로 스카우트 당했습니다. 그가 직업을 바꾼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20년 전 사라진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신충은 20년 전, 핀토스 구단의 투수로 '노 히트 노 런'까지 기록한 대단한 투수였는데 자신이 선발인 한국시리즈 5차전 경기를 앞두고 홀연히 사라져 이후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별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 실종의 미스터리를 혼자라도 풀기 위하여 보다 야구와 가까운 직업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몰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가 팀장으로 있는 '에이스 팀'은 구단 내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골칫거리를 홍희 단장의 지시에 따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쯤되면 눈치채셨겠죠? 제목인,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네, 바로 '에이스팀'인 신별과 기연입니다. 그들은 회의실에서 발견된 도청 장치 사건을 시작으로 얼른 납득할 수 없는 트레이드 리스트를 제시해 온 상대 구단의 책략을 간파해야 하고 한 조선족 살인 현장에 우연하게 포착된 유격수 유망주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파헤쳐야 하며 과거 후배 선수 폭행으로 방출된 투수가 있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실은 팀에서 왕따를 당했다면서 계속적으로 시위를 하자 그 진실도 밝혀야 합니다. 이렇게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터질 지 모르는 온갖 돌발적인 사건들을 인과 관계를 잘 규명하여 잡음 없이 깨끗이 해결하는 게 '에이스 팀'의 임무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결사라고나 할까요. 비록 마운드에 서지는 않지만 그 배후에서 팀이 경기에만 전념에 승리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니 유니폼은 없다고 해도 선수나 다를 바 없는 것이죠. 제목은 분명 그런 뜻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신별은 놀라운 추리력으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냅니다. 경찰 출신에다 태권도 유단자인 기연 또한 신별이 잘 하지 못하는 일을 척척 해내어 완벽하게 조력하구요. 이들의 콜라보와 케미 앞에서 모든 에피소드의 미스터리는 명쾌하게 해결됩니다. 마지막의 아버지 실종 사건 역시도.


 재미와 정보가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모든 에피소드 뒤에는 신별이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야구 칼럼이 삽입되어 있는데, 모두 야구의 매력과 야구를 하는 의미에 관한 것으로 에피소드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저 독자의 흥미와 재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야구를 통해 자신의 삶 또한 음미할 수 있도록 손짓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본격 야구 미스터리 소설이 이토록 성공적인 모습으로 나왔기에 아무래도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앞서도 말했듯, 야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벗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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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2-29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오쿠다 히데오가 울고 가나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 오쿠다 히데오도 야구 소설을 썼더군요 그걸 기억해서 다행이네요 그 책을 정말 읽은 건지 다른 사람이 쓴 걸 본 건지... 제가 책을 읽고도 쓰지 않을 때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책 읽고 쓰고는 오쿠다 히데오 소설 별로 못 봤어요 존 레논이 나오는 소설을 본 다음일지도... 그 책을 잘 못 봐서 그랬습니다

미스터리와 야구 둘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게 보겠습니다 아니 야구만 좋아해도 재미있게 볼 것 같아요


희선
 
속죄의 소나타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권영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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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갑자기 잇달아 그의 책이 발간되는 바람에 더욱 그 이름을 뇌리에 새겨두게 된 일본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속죄의 소나타'를 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살인마 잭의 고백'을 통해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작가입니다. 세 가지 점에서 감탄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설정을 이야기로 잘 풀어낸다는 것과 플롯을 참 잘 짠다는 것 그리고 이야기를 굉장히 흡인력 있게 끌고 나가는 것. 간단히 말하면, 참신함과 대중성을 고루 갖추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중 많은 작품이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더군요.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알린 '안녕, 드뷔시'가 그렇고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로 나온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그러하며 이번에 나온 '속죄의 소나타'도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최근 그의 소설이 다시금 이렇게 주루룩 나오게 된 것은 분명 2016에 '안녕 드뷔시'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드라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속죄의 소나타'는 그 보다 전인 2015년에 드라마로 방영되었죠. 읽은 게 '속죄의 소나타' 외에 '살인마 잭의 고백'밖엔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다만 '참신성'과 '대중성'만큼은 그의 분명한 '트레이드 마크'란 것을 확인했습니다.


 네, '속죄의 소나타'도 '살인마 잭의 고백'처럼 독특한 설정을 가집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미코시바 레이지라고 변호사인데, 수임료만 많이 주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이도 변호해 동종 업계에서 아주 악명이 높습니다. 드라마 '리갈 하이'에 나오는, 사카이 마코토가 분한 왕재수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를 떠올려 보시면 미코시바 레이지 이미지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악덕 변호사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이 소설이 참신한 설정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건 앞서 말한 '리갈 하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음 것은 정말 다른 데서 보도 듣도 못한 설정입니다. 미코시바 레이지가 실은 살인자였거든요. 그것도 중학생 때 말이죠. 그냥 죽이고 싶어서 5세의 여자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러고서도 그게 잘못이라는 걸 전혀 몰랐죠. 네, 그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이런 궁금증이 드시겠죠? 아니, 그런 살인자가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단 말이야? 거기에 대해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기도 한 라이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법고시는 말이지, 인격은 상관없어. 어때, 재미있지 않냐? 곤경에 처한 사람 돕는 일일 텐데 인간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말이야. 나처럼 세상 사람들한테 악마라느니 인간이 아니라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시험 성적만 좋으면 변호사 배지를 받을 수 있는 거다. 일본은 참 좋은 나라라니까."(p. 215)


 솔직히 전 이 문장 하나만으로 이 작품이 단번에 좋아져버렸습니다. 라이야 말이 맞습니다. 사법고시에 인격은 필요없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도 참 좋은 나라입니다. 인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법고시 때문에 우병우도 나왔고, 양승태, 홍만표, 이인규를 지금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법 적폐들이 출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소시오패스 살인마 출신이 변호사 되지 말란 법도 없죠, 뭐. 소설은 그런 미코시바 레이지가 어떤 남자를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 개입 없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혐의가 오지 않도록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역시 사법고시의 은총을 받아 변호사가 된 괴물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속죄의 소나타'란 제목을 붙였던 걸까요?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제목은 결코 비유가 아닙니다. 정말 '속죄'의 이야기이고, 그런 속죄로 나아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소나타' 입니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직접 읽으면서 느껴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되기에 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미코시바 레이지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처리한 시체가 어떤 자연적인 조건의 개입으로 레이지의 예상보다 일찍 발견되어 버립니다. 시신의 신원이 남의 약점을 잡아 그걸로 돈을 뜯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잡지 기자 가가야로 밝혀지자 노련한 형사 와타세와 파트너 고테가와는 살인이 그것과 관련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가 최근 찾았던 '도조 제재소'를 방문합니다. 당시 도조 제재소는 사회적으로 꽤 유명한 곳이었는데, 왜냐하면 원래 이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던 소이치로라는 남자가 사고를 당하여 뇌사에 빠졌는데 아내가 안락사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아직 안락사를 범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그런데 나중에 소이치로의 죽음으로 굉장한 액수의 사망 보험금이 나오는 것으로 밝혀지자 검찰은 아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했을 것이라 보고 살인죄로 기소합니다.


 당시 재재소는 경영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아내는 국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국선 변호사가 바로 하필이면 '미코시바 레이지' 였습니다. 와타세 형사 일생이 도조 제재소를 찾아 가보니 지금은 소이치로 부부의 유일한 아들, 미키야가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겨우 왼손 뿐인 장애인입니다. 그 자리에 나온 미코시바 레이지를 보고 바로 예전의 '중학생 살인마'라는 걸 안 와타세는 가가야가 레이지를 협박하러 왔다가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리합니다. 레이지는 와타세 형사가 굉장히 노련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본능적으로 위기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과연 레이지는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레이지는 왜 돈이 전혀 안 되는 소이치로 안락사 사건을 맡게 된 것일까요? 레이지는 아내가 소이치로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소이치로 죽음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또 잡지 기자 가가야는 무엇 때문에 살해된 것일까요? 와타세의 추리는 맞는 걸까요? 이런 이야기 그 어디에도 속죄와 관련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제목은 어쩌자고 속죄의 소나타가 된 것일까요?


 아마도 읽다보면 저처럼 이런 많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이 모든 의문은 3부를 지나 놀라운 반전과 함께 모두 해결됩니다. 특히나 3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기에 여기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실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것만 슬쩍 눈 감아준다면 이 소설은 꽤 재밌게 다가오지 않을까 합니다. 뭣보다 4부에서 밝혀지는 반전이 꽤나 흥미진진하거든요.


 작가가 직접 밝히지 않았기에 조심스럽지만, 미코시바 레이지는 아마도 실존했었던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고베아동연쇄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아즈마 신이치로' 입니다. 모두 3명의 초등학생을 살인한 범인이 14세의 중학생으로 밝혀져 일본 열도를 그야말로 충격으로 뒤흔들게 만들었죠. 레이지는 뚜렷한 살인 동기가 없는데 형사가 자꾸 이유를 닦달하자 할 수 없이 즐겨 본 호러 영화 때문이라고 대답하는데, 이 역시 아즈마 신이치로가 했던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성년자였기에 소년원에 수감되었는데, 레이지도 똑같은 과정을 밟습니다. 때문에 분명 아즈마 신이치로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모델이 되었을 것 같구요, 그 아즈마 신이치로가 변호사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 소설이 나왔으리라 전 생각되네요. 물론 아즈마 신이치로의 범행은 레이지의 것보다 훨씬 더 엽기적이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더 재밌게 읽은 듯 합니다. 참신한 설정과 법정 미스터리 그리고 반전이 주는 산뜻한 맛을 좋아하신다면, '속죄의 소나타'를 한 번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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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2-2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이 확실한지 모르겠지만 야쿠마루 가쿠 소설 《천사의 나이프》에도 어렸을 때 사람을 죽인 사람이 변호사로 나왔어요 오래전에 읽어서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한번 본 것 같아요 소년법을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거기에서 변호사가 된 사람도 어렸을 때여서 그 일은 드러나지 않았죠 변호사만 인격을 보지 않는 건 아니죠 인격을 갖춰야 하는 일 모두 보지 않죠 그 일을 하다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요

어떤 반전이 있을까 싶네요


희선
 
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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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 이야기'로 이미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한 번 알린 적이 있는 사토 쇼고의 소설이자 157회 나오키 수장작이기도 한  '달의 영휴'는 환생에 대한 것입니다.

 줄거리 소개부터 바로 들어갈게요. 이야기는 오래 전에 아내와 딸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고 혼자 살고 있는 오사나이 쓰요시가 예전 딸의 친구이기도 한 여인과 그녀의 딸을 카페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딸의 친구라지만 장례식 때 말고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던 이 여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 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주 어린 딸이 쓰요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제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말이죠.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은 쓰요시에게 더욱 충격적인 일입니다. 죽은 딸의 친구인 엄마의 딸이 바로 자신의 죽은 딸이 환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딸의 이름과 똑같은 '루리'라고. 그러나 쓰요시에겐 마냥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이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은 죽고 없는 아내가 쓰요시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루리가 심한 고열을 잃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다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쓰요시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루리가 다른 존재가 환생한 것 같다고. 단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또 어떤 남자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쓰요시는 그런 아내의 말을 묵살해 버립니다. 초등학생인 된 루리가 기억 속의 남자를 만나겠다면서 가출까지 했지만 그냥 덮으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자신의 무시와 방관이 어쩌면 커다란 잘못이고 사실 딸과 아내의 죽음 역시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때문에 쓰요시는 딸이 환생했다는 그 어린 '루리'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실체로 출현한 '루리' 앞에서 그런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만 가능할 뿐입니다.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했던 현실이 실은 보잘 것 없는 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토록 오만했던 자신을 자책하면서 닥쳐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달의 영휴'는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을 취하는 카멜레온 같은 소설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소설을 환생을 거듭해서라도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이루려 하는 아주 애달픈 사랑 이야기로 읽힐 것입니다. 사실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주로 세 개의 가지로 엮어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루리의 원본이 되는 여인이 미사미란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하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루리가 아니라 저처럼 쓰요시에 주목한다면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힙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점이 정말 궁금했습니다. 왜 환생을 잘 믿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쓰요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소설의 주된 인물로 삼았는지 말이죠. 저는 이것이 환생을 다룬 소설로선 아주 독특한 시점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환생을 다룬 작품들을 생각해 보시면 납득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동안 환생을 다룬 작품들 하면 저는 얼른 일본 애니메이션 '나의 지구를 지켜줘'와 우리나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가 떠오르는데요, 그 두 작품 모두 '환생'의 주체 이거나 '번지 점프를 하다'처럼 환생 하기 전의 연인과 같이 환생하는 존재의 직접적인 상대방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또 요번에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영화를 감독한 케네스 브래너가 주연 감독한 영화  '환생'도 있다는 게 생각나네요. 그 영화 역시 환생한 주체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렇게 환생을 다룬 많은 작품들이 환생한 주체이거나 직접적인 상대방 범위를 잘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제 3자 인데다 한결같이 환생을 거부하는 자인 것입니다. 사실 '환생' 장르에 어울리는 주인공은 루리가 사랑한 연하남 미사미일 것입니다. 이 소설엔 그런 루리를 괴롭혔던 남편도 등장하는데, 이 남자를 악역으로 삼으면 그동안 나온 '환생 장르 공식에 딱 맞아 떨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토 쇼고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미사미와 원래 루리의 남편 모두 쓰요시 보다 비중이 적은 조연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쓰요시'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의문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왜 제 3자인데다 환생을 부정하는 쓰요시가 주인공인 것일까?

 그런데 이런 쓰요시의 모습에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진 않습니까? 현실은 계속 '네 생각을 바꿔, 이제 네가 변화해야 할 차례야!'라고 강권하는데, 땅바닥에 얼굴을 쳐박은 타조처럼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면서 오로지 지금의 현실과 자신의 주관만을 고집하려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서 저는 얼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 정부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그 때의 아베 정권은 정말 쓰요시와 같았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환생한 루리처럼 지금까지 아베 정권이 했던 것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자성과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였지만 그들을 그것을 쓰요시처럼 깨끗이 묵살했습니다. 현실은 계속 지금 잘못 나가고 있다고 알렸지만 밖으로 열린 귀를 모두 닫고 자기 합리화에만 빠져 있는 일본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내와 딸을 모두 잃은 쓰요시처럼 재생의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이건 지금의 일본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로 점점 더 최악이 되고 있다는 것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죠. 아마도 이런 까닭으로 저는 사토 쇼고가 하필이면 쓰요시를 주인공으로 쓴 것 같습니다. 쓰요시처럼 아주 어리석은 행보를 보여 온 일본 정부와 그것을 지지한 일본 국민에 대한 섬뜩한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 말이죠. 너무 나간 해석일까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바로 마지막 장면 때문이죠. 반전이기에 자세히 말하진 않겠습니다만 거기서 루리는 쓰요시에겐 아주 중요할 사실 하나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미 쓰요시 주변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자신의 눈으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었죠. 그러나 이제 그것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환생'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엔 이런 쓰요시와 비슷한 인물이 하나 더 나옵니다. 바로 원래 루리의 남편입니다 그 역시 쓰요시처럼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루리의 영혼을 질식하게 만들었죠. 그녀가 미사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일종의 숨통 같은 것이었습니다. 루리는 우연히 찾아온 미사미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 루리가 죽음마저 초월한다는 점에서 사토 쇼고가 쓰요시와 루리 남편의 의미를 이 소설에서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한층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네요.


 사토 쇼고가 이런 전개를 취한 까닭에 대해서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변하지 않으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희망조차 보지 못한다고 이리도 선명하게 알리고 있는데. 

 '달의 영휴(盈虧)'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걸 뜻한다고 합니다. 소설이 이것을 제목으로 한 것은 영휴하는 달처럼 사람의 삶과 죽음도 연속된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겠죠. 그것이 바로 '환생'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영휴' 그대로 한없이 변하는 달의 모습입니다. 지구에서 보이는 달의 모습엔 항구적인 것이 없습니다. 부단히 변합니다. 바로 그런 일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기원이 스민 제목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내 자폐(自閉)로만 치닫고 있는 일본 속에서 국민들의 영혼이 모조리 질식하기 전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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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5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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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난 이 작품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5월의 어느 날. 아버지 책장에서 두툼한 양장본에다 여러 권으로 된 '전쟁과 평화'를 발견했다. 그 때 내겐 두 가지가 왕성했는데, 하나는 호기심이요 다른 하나는 도전 의식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그 둘 모두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로 줄에다 엄청난 분량의 그 소설을, 모르는 단어도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6월 초까지 다 읽고 말았다. '한 번 잡은 책은 무조건 끝까지 다 읽는다'가 당시의 내겐 금과옥조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을 주려 하는 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주 어렵고 정말 글밥이 많은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만 가득 남았을 뿐이었다.


 두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때 나는 옆집에 사는 누나를 이성으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누나가 톨스토이를 무척 좋아했다. 누나의 환심을 사려면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과 평화'를 비롯하여 내가 구할 수 있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모조리 읽었던 것 같다. 따로 노트를 마련해 국어 공부를 하듯, 등장인물과 사건, 대사와 주제들을 정리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시험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이걸 보면 당신도 이제 알 것이다. 문학을 가까이 하는 가장 좋고 빠른 길은 다름아닌 문학을 좋아하는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걸. 여하튼 '전쟁과 평화'는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한 번은 호승심으로, 다른 한 번은 사랑으로.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전쟁과 평화'를 세 번째로 만났다.

 첫 번째는 멋 모르고 읽었고 두 번째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문학 자체로 순수하게 음미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또 손에 잡았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으로. 이번엔 '전쟁과 평화'를 그 자체로 감상하기 위하여.


['전쟁과 평화' 1권과 '톨스토이 미션 카드'의 모습]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구상하고 집필, 퇴고하는데 모두 24년이 걸린 작품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만 해도 무려 559명에 이른다. 문학동네에선 모두 네 권으로 나왔는데, 그 중 1권의 이야기는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안나 파블로브나 세레르가 주최한 야회로 시작한다. 이 야회는 마치 연극에서 개막을 하기 전에 미리 주요 등장인물들을 무대로 불러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처럼 앞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갈 인물들을 독자에게 첫 선을 보이기 위한 장치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 안드레이 불콘스키 공작과 피예르를 만난다. 둘은 친구지만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극과 극이다. 안드레이가 유명한 불콘스키 공작의 첫째로서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하나와 결혼까지 하는 등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면 피예르는 비록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베주호프의 유일한 아들이긴 하지만 아직 적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에다 용모는 뚱뚱하고 볼품이 없어서 사교계가 썩 환영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위치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공평하게 둘 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던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을 맞아 왕정 중심의 구체제 수호를 위해 러시아가 참전을 결정하고 자신도 자기가 부관으로 모시는 쿠투조프 장군(실존 인물이다.)을 따라 전쟁에 나가게 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사생아란 신분과 가진 것도 별로 없어서 상류 사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던 피예르는 임종을 맞이한 베주호프가 자신을 적자로 인정하고 엄청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로 만들어주면서 상류 사회의 중심에 선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자신이 바라던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운명은 돌연 그 표정을 바꾸고 먼저 주었던 기회가 마치 덫 안의 치즈이기라도 하듯 눈 앞에서 그들이 바라던 것이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보여 낭패를 경험토록 한다. 물론 피예르가 1권에서 그런 경험을 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안드레이 뿐이다. 그래서 1권의 진짜 주인공은 안드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1권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 이후로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유역과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이는 전투가 주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아우스터리츠 전투'란 말에서 눈이 번쩍 뜨일 것 같다. 나폴레옹의 유럽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이니까 말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세력에 비해 정말 약했지만 오히려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하여 적을 함정으로 유도하고 자신이 창조했고 특기이기도 한 대포를 적극 사용하는 전술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대파한다. 결국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함으로써 유럽에 자신의 제국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안드레이의 운명 또한 크게 바뀌게 되니 이런 겹침이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평소 안드레이는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명예의 한 순간'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혈육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자신이 곧 '명예의 한 순간'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운명이 변덕을 부려 명예는 커녕 나폴레옹의 포로가 된다.


 사실 포로가 된 게 그의 낭패가 되었던 건 아니다. 진정한 낭패는 포화로 들판에 쓰러졌을 때 찾아왔다. 그 때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하늘이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명예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오직 하나만 보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려왔는데 실은 이토록 공허한 것이었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워졌다고 느낀다. 마치 눈을 가리고 있던 콩깍지가 벗겨진 것처럼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현혹에서 벗어났으니까. 과연 그랬는지, 안드레이는 자신이 인간적으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겼던 나폴레옹을 직접 눈으로 대면하고 그에게 칭찬까지 받아도 심드렁하게 대한다. 이런 안드레이의 모습은 황제를 보고 그 빛나는 모습에 그만 눈이 멀어버린 나머지 한없이 그 권위를 동경하게 되는 로스토프와 대비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 로스토프의 모습은 각성을 하기 전의 안드레이와 같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다. 로스토프와 똑같이 안드레이 역시 황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를 만났으나 오히려 그가 본 것은 그만한 커다란 영광도 쉽게 가리지 못하는 허무였다.

 1권은 바로 이렇게, 속세가 추구하는 가치가 진실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드라마였다.


 안드레이를 보니 어쩔 수 없이 톨스토이가 떠올랐다.

 안드레이에게 딸려있는 불콘스키는 사실 톨스토이의 어머니 쪽 가문의 이름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작가였다. 아버지는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공작의 딸이었으니까. 외할아버지가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불콘스키 공작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안드레이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 중 많은 부분에 톨스토이의 자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 역시 안드레이와 똑같이 장교로 군대에 있었다. 그것도 5년이나.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되는 전쟁이 더없이 생생한 것도 이런 군대 경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바로 그 군대에서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5년 내내.

 그 전까지 톨스토이는 글과 먼 생활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그는 내내 '전쟁과 평화'에서 나왔던 이폴리트 공작의 저택의 술 파티 못지 않게 방탕한 생활을 했다. 피예르가 거기서 한 위험한 내기도 어쩌면 톨스토이 자신 역시 했을 지 모른다. 그러다 성병에 걸렸고 병원 신세마저 졌다. 입원해 환자로 있으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 쓰기는 톨스토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톨스토이가 방탕한 생활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군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일기 쓰기가 가져온 변화가 아닐까 싶다. 글은, 특히나 일기란 자신을 계속해서 되돌아보게 만드니까 말이다. 톨스토이에게 글은 구도의 여정이었다. 군대에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글을 통해 비로소 시작된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으려는 여정이 도달한 또 하나의 단계였을 것이다. 안드레이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마침내 세상이 가져다 준 현혹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엔 바로 이런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우러나 있다고 보인다.


 가장 정평이 난 톨스토이 전기를 쓴 영국 작가 앤드루 노먼 윌슨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내적 모순이 가득한 존재였으며 그 중 가장 격렬했던 모순은 '탕자와 성자' 사이의 모순이라고 했다. 그 모순은 '전쟁과 평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나니 탕자와 성자의 관계가 내겐 대립 보다 연속의 과정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탕자의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성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탕자'란, 방탕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성경에 나오는 탕자 그대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유랑하는 존재로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주에서 이탈한다는 뜻이다. 현실 질서와 일상의 궤도에서 탈주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탕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 '탕자'로 가장 잘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글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무엇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되어보는 것으로 여자에 대해 글을 쓰면 '여자-되기'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쓰면 '동물-되기'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타자-되기'의 체험인 것이다. 나를 떠나 남이 되는 것. 그것은 그대로 사회화를 통해 사회적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벗어남'이 본연의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안드레이가 거쳤던 과정 그대로 말이다.


 성자는 바로 그런 탕자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톨스토이의 삶 자체가 증거다. 그는 1878년에 영적인 각성을 하고 새로운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안나 카레리나'를 완성하고 난 뒤였다. 소설의 여정이 기반이 되어 성자의 삶이 구현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그런 '탕자의 여정'을 생생하고 풍부하게 경험토록 해 준다.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시대에 거꾸로 거기에서 이탈하려는 흐름을 포착하고 두드러지게 만들면서 누구나 정답으로 여기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하고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의 삶에도 정답인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필 이 시점에 '전쟁과 평화'가 도래한 것은 어쩌면 운명의 손길 덕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소설 속 나폴레옹 시대만큼이나 권력이든, 자본이든, 인종이든, 종교든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시대이고 그 수렴이 그 바깥에 존재하는 이는 물론이고 안에 속한자마저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수렴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가 '탕자의 여정'을 통해 강조하는 산포(散布)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전쟁과 평화'이니만큼 '추천합니다' 같은 말은 사족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의 150년이 되는 과거의 작품('전쟁과 평화'는 1869년에 발표되었다.)이라 오늘날에 이런 소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는 분이 있을지도 몰라 굳이 말씀드려 본다면, 단언컨대 '전쟁과 평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대에도, 아니 이런 현대이기에 더한층, 의미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작품인 것이다.


 특히나 이번 문학동네에서 나온 '전쟁과 평화'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것이고 거기다 톨스토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예술문학출판사가 발간한 것을 원본으로 삼고 있는 데다 번역도 좋아서 더욱 읽어볼만하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워서 한 번 탕자가 되어보려고 해도 그러기가 참 어렵다. 그럴 때는 '전쟁과 평화'가 딱이다. 육체는 비록 '방콕'을 하고 있더라도 내면 속에서 탕자의 여정을 거침없이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니까 말이다. 부디 톨스토이가 선사하는 탕자의 여정을 깊이 체험해 보시기를. 어쩌면 안드레이가 그랬듯, 당신의 인생을 마구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을 만나볼 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미션 카드을 펼친 모습. 이렇게 톨스토이 작품을 읽고 체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느낌이 뭐랄까?, 어떤 역에 가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스탬프를 받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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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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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내게 마치 어릴 때 성탄절날 아버지에게 받았던 '과자종합선물세트' 같았다. 다양한 과자들이 하나로 담겨 있던 그 상자처럼 지금까지 내가 읽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부가 이 한 권에 투영되어 있었다.'  최근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을 읽은 소감을 이런 말로 시작하고 싶다. 정녕 내게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열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서 이스탄불로 옮겨 와 무려 43년 넘게 그 도시의 온갖 골목을 걸어다니며 터키의 전통 음료 중 하나인 보자(boza)를 팔아온 메블루트란 남자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형 하산과 함께 6년 전에 먼저 이스탄불에 와서 정착했는데, 바로 그 형인 하산의 가족이 오르한 파묵의 첫 소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의 제브데트 가족을 연상시킨다. 제브데트처럼 하산 역시 두 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산을 비롯하여 두 아들, 코르쿠트와 쉴레이만은 민족주의자로 서구 문화를 동경하여 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제브데트와 거리가 있지만 잇속에 밝은 자본주의자로 세속적인 성공을 이룬다는 점은 닮았다. 그런 면에서 이상주의자로 개혁 성향이 강했던 제브데트의 차남 레피크와 쉴레이만 역시 매우 다르다. 그런데 메블루트가 스스로 가장 고귀한 우정을 나눈다고 여기는 친구이자 개혁을 지지하는 쿠르드족인 페르하트는 레피크와 많이 비슷하다. 자신의 욕망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머지 아내가 떠나버린다는 것 또한 유사하다.




 '내 마음의 낯섦'이 가진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특히 메블루트를 비롯하여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아주 뛰어난 미모를 지닌 사미하를 둘러싸고 벌이는 얽히고 설킨 사랑의 행로는 압권이다. 그들 모두 정작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데, 이건 두 번째 작품, '고요한 집'과 닮았다.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두고 사랑의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선, 이스탄불 최고 미녀인 세큐레에게 똑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던 카라와 하산이 등장하는 '내 이름은 빨강'이 떠오른다. 쉴레이만이  갑자기 사라진 사미하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그대로 어느날 불현듯 실종되어버린 아내, 뤼야를 찾아다녔던 '검은 책'의 주인공 남편 갈립을 연상시키고,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메블루트의 모습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터키 전역으로 버스 여행을 떠나는, 소설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 '오스만'과 모든 것이 눈에 뒤덮인, 하얀 설원의 도시 카르스를 존재의 의미를 찾아 배회하는, 소설 '눈'의 주인공 시인 '카'를 떠올리게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마음의 낯섦'이 내게는 오르한 파묵이 여기까지 걸어온 문학적인 여정의 집대성으로 보인다고 말해도 그리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아도 파묵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그 작품의 세부적인 것이나 하나의 문장에서 나온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이란 책에서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며,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만큼 소설의 정신에 충실한 작가도 또 없다고 하겠다. 또한 '내 마음의 낯섦'은 쿤데라의 언급처럼 그 전까지 나온 오르한 파묵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듣고 누군가 내게 '그렇다면 메블루트를 중심으로 1968년 9월부터 2012년 10월 25일까지 모두 635 페이지에 걸쳐 다양한 이들의 방대한 삶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대답은 과연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암흑의 포용(包容)'이라 말하고 싶다.


 사람은 어둠을 싫어한다. 그것이 불안정과 불확실함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빛을 원한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구분되어 그것으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자신에게 뭐가 위험이 되고 이득이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그런 인간의 염원을 배신한다. 얼마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의 현대가 매우 유동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바다. 마치 가상화폐 시장 상황처럼 오늘의 삶은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국적이나 인종 등 태생적으로 타고난 정체성과 종교에 더욱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발밑이 허공 뿐이라고 느껴진다면 본능적으로 매달릴 곳을 찾듯이,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혼란과 불안이 생길 때마다 사람은 자연히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권위 있는 무언가나 늑대와 개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표식에 들러붙기 마련이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쉴레이만이 속한, 우익이며 터키인 중심인 둣테페와 '페르하트'가 속한, 좌익이며 쿠르드족 중심신 퀼테페가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극명하게 대립했듯이 말이다.


 안 그래도 이러한 쌍방 대립 구도는 그동안 오르한 파묵의 작품에서 데뷔작을 포함하여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터키 자체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동양과 서양 문명 모두에게 그 영향을 부단히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의 투사(投射)이자 역사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문명의 융합체였던 오스만 제국이 남긴 유산일 것이다. 소설 '눈'을 보면 이 대립이 현재의 터키에서 얼마나 극심해졌는지 잘 목도할 수 있다. 터키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주의와 거기에 반발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대립 사이에서 도시 카르스에 가득한 눈처럼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 즐비한데도 개인은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집단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 강의실에 여성이 히잡을 쓰고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치열하게 대립할 때 정작 당사자인 소녀들은 자살을 한다. 누구도 자신을 삶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그 대립 속에서 자살만이 유일하게 진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살은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 자신이 탄 버스가 사고를 당하자 오스만이 얻게 된 깨달음과 유사하다. 그는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천국의 빛처럼 환영하는데 그것은 죽음으로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비된 몸과 의식.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다. ('새로운 인생', p.72)




 오르한 파묵이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허무주의자라거나 죽음 예찬론자라서가 아니다. 죽음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삶에 있어 죽음은 광막한 암흑이다. 죽음이 무엇이고 언제 찾아올지 아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압도적인 불확실함이고 그로 인해 삶은 불안정하다. 죽음이란 갑자기 눈 앞에 암막이 내려진 것과 같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내던져진 것과 같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기피하기 마련인 그런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포용하라고 권한다. 그것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권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면 얼른 '내 마음의 낯섦'을 들춰봐야 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나는 소설의 시작 부분을 특히 눈여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소설은 메블루트의 인생을 시간 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바로 메블루트의 진정한 사랑이 될 라이하와 단 둘이 몰래 도망치는 시간이다. 


 '스물다섯 살에 고향 처녀와 함께 도망쳤다. 이것은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이었다.'(p. 17)


 그 장면을 묘사하면서 오르한 파묵은 몇 번이나 아주 어두웠다고 강조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만났다', '어둠 속에서는 여자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등등. 메블루트가 실체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알린다. '암흑'이다. 물론 이렇게 할 이유는 있다. 실은 지금 메블루트가 데리고 도망치는 여인이 원래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블루트는 셋째 딸, 사미하를 사랑했다. 그녀의 순수한 검은 눈에 매혹되어 군대에 가 있는 3년 동안 내내 사랑을 갈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름을 잘못 알았다. 둘째 언니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하와 도망치는 것을 유일하게 도와준 사촌 쉴레이만의 술책 때문이었다. 그 역시 사미하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메블루트가 이름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바로잡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메블루트는 쉴레이만이 운전하는 트럭의 밝은 빛 아래에서야 자신이 데리고 온 여인이 사미하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어둠에 있었을 때 놀랍도록 충만한 사랑이 삽시간에 식고 그는 밝은 빛 속에서 '삶이 놓은 덫' 속으로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메블루트의 삶 속으로 평생토록 지니게 될 낯선 감정이 쓰윽 들어온다.


 메블루트는 평생을 함께 보낼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았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순간을, 그 낯선 감정을 자주 떠올릴 것이었다.(p. 22)


 보시다시피,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의 전모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여인을 잘못 데려왔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우연이 만든 그 인연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운명이 된다.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라이하를 사랑했어"(p. 635)


 그러므로 그 암흑은 메블루트에게 결코 방해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라리 자신도 몰랐던 진정한 사랑을 찾아준 큐피드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이처럼 '내 마음의 낯섦'은 전작들에 이어 다시 한 번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사건 묘사에서 어둠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또 하나를 본다.

 그건 바로 '개 짓는 소리'다. 낯선 감정과 함께 메블루트가 평생 짊어지는 감정 하나가 더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메블루트가 라이하와 도망칠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소리로 소설에 출현하여 소설의 중요한 계기마다 등장한다. 메블루트가 처음으로 보자 파는 일을 그만 둘 결심을 했을 때, 개 짓는 소리가 궁극적인 원인이었듯 말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이스탄불에 와서야 비로소 생겼다. 고향에 있을 때는 모든 개가 자신을 잘 알아 전혀 짓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개 짓는 소리란 메블루트에게 '넌 이방인이야! 우리와 달라! 넌 여기 섞일 수 없어!'하고 외쳐대는 것과 같다. 아니나 다를까 메블루트가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지혜를 빌리러 찾아갔던 선지자 에펜디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개들은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을 감지하고 안다네.(...) 이 모든 수난을 겪은 개들은 이제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를 깊이 감지하고 있다네.(p.505)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소리를 진짜 개 짓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메블루트가 가지고 있는, '이스탄불에서 어쩌면 내내 이방인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오르한 파묵이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진실은 정반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소설 '눈'에서 주인공 카의 말을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다.


  "나에게 시를 보내는 것은 신입니다. (...) 나는 모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두려워하고 있군, 자네를 비난하고 싶네."

  "그렇습니다. 두렵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눈' 1권, p. 186)




 메블루트 또한 두려움이 많은 자다.

 그는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과감하게 쭉쭉 뻗어나갈 때,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에 그 어디에도 들러붙지 않고 홀로 남은 채로 제자리를 맴돈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도 메블루트가 여전히 거리에서 보자를 판다며 때로는 어리석다고도 하고 또 때로는 불쌍하다고도 하지만 삶 전체를 통해 끝내 승리한 사람은 메블루트라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누구도 찾지 못한 진짜 사랑과 행복을 그는 찾았고 누렸으며, 또한 이것이 더 큰 것인데, 그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문학에서 구원은 언제나 집단에 휩쓸리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 있을 때 찾아온다. 소설 '검은 책'의 2권 후반에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듯 말이다.


한때,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될 수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임을 발견한 왕자가 살았다.('검은 책' 2권, p. 259)


 이 이야기 속 왕자가 평생 추구했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느냐가 작가에겐 중요하다.

 터키 사회에 종교, 정치, 문화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는 대립관계처럼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적대와 차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타자에게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것에만 기반하여 주체를 정립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암흑과 두려움은 귀중하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갖는다. 모두 타자의 생각에 무분별하게 섞여드는 것을 막아주고 어떻게든 먼저 자신의 생각으로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보다 더 크고 위대한 뭔가에 들러붙은 껌이 되어 기생을 통해 성장하려는 생각을 차단하여 어디로든 기울지 않고 혼자 힘으로 우뚝 서는 오뚝이가 되도록 한다. '검은 책'에 나오는 왕자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자신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울리는 기억의 음악에 저항해야 한다.('검은 책' 2권, p. 272)


 하지만 여기서 오해해선 안 될 게 하나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된다고 하여 오르한 파묵이 오만과 독단까지 하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파묵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원한다. 바로 그것이 두려움과 소심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파묵의 주체 정립 과정은 서양 철학이 말했던 주체 정립 과정과 다르게 어디까지나 겸허(謙虛)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구분과 배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포용하고 그 타자의 입장에서 그를 헤아리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다.


  소설 '하얀 성'에서 이탈리아인 기독교도 '나'와 터키인 무슬림 '호자'의 관계가 잘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눈'의 주인공 카도 자신의 말을 들려주기 보다는 먼저 많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르한 파묵에게 정체성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겸허를 통한 타자 중심이기에 정체성 같은 것은 얼마든지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얀 성'에서 나와 호자가 정체성을 바꿔 호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나는 터키에서, 그렇게 나라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상대방의 나라에서 잘 살아가듯 그리고 '검은 책'에서 주인공 변호사 갈립이 아내와 같이 사라진 자신의 사촌이자 칼럼니스트인 제랄과 아주 쉽게 정체성을 바꾼 것처럼.




 이렇게 정체성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보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변화 무상하고 다양한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곳이라는 생각과 이어져 있다. '새로운 인생'을 비롯하여 그의 소설이 자주 순례에 가까운 여행을 통하여 각성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 세상이기에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거나 고집하는 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도 또 없다. 그것은 자신의 변화를 통해 맞이할 수 있었던 삶 속에 내재된 무한의 가능성을 그대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메블루트가 이 소설에서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수많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그는 삶과 인간 관계 속에서 느끼는 피로와 아픔을 거리에서의 상상력을 통해 치유한다. 골목마다, 방문하는 집마다 그가 마주하는 도시의 다양한 변모가 삶에 수많은 의미와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밤에 밖으로 나가 보자를 팔 때는 창문 하나 열리지 않아도, 아무도 보자를 사지 않는 텅 빈 거리에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걸으면 상상력이 가동하고 메블루트에게 이 세상에, 사원 벽 뒤에, 무너져 가는 목조 가옥들에, 묘지들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p. 436)


 아마도 이러한 가능성을 독자도 느껴보라고, 파묵은 하필이면 많은 거리를 돌아다녀야 할 보자 장수를 주인공으로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메블루트는 소설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되거나 고정된 장소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나온다. 메블루트 자신이 시골에서 올라온 이방인인 데다 그가 오래도록 살고 있는 '게제콘두' 또한 실은 소유권을 등기할 수 없는 땅이다. 나라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밀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사는 퀼테페는 시골과 주변 나라에서 몰려든 이방인들로 가득하다.


 2008년에 나온 '순수 박물관'과 비교해 보면 이 '퀼테페'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성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 '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이스탄불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순수 박물관'에선 그러한 이스탄불의 상류층 문화를 그렸다. 그것은 중심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은 '퀼테페'가 잘 보여주듯이 그와 정반대인 주변의 이야기다.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망각의 존재가 되어가는 보자 장수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도 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순수 박물관'에서 사라진 여성 퓌순은 주변적인 존재였다.

 주인공 케말은 중심에 있기위해 그녀를 배신했고 결국 그녀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부재로 중심의 허망함을 깨달은 케말은 비로소 주변에 시선을 돌리고 거기에 남은 사물을 통해 이제 중심의 의미를 거꾸로 구현한다. 이러한 케말의 사물에 대한 태도가 하나의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 나는 지금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메블루트와 같은 주변적인 사람들은 그가 다녔던 중학교의 교장 '해골'의 말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스탄불의 상류층이란 중심에서 잘 보이지 않거나 쉽게 무시되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을 결코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바로 2010년에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으로 번진, 후에 '아랍의 봄'이라 불리게 된 반정부 시위의 불길이다. 그것은 그동안 억압과 차별 속에 있었던 자들의 억눌린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아래 하나의 신체 같았던 그 곳에도 실은 '계급'이라는 분열의 지점들이 있었다는 게 전면으로 드러난 것과도 같았다. 신체는 '순수 박물관'에서 퓌순의 부재처럼 낱낱이 해체되었고 이제 더이상  하나의 신체로 묶어둘 수 없다는 것도 명약관화해졌다. 이러한 외부 사정이 파묵으로 하여금 더욱 메블루트와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도록 했을 것이다. '순수 박물관'에 온당히 보존되어야 할 존재이니까 말이다.





 박물관에 보존되는 존재들은 '순수'해야 한다.

 여기서 순수란 있는 그대로 즉 인위적인 가공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존되는 것은 존재에 깃든 역사니까 말이다. '내 마음의 낯섦'이 한 사람의 43년에 걸친 긴 삶의 시간을, 그것도 놀랍도록 생생한 리얼리티와 함께 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는 '내 이름은 빨강'과 유사한 소설의 형식에도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처럼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등장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이어 받으면서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했으며 또한 행동했는지, 자신의 육성으로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각 개인들을 보존한다. 순수 박물관에 보존되는 사물과 같은 것이다. 설령 그것이 등장인물이라 하여도 작가가 서사의 주도권을 가지지 않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런데 박물관에 전시되는 사물들 사이엔 간격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저마다 홀로 침묵한 채, 감상자의 자의적 해석에 자신을 내맡길 뿐이다.


 이처럼 많은 소설들은 작가의 주도권 아래 등장인물들이 수렴되지만, 이 소설은 거꾸로 등장인물 각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산포한다. 그리고 그 산포(散布)를 통해 생겨난 간격 속으로 독자의 참여를 이끌어 독자 스스로 작가가 주려는 것 이상으로 메블루트가 거니는 골목과 방문한 집만큼이나 다양하기 그지 없는 삶의 결을 체득하도록 만든다. 파묵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겸허의 태도를 독자에게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대한 감정 이입을 자제한 채, 담담히 모든 이의 삶을 서술하는 것 또한 문학 보다 더 거대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겸허의 태도에서 나왔다고 나는 믿는다.




  기왕에 산포란 말이 나왔으니 이제 오르한 파묵의 진짜 주제로 들어갈 시간이 된 것 같다.

 왜 우리가 암흑을 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산포가 바로 열쇠다. 산포는 틈을 만들어낸다. 파묵에겐 그 '틈'이 아주 중요하다. 분리는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낳는다.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분리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연인과 이별로 분리되는 것도 피하고 싶어하며 모두에게 분리되어 외톨이로 남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또 없다. 그러나 파묵에겐 그 분리가 오히려 구원이 발아되는 장소가 된다. 소설 '눈'에서 그동안 시를 쓸 수 없었던 주인공 카가 폭설로 완전히 격리된 '카르스'에서 시를 쓰게 되듯이 말이다. 이러한 틈이 바로 암흑이다. 이것은 파묵의 소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건 '검은 책'처럼 아내의 실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얀 성'처럼 터키 함대에게 납치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새로운 인생'에선 한 권의 책, '눈'에선 돌연한 정전으로 도래하기도 한다. '내 마음의 낯섦'에선 때로 지진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스탄불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집에서 뛰쳐나온 메블루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그토록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건 예전에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죽음 역시 그 틈이 극대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건, 예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고 만날 수 없었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순간들은 사실 이전의 삶이 가동을 멈추는 정지(停止)의 시점이기도 하다. '검은 책'에 나왔던 왕자의 말을 다시 빌어 말하자면, 기억 속에 알알이 박힌 과거의 소음들이 침묵하는 정적(靜寂)의 시간이다. 죽음은 그 정적이 극대화된 형태라 할 만하다.


 두 사람이 찾고 갈구하던 것이 바로 이 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말해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만이 자신이 되는 것에 아주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왕자는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말해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에만, 과거와 책에 대한 모든 기억과 기억 그 자체를 잃어버렸을 때만, 그 깊은 정적을 들은 후에만, 자신을 자신이게 할 진짜 목소리가 허락될 것이다.('검은 책' 2권, p. 276)



 이렇게 하여 우리는 왜 이 소설이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어둠으로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어둠이 예전 삶과 틈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란 걸. 그 간격으로 참다운 자신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기존 사회의 모든 소음과 현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파묵은 강조한다.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으면 그 틈을 억지로 메우지 말라고. 간격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박물관에 전시된 사물처럼 정적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내맡기라고.

 여기까지 오면, 이제 우리는 왜 소설에서 메블루트와 쉴레이만 그리고 페르하트가 똑같이 사미하를 사랑하고 또 잃어버리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사미하를 잃어버리는 것은 '검은 책'의 뤼야와 '순수 박물관'의 퓌순이 그러하듯 갑작스럽다. 불현듯 자기 삶에 드리워진 암막 같다. 그것은 소설 처음에 메블루트를 찾아온 암흑 그대로다. 그렇게 틈이 생겼다. 그런데 셋이 보여주는 반응은 다르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려 한다. 문득 가지게 된 간격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사미하를 끝까지 찾아다닌다. 페르하트는 더 심하다. 그는 사미하와 같이 살면서도 다른 여자에게 흑심을 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녀만 찾아 다녔다. 그러다 결국 사미하도 떠나가게 만들고 말았다. 한 번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시도가 비극으로 끝났음에도 그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다시 잘못을 반복했다. 페르하트는 끝내 살해당한다. 이러한 죽음은, 살해라는 점에서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집착이 종국에는 무엇을 가져오는 지에 대한 작가의 불길한 예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메블루트만은 달랐다. 그는 메우려 들지 않는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오히려 그 틈에다 자신을 길들인다. 오직 메블루트만이 진정한 사랑을 찾고 행복을 경험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틈으로 남이 아니라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았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광장으로, 자신만이 가득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타인들을 널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메블루트가 자신을 내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의 차이'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보자 장사를 하면서, 후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이들을 단속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알지 못해 곤란을 겪는다. 페르하트는 사적인 관점과 공적인 관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그는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그가 흐르는 삶의 시간 속에서 축적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면서 이윽고 깨닫게 된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의 의도는 의도대로, 말의 의도는 의도대로, 그냥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이다. 그 후, 그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면서 페르하트가 가르쳐준 온갖 꼼수들을 전혀 쓰지 않는다. 누가 되었건, 그저 정직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의 판단은 운명에 맡긴 채로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운명이라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삶의 궤도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왜 자신이 사미하가 아니라 라이하와 도망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다는 걸 말이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사이에 놓인 다리는 물론 운명이었다. 사람은 어떤 의도를 두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운명은 이 두 가지를 합치할 수 있다. (...) 라이하와 함께 발견한 행복은 메블루트의 인생에서 커다란 운명이었다. 그것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p. 534)


 운명은 삶이 간직한 신비다. 그것의 운행을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삶에 내재된 신비를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문명은 과학으로 이러한 신비를 가급적 제거해 왔다. 진리는 비밀스런 빛처럼 감춰진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되었고 그러자 자기가 바로 그 진리를 가지고 있다며 주장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그런 그들의 선동과 이데올로기로 일어난 전쟁으로 얼룩졌다. 그것은 지금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터키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동양에선 원래 진리는 신비의 베일에 감춰진 것이었다. 노자는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말했고 부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소로 화답했다. 신비는 대립을 낳지 않았다.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누구도 진리에 기대어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우월도 배척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파묵은 신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 메블루트가 말한 삶의 존경은 거대한 삶이 포용하고 있는 신비에 대한 겸허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은 '검은 책'에서 F.M. 위췬지의 말로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난 바 있다.

 "동양과 서양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던 각 시기는 우연이 아니라 논리적인 결과였다. 그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승기를 잡은 쪽은 세계를 비밀과 이중적 의미로 가득 찬 신비스러운 장소로 보는 쪽이었다. 세계를 단순하고 단일한 의미로, 신비스럽지 않는 곳으로 보는 사람들은 패배했고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었다."('검은 책' 2권, p. 106)

 위췬지는 문명이 '신비'의 개념을 상실하는 것은 사고의 '중심'에서 박탈되어 그 질서를 상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세계는 신비를 잃어버렸으며, 우리의 얼굴도 글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얼굴은 공허하고, 과거와 같이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읽을 가능성은 없어졌다. 우리의 눈썹, 눈, 코, 눈길, 표현, 공허한 얼굴은 무의미하다."(같은 책, p.107)


 얼굴을 잃어버림은 진정한 자신으로 만드는 고유한 개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연결된다. 암흑의 포용은 그동안 우리가 무시해왔던 삶의 신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런 수용을 통해 우리는 누가 가르쳐 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내면에서 길어올린 자신의 고유한 모음(母音)으로 말할 줄 아는,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이걸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메블루트가 끝내 몰개성과 획일화의 공간인 아파트를 거부하고 끝까지 골목 순례를 선택하는 것처럼 마음에 깃든 낯섦을 낯익은 것으로 바꾸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곧 암흑을 포용하듯이,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피하려 들지 말고 그것에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서야 우리는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삶의 모든 어귀와 순간마다 깃들어 있는 운명과 신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신(神)'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저의 오만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기 저 아름다운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을 믿고 싶습니다. 세상의 은밀한 균형을 주시하고, 인간을 더욱 더 문명화하고, 더 섬세하게 만들 신은 있습니다."

 "물론 있지."

 "하지만 그 신은 이곳 당신들 사이에는 없습니다. 밖에, 텅 빈 밤에, 어둠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에 내리는 눈 속에 있습니다."('눈' 1권, p. 148)


 다치바나 다카시가 우주로 나갔던 경험이 있는 이들과 인터뷰 한 바에 따르면, 한 번 우주에 갔다 왔던 이들은 한결같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광막한 우주의 크기에 압도되어 신이 아니고서는 이런 거대한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들기 때문이란다. 이는 곧 먼 우주에서 보면,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보다 훨씬 더 작은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이런 왜소함은 우리 역시 굳이 우주를 나가지 않아도 현실 속에서 매번 경험하는 바다. 


 왜소하기에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 왜소하기에 나보다 더 거대한 것에 착 달라붙어 호가호위 하듯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왜소함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 왜소함이 만들어내는, 삶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암흑들을 무작정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그것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함께 어울리며 천천히 동행하라고 권한다. 어떤 암흑이 삶이 감춘 또 어떤 신비와 연결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새로운 인생'의 마지막에 오스만이 본 천사처럼, 신은 자신의 것을 모두 내려놓은 순간 문득 도래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올 다양한 가능성들을 큼직한 자루에 넣어 산타클로스처럼 등에 지고서.

 이래도 파묵의 조언에 설득되지 않는다면, 버트란드 러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떨까?


 인간은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왜소함에 직면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내 마음의 낯섦'은 당신에게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위대한 여정이다. 아니, 앞서 내가 파묵의 다른 소설들을 인용한 것처럼 실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의 여정을 이룬다. 밀란 쿤데라의 말 그대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특히 연속성이 강하고 전과 후의 작품들이 상호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뷰도 비록 '내 마음의 낯섦' 한 권에 대한 것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소설들을 아우르며 썼다. 덕분에 글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게 다 내가 느낀 파묵의 진심을 당신에게 잘 전하기 위함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파묵을 본받아, 내 필요에 따라 그의 주제를 재단하지 않고 가급적 그가 주려고 했던 말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으로 나름 작가에 대해 내 겸허의 태도를 보이려 한 것이니 더욱 아량를 베풀어주길 빈다.


 새벽 내내 이 글을 썼다. 그렇게 파묵과 동행했다. 문득 커피가 그리워 부엌으로 가보니 창으로 아침이 어느새 찾아와 있고 바깥 풍경이 하얀 설원으로 변해있다. 문득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카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렸던 '눈의 정적'이란 말이 생각났다. 파묵에게 있어 정적은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다. 과연 그런 것처럼, 눈 앞의 하얀 세계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였다. 한동안 틈을 두고 풍경을 조용히 응시했다. '순수 박물관'의 사물이라도 된 듯.



 [소설에서 메블루트를 매혹시켰던 그림이다. 그는 이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여 페르하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가계 벽에 걸어두기까지 하면서 바라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묘지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묘지란 대표적인 정적의 장소다.  소설 '검은 책'에서 왕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속의 고요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될 수 있는 황량한 사막에 있는 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 사이에 있는 바위, 아무도 보지 않는 계곡에 있던 나무를 부러워한다고도 말했다. 메블루트 또한 같은 마음으로 묘지에 가고 이 그림을 바라본다. 정적을 두고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신을 통해 영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자신이다앞으로 무엇이 그려질지 모르는,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순백의 영혼이다.]


 긴 겨울은 내면의 순례를 떠나기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그 안내자요 동반자로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을 권해 본다. 당신도 이 겨울의 어느 순간, 당신의 신을 만나게 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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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12-11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반칙, 헤르메스님. 이건 리뷰가 아니잖아요. 한 편의 버젓한 평론이지.....

도대체 헤르메스님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헤르메스님이 리뷰를 쓰신 책을 syo는 절대 리뷰하지 않겠습니다......

ICE-9 2017-12-17 22:54   좋아요 0 | URL
앗! syo님!! 이런 졸문을 감히 평론이라 추켜세워주시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빨리 댓글로 인사드려야 했는데, 요즘은 너무 바빠서 이렇게나 늦었네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댓글에 진짜로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